예술과 탈역사 - 예술의 종말에 관한 단토와의 대화
아서 C. 단토.데메트리오 파파로니 지음, 박준영 옮김 / 미술문화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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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인공품은 예술품이 되고, 또 어떤 인공품은 예술품이 되지 못하는가?" 독자는 이런 질문을 속마음으로 해본 적이 있다. 특히 현대 미술 가운데 팝아트로 분류되는 일부 미술품들은 마치 낙서 같은 그림, 아무 의미도 없는 재활용 쓰레기처럼 보이기도 하는 물건들이 예술품이라고 전시된다. 뿐만 아니라 미술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기도 하는 것을 보고 독자의 예술 지식을 탓하다가 이내 고개를 숙이곤 한다. 사실 기존의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도 별 지식 없이 작품을 접해 왔다. 그저 기존 평에 기대어 작품의 질을 높이 보기도, 또 좀 낮게 보기도 했다. 한마디로 남 감상을 따라 감상했다는 자책감이 들 때가 많다. 그렇다고 예술이나 미술 평론을 따로 배울 필요도 못 느꼈다. 생계와 관계 없이 그냥 예술을 즐기는 차원이라 절실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때문에 작품 감상 기준이 비평가나 기존 예술가들이 평가한 대로 오락가락한다는 점은 인지하고 있었다.

이 책 『예술과 탈역사』는 사실 독자에게 굉장히 어렵다.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도 읽고 싶었던 이유가 저자이자 철학자인 아서 C. 단토가 예술의 종말을 주장해 굉장한 논란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다. 단토는 "예술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려면 이제는 철학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책에 따르면 1964년, 단토는 앤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를 보고 깊은 충격을 받는다. 그 충격은 단토의 미학에서 일종의 신호탄 역할을 했다. 왜 어떤 인공품은 예술이 되고, 또 어떤 인공품은 예술이 될 수 없는가? 앤디 워홀은 하고많은 상품 중 왜 브릴로 상자를 택했는가? 이것이 예술이 될 수 있다면, 이제 예술을 뭐라 정의내릴 수 있는가? 예술에서 철학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던지고 사유했다. 그리고 통찰의 끝에, 그는 예술의 종말을 선언한다. 이 테제는 단토의 많은 저서들에서 여러 번 논의된 바 있지만, 그만큼 대중으로부터 여러 번 비틀리고 왜곡되고 오인되어 왔다.

 


 

이 책은 단토가 거듭 주장한 탈역사와 예술의 종말 개념을 재확인하고 오해를 바로잡으며, 더 나아가 워홀 말고도 다양한 현대 미술가들의 작품을 그가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소중한 기록이라고 한다. 역자 박준영은 책 뒷 부분의 〈역자 후기〉에서 이 책에 실린 단토와 이탈리아 미술 비평가 데메트리오 파파로니의 대화에 귀 기울이다 정합성을 갖춘 1인칭의 건조한 글에서는 느낄 수 없는 우발성과 어긋남의 소소한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대담자들은 상대방의 의견을 분명하고 솔직하게, 그러나 절대 오만하지 않게 전달한다고 평가한다. 역자는 또 상호 존중과 배려의 분위기 속에서도 시종 팽팽하게 유지되는 지적 긴장과 거기서 오는 지적 희열은 독자들이 이 책에서 맛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라고 평가한다.

물론 독자로서는 역자의 수준에서 이 책을 읽지 못했다. 두 저자가 대담한 내용 중에서 서로 상대를 존중하고 자신의 주장도 분명히 밝힘으로써 담화를 이어나간다는 느낌은 받을 수 있었지만 그들의 내용에서 독자가 즐거움이나 희열을 느낄 수는 없었다. 그들의 대담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독자 판단으로 굉장히 높은 수준의 예술론을 다루고 있으며, 누구도 감히 함부로 내세울 수 없는 예술의 종말론을 이끌어낸다는 것을 예술 공부라고는 책 한 권도 제대로 읽지 못한 독자가 잘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소리일 것이다. 한마디로 책의 내용은 일반 독자들이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자 후기〉로 역자의 설명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서평에서 한두 줄 인용해야 할 내용을 이 책 서평에 원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단토의 예술 철학을 비판적으로 개관하는 서문이고, 나머지는 파파로니와 단토가 주고받은 대화록이다. 특히 이 책의 주된 부분을 차지하는 대화록은 그 형식의 특성상 딱딱한 논문에서는 포착하기 어려운 단토의 미묘한 생각과 태도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다. ‘예술의 종말’이라는 단토의 유명한 테제는 그토록 잘 알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오해를 낳고 파악하기 힘든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런 상황에서 단토의 예술 철학을 대담의 형식으로, 그러니까 일상의 언어로 접할 수 있다는 것은 그의 사유를 입체적으로 헤아려 볼 수 있는 무척 좋은 기회가 된다. 또한 그가 미술, 그중에서도 예술 철학과 분석 철학에 입문하게 된 내밀한 이야기도 엿볼 수 있다.

이 책의 대담자들은 저마다 전문 분야가 다르지만 모두 어느 정도는 철학자고, 미술가며, 미술 비평가다. 사안을 바라보는 시각이 조금씩은 다를 수밖에 없으니 상대가 자신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고, 서로 오해가 생길 수도 있다(이런 오해는 때로 자기 논리의 허점을 회피하는 의도적 혹은 무의식적 전략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이야기의 초점이 미세하게 틀어지기도 한다. 역자도 사실 내용이 다소 전문적이고 난해한 대목이 적지 않다고 밝힌다. 하지만 이 책을 집어 들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이라면 이미 모두 조금씩은 철학자이자 미술 비평가, 예술가일 것이고, 따라서 이 책에서 저마다 자신에게 필요한 값진 정보와 가치, 영감을 얻어갈 수 있으리라고 역자는 확신한다. 이런 어긋남을 지켜보며 독자는 화자들, 특히 단토의 논지를 오히려 더 깊고 선명하게 이해하게 될 것으로 예상하기도 한다.

 

 

이탈리아의 미술 비평가이자 큐레이터, 편집자인 파파로니와의 대화는 그의 넓은 식견과 탐구 정신으로 단토 사유의 여러 측면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 이 대화(화가 밈모 팔라디노와 철학자 마리오 페르니올라가 참여할 때도 있다)에서 우리는 서로 날카로운 질문을 주고받는 대담자들의 생생하고 즉흥적인 토론을 지켜볼 수 있다. 단토가 이 시대에 던진 두 가지 화두인 ‘탈역사’와 ‘예술의 종말’이 가리키는 방향은 곧 다원주의 시대라고 역자는 본다. 이런 점에서 단토의 사유가 가닿는 영역은 비단 예술에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책의 담화가 예술과 철학, 미학의 범주 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긴 하지만 그 내용은 우리가 지금 발 디디고 살아가는 이 세상과 시대, 사회의 현재와 과거와 미래를 되돌아보고 가늠해 볼 수 있는 비전을 제공한다.

“내가 말하는 것은 역사의 종말이지 예술의 죽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역사로 구축된 세상에 얼마간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탈역사’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남은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이야기를 단념하지 못하는데 인간의 마음이 늘 사태를 서사적 관점에서 보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조만간 이야기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고 사태를 있는 그대로 보게 될 것입니다.”(p.84)

동시대의 예술의 주된 목적은 미적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는 하지만 단토는 미학을 동원하는 예술도 있음을 부정하지 않았다. 한편으로 그는 미학을 추구하는 것은 "예술사가 전개되는 동안 제작된 예술 대다수의 주된 목표"가 아니었다고 말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많은 전통적 예술과 일부 동시대 예술에는 틀림없이 미적 요소가 있다."라고 확언한다.

 


 

역자는 파파로니가 「우연히 시작된 대화들」이란 〈서문〉에서 언급하듯 이 책은 단토와의 대담 외에도 단토의 예술 철학을 개관하는, 그러나 그것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파파로니 본인의 독자적인 생각을 표명하는 해설 『주디의 방에서』를 포함한다. 역자가 이해한 바로 '주디의 방'은 예술과 삶, 혹은 허구와 실재가 공존하는(달리 말해 양자가 끊임없이 자리바꿈하는) 공간을 표상한다. 그리고 바로 이 사태의 핵심 계기는 역사 혹은 시간의 어떤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있다. 파파로니는 이 해설에서 여러 개별 작품의 '시간관'을 구체적으로 분석하면서 예술과 진리, 차용과 독창성, 해석과 동기(의도), 모더니즘과 탈역사 등의 문제를 논하는데, 단순히 보론(補論)이라기보다는 1~4장의 대담과 별개로 그 자체로도 탁월한 통찰이 돋보이는 흥미로운 에세이라고 강조한다.

대서사들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무엇이라도 가능한 시대, 소서사들의 시대가 열렸다. 거실에서는 TV가 사라지고 셀 수 없이 많은 유튜브 채널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이 책에서 예술계의 오늘과 어제와 미래를 조망한다. 예술계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특수한 구역이 아니라 바로 이 세상을 축소한 모델-어느 영역보다 세계의 흐름에 예민하고 민첩하게 변화가 일어나는 곳-이다. 이런 뜻에서 『예술과 탈역사』는 예술의 범주에서 더 나아가 한 권의 인문·역사서로도 기능한다. 나아가 단토가 제기한 두 가지 화두, 탈역사 개념과 다원주의 비전은 우리가 현시대를 진단하고 각자의 지난날과 앞날을 조망하는 데도 유용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참고로 역자가 앞서 언급한 대로 파파로니의 해설 『주디의 방에서』의 일부를 여기에 게재한다. "아서 단토가 보기에, 작품에 점차 철학이 깃들면서 그것을 감상하고 해석하는 일을 눈이 아닌 정신이 맡게 되리라는 헤겔의 예언이 실현된 것은 뒤샹에 이어 워홀의 브릴로 상자가 제기한 질문들과 더불어 20세기에 와서였다. 단토가 그의 '예술의 종말'이론을 발전시키는 데 전념하게 된 중대한 순간은 그가 1964년 맨해튼 스테이블 갤러리에서 열린 워홀의 전시회를 방문했던 때와 일치한다. 어떤 것이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역사의 어느특정한 시기에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여겨지게 되는 이유를 그가 탐구하기 시작했던 것이 바로 그때였다. (중략)

뒤샹의 레디메이드와 워홀의 브릴로 상자는 평범한 대상으로 제시된 예술 작품들로, 둘 다 구상 미술의 서사 구조도 추상 미술의 구성 구조도 없다. 단토에 따르면 평범한 대상과 예술품의 차이는 이제 그 형태가 아니라 해석 과정에 근거하는데 브릴로 상자의 경우에는 서로가 서로를 지시하는, 즉 원본과 사본을 구별하기 힘든 한 쌍의 대상을 비교하는 방법이 쓰인다. 예술품에 대한 단토의 철학적 해석은 바로 이런 동일성과 차이를 인식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뒤샹과 워홀의 작품에 대한 비교 분석은 예술품의 고유성과 항상성을 숙고하게 한다."(p.39~54)

이 책을 국내 독자들에게 처음 소개하게 된 올해가 단토의 타계 10주기다. 이탈리아어 초판은 2020년에, 개정을 거친 영어판은 작년에 출간되었다고 한다. 시점이 시점이니만큼 한 가지 의미를 부여해 이 책을 소개한다면, 동시대의 가장 중요한 예술 철학자의 성취와 자취를 뒤돌아보고 기리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고 역자는 소감을 밝혔다.

 


 

“내 견해는 ‘죽음’이 명백히 뜻하는 바대로 예술이 더는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 전개상 적절한 다음 단계로서 확신을 주는 서사에 힘입지 않아도 어떤 예술이든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끝나는 것은 서사(narrative)이지 서사의 대상(subject)이 아니다.” 예술 자체가 끝난 것이 아니라 예술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과 더불어 예술을 비평하는 일정한 방식이 끝난다는 말이다.(p.84)

 

저자 : 아서 C. 단토(Arthur C. Danto)

미국의 철학자이자 미술 비평가. 웨인주립대학교에서 미술과 역사를 공부했으며 판화가로 활동하면서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철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컬럼비아대학교에서 다양한 교수직을 역임하다가 1966년에 정교수가 되었다. 1984년부터 2009년까지 『네이션』의 미술 비평가로 활약했으며 미국철학회장과 미국미학회장을 역임했다. 그의 주 관심사는 사고, 감정, 예술 철학, 표상 이론, 철학적 심리학, 헤겔 미학, 그리고 메를로퐁티와 니체, 장폴 사르트르의 철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했다. 단토는 1964년 앤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를 보고 ‘어떤 인공품은 예술품이 되고, 또 어떤 인공품은 예술품이 되지 못하는가?’라는 논지의 화두를 미술계에 제기해 이목을 모았다. 같은 해 발표한 논문 「예술계」로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해부하면서 철학적 미학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2013년 10월 89세를 일기로 타계한 단토는 수많은 평론과 저서를 남겼다. 주요 저서로는 『예술의 종말 이후』와 1990년 미국도서평론가협회 평론 부문을 수상한 『만남과 성찰』을 비롯해 『일상적인 것의 변용』 『브릴로 상자를 넘어서』 『비자연적인 기적들』 『미래의 마돈나』 『앤디 워홀』 『무엇이 예술인가』 『미를 욕보이다』 등이 있다.

 

저자 : 데메트리오 파파로니(Demetrio Paparoni)

이탈리아의 미술 비평가이자 큐레이터, 작가, 편집자. 카타니아대학교에서 근현대 미술사를 가르쳤으며 지금은 이탈리아 신문 『도마니』에서 미술 비평가로 일하고 있다. 1983년에 현대 미술 매거진 『테마 첼레스테』와 동명의 출판사를 설립하여 2000년까지 운영했다. 주요 저서로는 『악마: 시각적 역사』(2019) 등이 있다. 단토 생전에 그의 담당 편집자로 일했으며, 단토와 주고받은 대화를 정리해 본서로 출간했다.

 

역자 : 박준영

한때 영화를 만들었고, 미학을 잠시 공부했다. 현재는 미학을 실천하는 내 나름의 방식이란 핑계로 번역을 하고 있다. 관심 분야는 분석 철학과 현대 예술이며, 옮긴 책으로는 나이절 워버턴의 『그래서 예술인가요?』와 벤체 나너이의 『미학』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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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벤션 - 발명의 성공과 실패 그리고 미래를 이야기하다!
바츨라프 스밀 지음, 조남욱 옮김 / 처음북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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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인벤션』은 표제어 '인벤션(invention)'이 의미하듯 '발명(품)'을 이야기한다. 저자 바츨라프 스밀의 말대로 "인류의 진화는 발명과 분리하여 설명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발명이 인류의 역사에 물리적 변화와 행동 양식을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모든 발명이 인류를 편리하게, 더 많은 것을 소유하게 만들어주지는 않았다. 발명이 자본주의와 만날 때부터는 인류의 행복을 위한 발명품보다는 더 강력하고 폭발력이 강한 물체들이 발명돼 인류의 행복과 반대의 결과를 낳기도 했다. 인류의 행복과 편리한 일상을 위한 발명품 가운데 비경제적이라서 퇴출당한 것들이 있는가 하면 혁신적이지만 유해함이 입증돼 영원히 사라지는 것들도 있다.

이 책은 눈부신 기술 발전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미래를 향한 교훈과 통찰을 제공하기 위해 쓰였다. 최점단 기술이 쏟아지는 현시점에서 근대 발명과 혁신의 흐름을 되돌아보고 미래를 전망하려는 저자 스밀의 시도는 매우 시의적절하다고 역자 조남옥도 동의한다고 〈옮긴이의 말〉을 통해 밝혔다. 이에 따르면 과거의 실패와 진행 중인 기술 가운데 대표적인 사례들을 통해 기술 발전의 역사를 조망하고 있다. 20세기에 화려하게 등장한 유연휘발유, DDT, 프레온가스는 초창기에 주목받으며 인류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결국 실패로 끝났다. 비행선, 핵분열 기술, 초음속 비행기는 세상을 지배할 것처럼 등장했지만 실망스러운 발명이다. 물론 핵분열에 의한 핵발전과 초음속 비행기는 여전히 기대되는 기술이며 발전이 진행 중인 기술이다. 하이퍼루프를 이용한 고속 이동, 화학비료가 필요 없는 바이오 농업 기술, 핵융합을 이용한 발전 기술, 탈탄소화 기술 등은 인류가 아직도 간절히 기다리는 기술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기본적으로 기술 발전에 의한 인류의 진보에 대해 확신하지만, 최근 기술에 대한 지나친 낙관은 경계한다. 최근 각국이 사활을 걸고 있는 반도체 산업도 마찬가지이다. 2023년 현재 최첨단 반도체 산업의 선폭 기준은 3nm이다. TSMC와 삼성전자 등 최첨단 반도체 기업들은 이 좁은 선폭의 반도체를 제조하기 위해 사활을 걸고 있다. 3nm의 다음 세대 반도체는 1~2nm이 될 것이라. 이 단계에 들어서면 반도체 산업은 극한의 물리적 한계에 봉착할 것이다. 선폭을 줄이기 위해 투입되는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수익을 담보하지 못하는 단계로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고 예견한다. 만약 지금까지의 반도체와는 달리 완전히 다른 구조의 반도체가 등장하지 않는다면 1970년대부터 이어진 반도체 무어의 법칙*은 이제 곧 한계를 드러낼 것이다.

* 무어의 법칙(Moore's Law) : 인터넷 경제의 3원칙 가운데 하나로, 마이크로칩의 밀도가 24개월마다 2배로 늘어난다는 법칙을 말한다. 1965년 페어차일드(Fairchild)의 연구원으로 있던 고든 무어(Gordon Moore)가 마이크로칩의 용량이 매 18개월마다 2배가 될 것으로 예측하며 만든 법칙으로, 1975년 24개월로 수정되었다. 마이크로칩 기술의 발전속도에 관한 것으로 마이크로칩에 저장할 수 있는 데이터의 양이 24개월마다 2배씩 증가한다는 법칙이다. '인터넷은 적은 노력으로도 커다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메트칼프의 법칙, '조직은 계속적으로 거래 비용이 적게 드는 쪽으로 변화한다' 는 가치사슬을 지배하는 법칙과 함께 인터넷 경제3원칙으로 불린다. 또한 컴퓨터의 성능은 거의 5년마다 10배, 10년마다 100배씩 개선된다는 내용도 포함된다. 이 법칙은 컴퓨터의 처리속도와 메모리의 양이 2배로 증가하고, 비용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 책은 모두 5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발명과 혁신의 역사」, 2장 「발명과 혁신의 역사」, 3장 「세계를 지배할 뻔한 발명」, 4장 「인류에게 꼭 필요한 발명」, 5장 「발명과 혁신의 현실적 전망」 등이다. 저자는 현대사회에서 퇴출당한 발명은 무엇이었나를 살펴본다. 또 세상을 지배할 뻔한 발명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실제 발명품에 대한 원리와 뒷이야기도 알아본다. 이를 통해 인류에게 꼭 필요한 발명은 무엇인가?란 질문과 이야기로 이끌어간다. 지금 한창 진행 중인 인공지능, 신약, 전기차, 탈탄소화 기술 등의 현주소는 어디인가?도 함께 분석해본다. 또 퇴출되거나 인류의 행복에 반하는 발명과 혁신에 대한 기술적 과장과 미디어의 과대광고에 대해서도 이 책에 연구 결과로 나와 있다. 빌 게이츠가 가장 사랑하는 사상가인 바츨라프 스밀의 객관적인 시선으로 전하는 발명과 혁신의 이야기다. 인류의 발명과 혁신의 역사와 미래 기술 발전에 대한 바람직한 모습을 과학적, 통계적 분석을 통해 살펴보는 흔치 않은 기회가 될 것으로 독자는 기대한다.

저자 바츨라프 스밀는 세계적인 에너지, 환경 분야의 거장이다. 빌 게이츠가 사랑하는 사상가이기도 하다. 이 책은 발명과 혁신의 역사적 사례들을 조사하여 성공적으로 대중화된 것들과 실패로 끝난 것들을 분석하며, 인류에게 필수적인 발명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또한, 바츨라프 스밀은 기술의 발명과 혁신에 실패를 다루면서, 실패의 원인과 결과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기술 역사를 통해 학습하여 현재와 미래의 기술 발전에 대한 더 나은 이해와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 『인벤션(THE INVENTION)』은 기술, 경제, 사회학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다가올 것이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발명과 혁신의 성공과 실패, 그리고 이에 따른 사회적 영향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우선 저자는 현대사회에서 퇴출당한 발명품 세 가지를 집중적으로 알아본다. 앞서 언급한 대로 유연휘발유, DDT, 프레온가스 등이다. 이들 발명품은 발명 초기에는 환영받으며, 세계적으로 확산되었으나 결국 실패한 발명품으로 확인돼 지구상에서 퇴출당했다. 이런 발명들은 시간이 지나 인간과 환경에 바람직하지 않거나 해로운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이것들은 처음 발명된 용도로 사용되는 것이 완전히 금지되었다. 또 세계를 지배할 뻔한 발명에 대해서도 이 책은 써 놓았다. 비행선, 핵분열, 초음속 비행기 등 세 가지다. 틈새시장에서 유망해 보였으나 생각보다 기대에 미치지 못한 발명이다. 이러한 발명들은 상업화에 성공하기도 했고 어느 정도 확산되기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기대했던 잠재력에 도달하지 못하리라는 것이 드러났다. 지금은 연구 대상으로 남아 있기만 할 뿐 실제 제작돼 실용화하지는 못하게 됐다.

그리고 인류와 지구를 위한 발명품으로 안내한다. 저자는 하이퍼루프, 질소고정 작물, 핵융합 등의 세 가지를 꼽았다. 인류에게 꼭 필요한 발명이라고 저자는 자신 있게 내세운다. 만약 이것들이 대규모의 상업화가 이루어진다면 세계적인 혁신을 일으킬 수도 있고, 실현되기만 한다면 오랫동안 성공이 보장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요원한 단계에 있다고 한다.

인류는 더 나은, 더 안전한, 더 공평한 세상을 이루기 위해서 수많은 혁신적인 발명을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저자는 역설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과장되거나 거짓이 있거나 부작용이 있지는 않을까? 바츨라프 스밀은 특히 발명과 혁신의 과대광고와 미디어 환경의 영향력에 초점을 맞추어, 이러한 요소들이 새로운 기술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기대를 형성하는 데 어떻게 기여하는지도 이 책에서 살펴본다.

 


 

현재 발전을 거듭하는 인류의 최근 발명품들은 현재 인류의 기술 발전이 어디까지 와 있나를 살펴볼 수 있다. 그 장단점과 전망 등을 살펴보는 일은 앞으로 인류의 기술이나 지향점이 어디인지 통찰력을 얻을 수도 있다. 인공지능은 우리의 능력을 확장하고 최적화하는 데 도움이 되며, 딥러닝 신경망을 통해 전례 없는 풍요로운 축복의 시대를 열 것으로 전망한다. 하지만 현실은 훈련 알고리즘보다 훨씬 더 복잡할 수 있기에, 딥러닝 신경망은 편향되기 쉽고 치명적인 망각(챗GPT의 오류: 할루시네이션hallucination)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이 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의학 분야의 경우 언론에서 지나치게 좋은 소식으로 자주 보도된다. 의약 분야에서 실용적인 성과가 나올 수 있으며 상업화가 가까워졌다는 식으로 과학 연구를 과장하여 보도하는 관행은 흔한 일이다. 이는 진정한 의학 발전보다 의학의 상업화 쪽으로 기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경계한다. 저자는 특히 세계 여러 곳에서 탈탄소화를 외치며 새로운 발명과 혁신을 선보이고 있지만, 탈탄소화를 앞당길수록 화석연료를 더 사용하는 모순이 생기고 있다는 점을 경고한다. 더욱이 빌 게이츠는 “탄소 배출 제로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기술의 절반은 아직 존재하지 않거나 너무 비싸서 감당할 수 없다.”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이처럼 이 책은 독자에게 기술 발명과 혁신에 대한 현실적인 시각을 제공하고, 이를 바탕으로 미래의 기술 발전에 대한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쓰였다. 이와 함께 부유한 국가에 사는 10억 명과 반복되는 질병, 조기 사망률, 최저 생계 수준에서 살아가는 30억 명 간의 차이를 줄여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따라서 필수적인 물, 식량, 에너지, 물질적 필요를 충족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가 될 것으로 전망하기도 한다.

 


 

바츨라프 스밀은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발명을 구별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 방법은 바로 우리가 어떻게 현재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현재 시점에서 기존의 불평등을 크게 줄이고 건강, 교육, 소득 격차를 좁힐 수 있는 발명과 혁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놀라운 발명을 통해 미래의 혜택을 추구하는 것과 이미 확립된 기술을 전 세계적으로 유용하게 활용하는 것 사이의 균형을 이야기하며 미래 기술이 올바르게 나아갈 방향까지 제시한다.

 

현실을 인정하고 과거의 실패와 교훈에서 배우려는 의지는 현대사회에서 점차 사라져 가는 추세다. 정확한 과학적 이해를 갖추지 못한 대중은 혁신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한 보고서와 과장된 새로운 발명에 대한 주장에 매일 노출되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뉴스 미디어가 종종 현대사회를 ‘변화’시킬 ‘파괴적’인 전환이 곧 도래할 것처럼, 거짓된 희망을 계속해서 제시한다는 점이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지금 탈진실 사회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p.265)

 

저자 : 바츨라프 스밀(Vaclav Smil)

에너지, 환경, 식량, 인구, 경제, 역사, 공공 정책까지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며 50여 년간 광범위한 분야의 연구를 선도해 온 환경과학자이자 경제사학자. 세계 발달사를 꿰뚫는 통계분석의 대가로 손꼽히며, 빌 게이츠가 가장 신뢰하는 사상가로 주목받았다. 캐나다 매니토바대학교 환경지리학과 명예교수이며, 캐나다 왕립과학아카데미 회원이다.

체코에서 태어나 프라하 카를로바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럽연합을 비롯해 미국과 유럽의 다양한 국제기구에서 정책 자문을 했다. 세계의 에너지와 환경 정책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비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미국과학진흥회(AAAS)의 ‘과학기술의 대중이해상’을 받았다. 2010년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가 발표한 ‘세계적 사상가 100인’에 선정되었고, 2013년 캐나다에서 민간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 훈장인 캐나다훈장을 받았으며, 2015년 OPEC 연구상(OPEC Award for Research)을 수상했다. 에너지 기술 혁신이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 등 에너지와 환경, 인류 문명에 관한 거시적 관점의 책을 집필해 왔다.

저서로 《대전환》, 《숫자는 어떻게 진실을 말하는가》, 《에너지란 무엇인가》, 《에너지 디자인》, 《How the World Really Works》, 《Growth: From Microorganisms to Megacities》 《Energy and Civilization: A History》 등 40여 권이 있다.

 

역자 : 조남욱

서울대학교 산업공학과에서 학사,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퍼듀 대학교에서 산업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알카텔-루슨트(Alcatel-Lucent)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하였고, 삼성SDS 전자제조컨설팅실에서 책임컨설턴트로 일하였다. 2004년부터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산업공학과에서 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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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후의 삶 - 이별의 상처를 극복하고 홀로 서기 위한 치유가이드
사브리나 폭스 지음, 김지유 옮김 / 율리시즈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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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살면서 이별을 경험한다. 그것도 한두 번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모두 다 만남의 횟수만큼 이별을 겪는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불교에서 쓰는 용어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이 맞다. 부처님이 자신의 임종을 슬퍼하자 위로하느라고 한 말이라지만 우리 삶에 딱 맞는 말이란 생각이 든다. 이별 중에는 기쁜 것도 있을 수 있으나 대개는 고통스럽고 슬프다. 때로는 고통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오랜 세월 괴로워하며 주변 사람까지 불행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의미로 바라본다면 이별은 새로운 시작이기도 하다.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성장하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다.

심리상담가, 소통전문가로서 활동해온 저자 사브리나 폭스는 이별은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아니며, 실수도 실패도 아니라고 말한다. 누구나 관계를 맺을 권리가 있듯이 이별할 권리도 있는 것이라고, 그저 삶의 일부일 뿐이니 죄책감이나 지나친 고통으로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고 위로한다. 아까 말한 부처님의 뜻과도 비슷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이 책 『이별 후의 삶』은 종교적 의미를 담은 것은 아니다. 훨씬 현실적이고 인간의 감정에 의해 분석하고 규정되어진 현실 감정에 의해 쓰였다.

실제로 저자 역시 두 번의 이혼을 겪으며 온갖 부침을 경험했다고 한다. 저자는 자신의 이야기와 더불어 30년간 상담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의 사례를 바탕으로 관계의 시작부터 끝, 이별의 아픔을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이 책에서 제시한다. 파트너 선택, 이별 전, 이별 과정, 이별 이후,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까지 각각 어떤 감정을 겪는지, 그 와중에 맞닥뜨리는 어려움은 단계적으로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이를 통해 비로소 객관화되는 진짜 내 모습은 어떤지…… 또한 부모의 이별로 아이들이 겪게 되는 슬픔, 아이들과의 이별,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 이별 후 새로운 가족 구성에 대한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조언까지 비중 있게 살펴본다.

 


 

이 책은 450여 페이지의 두꺼운 책이지만 구성은 단순하다. 모두 12개의 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제는 '이별'이지만 이별 전과 후의 모습을 모두 담았다. 사용된 언어도 지극히 평범한 언어가 대부분이며 이는 독자들의 이해를 쉽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심리학 분야에서 다룰 법한 내용이지만 심리학 전문 용어를 가능한 배제시킨 것도 저자가 독자들의 쉬운 이해를 바랐기 때문이리라 짐작된다. 12개 장의 제목만으로도 이 책을 쓴 이유와 통흐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1장 「이별,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2장 「왜 당신이어야 했을까」, 3장 「두 번의 결혼과 이혼, 마침내 자유」, 4장 「사랑, 그리고 사랑이라는 착각」, 5장 「이별은 실패가 아니다」, 6장 「헤어질 결심」, 7장 「지금 헤어지는 중입니다」, 8장 「이별에도 의식이 필요하다」, 9장 「이별에도 의식이 필요하다」, 10장 「이별 후의 삶」, 11장 「아이들과의 이별, 그리고 패치워크 가족」, 12장 「아쉬워하지 말고, 아파하지 말고」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이별의 십계명」과 「이혼 후 새로운 가족관계를 위한 십계명」이 책 중간에 삽입되어 있다. 독자들의 특별한 관심이 요구된다. 또 〈부록〉으로 「이혼하려는 부부에 대한 현실적인 조언」, 「관계 개선을 시도하는 부부에 대한 조언」, 「이혼 후, 자녀와의 만남에 대한 조언」, 「패치워크 가족을 위한 유익한 정보」, 「이혼 후, 부모, 가족, 친구, 동료에게 쓰는 편지」 등이 첨부되어 있으니 관심 있는 독자들의 일독을 바란다. 이 책은 이별을 겪은 이들이 상처를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도록 이끌어주는 이별 지침서이자 치유가이드다.

이별(이혼)에 앞서 부부 대다수가 "제대로 이별하지 않으면 다시 시작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해봤음 직하다. 분명 문제가 있고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서로 잘 알고 있지만, 이별에 대한 두려움에 결단을 주저한다. ‘사는 게 다 그렇지’라고 위안하며 미루거나 무시해버린다. 하지만 관계의 문제는 외면하고 억누를수록 곪아가며, 나중에는 비극적인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저자는 이런 문제를 겪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통해 도발적인 제안을 던진다. 문제를 안고 억지로 살아가기보다는 떨어져 각자의 시간을 갖는 것이 나을 수 있다면서, 잠시 휴식기를 통해 관계를 유지하고 회복시킬지, 아니면 완전히 새로운 시작을 감행할지 고민해보라는 것이다. ‘관계 안에서 길을 잃었다면, 나를 되찾는 유일한 방법은 이별뿐이다.’ 저자에 따르면 사랑의 관계에 속해 있는 동안에는 내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상대를 거울삼아 나 자신을 보거나, 내가 원하는 모습을 투영해서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한다. 하지만 관계에서 빠져나오면 비로소 진짜 모습과 마주할 수 있다. 차라리 관계에서 빠져나와야 자기감정에 솔직해질 수 있다. 분노, 두려움, 수치심, 복수심, 애증, 미련 등, 상대를 향했던 부정적인 감정들을 떨쳐버릴 수 있다.

다만 헤어질 결심에는 이후에 뒤따를 온갖 불안을 감내할 각오가 있어야 한다. 특히 자녀들이 있다면 바닥까지 내보일 진흙탕 싸움이 기다리고 있기도 하다. 저자는 이렇듯 관계의 늪에 빠져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이별의 가능성을 안내한다. 이 책은 이별 지침서인 동시에 관계 가이드북이다. 이별은 결코 관계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을뿐더러,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기 위한 관문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이별하지 못하면 그 누구와도 새로운 시작이 불가능하다. 왜 그 사람이어야 했는지, 그와 사랑에 빠진 이유는 무엇인지, 그와의 관계에서 어떤 습관을 갖게 되었는지를 알아야 과거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고, 나아가 앞으로의 관계에서도 더 확실하고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기쁘고 행복했던 순간도, 악마처럼 못되게 굴었던 순간도, 휘몰아친 감정의 폭풍도 모두 지나간 지금, 그 모든 걸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지금이야말로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돌아볼 시간이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과 수많은 내담자와의 상담을 통해 이별에 대한 연구 자료를 충분히 확보하고 오랜 치유 경험을 더해 분석했다. 저자가 얻은 결론 중 하나는 "사랑에 빠질 때는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을 보여주고 헤어질 때는 진짜 내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앞서 저자는 먼저 자신의 경험을 솔직히 털어놓는다. 다른 사람의 삶은 비교적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으니 저자의 경험을 통해 각자의 삶을 명확히 들여다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두 번의 이혼, 남자친구와의 만남과 이별, 그로 인해 파생된 여러 관계를 서술하고, 이별을 통해 무엇을 배웠는지를 들려준다. 이를 바탕으로 30년간의 상담 생활 동안 만났던 숱한 사람들의 사례들이 등장한다.

이 책은 크게 과거, 현재, 미래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즉 이별 이전, 이별하는 과정, 이별 후의 시간을 살펴보면서, 그와 더불어 관계를 시작할 때, 또는 관계를 쌓아가는 과정에서 어떤 선택들을 하는지, 왜 그러는지 이유도 들여다본다. 그 과정을 통해 독자는 이들의 관계 지형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아이가 있는 부부, 아이가 없는 부부의 이혼, 우정, 원가족, 죽음 등 여러 사례를 통한 다양한 형태의 이별도 살펴본다. 특히 후반부에서는 많은 분량을 할애해 부모가 이혼할 때 아이들이 어떤 마음인지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부모가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이혼이 아이들에게 힘들고 슬프기만 한 과정은 아닐 수도 있다는 지점이다. 누가 원인 제공자인가를 따지기에 앞서, 아이들에게 죄인이 된 듯한 심정을 안고 사는 부모로서는 희망적인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이 책은 저자가 상담한 수많은 사례와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별 전후에 벌어지는 거의 모든 경우의 수를 아우른다. 특히 실제 사례와 질문지를 활용하여 독자가 책에 서술된 내용을 자신에게 적용해볼 수 있는 구성이 특징으로, 수록된 질문들은 저자와 마주 앉아 속 깊은 상담을 나누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만큼 예리하고 치밀하다. ‘관계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도구를 제시해준 연습문제집 같은 책’ ‘문제의 원인을 이해하고, 같은 행동 패턴을 반복하지 않으면서, 해로운 관계를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준 책’이라는 추천들이 이어진 이유다.

 


 

이 책에서 저자는 '영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영성에 기반을 두고 관계와 이별을 탐구한다고 밝힌다. 책의 「들어가기」에서 저자는 자신이 영혼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영혼이 저자를 소유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힌다. 이에 저자는 '환생'을 믿는다고 종교적 입장 역시 인정하는 듯하다. 다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새로 태어남'의 환생이 아니라 삶의 다양한 측면을 경험하면서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다시 태어나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영혼과 정신은 서로 다릅니다. '영혼'이란 마음속 민감한 부분을 표현할 때 자주 사용되는 단어지만 그런 식으로 설명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영혼은 아픔을 느끼지 않습니다. 아픔을 느끼기 위해서는 감정이 필요한데, 감정은 영혼이 아닌 인격의 한 측면이거든요. 영혼은 그더 존재할 뿐이죠. 영혼은 기분족으로 사랑과 호의로 충만한 상태입니다. 반면 인격은 자신의 현재 상태, 성장, 만족감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감정을 필요로 하죠."(p.12~13)

앞서 언급한 대로 〈부록〉에는 이혼 관련 전문가들과의 인터뷰를 실어 각각의 경우에 실용적인 도움이 될 만한 팁을 제공한다. 이혼을 앞둔 부부, 관계 개선을 시도하려는 부부, 이혼 후 자녀와의 만남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부모, 패치워크 가족을 위한 유익한 정보도 덧붙였다. 저자가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메시지는 ‘이별은 실패가 아니다. 당신은 단지 결단을 내렸을 뿐이다.’도 포함된다. 누구의 잘못인지를 따지는 것은 사실 무의미하다. 누가 잘못했느냐가 아니라, 두 사람의 관계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나를 정말 아프게 하는 것은 상대가 아니라, 상대의 행동에 대한 나의 반응이라는 사실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누구에게나 관계를 맺을 권리와 이별할 권리가 있다. 그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관계에 대한 강박을 한결 내려놓을 수 있다. 이별은 실수도 실패도 아닌, 그저 삶의 일부일 따름이지만 그 이별을 어떻게 다룰지는 스스로 결정할 일이다. 이 책은 그 결정을 현명하고 지혜롭게 수행하도록 격려하는 안내서다.

 


 

이 책은 저자의 설명이 끝날 때마다 자문자답 형식의 별도의 난이 독자들 기다린다. 스스로 느낀 점을 적어볼 수 있고 질문에 대한 답을 충분한 시간을 두고 작성해 나간다면 세부적인 감정 정리를 통해 책 전제의 의미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을 독자는 기대한다. 또 일부는 외워두고 수시로 자문해볼 만한 내용도 있다. 이른바 〈이별의 십계명〉과 〈이혼 후 새로운 가족관계를 위한 십계명〉이다. 이 가운데 〈이별의 십계명〉을 여기에 적어본다.

① 서로를 존중하기

② 지금까지 함께한 시간에 감사하기

③ 상대 때문에 마음 아팠던 일 용서하기

④ 나 자신 때문에 아파했던 일 용서하기

⑤ 주도권 싸움을 하지 않기

⑥ 넓은 마음 갖기

⑦ 나를 부추기지 않고 편안하게 해주는 사람들과 함께하기

⑧ 감정을 진정시키는 법 배우기

⑨ 내 삶을 챙기며 살아가기

⑩ 실제 일어나지 않은 일로 지금 이 순간을 망치지 않기

 


 

건강하고 성숙한 사랑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성숙한 사랑에서는 두 사람 모두 관계의 시작과 끝을 스스로 선택합니다. 당연한 것인데 이 사실을 모두가 분명히 아는 것은 아닙니다. 이별 후 슬픔에 잠겨 감정적으로 행동하거나 분노를 터뜨리는 사람도 있거든요. 이런 사람은 빌려준 물건을 다시 돌려받는 것처럼 상대방을 반드시 되찾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파트너는 소유물이 아닙니다. 그도 나와 마찬가지로 오롯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거지요.(p.122)

 

우리 삶은 실수가 아닙니다. 살면서 경험하는 모든 일에는 의미와 당위성이 있어요. 그리고 자신을 더 잘 알수록 더욱 분명하게 자기 행동을 인지하고 살아갑니다.(p.401)

 

저자 : 사브리나 폭스(Sabrina Fox)

작가, 심리상담가, 소통전문가, 명상지도자. 저널리스트로 시작해 독일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진행자로 활동했고, 이후 30여 년간 임상최면치료사, 갈등해결코치, 중재자로서 몸과 마음, 영성간의 연결을 주제로 한 워크숍과 강연, 저술활동을 활발히 해오고 있다. 특히 모든 연령대의 여성을 대상으로, 내면의 지혜를 감지하고 직관을 신뢰하는 법, 자기결정적인 삶을 살기 위한 가이드를 전달하는 것에 주력한다. 저자는 영혼의 매개체인 인체를 주시하고 탐구함으로써, 영적인 신호를 감지하고 활용할 것을 당부한다. 각자의 삶에서 부여받은 숙제를 해결하고 자신만의 행복을 찾을 수 있도록, 20여 권이 넘는 책, 온라인 수업, 블로그, 워크숍을 통해 도움을 주고 있다. 온라인 수업의 주제는 정신, 영혼, 육체, 직감과 마음챙김, 자기애와 관계, 느낌과 감정, 소통, 내면의 평화 등이며, 지은 책으로는 《마침내 각성하다》 《위기를 치유하는 법에 대하여》 《바디 블레싱, 내 몸 사랑하기》 《영혼이 원하는 것》 《모든 여성은 나이가 든다, 문제는 어떻게 늙어가느냐》 등 다수가 있다.

웹사이트_www.SabrinaFox.com

인스타그램_Sabrinafoxspirit

페이스북_Sabrina.Fox.Spirit

 

역자 : 김지유

충남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 한독과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대기업과 공공기관에서 통역사로 일했으며, 현재 출판번역 에이전시 유엔제이 소속 전문번역가로 활동하며 좋은 외국 도서를 한국에 소개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우리에게 닥친 기후재앙을 멈추는 법』이 있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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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 박미옥
박미옥 지음 / 이야기장수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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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형사 박미옥』은 대한민국 경찰 역사상 최초의 강력계 여형사, 최초의 여성 강력반장의 이야기다. 탈옥수 신창원 사건, 연쇄살인범 정남규 사건, 숭례문 방화사건 화재감식 등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한 사건 속에 형사 박미옥이 있었다. 이 책은 30년간 강력계 형사로 살아가면서 파헤쳐나간 굵직한 사건들뿐만 아니라 뉴스에 한 줄 나가지 못한 소매치기 일당이나 스토커, 차량 절도범들과의 이야기가 담긴 치열하고 뜨거운 기록이다. 최초의 여형사인 만큼 많은 에피소드를 갖고 있을 듯하다. 특히 탈옥수 신창원이 검거된 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인사했다는 전설의 여형사가 바로 박미옥이라고 한다. 1991년 대한민국 경찰 역사상 최초로 ‘여자형사기동대’가 창설됐다. 그는 초임 순경 시절 '자의반 타의반'으로 최초의 강력계 여형사가 됐다.

그가 교통순경으로서 거리에서 힘차게 수신호를 하던 때 여자형사기동대를 지원하는 여자 형사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당시 상사이던 분이 '자네도 지원해봐' 한마디가 박미옥을 대한민국 전설의 여형사가 된 단초였다. 초보 형사로 첫발을 내딛었을 때, 그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후 30년간 강력계 여형사로 살아가며 그가 어떤 지옥 같은 사건과 사람들을 마주하게 될지를. 그 와중에도 인간의 선의를 믿을 수밖에 없게 하는 사람들을 만나, 그가 그 선함을 지키고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어디까지 가게 될 것인지를. 연쇄살인범 정남규 사건, 만삭 의사 부인 살해 사건, 한강변 여중생 살인사건, 숭례문 방화사건 화재감식 등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들을 맡았던 형사 박미옥이 직접 쓴 이 책은 여형사로서, 남성들의 세계라던 강력계 형사들 사이에서 제몫을 톡톡히 해 여형사의 전설이 됐다.

 


 

당시 여성 형사, 강력계 형사는 경찰 내에서도 낯선 존재였기에 사건뿐 아니라 편견과도 싸워야 했다. 그는 “‘냄비’(여성을 성적으로 비하하는 은어)가 왔냐”는 인사에 “주전자는 가만히 계시죠”라고 응수하고, “립스틱 정책이냐”는 비아냥에 머뭇거림 없이 맞받아쳤다고 회고한다. 그러면서 사건은 여경과 남경의 성 대결이 아니라 팀워크로 해결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들을 통해 이른바 ‘여경 무용론’을 무너뜨리고 사회의 성 편견을 정당하게 부숴버렸다. 그리고 강력범죄 현장에서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 선과 악의 끝을 마주한 형사 박미옥은 해결되지 못한 상처들, 남모르는 아픔들로 앓고 있는 한국 사회에 책을 통해 안부 인사를 건넨다.

형사로 살면 살수록 세상과 사람에 대해 점점 더 모르는 사람이 되어간다고 형사 박미옥은 되돌아본다. 점점 더 아는 게 많아지고 매사에 명확한 사람이 될 줄 알았는데, 온갖 사건들은 내게 사람 일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세상은 그렇게 흑백으로 선명하게 갈리지 않는다고 이 책을 통해 말한다. 그렇게 모르기 때문에 점점 더 낮은 자세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다고도 강조한다. 타인에 대해 알 수 있는 부분은 아무리 노력해도 겨우 한 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서, 속속들이 관찰하고 파헤치고 묻는 것만이 사건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모르는 인생 앞에, 쉽게 안다고 표현 못 하는 타인 앞에 저자 박미옥은 앞으로도 살아가는 동안 내내 그러할 것이라고 장래도 밝힌다. 영원히 잘 모르므로 눈과 손발이나마 부지런히 굴리는 사람으로 살아갈 것이고. 공직자로서 자세도 확고하게 자리잡은 듯한 모습이다.

 

 

예전에 몇몇 사건들로 인해 세간에 ‘여경 무용론’이 유행처럼 입길에 오르곤 했다. 그때나 이제나 형사 박미옥은 아무 말도 히지 않았다. 기존 남자 형사들은 물론 국민들도 여형사라는 존재를 낯설어하고 이상하게 여기던 1990년대부터 최근까지 강력범죄 현장을 누비며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한 무수한 사건들을 해결해온 여경이 나서서 반론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에서다. 뿌리 깊은 여성 비하 의식이 하루아침 한 사람의 말로 사라지겠는가? 오히려 더 큰 후폭풍이 우려될 뿐이다. 그는 당시에도 지금 여기에서도 오직 범죄 척결과 범죄 척결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후배들에게 몸으로 가르치는 데 익숙해 있다. 그의 그런 소신과 성격은 책제목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다른 수식어도 없이 간결하고 명확하다.

그가 처음 강력계 형사가 되었을 때, 국민들은 물론이거니와 기존의 남자 형사들에게도 여자 형사란 낯설고 이상한 존재였다고 한다. 지금 이 책을 읽는 독자도 같은 생각이었다. 여경들은 복사 심부름이나 보조업무 같은 행정 파트에나 있는 줄 알았다. 또 대부분의 여경들이 비교적 힘들지 않은 파트에서 지금도 일하고 있다. 91년 당시에는 여형사가 배치되면 ‘형사기동대 차로 운전연습을 하더라’ 같은 유언비어성 비난이 퍼지기도 했다고 한다. 여형사들끼리 거의 다 해결해놓은 사건을 막판에 ‘여형사가 범인을 직접 검거하기엔 위험하다’는 이유로 남자 형사에게 고스란히 공을 돌려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여형사들은 이렇게 사건뿐만 아니라 세간의 편견과도 싸워야 한 것이다. 하물며 최고의 검거 실적을 쌓아가던 박미옥 형사가 강남경찰서 최초의 여성 강력계장으로 임명되었을 때도, 그는 공식석상에서 이런 질문을 받아야만 했다.

 


 

탈옥수 신창원 검거 특별팀에 투입되었을 때는 웬 ‘냄비’(여성을 성적으로 비하하는 은어)가 왔느냐는 거친 언사도 들었지만, 그는 “주전자는 가만히 계시죠”라고 응수하며 곧장 현장에 집중했다. 결국 현장에서 사건은 여경과 남경의 성대결이 아니라, 언제나 긴밀한 팀워크로 해결되기 때문이다. 범인을 검거하다가 도리어 경찰이 부상당하거나 때론 사망하기도 하는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현장. 그는 이 현장에서 함께했던 동료들의 삶과 죽음들을 곡진한 문장으로 위로하고 쓰다듬는다.

 

애통하게 떠난 두 형사를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날, 나는 그곳에서 두 형사를 보내는 진혼시를 낭독했다. 그때 내 안에서 나 자신과 내가 아는 모든 형사들의 영혼이 목놓아 울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억눌러왔던 형사의 울음이었다. 경찰관으로서 제복 입고 가슴에는 흉장을 달고서 밤낮없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경찰 정신을 안고 살지만, 실은 언제 칼 맞고 총 맞을지 모르는 운명. 경찰관 이전에 우리도 흉기를 보면 두렵고 괴한에게 죽임당하고 싶지 않은 사람일 뿐이라고 대놓고 주장하기도 어려운, 우리 동료들끼리만 아는 뜨거운 눈물이었다. 현장을 함께해본 사람이라면 안다. 남녀 불문 우리 모두에게는 불안과 두려움이 있다는 것을. 때론 나의 불안도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다. 경찰의 세계는 여경과 남경으로 갈리지 않는다. 한마음으로, 서로 함께하는 호흡과 노력으로, 오던 칼도 멈추게 하고 가던 범인도 우리 손 안에 들어오게 하는 기운은 오직 팀워크에 있다.(p.22~23)

 


 

이 책에는 대한민국의 국보 1호(숭례문)가 잿더미가 되어가는 장면이 실시간으로 온 국민에게 생중계된 숭례문 방화사건, 국민들 사이에 의적이라도 된 듯 신드롬을 일으켰던 탈주범 신창원을 검거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그의 일기장을 분석했던 때의 일을 비롯해 그가 파헤쳐나간 수많은 사건들의 전말이 기록되어 있다. 그에게 특진과 포상을 안기며 그의 이름을 인구에 회자되게 한 것은 대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다 아는 큰 사건과 지독한 범죄자들일 테지만, 이 책에서 그가 특히 공들여 기록한 것은 뉴스에 한 줄 나가지 못한 소매치기 일당이나 스토커, 차량 절도범들과의 전투다.

소매치기는 반드시 현장검거를 해야만 하는데, 훔치는 손은 너무도 빨라서 그의 눈에 잡히지 않는다. 형사 박미옥은 만원 전철 속으로 스며들어가 소매치기로 추정되는 이의 등에 슬그머니 제 어깨를 기대본다. 그리고 가만히 포착한다, 범인의 어깨뼈가 움직이는 그 찰나의 순간을. 눈보다 예리한 감각으로 마침내 그는 소매치기 일당을 현장검거한다.

흔히 형사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강력사건이나 흉악범들이 회자될 때 스포트라이트를 받곤 하지만, 형사들이 자신의 업에 뿌듯함을 느끼는 건 바로 이런 순간이다. 범죄자가 움직이는 찰나를 놓치지 않고 붙들어 범죄 피해를 막아냈을 때, 뉴스에도 한 줄 나가지 못할 작은 사건일지라도 서민들이 가슴 칠 일을 막아냈을 때라고 회고한다.

 

"내가 나 자신을 기특하게 여길 일이 필요했을 때, 소매치기 두목과 기술자를 잡았다. 우리에게는 이렇게 자주 내 일에 대한 성과와 보답이 필요한 것 같다. 그래야 비로소 다음을 향해 넘어갈 수 있고 힘들어도 견딜 수 있는 에너지를 비축한다. 일의 고통을 이겨낼 힘도, 일하다 얻은 상처를 싸매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동력도 모두 일이 주는 기쁨과 슬픔 속에 있었다."(p.165~166)

 


 

형사 박미옥은 취조의 달인이자 범인들의 마음을 돌려세우는 기술자다. 범인의 화려한 범죄경력보다 살이 다 터지고 때가 낀 범인의 손등에 담긴 표정을 읽어내 기댈 곳 없는 범인의 마음을 달래고, 자백을 닦달하며 취조하기보다 질문하고 대화하며 속이야기를 끌어낸다. 위험천만한 인질극이 벌어지는 현장에서도 그는 “지금 당신의 얘기를 듣고 도울 사람은 바로 나”라고 외치며 범인과 인질 모두를 살려낸다.

범인에게 ‘당신 왜 그랬느냐,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느냐’고 더 정확하게 묻기 위해 프로파일링을 공부하고 서울과학수사계 프로파일링 팀장으로 일하기도 했던 그는, 이제 또다른 삶의 도구를 통해 사람들을 만나려 한다. 그가 돌연 경찰 조직을 떠난다고 했을 때, 불치병에 걸렸다더라는 소문이 퍼질 만큼 그는 경찰로서의 안정적인 미래가 보장되어 있는 사람이었으나, 그는 이제 ‘현장이 되기 이전의 사람들’을 만나 대화하고 싶다고 털어놓는다. 인생에서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며, 상황에 따라 선과 악을 오가며 살아가는 우리들-그 복잡하고 상처받은 마음들을 그는 듣고 싶다고 말한다.

30년 형사 생활을 하는 동안 그는 경청과 응시로 사건을 해결했고, 여자라고, 남자라고, 범죄자라고, 전과자라고 그 누구도 함부로 판단하고 막 대하지 않는 법을 몸과 마음에 새겼다. 인간의 극단적인 모습들이 수시로 터져나오는 강력범죄 현장에서 선과 악의 끝을 목격한 형사 박미옥-이 책은 해결되지 못한 상처들, 남모르는 아픔들로 앓고 있는 한국 사회와 사람들에게 건네는 그의 안부인사이다. 그는 책을 통해 말한다. 오래된 상처와 원한들이 터져 피와 눈물이 되어 흐르는 현장에서 끝없이 후회하고 애도하지만 말고, 이제는 일상 속에서 서로 이해하고 풀며 살자고. 우리는 끝내 그럴 수 있다고.

 


 

"사람들의 욕망과 슬픔이 버글거리는 그 현장에서 나는 결코 이기적일 수 없었다. 때론 기꺼이 이익 앞에 물러나고 불편함을 감수한 것은 그것이 곧 형사의 삶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나는 이미 현장이 된 사람보다 현장이 되기 이전의 사람을 만나고 싶다. 내가 당신을, 당신이 나를, 위로하고 치유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제 나는 일상의 당신들을 만나고 싶다."(p.295)

 

저자 : 박미옥

 

경북 영덕에서 태어나 순경 공채 시험에 합격하며 경찰 생활을 시작했다. 1991년 서울지방경찰청에서 여자형사기동대를 창설할 때 선발되어, 23세에 한국 경찰 역사상 첫 강력계 여형사가 되었다. 경찰이 된 뒤 익힌 수준급의 유도, 태권도, 검도 솜씨로 사람들을 압도하며 출중한 검거 실적을 쌓아갔다. 순경에서 경위까지 9년 만에 초고속 승진을 했다. 청송교도소 출신 납치범을 검거하며 경사를 달았고, 탈옥수 신창원을 잡는 데 기여한 공로로 경위가 되며 특진을 거듭했다.

2000년 최초로 여성 강력반장이 되었고, 2002년 양천경찰서 최초의 여성 마약범죄수사팀장으로 임명되었다. 2007년부터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계 행동과학(프로파일링)팀장과 화재감식팀장을 겸임하며 숭례문 방화사건 현장의 화재감식을 총괄지휘했다. 2010년에는 마포경찰서 강력계장으로 발령받아 만삭 의사 부인 살인사건, 한강변 여중생 살인사건 등을 해결했다. 이어서 2011년 강남경찰서 최초의 여성 강력계장을 맡고 본인이 세운 ‘최초’의 기록들을 스스로 갈아치우며 여형사의 새로운 역사를 써나간다.

드라마 〈시그널〉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 〈괴물〉 〈히트〉 〈미세스 캅〉 〈너희들은 포위됐다〉, 영화 〈조폭 마누라〉 〈감시자들〉 〈하울링〉 등 수많은 작품에서 형사의 현장과 사건에 대해 자문을 맡고, 극의 모티브가 되었다. 2021년 서귀포경찰서 형사과장을 끝으로 명예퇴직했다. 언론은 그를 ‘여경의 전설’이라 칭했다. 현재 제주에서 후배 여형사와 한 마당에 각자의 집을 짓고서, 마당 한쪽에는 인간의 선악과 마음에 대한 책들을 가득 채운 서재 겸 책방을 열어둔 채 살고 있다. 두 여형사의 집에 온 사람들은 고단하고 복잡한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으며 울고 읽고 쉬어간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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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퉁이 집
이영희 지음 / 델피노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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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그 모퉁이 집』은 장르 소설로 분류되지만 역사 소설에 가깝다. 표제어로 쓰인 '그 모퉁이 집'은 일제 강점기 불에 타 80년째 버려진 폐가이다. 어느 날 신비한 분위기의 두 남자가 이사를 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매일 아침 꽃집에 3만 원짜리 꽃다발을 주문하고, 꽃잎 향과 맛이 나는 쿠키를 구워내는 남자들. 꽃집의 딸이자 아쟁 연주자인 ‘한마디’가 그 모퉁이 집에 꽃 배달을 간다. 저자 이영희는 일제 강점기 때로 모퉁이 집의 기원을 끌어올린다. 일제 강점기-여성(소녀)-위안부란 상상적 공식을 끌어내기에 충분한 소재의 연결이다. 주인공 한마디는 어릴 적 기억을 잃었지만 신비한 능력을 지녔다. 독특한 인물 설정으로 독자들을 신비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솜씨는 중견 작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특히 저자는 꽃 전문가로서 다양한 꽃들에 대한 해박한 지식에 역사적 상상력을 보태어 새로운 장르인 〈플라워 판타지〉를 선보이며 독자들에게 빠져나올 수 없는 재미를 선사한다.

한마디가 매일 아침 꽃다발을 들고 찾아가는 모퉁이 집에서는 두 남자가 살며, 꽃잎 향과 맛이 나는 쿠키를 구워낸다. 생계인 셈이다. 갖가지 꽃들이 만발한 그 모퉁이 집에 홀려 이야기 전개를 따라가다 보면 묘하게 비밀로 가득한 집의 베일이 차츰 벗겨진다. 저자는 마치 한 잎 한 잎 꽃잎을 떼어내듯 특유의 몽환적이고 섬세한 문장들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시공간의 배경도 80년을 사이에 두고 과거와 현재, 현실과 환상을 종횡무진 오고 간다. 결코 가볍지 않은 소재를 매력적 인물들을 통해 씨줄과 날줄로 엮듯 입체적으로 그려내며 환상적인 세계를 독자들을 안내한다. 이 책 『그 모퉁이 집』은 책을 읽는 내내 향긋한 꽃 향기에 휩싸인 듯한 환상의 세계로 안내할 것이다.

 


 

"1944년 12월, 짓밟혀 누운 경성 위로 눈발이 흩날렸다. 차디찬 싸리꽃 송이들이 목조건물을 스쳐 날리는 밤 풍경은 동화 같았다. 하지만 상복을 입은 나라는 눈이 동화와 직결된다는 것이 서글펐다. 혀가 잘려 버린 말(語)이나 겁탈을 당한 인간의 존엄은 서글프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p.11)

소설의 도입 부분이다. 80년 전 우리나라 서울의 모습을 설명한다. 눈발이 날리지만 싸리꽃이 등장하며 분위기를 완화시킨다. 그러나 '혀가 잘리고', 일본 제국주의에 짓밟힌 서울이 온전한 모습일 리 없다. 1944년 12월의 겨울이면 사실 제 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로 치달을 때다. 이미 독일군은 항복 직전이고 일본 역시 오키나와를 넘어 일본 본토에 폭격을 당하는 파국 직전이다. 그 서울의 한 기생집에서 조선 총독부 관리들이 〈매화실〉에 앉아 술자리를 갖고 있다. 매화실은 이 기생집에서 최고의 예인들이 매일 공연을 펼치는 곳이다. 그들은 이미 거나하게 술기운이 도는 상태다. 예인이 등장한다. 아쟁을 연주하는 악사다. 여인은 고개를 숙였지만 눈썹부터 콧날을 지나 입술까지 흐르는 선이 참으로 처연한 미색이라고 저자는 표현하고 있다.

여인은 곧바로 연주를 시작하지 않았다. 대신 여전히 열려있던 방문으로 창포 꽃이 심긴 토분 몇 개가 따라 들어왔다. 봉오리만 맺힌 꽃대들이었다. 비록 꽃을 피우지는 않았지만 12월에 창포 꽃을 본다는 것 자체가 기이하였다. 이어 활대를 잡아 쥐는 여인의 손가락은 창포 꽃대처럼 길고도 희었다. 그제야 관리들과 윤송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이채(異彩)란 낯선 단어지만 큰 뜻은 없다. 사전식 풀이로는 이상한 광채나 색다른 빛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겨울에 등장하는 창포 꽃과 예인으로 등장해 연주하는 악기가 아쟁 등에 관심이 쏠린다. 윤송이란 인물이 등장하지만 아직은 총독부 관리들의 뒷바라지를 하는 조선인 하급 관리쯤으로 생각해도 괜찮을 듯하다.

 


 

책을 펴낸 출판사 측에 따르면 꽃마다 창조주의 메시지가 담겨있다는 뜻으로 모든 꽃은 자기에게 어울리는 각각의 꽃말을 가지고 있다. 빅토리아 시대에는 직접 말이나 편지로 전하는 것보다 하고 싶은 말의 뜻을 가진 꽃을 상대에게 보내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하니 하루 이틀 된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장미의 꽃말은 낭만적인 사랑, 해바라기의 꽃말은 숭배이다. 예로부터 꽃은 각 민족·종교·민속 등에서 여러 가지 상징·표장(標章)으로 사용되었다. 꽃의 특징·성질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말인데 이 풍습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페르시아·아라비아 등의 풍습을 받아들였다는 설(說), 이것을 영국에 전했다는 설 등이 있으나 유행된 것은 19세기 후반의 일이라고 두산백과는 밝히고 있다. 많이 아는 꽃말로 장미는 '사랑' '아름다움', 백합은 '순결', 제비꽃은 '겸손', 월계수는 '영광', 올리브는 '평화' 등이 있다. 이들 꽃은 특질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로 붙인 말이다. 앞서 언급한 노랑꽃창포의 꽃말은 '우아한 심정', '당신을 믿는다', '그대는 정숙하다'라고 한다. 이 책의 뒷 부분에 「그 이름 은. 조.」란 일곱 번째 장(章)에서 '노랑창포꽃' 이야기를 다룬다.

 

“우쨌든 그 천녀님은 그대로 마을에 머물게 댔는데, 이 천녀님이 참말 하늘에서 온 사람인 게, 꽃을 피우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누만.”

“꽃을 피우는 재주요?”

“암. 그 천녀가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믄 그라고 꽃들이 피어났다고 하제.”(p.283)

 


 

이 소설은 이런 꽃말처럼 아름다우면서도 묘하게 신비로운 속성을 지니고 있는 ‘꽃’들을 소재로 펼쳐지는 판타지라 더욱 아름답고 흥미롭다. 버튼 하나면 자극적인 영상물들이 주르륵 쏟아지는 요즘 같은 때에 이렇게 잔잔하고 신비하리만큼 환상적인 이야기는 어딘지 모르게 드물고 귀하다. 물론 주인공인 ‘한마디’가 국악원의 아쟁 연주자인 설정도 예사롭지 않다. 다른 악기들과 달리 아쟁 연주가 갖는 처연한 느낌은 이 작품의 또 다른 배경인 일제 강점기를 넘나들며 이 작품의 분위기를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이 작품에서 한마디가 다루는 아쟁(牙箏)이란 악기는 아시는 독자들이 많겠지만 아시아 금쟁(琴箏, 치터)류 악기 중 유일한 찰현(擦絃 또는 궁현弓絃, 줄비빔)악기로, 안족(雁足, 기러기발) 위에 음높이 순으로 얹은 7~10개의 줄을 막대기나 말총활로 문질러 연주한다. 정악에 쓰이는 대아쟁과 민속악용 소아쟁(산조아쟁) 외에, 창작곡 연주를 위해 개량된 여러 종류의 크고 작은 아쟁이 있다고 한다. 대아쟁(大牙箏)은 한국 전통 선율악기 중에서 음역이 가장 낮은 악기이며, 현악기 중 크기가 가장 큰 악기이기도 하다. 아쟁은 현악기이지만, 전통음악에서 아쟁 파트는 해금과 함께 흔히 관악으로 취급한다. 이는 전통음악에서 현악기 하면 주로 거문고나 가야금처럼 줄을 뜯어 연주하는 치터(flucked zither)를 가리키고, 아쟁이나 해금과 같은 찰현악기는 지속음을 낼 수 있다는 점에서 음악 특성이 관악기와 유사하다 보기 때문이라고 두산백과는 전하고 있다.

 

"흰 장미를 닮은 여자가 사의 찬미를 아쟁의 선율로 만들어 흘려보내는 밤. 주변을 둘러싼 모든 꽃들이, 나무들이, 그 남자가, 그 선율 때문에 숨죽여 흐느끼는 밤. 누군가는 덜컹 박자를 놓치고 누군가의 꽃마차는 덜컹 바퀴가 걸렸다."(p.157)

 

 

소설을 읽다 보면 백과사전을 찾아 확인하고 싶은 부분이 자주 등장한다. 꽃은 물론 악기나 일제 강점기 막바지의 모습 등이 자주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귀찮지 않다. 모르는 것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읽는 재미가 한 번에 죽 읽어내리는 소설보다 더하다. 특히 저자의 꽃에 대한 해박한 저자의 지식은 한 번 읽고 지나쳐 버리기 아까운 생각이 드는 부분이 많다. 또 일제 강점기에 대한 인식과 현재의 우리나라로 80년을 뛰어넘어 사건을 전개시키는 저자의 상상력과 그것을 그려내는 필치는 가히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누군가 벚꽃이 눈처럼 흩날리는 순간을 글로 옮긴다면 이런 느낌일까? 주인공 ‘한마디’가 공연을 마치고 돌아오다 모퉁이 집의 새 주인 ‘모도유’를 만나고 마음을 여는 과정은 마치 꽃잎을 하나씩 세는 듯 섬세하게 그려지고 있다. 저자는 섬세하고도 가녀린 그렇지만 강인한 한 떨기 꽃과 같은 문장으로 한마디를 비롯한 인물들을 그려내는 솜씨가 탁월하게 느껴진다.

저자는 이 책을 읽으면서 아쟁 산조를 함께 들어보기를 권한다. 지극히 아름다우면서도 처연하고 구슬픈 아쟁의 선율은 한 여성의 기구하고도 애절한 삶을 넘어 독자가 1945년 한복판에 있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한마디’가 연주하는 아쟁의 선율 〈사의 찬미〉에 깨어나는 80여 년 전 그 사건은 대체 무엇일까? 이 소설은 구슬프고 아련하게 귓가에 울리는 아쟁 연주와 주위를 가득 채우는 창포꽃 향기의 몽환 속으로 독자들에게 색다른 감동을 전한다. 누구든 모퉁이 집에 발을 들이는 순간, 꽃을 소재로 한 역사소설 ‘플라워 판타지’의 매력에 빠져들 수밖에 없을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아입니더. 지는 나리께 목숨을 끊어 바쳐야 할 죄인입니더. 그래도 우짜믄 죄값은 쪼끔은 치렀십니더. 지가, 이 한 많은 목숨이, 아들 내외, 손자 내외 다 먼저 잡아묵고 이리 추악하게 혼자 늙었십니더.”

“그리 말씀하시 마세요. 저 또한 아들 내외를 한날한시에 사고로 잃었습니다. 그걸 어찌 누군가의 죗값이라고 하겠습니까? 그저 인생의 우거진 수풀 속에 놓여 있던 덫에 걸렸던 것뿐이지요.”(p.323)

 

〈어제도 말씀드렸죠? 저는 다 감사한 일뿐이라고요. 해서 더 이상의 바람은 제게 없어요.〉

”그 바람이 어디 너의 언덕에만 불고 있었더냐? 나는? 도유는? 마디 양은? 우리의 언덕에서는 여전히 그치지 않은 이 바람은 이제 누구를 향해 불어야 하는 건데?”(p.346)

 

저자 : 이영희

 

경남 진주시 하대동 거주.

꽃을 사랑해서 꽃으로 글을 쓰는 글쟁이.

<영남문학> 중편소설 등단.

통일부 통일창작동화 수상.

대한민국 e작가상 수상.

제 7회 진주시 북 페스티벌 초청 강연.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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