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지음, 안정효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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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utopia) "이상향(理想鄕), 이상적인 나라"를 뜻한다. 영국 작가이자 정치가인 토머스 모어가 『유토피아(Utopia)』에서 사용한 말이다. 그리스어에서 따 만든 유토피아는 'not a place', 즉 'nowhere'라는 뜻이다.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는 뜻이다. 유토피아의 반대 개념인 암흑향(暗黑鄕)은 'dystopia(디스토피아)'다. '놀라운 신세계(Brave New World'(멋진 신세계)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폭풍』에 나오는 말이다. 1932년 영국 작가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 1894~1963)가 자신의 소설 제목으로 삼았다. 이 책 『멋진 신세계』의 원제이다. 이 소설은 현대의 기술 진보가 악몽과 같은 유토피아, 즉 디스토피아를 낳는 걸 그렸다. 헉슬리가 자신이 여행했던 미국을 염두에 두고 쓴 이 소설은 좌우를 막론하고 당시 풍미하던 유토피아에 대한 기대와 환상에 정면 도전했다. 이런 까닭에 출간 당시에는 대부분 혹평 일색이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훨씬 긍정적인 평가를 받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소설 발표 당시 미국은 1차 세계대전 특수로 풍요롭지만 도덕적으로 타락한 상태라고 한다. 흥청망청의 사회 분위기를 당시의 매체는 잘 남기고 있다. 오래 갈 것 같은 풍요는 1929년 경제 대공황을 맞이하면서 하루아침에 디스토피아로 변한다. 대공황기의 미국 사회를 신문 기사부터 문학작품, 영화 등 수많은 매체가 다루었지만 그야말로 실업 상태의 노동자들이 거리에 넘쳐나고 폭력 조직 '마피아'는 금주령을 이용해 밀주를 만들어 팖으로써 돈벌이를 하고 지하 세계를 장악하는 등 혼란기가 지속된다. 미국 사회는 혼란 속에서 폭력과 매춘 등이 성행하고 품격과 정의로운 길보다는 타락과 불법이 판치는 일순간에 디스토피아로 변하고 말았다. 이 예언적 소설 『멋진 신세계』는 20세기에 미래를 가장 깊이 있고 날카롭게 파헤친 작품 중의 하나라고 '세터데이 리뷰〈Saturday Review〉'는 평가했다. 현대식 에덴동산에서의 삶을 그린 이 이야기는 자유와 도덕 개념이 낡은 넝마가 되어버린 현대 문명사회를 회화적으로 묘사하여 그 속에 내포된 위험을 경고한다.

 


 

뼈아프게 비판하고 고결하게 지키려는 헉슬리의 '인간 선언'에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귀 기울여햐 한다. 유토피아를 그린 많은 작가와 사상가들은 "유토피아는 현실에서는 없는 간절히 원하는 이상향"일 뿐이라고 말한다. 과학 기술의 발전과 인간 지능은 21세기를 맞이하고서도 희망만 이야기하지 암울한 미래를 지적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현실적으로 당면한 문제를 외면한 채 말이다. 공산주의는 붕괴되었을지라도 자본주의의 승리라고 말하지 못한 이유는 일부 공산주의 국가가 잔존하고 있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고 독자는 생각한다. 빈부 격차 심화 등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방안조차 제대로 내놓지 못하고 있다. 눈앞의 혜택과 쾌락에만 시선이 닿아 있는 것이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표제어 자체가 패러독스다. 쉽게 표현하자면 반어법이란 것이다. 이 소설을 한 번 읽어보면 금세 알 수 있다.

이 소설은 'A. F.' 즉 헨리 포드(자동차왕)가 T형 자동차를 대량으로 생산해낸 해를 기원으로 삼은 시대의 세계국(World State)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소재로 한다. 이 세계국 사람들은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까지 다섯 계급으로 나뉘어, 필요에 따라 ‘맞춤형’으로 대량 생산된다. 이들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수면 학습과 전기 충격을 통한 세뇌로 각자의 신분에 만족하며 살아간다. 그들은 정해진 노동 시간을 끝내면 자극적이고 단순한 오락들로 시간을 보내며, 항상 소마(soma)라는 약을 통해 환각과 쾌락을 느낀다. 누구도 불만이 없고, 만인은 만인의 소유이며, 심지어 죽음까지도 무의미한 세계. 이 완벽한 유토피아에서는 모두가 다 만족스럽고 행복하다. 과연 그럴까?

그러던 어느 날, 신세계와 격리된 보호 구역에서 살고 있던 야만인 존이 이곳으로 초대된다. 존은 젊고 아름다운 사람들과 처음 보는 놀라운 과학 문명에 감탄하지만, 자유를 빼앗긴 채 아무 생각 없이 순응하며 살아가는 거짓된 행복에 점차 환멸을 느낀다. 결국 야만인 존은 고통과 불행을 달라고 부르짖고는 홀로 외딴 등대로 간다. 그곳에서 과연 그는 갈망하던 원시적인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인가.

 

 

간단하고 단순한 줄거리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이 소설에는 많은 과학적 지식이 포함되어 있다. 사실 과학이 인간 문명 발달의 결정적 힘이라고 믿고 살아온 사람들이 현대인 아닌가. 당연히 과학은 인간의 노동을 덜어주고, 풍요를 가져다 주었다. 과학자들은 현대 문명을 가져온 결정적 기여자들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전쟁에서 대량 살상 무기를 만들어 한 순간에 수십만 명을 죽이는 위력도 갖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지구 자체가 병들어 가고 있음을 밝히는 데에도 과학은 결정적 기여를 했다. 어떻게 지구를 되살리는 게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아직 연구가 안 된 듯하다. 그러나 가까운 미래에 지구는 병들어 가고, 속도마저 가속도가 붙은 상태로 빠르게 최악의 상태로 가고 있는 것을 많은 과학자들이 밝혀내고 있다. 지난 세기, 어쩌면 그 전부터 지구 오염이 불러올 폐해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지만, 눈앞의 풍요와 쾌락, 안전만 추구할 뿐 기후 변화 등 환경 변화에 대해서는 애써 외면하는 듯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지구는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면 인류 번영은커녕 존속마저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

암울한 미래 세계를 그린 뛰어난 현대 고전으로 평가받은 『멋진 신세계』는 제목과는 반대의 개념인 디스토피아 세계를 그리고 있다. 역설적으로 우리의 삶의 방식은 뭔가 잘못 됐다는 점을 부각한 것이다. 물론 우리의 현재가 소설 내용과 똑같은 것은 아니다. 헉슬리는 영국의 명문 집안 출신의 작가로서 광범위한 지식뿐 아니라 예리한 지성과 우아한 문체, 그리고 때로는 냉소적인 유머 감각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풍요와 쾌락을 추구한다면 마음껏 즐거운 인생을 살 수도 있는 입장이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가장 풍요롭고 거침없이 발전하고 있는 미국으로 여행을 갔다. 그러나 미국 사회에서 그가 보고 느낀 것은 '신세계'가 아닌 암울한 미래였을까? 소설 속에서는 정확한 시점을 명시하지는 않지만 약 100년 후의,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을 전망하고 그리고 있다. 이 소설은 미래를 가장 깊이 있고 날카롭게 파헤친 작품 중의 하나로 평가받는다.

 


 

소설 속의 『멋진 신세계』는 과학이 최고도로 발달한 사회다. 사회의 모든 면을 관리·지배하고, 인간의 출생과 자유까지 통제하는 미래 문명 세계다. 요즘 대세인 SF 소설의 성격이다. 인간성을 상실한 미래 세계를 신랄하게 풍자하는 한편, 신의 영역을 넘보는 인간의 오만함을 경고하고 비판한다. 이 소설은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1984』와 마찬가지로 충격적인 미래 예언을 통해 인간의 자유와 도덕성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미 『멋진 신세계』에서 인간이 구성해놓은 미래의 전주곡이 진행되는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풍자적이면서도 냉혹한 미래상이 앞으로 얼마나 현실로서 대두될지 사뭇 관심거리일 수밖에 없다.

헉슬리가 그리는 이 소름 끼치는 미래상은 더 이상 공상소설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성이 맞게 될 위기를 다루는, 인간을 소재로 삼은 작품이다. 소설 『멋진 신세계』에서는 전체주의 국가가 인간을 파멸시키는 참혹한 과정이 생생하게 드러나며 유토피아가 곧 파멸이라는 역설이 두드러진다. 또 문명의 발달과 인간의 몰락이라는 반비례 원칙을 제시한다. 지금,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에서 설정해놓은 악몽이 빠른 속도로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현대 과학 문명의 발달과 함께 점차 개성과 인격을 상실해가는 오늘날, 지금 세태의 종착지는 과연 어디인가.

저자 헉슬리는 20페이지가 넘는 긴 〈서문〉을 통해 인류가 종말을 향해 가는 현실을 결코 인류가 바라는 방향은 아니라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음을 내보인다. 물질적이고 외적인 세계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영혼과 육체 속에서 이루어지는 '혁명적인 혁명'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때마침 혁명적인 시기에 살았던 터라 마르키스 드 사드(Marquis de Sade)가 그의 독특한 광증의 양상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이 혁명의 이론을 동원했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할 따름이다. 로베스피에르는 가장 피상적인 종류의 혁명인 정치 혁명을 달성했다. 발뵈프는 조금 더 깊이 들어가서 경제적인 혁명을 달성했다. 사드는 자신을 단순히 정치와 경제를 초월한 참된 혁명적인 혁명의 사도라고 자처했다."(p.16~17)

 


 

이 소설 속에는 가족이라는 유대가 사라진 세계가 있다. 죽음까지도 익숙해지도록 길들이기 훈련을 받는 세상에서 인간은 최소한의 존엄성과 인간적 가치, 그리고 스스로 생각할 자유마저 박탈당한다. 이곳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까지 다섯 계급으로 나뉘어, 인류를 ‘맞춤형’으로 대량 생산한다. 하나의 난자에서 수십 명의 일란성 쌍둥이들이 태어나고, 이들은 끝없이 반복되는 수면 학습과 세뇌를 통해 어떠한 의문도 갖지 않고 정해진 운명에 순응한다. 노화도 겪지 않고, 책임도 도덕도 없이 문란한 성관계를 맺고, 정신적인 외로움도 느끼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쾌락과 만족감뿐이다. 정해진 노동 시간 이외에는 단순한 자극으로만 이루어진 오락들로 꽉 짜여 있으며, 혹 나쁜 기분이 들거나 고통스러운 일을 겪으면 항상 소마(soma)라는 가상의 약을 통해 즉각적인 쾌감을 경험한다. 마약과도 같은 소마는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하고, 사고할 능력을 빼앗는다. 때문에 이 완벽한 유토피아에서는 누구나 다 행복하다. 이런 세상을 원하지는 않았다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사실이다.

저자 헉슬리는 디스토피아라고 해야 어울릴 듯한 사회에서 드디어 탈출구를 제시한다. 어느 날, 신세계와 격리된 원시 지역(Reservation)에서 살고 있던 ‘야만인’ 존이 우연히 이곳에 초대받는다. 그는 처음 보는 고도의 과학 문명과 모든 것이 완벽하게 설계된 세계에 감탄하지만, 소수의 지배자들에게 통제받으며 조작된 행복에 길들여진 ‘백치’와도 같은 사람들의 모습에 점차 환멸을 느낀다. 결국 그는 문명에 절망하고 좌절한 채 다시 원시 지역으로 떠나간다.

 


 

“하지만 난 안락함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신을 원하고, 시를 원하고, 참된 위험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고, 그리고 선을 원합니다. 나는 죄악을 원합니다.”

“사실상 당신은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는 셈이군요.” 무스타파 몬드가 말했다.

야만인이 도전적으로 말했다. “나는 불행해질 권리를 주장하겠어요.”

“늙고 추악해지고 성 불능이 되는 권리와 매독과 암에 시달리는 권리와 먹을 것이 너무 없어서 고생하는 권리와 이(?)투성이가 되는 권리와 내일은 어떻게 될지 끊임없이 걱정하면서 살아갈 권리와 장티푸스를 앓을 권리와 온갖 종류의 형언할 수 없는 고통으로 괴로워할 권리는 물론이겠고요.”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나는 그런 것들을 모두 요구합니다.” 마침내 야만인이 말했다.(p.362~363)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에서 야만인 청년 존을 통해 두 세계, 즉 유토피아 세계와 원시 세계를 비교함으로써, 우리의 현재와 미래상을 병립시켜 보여준다. 오로지 최대의 능률과 발전만을 목표로 삼는 현대 과학 문명에 대해 신랄한 비판과 함께, 곧 도래할 섬뜩한 미래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낸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에게는 무엇이 참된 이상향이며, 우리들은 그곳에 다다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그 해답을 알아내는 것은 우리에게 여전히 중요한 숙제로 남아 있다.

역자 안정효는 "이 소설은 매끈하게 다듬어진 이상향이라는 부자연스러운 세계에 자연인을 투입시켜 인간의 미래를 이해하려는 하나의 예언적인 시도로서, 조지 오웰의 『1984』나 마찬가지로 미래의 공포라는 충격을 제시하고, 그러한 예언을 통해 인간의 자유와 도덕성을 주장하는 선언서 노릇을 한다."고 「현재를 예언하는 소설」이란 제목의 〈옮긴이의 말〉을 남겼다. 우리 사는 세상의 미래를 알고 싶다면, 현재의 지구 환경에 불안을 느끼는 독자들은 당연히 이 책을 읽을 것을 먼저 읽은 독자로서 추천한다.

 


 

저자 :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

 

광범위한 지식뿐 아니라 뛰어나고도 예리한 지성과 우아한 문체에 때로는 오만하고 냉소적인 유머 감각으로 유명한 영국 출신의 소설가이자 비평가. 1894년 7월 26일 서리 지방 고달밍에서 토머스 헉슬리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이튼 칼리지와 옥스퍼드 대학교를 졸업했다. 지적 정보와 함께 재치와 풍자로 가득 찬 다양한 방면의 저술 활동으로 유명한 헉슬리는 20세기 관념소설의 큰 줄기를 이룬 대표적 작가다. 소설가로서 널리 알려지기는 했으나 그 외에도 수필, 전기, 희곡, 시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멋진 신세계』는 그가 1932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한 미래 과학 문명의 세계를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야만인 청년을 통해 두 세계, 즉 유토피아 세계와 원시적인 세계를 제시한 작품으로 문명 비판적 풍자와 도덕적 교훈이 잘 맞물려 현대 문명사회를 희화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진보주의에 대한 위험을 경고하고 있다. 1958년, 『멋진 신세계』의 예언적 주제들을 심도 있게 검토한 『다시 찾아본 멋진 신세계』를 발표했다. 활동 후반기에는 힌두 철학과 신비주의에 깊이 끌렸으며 이 경향이 작품들에 반영되었다. 미국에 정착해서 살다가 1963년 11월 22일 캘리포니아에서 사망했다.

1916년 시집 『불타는 수레바퀴』를 출간한 이래 몇 권의 시집을 더 냈으나, 1921년 『크롬 옐로우』가 인정을 받은 후부터 일생동안 소설 창작에 심혈을 기울이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그의 대표작이라고 여겨지는 『연애대위법』(1928)은 다양한 1920년대 지식인들을 풍자적으로 묘사한 작품으로, 이 소설로 그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작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이 밖에도 과학문명에 지배되어 가는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식이 돋보이는 『멋진 신세계』(1932), 열여덟 살 때 완전히 실명했다가 차차 시력을 회복한 경험을 바탕으로 평화운동을 추구하는 작가 자신을 그린 『가자에서 눈이 멀어』(1936)를 발표했다. 이는 헉슬리의 ‘후기파’ 성향을 지닌 첫 소설로서, 그의 작품 세계에서 분기점 노릇을 한다. 또한 폭력의 부정을 역설한 『목적과 수단』(1937), 제3차 세계대전을 가상해서 쓴 『원숭이와 본질』(1948) 등의 저서가 있다.

또 1945년 《영원의 철학》을 통해 그때까지 서구 지성사에 전해오던 ‘영원의 철학’이라는 개념을 핵심적으로 통합하여 종교와 영성에 대한 이해를 혁명적으로 바꿔놓았다. 주요작품으로는 『어릿광대의 춤(Antic Hay)』, 『하찮은 이야기(Those Barren Leaves)』, 『연애대위법(Point Counter Point)』,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 『가자에서 눈이 멀어(Eyeless in Gaza)』, 『목적과 수단(Ends and Means)』, 『원숭이와 본질(Ape and Essence)』, 『루당의 악마(The Devils of Loudun)』, 『천재와 여신(The Genius and the Goddess)』, 『아일랜드(Island)』 등이 있다.

 

역자 : 안정효(AHN, JUNG-HYO,安正孝)

 

서강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코리아헤럴드』와 『코리아타임스』 기자를 거쳐 한국브리태니커 편집부장을 지냈다. 1975년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시작으로 130여 권을 번역했고, 1982년 존 업다이크의 『토끼는 부자다』로 제1회 한국번역문학상을 받았다. 1977년 수필 『한 마리의 소시민』을 발표했고, 1985년 장편소설 『하얀 전쟁』으로 등단해,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 『가을바다 사람들』, 『은마는 오지 않는다』 등을 선보였다. 영문판 『하얀 전쟁』과 『은마는 오지 않는다』가 각각 1989년과 1990년 『뉴욕 타임스』 추천 도서로 선정됐고, 그 외에 덴마크, 일본, 독일에서도 번역 출간됐다. 1992년 『악부전』으로 김유정 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가 겸 번역가 안정효는 2023년 향년 82세로 별세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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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꼬리의 전설
배상민 지음 / 북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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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아홉 꼬리의 전설』은 추리·미스터리 소설로 탁월한 역량을 보여준 배상민 작가의 네 번째 장편소설이다. 표제어에서 드러나듯이 옛날 흑백 TV 시절 브라운관 앞으로 수많은 시청자들을 끌어모았던 〈전설의 고향〉이 생각나게 한다. 극장의 영화팬들을 '안방극장'인 TV가 빼앗아갔다고 소문이 날 정도로 당시 TV에서의 드라마는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산업화를 막 시작하던 시절이라 주머니가 얄팍한 월급쟁이들의 여가 활동으로는 영화가 가장 대표적이었다. TV의 등장으로 영화는 일시적으로 타격을 입었을 것이라는 기록이나 각종 보도를 통해 이미 확인된 사실이다. 〈전설의 고향〉은 말 그대로 구전돼 오던 각 지역의 '전설' 중에서 TV의 드라마로 제작해 보여준 프로그램이었다. 우리의 정서와 잘 맞아서인지 굉장한 인기 프로그램으로 장수를 누렸다고 들은 바 있다. 그때는 주제와 소재를 중심으로 방영할 내용에 초점이 맞춰졌지만, 부풀려지거나 전해져오는 동안 재미를 더하기 위해 과장도, 왜곡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수록 독자나 시청자들은 더 흥미를 느낄 수 있기에 TV 제작 프로그램 소재로 채택되고 인기가 높을 수밖에 없었을 터다.

사실 소문이나 전설은 사회 비판적 성격이 강하지 않으면 오랫동안 인구에 회자되지 않는다. 더욱이 수천 년 동안 폐쇄적 사회에서 피지배자들이 겪는 각종 설움이나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많은 이야기들이 민간에서 나돌기 마련이다. 사회의 온갖 소문은 전설이 되고, 내용은 오롯이 피지배 계급의 애환이 담겨 있다. '전설'은 이런 태생적 이유로 민중들의 불만 해소로도 좋은 줄거리를 갖고 있는 이야기가 많다. 저자 배상민이 오늘날 수사극이나 미스터리 소설의 소재로 '전설'을 주목한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저자가 특히 관심을 갖고 있는 장르에 잘 맞아서 선정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독자는 생각한다.

 


 

이 책은 당시 소문으로, 전설로 내려오던 이야기를 탐정수사극으로 바꿔 소설로 썼다. 배상민 작가가 소문과 전설은 사실 확인이 잘 안 되지만 당시의 사회 상을 빗대보면 많은 은유가 숨어 있다. 교훈적이라는 단어에 일괄 흡수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탐관오리의 횡포, 지배 계급의 무자비한 행위로 입은 피햬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점에서 사회 풍자나 사회 비판의 성격이 강할 것이다. 추리·미스터리 작가의 눈으로서는 무척 매력적인 소재가 아닐 수 없다. 특히 드라마 제작사 기획 PD로 일하다가 제1회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저자에게 전설로 내려오던 이야기 중 몇 가지를 엮어 한 편의 완전한 소설로 엮어냈다. 저자는 『조공원정대』 『콩고, 콩고』 『페이크 픽션』 『복수를 합시다』 등을 통해 유머러스하면서도 현실을 비트는 통렬함으로, 현실과 서사의 틈 사이를 날카롭게 파고들며 우리에게 현실의 문제를 환기시켜 준 작가로 알려져 있다.

이 책에는 ‘소문의 시대’였던 고려 말을 배경으로, 혼란의 시기에 더욱 무성하게 가지를 뻗는 흉흉한 ‘소문’과 기이한 ‘이야기’를 쫓는 두 탐정 이야기로 써냈다. 문학적 분류로 이런 명칭이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미스터리 수사극'을 선보인다. 아홉 꼬리를 가진 ‘구미호’, 고을 감무의 목숨을 노리는 ‘처녀 귀신’, 쇠를 먹어치우는 ‘불가살이’ 등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소재들이다. 뿐만 아니라 다리가 세 개 달린 영물 ‘삼족구’ 등 형체가 없는 ‘소문’이 스스로 살을 붙이고 뼈대를 갖춰 하나의 온전한 ‘이야기’가 되어가는 과정을 저자는 추적하고 있다. 이야기가 어떻게 탄생하고 소멸하는지 그 근원 속으로 파고들어 사건 해결의 탐정 역할로 두 사람의 독창적인 인물을 내세운다. 저자는 '에필로그'인 〈작가의 말〉에서 좀더 구체적인 소개를 곁들인다. "한량에다 겁도 많지만 잔머리가 잘 돌아가는 선비가 떠오른다. 하지만 그 혼자서는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다. 전장에서 반평생을 보낸 우직한 무사가 그의 곁에 있어주면 좋을 것 같았다. 나는 선비에게 정덕문이라는 이름을, 무사에게 금행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p.321~322)

 


 

저자는 집필 이유를 "기이하고, 잔혹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밝힌다. 참혹하게 죽은 시신이 보인다. 시신은 여자고, 나이는 열일곱 살쯤. 눈은 뜨고 있었고, 배가 갈려서 창자가 튀어나와 있다." 저자의 말은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잔혹한 사건의 피해자로부터 시선을 고정시키고 시대와 사회상, 등장인물의 성격, 사건의 개요, 사건 해결 과정 등을 마치 저자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 요즘 신문 기자가 사건을 추적해 들어가듯 객관적인 시선으로 그리고 있다. 그래서 선택된 시대 배경은 고려말이다. 피해자인 시신의 옷차림으로 보아 고려시대 사람이다. 고려말은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으로 목숨값이 참으로 가벼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눈을 뜨고도 믿지 못할 기이한 일이 많이 벌어질 법하다.

책의 뒷 부분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사실 책의 시작 부분에 해당되기도 한다. 책의 첫 문장은 불길하다는 까마귀 떼의 울음소리다.

"까악 까악."

아침부터 온 산이 울리도록 까마귀 떼가 어지러이 울어댔다. 밤사이 변고가 일어났다는 것을 직감했다.

"시신은 참혹했다. 배는 갈라져 있었고, 위장, 창자, 자궁같이 배 속에 있어야 할 장기들이 시체 주변에 널려 있었다. 손과 발이 묶인 처녀는 눈을 뜨고 죽어 있었다. 어쩌면 살아 있는 채로 저리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지금껏 봐왔던 시신보다 더 끔찍하여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p. 8) 저자는 사건 현장을 서두에 두었다. 요즘 미스터리 소설의 시작 부분이 그렇듯 참혹한 사건 현장을, 그것도 '엽기적인' 현장을 그려내고 있다. 엽기적인 것이라는 것은 범행이 더 잔혹하다는 다른 표현이다.

고려 말이라는 시대적 배경에 대해 저자는 혼란한 때 소문은 더 빨리 퍼진다는 점을 간파한 것이다. "고려 말은 소문의 시대였다. 밖으로는 왜구의 침입이 끊이지 않았고, 안으로는 이임임, 임견미 같은 권신들이 득세하여 활개를 치는 통해 조정이 어지러웠다. 나라 꼴이 이러하니 무수한 소문이 떠돌 수밖에 없었는데, 원귀와 괴물에 관한 것이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자는 괴물에 대한 소문을 낳았다."

 

 

‘말(소문)’은 한자리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세상을 축으로 하여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옮겨 다니며 그 형태를 수시로 바꾼다. 특히 세상이 혼란할수록 ‘소문’과 ‘이야기’는 사람들의 ‘공포’를 자양분 삼아 활기를 띠기 마련이다. 이 책은 나라 안팎이 소란스러웠던 고려 말을 배경으로, 고을에서 일어난 연쇄 살인 사건과 그 뒤에 아홉 꼬리처럼 감추어진 소문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책에는 모두 13개의 각기 다른 사건이다. 소문을 추적해 가는 두 주인공이 사건이 일어난 각지를 돌아다니며 '수사'를 펼친다. 가문이 기울어진 후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세상에 떠도는 기이한 이야기를 찾아다니는 주인공 ‘나(정덕문)’는 고을에서 연쇄적으로 일어난 살인 사건에 관심을 갖는다. 소설은 정덕문이 화자(話者)로 스토리를 이끌어 간다. 사건 현장에는 수상한 점이 많다. 잔인하게 살해된 시신이 발견되는 날이면 어김없이 실질적으로 고을을 다스리는 호장가에서 부리는 순라꾼들이 “여우가 나타났다”라고 외치고 다니는 것과 이 사건을 파헤치기만 하면 고을 감무*들이 처녀 귀신에 의해 혼이 빼앗긴 채 목숨을 잃는다는 점은 쉽게 믿을 수 없는 비과학적 이야기지만 오늘날 관점으로 그렇다. 당시에는 소문의 시대답게 살을 붙이고 뼈대를 바꿔도 진실로, 사실로 더욱 확대되어 갔다. 이것에 의문을 품은 ‘나’는 고을에 새로 부임한 감무인 ‘금행’과 함께 고을을 공포로 몰아넣은 흉흉한 소문 뒤에 감춰진 진짜 실체를 찾아 나선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나(정덕문)는 인물 자체가 기이하다. 소문을 소문으로만 듣지 않고 이야기의 진원지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닌다. 당시 한량이라면 귀족 계급의 자녀로서 먹고 살 걱정은 당초 없었던 듯하다. 그러나 공부를 하기 싫어서 안 한다는 점은 어쩔 수 없으나, 이상한 이야기에 매혹되었다고 스스로 혼잣말 하듯 말한다. 남들은 젊은 한때를 탕진한다고 비웃었으나, 자신은 이야기들을 좇느라 등과하여 조정 일을 할 생각조차 없었다."

* 감무 : 고려시대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던 속현 혹은 향, 소, 부곡, 장, 처에 파견되던 하급 지방관. 현령보다 낮은 지위로 임시직이었으나 후에 상설직이 됨.(저자 주)

 


 

정덕문은 사건을 추적할수록, 그 진실에 가까워질수록 이야기 뒤에는 반드시 다른 숨은 의도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참혹한 살인 사건의 진범을 감추려는 눈속임일 수도 있고, 더 많은 권력을 가지려는 탐관오리들의 검은 술수일 수도 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생존본능과도 같은 것일 수도 있다. 그 실체를 따라가던 ‘나’와 ‘금행’은 결국 ‘구미호’도 ‘불가살이’도 ‘삼족구’도 현실을 토양으로, 인간의 욕망을 자양분으로 자라난 것임을 알게 된다.

 

문득 도사의 말이 떠올랐다. 꼬리 아홉 달린 여우만 잡을 수 있다면 무엇이건 삼족구가 될 수 있다고 했던가. 갑자기 이런저런 생각들이 이어졌다. 내가 강태공이 되면 어떨까? 그리고 금행이 여우를 잡는 삼족구가 되면 또 어떨까? 내가 금행을 여우 앞에 데려다 놓을 수만 있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않을까? 생각이 떠오를수록 가슴이 조금씩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어느새 배는 강 건너에 다다랐다. 나는 배에서 내릴까 하다가 다시 뱃머리에 주저앉았다. 어쩌면 새로운 이야기를 하나 더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 때문이었다.(p.151)

 

과연 끔찍한 연쇄 살인 사건의 진범은 누구이며, ‘나’와 ‘금행’은 구미호를 잡는다는 발 세 개 달린 영물인 삼족구가 되어 사건을 해결할 수 있을까. 이 책 『아홉 꼬리의 전설』은 짜임새 있는 미스터리한 사건 전개를 통해 은폐된 진실을 파헤쳐 긴장감을 선사함과 동시에, 인간의 욕망과 현실을 투영하며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점점 몸피를 갖춰나가는”(「작가의 말」 중에서), 스스로 생명력을 가진 이야기의 속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저자는 드라마 제작사 기획 PD와 소설가로 동시 활동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이야기 작법서'를 출간하기도 한 작가의 폭넓은 사유로 구축한 ‘이야기’라는 하나의 거대한 세계라고 할 수 있다. 독자들은 이 세계를 통해 몰입의 재미와 동시에 이야기가 가진 힘을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을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이 책은 모두 13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우가 찢어놓은 시신」, 「불가살이와 가왜」, 「요물과 귀신의 기운」, 「호강가의 잔치」,「처녀 귀신의 소원」, 「미끼가 된 귀신」, 「호장가의 힘」, 「동자승과 곶감」, 「위협과 위기」, 「정도전과의 담판」, 「미끼를 위한 미끼」, 「지는 해 뜨는 달」, 「다리가 셋인 개를 구하러 가는 감무」 등이다. 앞서 '감무'에 대한 주석은 저자가 직접 달아 이 책의 서평에 그대로 써넣었지만 독자로서 생경한 단어 '호장가'란 단어엔 주석이 없어 독자의 추정으로 단의의 의미를 독자들에게 전한다. 호장가는 한자어 '戶長家)'는 고려 초기 흔히 쓰였던 '지방 호족' 가문을 말한다. 이들은 왕건의 고려 건국을 도왔으며 그들의 딸들의 상당수가 왕건과의 혼인으로 고려 황후의 신분을 획득한다. 고려 말 등장하는 '권문세족'과는 다른 뜻이다.

 

백성들 사이에서 새롭게 떠도는 이야기를 들으며, 이야기라는 놈은 정말 살아서 돌아다니고 있구나 생각했다. 동시에 두 이야기가 합쳐진 데에는 무슨 연유가 있지 않을까 짐작해보았다. (중략) 쇠를 먹는다는 괴물은 농사지을 쇠붙이까지 모조리 수탈해 가는 조정일 수도 있고, 먹고살기 위해 쇠를 먹는 괴물을 만들어 그 뒤에 숨고 싶은 백성들의 염원일 수 있었다. 어쩌면 이 이야기에도 백성들의 염원이 담겨 있을지 몰랐다. 꼬리 아홉 달린 여우를 없애달라는 염원.(p.231)

 

“선비님 아니십니까?”

노인이 달려와 내 양팔을 붙들었다. 몇 년 전, 가왜들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던 노인이었다. 나는 노인을 꼭 끌어안았다. 이제야 진짜 살았다 싶었다. 내 운이 여기서 끝이 아니었던 것이다. (중략) 헤어지기에 앞서 나는 노인과 마을 사람들에게 두 번 세 번 인사하며 고마움을 표했다. 그리고 사라져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이런 세상이라도 백성들은 제법 의리가 있다는 금행의 말이 새삼 떠올랐다.(p.301~302)

 

저자 : 배상민

 

2009년 제1회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을 통해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소설집 『조공원정대』, 장편소설 『콩고, 콩고』 『페이크 픽션』 『복수를 합시다』, 이야기 작법서 『이야기 어떻게 쓸까?:매체를 넘나드는 이야기 쓰기의 원리』 등이 있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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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학살을 넘어 - 팔레스타인에서 우크라이나까지, 왜 인류는 끊임없이 싸우는가
구정은.오애리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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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인류 역사상 하루도 끊이지 않고 계속되어 왔다"는 어느 전쟁사가의 말이 새삼 재인식되는 요즘입니다. 뉴 밀레니엄인 21세기에 들어와서도 4반세기가 지나는 동안 정말 지구상에서 단 하루도 전쟁이 없었던 날이 있었나 싶습니다. 요즘은 물론이지만 21세기 새 희망으로 가득 찬 2000년도부터 우리에게 들려오는 '전쟁' 뉴스는 매번 국제뉴스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작은 전쟁, 내전 등에 관해서는 이젠 뉴스거리도 안 된다는 듯 외신마저 다루지 않을 정도이니 이 책 『전쟁과 학살을 넘어』를 펼치면서 떠오른 독자만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2년 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발발 때만 하더라도 엄청난 전쟁의 시작이라며 각종 뉴스 매체들은 앞으로 세계 패권국의 양상이 재편되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는 해설까지 내놓으며 요란스러웠다. 미국을 비롯한 유럽 등은 우크라이나의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을 환영하는 입장이어서 적극 지원을 약속하고,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는 핵을 사용해서라도 자신들의 침략은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아시아 아프리카나 남미 등 다른 대륙의 세계인들도 직접적인 전쟁 피해는 아니더라도 크든 작든 러-우 전쟁은 일상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우려하는 마음이었다. 식량과 에너지 공급에 대한 압박 때문이다. 그리고 한마음 한뜻으로 전쟁이 빨리 끝나기만은 빌고 또 원했다. 러-우 전쟁은 지금 벌써 2년이 다 되어가도 종전 소식은커녕 가끔씩 확전 소식과 미사일로 인한 사상자 숫자만 늘어나고 있는 장기전 형국이다.

특히 지난해 10월 세계인이 놀랄 만한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면서 뜸하던 러-우 전쟁 뉴스는 이젠 거의 보도되지 않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전쟁 소식에 집중돼 있다. 전쟁을 일어난 계기는 팔레스타인 하마스 같은데, 공식으로 전쟁 선언은 이스라엘이 했다. 미사일 공습과 불법 침략으로 이스라엘 국민 수백 명이 죽었다는 사실에 분개한 이스라엘 정부가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하며 하마스 조직을 뿌리뽑아 평화를 되찾겠다는 선언이었다. 사실 하마스 공격은 불법이었고, 사망 또는 인질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사람들이 100명이 훨씬 넘는다고 하니 어느 국가든 분노하지 않겠는가. 즉각 이스라엘은 하마스 세력을 뿌리뽑겠다고 무력 진압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지금까지 가자지구에 살던 팔레스타인 민간인의 희생자가 1만 명을 넘었다고 발표된 지도 한 달이 넘었다. 전쟁은 계속되고 있지만 어쩐 일인지 생각보다 훨씬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다.

 


 

이 책 『전쟁과 학살을 넘어』의 공동 저자 구정은과 오애리는 오랫동안 언론사에서 일하며 국제 뉴스를 다뤘다. '새천년'을 향한 희망의 해를 바라보며 기대가 채 잊혀지기도 전에 전쟁과 분쟁으로 얼룩진 21세기의 단층들을 심도 있게 분석했다. 전쟁 과정과 피해, 앞으로의 전망보다는 그 나라들이 왜 전쟁을 일으키고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은 이제 지역적 분쟁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왜 전쟁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아야 되는지에 당위성을 개진하는 입장에서 쓴 책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전쟁과 우리는 21세기 지역 전쟁들과 무관한 것인지, 우리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아직 휴전 중인 국가 대한민국에서 바라보는 '전쟁불가론'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이 책은 모두 6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 〈세계를 뒤흔든 우크라이나 전쟁〉, 2부 〈팔레스타인은 왜 ‘분쟁지역’이 되었나〉, 3부 〈아랍의 봄과 시리아 내전〉, 4부 〈끝나지 않는 전쟁, 아프가니스탄〉, 5부 〈세계가 반대한 이라크 전쟁〉, 6부 〈전쟁을 막을 수는 없을까〉 등이다. 1부에선 지구 전체에 그늘을 드리운 우크라이나 전쟁을 다뤘다. 민주주의를 향한 우크라이나인들의 힘겨운 여정과 거기에 계속 질곡을 강요한 러시아라는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 역사적 배경을 설명했다. 2부의 주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다. 이 또한 역사를 들여다보지 않고는 맥락을 잡기 힘든 이슈다. 이스라엘 건국 때부터 현재까지의 진행 과정을 풀어 쓰면서, 이스라엘이 무법자로 인식되어온 과정과 그 도구가 된 정보기관들의 저돌적 행태를 정리했다. 3~5부에선 21세기의 주요한 전쟁인 시리아 내전과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을 다뤘다. 뒤의 두 전쟁은 미국의 일방적 침공으로 일어났고, 미국이 압도적 화력을 쏟아부어 장기전을 치렀지만 결코 ‘승리’라 할 수 없는 초라한 성적표만 받아들고 발을 빼야 했던 전쟁들이다. 사건의 진행 과정을 시기 순으로 설명한 뒤 미국의 오만과 일방주의가 어떻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갔는지, 그 전쟁들이 세계에 어떤 파장을 일으켰는지를 분석했다. 마지막 장에는 전쟁 뉴스를 오래 들여다본 저자들의 고민과 바람을 담았다.

 


 

전쟁 범죄를 왜 처벌해야 하는가, 전쟁 범죄에 대한 인식과 단죄는 어떻게 진화해왔나, 한국인들에게 전쟁과 파병 그리고 난민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저자들은 주목했다. 인류애가 깨져나간 단층들을 돌아본 이 책이, 인류애를 일깨우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저자들의 집필 취지에 독자는 기대한다. 저자들은 국제부 기자들로서 전쟁 현장에 나갈 일이 거의 없다. 매일 쉴새없이 들어오는 국제 뉴스의 무게를 판단하고, 신중하고 가능한 한 우리와 관련이 되는 뉴스만을 선별해야 한다. 세계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건 사고 등 굵직한 뉴스를 다루지만, 21세기 들어 전쟁 뉴스는 '일상'이 되어버렸음을 깨닫는다.

지난 세기 제 1, 2차 세계대전을 치르고 양차 대전을 합쳐 줄잡아도 1억 명 이상의 사람이 죽었다. 독자들도 다 아다시피 전쟁의 가장 큰 희생자는 노약자, 부녀자, 어린아이 등이다. 군인들이 전사하는 숫자보다 민간인 피해가 훨씬 많다. 예전에는 군대를 훈련해 양측에서 어느 한 지역을 선택해 정면대결을 통해 전쟁의 승부가 가려졌다. 물론 패배한 나라와 사람들은 멸망할 수 있다. 다행히 노예로라도 끌려가면 훗날을 기약할 수 있지만 노예보다 굴욕적인 일은 없다고 해서 차라리 죽음을 택한 사람이 많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20세기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양상이 달라졌다. 직접 전쟁터뿐만 아니라 전쟁을 돕는 민간인들이 사는 곳을 비행기를 동원한 폭격, 성능과 사정거리가 엄청나게 발전된 미사일 등 대량 살상의 양상로 무기가 현대화됐다. 심지어는 핵폭탄(방사능탄), 화학탄(독가스), 생물탄(전염균) 등이 개발되면서 단 한 방으로 수십만 명을 일시에 희생시킬 수 있다. 전쟁은 점점 인류 존속 자체에 위협이 되는 수단이라는 데 인식을 같이하지만, 하루도 멈추지 않고 전쟁을 하는 인류의 앞날은 결코 희망적이지 않다.

저자들은 지난 세기 말 벌어진 '전쟁과 학살' 현장을 직접 갔다. 저자들은 뒤늦게나마 지난해 여름 동유럽을 찾았다. 숱하게 기사를 쓰면서 지명으로만 남았던 첫 방문지였다고 〈프롤로그〉를 통해 소개한다. 1990년 구 소련의 몰락으로 소련(소비에트 연방)은 붕괴했다. 옛 소련의 위성국가 역할을 했던 대부분의 나라들은 독립을 했으나 일부 국가는 내전에 휩싸였다. 이 가운데 가장 참혹한 '학살' 현장인 보스니아를 저자들은 방문했다. 이곳은 옛 유고 연방이었던 나라들끼리 내전에 돌입했다. 같은 나라였지만 기독교계 사람들과 무슬림들이 공존했다고 한다.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의 전쟁은 주위 경관엔 아랑곳하지 않고 무차별 학살의 만행이 저질러졌던 곳이다.

 

 

저자들은 "세르비아의 국경선 근처에 있는 스테브레니차를 찾아갔다. 세르비아계 혹은 정교도들은 그곳에서 사흘 만에 8,000명이 넘는 보스니아계 혹은 무슬림을 학살했다. 21세기를 목전에 두고 어째서 이런 학살이 벌어졌을까. 민족이란 무엇이며 종교란 무엇이기에 이런 잔혹한 일이 펼쳐지는 것일까. 유고연방의 70년 역사는 이들에게 어떤 것을 남겼을까."(p.5) 저자들이 어떤 심정이었을까? 쉽게 짐작은 안 되지만 책을 통해 읽은 내용으로는 이 지역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제노사이드'의 참혹한 기억을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제노사이드란 인종, 민족, 종족, 이념 등의 대립을 이유로 특정집단의 구성원을 대량 학살하여 절멸시키려는 행위를 이르는 말이다. 30년 전 이곳에서의 전쟁은 한 지역에서 도저히 살 수 없는 학살 등의 만행을 저지른 악몽을 죽을 때까지 짐지우고 산다. 주변 아름다운 경관과는 다르게 음울하고 우울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듯하다. 이 곳에서 저자들은 그들과 아픔을 같이하는 이방인으로서의 느낌을 갖고 "앞으로 10년 간 제노사이드는 생각하지 말자"고 다짐했지만 불과 한두 달 만에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 시작됨으로써 얼마나 참담한 심정이었을지는 충분히 짐작이 간다. 앞서 잠깐 언급한 '민족이란 무엇이며 종교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됐을 법하다.

저자들은 각 지역 분쟁에 대한 전쟁 발발 이유, 그리고 관련된 나라들의 속사정, 그 전쟁들이 세계에 일으킨 파장 등을 분석했다고 〈프롤로그〉에서 밝힌다. 특히 마지막 부 6부에서는 전쟁 뉴스를 오래 들여다본 저자들의 고민과 바람을 담았다. 전쟁 범죄를 왜 처벌해야 하는가, 전쟁 범죄에 대한 인식과 단죄는 어떻게 진화해왔나, 한국인들에게 전쟁과 파병 그리고 난민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하는 것이다. 저자들은 이번 취재와 책을 쓰는 동안 자료를 통해 느낀 점을 강력한 소망을 담아 썼다고 한다. "강자의 배짱 앞에 약자들은 그저 다치고 치일 뿐 아무 힘이 없는 것 같지만, 미국이라고 무소불위인 것은 아니다. 사람에겐 진화를 통해 습득해온 공감과 연민과 정의감이 있다. 그러나 국가 혹은 민족이라는 정체성이 앞서게 되면 정의감과 연민은 사라지고 국익이라는 명분 아래 이기주의와 폭력성이 판치게 된다. 하지만 개개인과 국가들 모두의 통합체인 '인류'가 되면 보편적 인권과 평화라는 화두가 다시 고개를 들며 윤리적 판단이 '냉혹한 국제질서'의 일부이자 한계이자 규범으로서 영향력을 갖게 된다. 인류애라는 말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p.8~9)

 


 

이 책은 우선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부터 살펴본다. 우크라이나 나토 가입 문제로 불거진 전쟁이다. 이는 겉으로 드러낸 명분이지만 사실을 파고 들면 또다른 이유가 보이게 된다. 저자들에 따르면 러시아와 우크라이는 특별한 역사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땅은 우리가 나눠준 것이며,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만들었다"는 식의 푸틴의 주장은 분명 문제가 있다. 우크라이나를 소련에 강제합병하는 바람에 둘이 한 나라가 된 것인데 '역사적 과거'를 소련 시절로만 한정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또 과거에 러시아 땅이었다고 해서 지금도 그렇다는 발상은 어불성설이다. 우크라이나 땅에 사는 우크라이나계와 러시아계 모두의 선택으로 독립을 해서 현재 주권국가로 존재하고 있는 것을 부정하고 침략한 행위는 국제법상 엄연한 범죄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포기하지 못하는 데에는 역사적 이유뿐만 아니라 군사적·지정학적·경제적인 이유도 있다. 무엇보다도 러시아는 긴 국경을 맞대고 있는 우크라이나가 유럽연합과 미국 주도의 군사동맹인 나토에 가입할 경우 엄청난 부담을 떠안게 된다. 러시아로서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타토는 유럽과 북미 31개의 회원국(2023년 10월 현재)이 소속된 정치 및 군사 동맹체이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냉전이 격화된던 1949년에 탄생했다. 나토의 핵심은 조약 제 5조에 명시된 '회원국 한 곳에 대한 무력공격은 전체 회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는 집단방위 원칙이다. 지금까지 나토가 집단방위 원치긍ㄹ 발동한 것은 단 한 차례로, 2001년 미국에서 9·11 테러가 발생했을 때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하고 동유럽 국가들이 속속 민주화되면서 나토는 냉전의 유물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꾸준히 회원국을 늘리면서 몸집을 키웠다. 러시아는 줄곧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은 자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것이라며 반대해 왔다. 푸틴은 1990년 독일 통일 때 미국이 나토가 동쪽으로 '1인치도 나아가지 않을 것'이라 약속한 것을 줄곧 위반해 왔다고 주장한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접경지대에 병력을 배치한 뒤 2021년 말 미국에 안전보장을 요구했다. 우크라이나를 나토에 가입시키지 않을 것임을 문서 형태로 확약하라고 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미국이나 나토가 결정하고 약속할 사안이 아니다. 정작 중요한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의중이다. 그러기에 러시아가 이를 이유로 침공하는 것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2부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을 다룬다. 이 전쟁은 2023년 10월 7일 토요일 아침(현지 시각) 발발했다. 이스라엘 남부 가자지구 접경 마을 주민들은 3대 명절 중 하나인 '초막절'(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장막 생활을 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절기)를 지내고 난 후 첫 안식일을 느긋하게 맞이하고 있었다. 오전 6시 30분 갑자기 2,500발 이상의 로켓 포탄이 하늘을 뒤덮더니 가지지구를 장악한 무장 정파 하마스의 무장대원들이 픽업트럭과 오토바이, 패러글라이딩을 타고 국경 철책을 넘어 이스라엘 쪽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야말로 기습공격이었다.

완전한 방공망 '아이언 돔'이라고 큰소리치던 이스라엘의 하늘은 뚫렸다. 한꺼번에 이처럼 대량으로 포탄이 쏟아져 들어오면 일일이 모두 대응해 요격할 수 없다는 점을 하마스는 미리 알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대로 포탄과 하마스 공격 요원들에 맞닥뜨린 이스라엘 사람들은 공황 상태로 빠져 들었다. 삽시간에 수백 명이 죽고 240명 가량이 인질로 끌려갔다. 이후 팔레스타인 측은 '제 2의 나크바'를 맞이해야 했다. 나크바는 아랍어로 '대재앙'이란 뜻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1948년 5월 15일을 '대재앙의 날'로 부르면서 이날의 아픔과 슬픔을 해마다 되새긴다고 한다. 이날은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의 나라'가 세워진 날이다. 유대민족에게는 2'000년 가가이 세계 곳곳으로 흩어져 나라 없이 지내온 설움을 청산한 축복과 기쁨의 날이지만, 이스라엘의 건국은 팔레스타인 민족에겐 진정한 '재앙'이 되는 셈이다. 이스라엘 건국은 제 2차 세계대전의 후속 결정 사안이지만 전쟁에서 이긴 승전국의 입장에서 휘두른 무소불위의 힘에 의한 것이다. 당시 승전국 영국은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에게 특별한 혜택을 배풀고자 했는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2,000년을 살아온 팔레스타인이 있는 곳을 나가라고 하는 등 '혜택' 자체가 비극을 안고 있었던 셈이다. 프란체스카 알바네세 유엔 팔레스타인 특별인권보고관은 전쟁 발발 전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2023년은 나크바 75주년이 아니다. 나크바는 75년 동안 계속되고 있다."

이 비극의 씨앗은 로마군의 예루살렘 함락으로 유대 국가가 멸망한다. 당시 유대 저항군은 깎아지른 절벽 위에 구축된 천혜의 요새 마사다에서 3년이나 항전하다 패배 직전 전원 자결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후 유대인들은 세계 곳곳으로 흩어져 살았는데 이를 디아스포라(Diaspora)라고 한다. 이렇게 2,000년 갈등이 이 전쟁 속에 들어 있다. 세계의 패권국의 위치에 있는 미국이 뒷배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최강국으로 부상하면서 세계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분쟁에 관여해 왔다.

 


 

미군은 2003년 3월부터 2011년 12월 말 철군할 때까지 8년 9개월간 이라크에 주둔했다. 전쟁에 직접적으로 들어간 돈과 이라크 재건에 투입한 비용, 미국 내 전역병·부상병 복지비용 등을 모두 합치면 미국은 2조 달러 이상을 들인 것으로 추산된다. 미국은 가장 많았을 때에는 이라크에 15만 명을 파병했다. 이라크에서 숨진 미군과 다국적군 사망자 수는 4,800명이 넘는다. 이라크에서 다치고 장애를 입은 전역병들은 재정적자와 함께 미국 사회가 앞으로 수십 년간 책임져야 할 짐이다. 더불어 ‘수퍼 파워(초강대국)’로서 미국의 자존심, ‘선한 강대국’이라는 이미지도 타격을 입었다. 이 모든 것이 부시의 전쟁을 승인해주고 그에게 연임까지 안겨준 ‘못난 유권자들’에게 지워진 부담이었던 셈이다. 어쨌든 미국은 전쟁을 일으킨 나라이니 그 짐을 짊어지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라크인들은 무슨 죄일까. 미국은 전쟁의 상대국인 이라크의 민간인 피해에 대해서는 집계조차 하지 않았다. 이라크 전쟁을 맡았던 미군 중부사령부의 토미 프랭크스 사령관은 “우리는 시체를 세지 않는다We don’t do body counts”라는 말로 표현했다.(p.211~212) - 「미국의 오만, 미국을 실패로 이끌다」

 

저자 : 구정은

 

『경향신문』 기자로 일했고, 이라크와 시에라리온 등 세계 여러 곳을 취재했다. 사라지는 것, 버려지는 것, 약자들과 목소리를 잃은 사람들에 관심이 많다. 2021년부터 독립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면서 국제 이슈를 비롯해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우리의 일과 삶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글을 쓰고 있다. 『사라진, 버려진, 남겨진』, 『여기, 사람의 말이 있다』, 『10년 후 세계사』 등을 썼고, 『나는 라말라를 보았다』, 『팬데믹의 현재적 기원』 등 여러 책을 번역했다.

 

저자 : 오애리

 

『문화일보』와 『뉴시스』에서 오래 일했으며, 지금은 국제문제를 주로 다루는 프리랜서 언론인 및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국제사회에서 벌어지는 다양하고 복잡한 문제에 얽힌 역사적인 맥락을 전하고, 인문사회학적 이해를 높이는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넷플릭스 세계사』와 『숲으로 간 여성』을 비롯해 『성냥과 버섯구름』, 『모든 치킨은 옳을까?』 등을 썼고, 놈 촘스키의 『정복은 계속된다』와 마이클 무어의 『세상에 부딪쳐라 세상이 답해줄 때까지』를 우리 말로 옮겼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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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아더존스 - 우리는 왜 차이를 차별하는가
염운옥 외 지음 / 사람과나무사이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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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인디아더존스(In The Other Zones)』는 공동체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가장 확실한 열쇠는 '다양성'이란 주제를 갖고 있다. '다양성(多樣性)'은 '모양, 빛깔, 형태, 양식 따위가 여러 가지로 많은 특성'을 국어사전은 풀이하고 있다. 이 다양성이란 단어는 생물학에서 생물다양성이란 의미로 자주 사용해 왔다. 오늘날 세계에서 무척 중요한 이슈를 지닌 단어로 떠올랐다. 생물학자들은 생물다양성을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 전체로 정의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로 인해 인류의 번영과 존속에 영향을 미치는 생태계 등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고, 이는 곧 오늘날 지구가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는 주장은 인류 존속에 큰 위협이 되는 현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 생태계는 거의 모든 생물종이 연결되어 있음을 이미 오래 전에 밝힌 바 있다.

이 책은 표제어가 영어로 돼 있다. 앞서 명기한 대로 'In The Other Zones'이다. 언뜻 이해가 되지 않지만 부제 「우리는 왜 차이를 차별하는가」가 많은 것을 뒷받침하며 설명하고 있다. 인류 문화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차별'에 대한 이야기다. 이 책은 '차별'이 인류 역사와 함께한 것이지만 왜 생겼는지, 어떻게 작동하는 것인지, 결국 인류의 번영 존속에 악영향을 미칠지 탐구한 내용을 실었다. 이를 위해 주제별로 각 분야의 전문가·학자들로 구성된 저자들이 공동으로 집필했다. 결국 이 책은 인간 개인과 인류 공동체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절체절명의 과제로 떠오른 ‘다양성’에 관한 담론집 성격을 띠고 있다. 이를 위해 진화학·사회학·인구학·미디어학·종교학·범죄심리학 분야 국내 최고 권위자이자 존경받는 여섯 석학이 글을 썼다. 염운옥(사회학), 조영태(인구학), 장대익(진화학), 민영(미디어학), 김학철(종교학), 이수정(범죄심리학) 교수 등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인간 사회 안에 오랫동안 형성되고 굳게 자리 잡아 고질적인 문제를 야기하게 된 차별의 실체와 그 교묘한 작동 원리를 날카롭게 통찰하게 될 것으로 독자는 기대한다. 각 분야에서 차별과 다양성이란 문제의 실체를 파악하기에 매우 적절한 책이어서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읽어볼 것을 먼저 읽어본 독자로서 추천한다.

 


 

이 책은 모두 7개의 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인종, 그리고 인종차별〉, 2장 〈다양성의 시대에 어떻게 살아남을까〉, 3장 〈다양성과 공감, 그리고 행복〉, 4장 〈미디어는 어떻게 다양성을 저해하는가〉, 5장 〈신은 왜 인간에게 혐오를 가르쳤나〉와 '차별'에 대한 대담 〈우리 사회의 인종주의와 낙인〉과 '다양성'에 관한 대담 〈생존의 필수 조건: 다양성〉이 각각 6장과 7장을 이루고 있다. 이 책은 〈티앤시재단〉의 『헤이트(Hate): 왜 혐오의 역사는 반복될까』와 『행복은 뇌 안에』 등 2권의 전작의 뒤를 잇는 세 번째 시리즈 책이자 ‘혐오’와 ‘공감’ 그리고 ‘다양성’ 삼부작의 결정판인 셈이다.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인구 감소'다. 어렵게 선진국에 들어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번영과 발전의 기쁨을 누리지도 못한 채 100년 이내 소멸할지도 모른다는 청천벽력의 위기감이 감돈다. 선진국에 도달하기 위해 개발도상국이라는 지위의 그늘에서 일만 하던 수많은 인재들이 땀을 닦기도 전에 그토록 애써왔던 선진국 대한민국이 없어질지도 모른다니, 믿기지 않을 얘기다. 전쟁도, 천재도 아닌 인구 감소에 의한 소멸... 지구 상에서 인류가 역사를 만들기 시작한 이래 인구 감소로 나라가 없어진 곳이 있었나? 독자의 얄팍한 지식으로는 찾을 수 없다. 전쟁에 진 나라의 국민들이 포로나 노예로 잡혀 간 후 나라가 소멸된 예는 많다. 그나마 대부분 중세 이전의 이야기일 뿐 근대 이후에는 전쟁으로 나라가 소멸된 곳은 없을 정도로 인류는 끈질긴 생명력과 강인한 정신력으로 모든 위기를 극복해 낸, 지구상에서 가장 우월한 생물종이라고 했는데 말이다.

대한민국 사람은 인류 중에서도 이해할 수 없는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로서, 나라를 잃고 대항해 싸울 무기가 없어도 끈질기게 버티며 나라를 유지해오고 다시 번영의 길목에 선 나라다. 그동안 대한민국이 나라를 잃었을 때도 전쟁으로 나라가 망할지도 모를 위기에서도 많은 도움을 준 나라들을 잊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 사람들은 은혜를 잊지 않는 사람이란 것을 보여주듯이 이젠 국제 질서에 어긋나지 않는 한 원조도, 필요한 지원도 필요한 곳에 아끼지 않는다.

 


 

이 책의 〈서문〉을 쓴 김희영 〈티앤시재단〉 대표는 "한 사회가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속도는 역사·문화적 배경, 인구 구성 등에 기반한다"고 전제하고 "태생적으로 다양한 이민족으로 구성된 미국과 같은 국가는 여러 인종, 문화, 종교의 사람들이 공존하기에 다양성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것이 중요한 가치가 된다"고 말한다. 이들은 오랜 세월 갈등을 봉합하는 과정에서 불협화음보다 통합과 공존이 주는 혜택을 깨우쳤다는 주장이다. 반면 "상대적으로 동질적인 인구 구성을 갖는 한국 사회는 높은 폐쇄성을 보여준다"고 강조한다. 타 지역에서 온 사람을 비하하는 말을 쉽게 하고, 온라인상에서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혐오 발언을 거리낌 없이 내뱉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동질한 인구 구성'이라는 변명이 통하지 않는 시대다. 한국은 이미 상당한 글로벌 사회에 들어섰다고 지적한다. 〈서문〉에 따르면 2023년 9월 기준 등록된 국내 체류 외국인은 약 250만 명이다. 전문가들은 올해 2024년이면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5퍼센트를 넘어설 것으로 내다본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및 인구·통계학적 기준으로 외국인이 전체 인구의 5퍼센트를 넘으면 다인종·다문화 국가로 분류된다. 이에 더해 재외동포는 700만 명이 훌쩍 넘는다고 한다. 김 대표는 전체 국민의 무려 14퍼센트에 해당하는 인구가 해외 180여 개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한국은 '이주 국가'라고 단언한다.

이 책은 영화 〈인디아나존스〉를 패러디해 중의적인 의미를 담았다고 한다. '다른 곳(Zones)에서'라는 뜻도 되지만, 있어야 할 공간이 아닌 다른 공간에 뚝 떨어진 존스(Jones) 씨를 상상했다는 것. 한국전쟁의 아픈 상처로 '디아스포라'라는 단어가 품고 있는 쓸쓸함과 한의 정서보다는, 더 나은 삶을 개척하기 위해 떠날 수 있는 용기와 도전을 강조하고 싶어 채택한 제목이라고 김 대표는 밝힌다. 또 포지화 역시 매우 상징적이다. 철조망 위에 앵무새 한 마리가 앉아 먼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주로 우리에서 서식하는 앵무새는 해안가에서는 흔히 볼 수 없고, 철조망은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없게 하는 경계의 상징이다. 하늘을 가득 메운 세계지도는 위압적이지만 언제든 흩어질 수 있는 구름을 상징한다는 설명도 덧붙인다.

 


 

1장은 인종의 개념에 대한 설명과 인종의 허구성, 인종 차별을 없애기 위한 방안 등에 대한 고찰이 담겼다. 염운옥 경희대학교 글로벌역사문화연구소 연구교수의 인종에 대한 설명과 대안 등 해결 방안에 많은 영감을 제공한다. 염 교수는 "인종은 과학적으로 의미 있는 개념이 아니다. 생물학적 인종 개념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것은 마치 '지구가 평평하다'라고 믿는 것만큼이나 불합리하고 시대착오적"이라는 전제로 시작한다. 1950~1951년 이미 유네스코도 "호모 사피엔스는 단일종이며 모든 인종은 평등하다"라고 선언했다는 점을 덧붙인다. 호모 사피엔스는 '호모 미구란스(Homo Migrans)'이면서 동시에 '호모 하브리두스)Homo Habridus)'다. 호모 미그란스는 '이동(이주)하는 인간'이라는 뜻이고, 호모 하브리두스는 '잡종 인간'이라는 의미라는 말로 설명을 더한다. 아프리카 기원설이든 다지역 기원설이든 공통된 주장은 인간이 지닌 놀라운 두 가지 속성, '이동성'과 '혼종성'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럼에도 오늘날 깊이 뿌리박고 있는 백인우월주의는 유럽인이 신항로 개척을 명목으로 다른 대륙에 진출하고, 탐험하고, 침략하고, 약탈하는 과정에 만들어진 '근대의 발명품'이라고 역설한다.

염 교수에 따르면 인간을 인종의 잣대로 구분하는 유럽인의 시도는 16세기에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한 불류, 즉 인류를 피부색으로 구분하는 최초의 시도는 18세기 스웨덴 생물학자 칼 폰 린네(Carl von Linnie)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린네는 인류에게 '호모 사피엔스'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분류학을 정립한 인물로 유명하다.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학자들의 순수한 분류가 분류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차이(difference)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다만 그 차이에 인간이 의도적으로 위계(hierachy)를 부여하는 것이 문제다. 인간이 자연과 사회에 태생적으로 존재하는 차이에 의도적으로 위계를 부여하는 순간 차이가 차별을 낳고, 불공정과 불합리함이 발생하고, 폭력과 학대로 이어질 위험성이 생긴다는 점이다. 물론 린네는 인종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인종의 우열을 가리고 인종주의를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런 방식의 분류를 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린네의 인종 개념은 린네 분류학의 권위에 힘입어 학계뿐 아니라 대중에게도 폭넓게 받아들여지고 구석구석 스며들게 된다.

염 교수의 분석대로 다음 독일 분류학자이자 해부학자인 요한 프리드리히 블루맨바흐가 등장한다. 이 학자는 인종을 다섯 가지로 구분한다. 코카서스인, 몽골인, 에티오피아인, 아메리카인, 말레이인이다. 이 중 코카서스인이 가장 우수하고 창조적이며 아름다운 인종이라고 주장한다. '백인'을 지칭하는 용어로 '코카시안(Caucasian)'이라는 단어가 있다.

 


 

염 교수는 '인종'이라는 단어의 발생과 역사적 전개 과정을 밝히면서 인종의 허구성을 짚어나간다. 허구적이고 악의적 창조라고 말해도 될 듯싶다. 뿐만 아니라 인종의 구분대로 혜택과 차별을 했던 백인들의 우월주의 역시 허구이라는 말이다. 책에서 염 교수는 미국 화가 아치볼드 모틀리(Archibald Motley)가 1925년에 그린 〈악터룬 소녀〉의 초상화를 사례로 들며 인종주의 맹점을 지적한다. 외양만 보면 소녀는 흑인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백인 전용 시설을 이용하고 백인 행세를 하는 이른바 '패싱(passing)'이 가능했다. 물론 8분의 1 '흑인' 피가 섞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한 방울의 법칙'에 따라 흑인으로 분류된다. 유대인도 비슷한 방법으로 히틀러의 나치 독일에서 어렸을 때 '예쁜 아리아인 아기'로 선발된 헤프닝을 소개하기도 한다. 외양으로는 유대인과 비유대인의 구분이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염 교수의 고찰은 이제 인종 문제 해결 방안을 제시하려 한다. 인종주의를 없애려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안타깝게도 인종주의는 사라지기 어렵다고 잘라 말한다. 왜냐하면 '과학저긍로 인종 개념이 근거가 없다'고 아무리 열변을 통해도 '인종이 실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고정관념이 좀처럼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인종에 대한 우리 인식을 바꾸고 바로잡고자 한다면 '식민주의'를 진지하게 성찰하고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에 이른다. 이 점이 저자가 이 책을 펴낸 취지이기도 하다. 마지막 부분에 인종에 대한 의식 변화를 촉구하는 하나의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주목할 만한 일이다.

흔히 한국의 인종주의를 'GDP 인종주의'하고 규정한다는 말을 꺼낸다. 이게 무슨 의미인가? 독자로서는 처음 듣는 말일 뿐만 아니라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 있다니? 우리나라 사람들은 인종 차별 대우를 받아왔는데 '인종주의자'들이라고? 혼란스럽지만 저자 염운옥은 차분하게 설명을 단다. "한국에 이주해 오는 외국인을 그 출신국의 경제 수준, 즉 GDP에 따라 차등을 두어 차별한다는 뜻"이라고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이른바 한국에 진출해 있는 글로벌 기업에 다니는 외국인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를 다르게 대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란다. 이 부분에서 독자의 뇌리에 스치는 한 사건이 있다. 제주도에 전쟁을 피해 온 '예맨 난민' 사건이다. 이들의 '난민 인정'을 싸고 찬반의 열기가 달아올랐다. 각종 미디어 매체도 한몫 했던 기억이 독자의 머릿속에 남아 있다. 이슬람 국가 예멘의 난민이라면 일단 '테러' '부녀 강간' '난폭' 등이 연관 검색어처럼 머릿속에 떠올릴 정도로 매스컴의 활약(?)은 대단했었다. 우리 사회는 그들을 난민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그들에 대한 편견을 그대로 반영했다. 이게 인종 차별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겠지만... 차별과 다양성에 대한 전문가와 학자들의 글이 이어지고 뒷 부분에 별도로 대담도 2개 실려 있다. 독자들의 일독을 권한다.

 


 

저자 : 염운옥

마산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 1985년 고려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해 강의실과 도서관을 오가며 빠짐없이 수업을 듣는 모범생이었다. 1980년대의 대학은 학생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열기로 뜨거웠다. 캠퍼스에는 언제나 최루탄 연기가 자욱했고, 학내 문제나 정치적 이슈로 수업을 거부하는 일도 잦았다. 강의실 밖에서 세상을 배우고 시대를 고민하던 때였다. 1987년 일련의 민주화운동을 경험하며 사회의식에 조금씩 눈뜨기 시작했다. 역사의 무게가 새삼 무겁게 다가왔다.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를 계속할 결심을 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대학원에 진학하고 나서 남들은 학부 시절에 독파한 사회과학 서적들을 뒤늦게 읽었다.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일본에 유학해 도쿄대학교에서 〈영국의 우생학 운동과 모성주의〉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논문을 쓰는 동안 뜻대로 살아지지 않아 방황하기도 하고, 나 자신을 믿지 못해 좌절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쭉 뻗은 길이 아닌 샛길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을 풍요롭게 해주리라 믿으며 위안하곤 했다. 페미니즘에 눈뜬 것도 박사 논문을 쓰면서 얻은 소득이다. 역사의 주체에 여성을 놓자 보이지 않던 사실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페미니즘은 남성만이 부당하게 인간을 대표해왔음을 일깨워주었다.

〈우생학과 여성〉, 〈파시즘과 페미니즘 사이에서: 영국파시스트연합의 여성 활동가들〉, 〈타자의 몸: 근대성과 인종주의〉 등의 논문을 발표했고, 《낙인찍힌 몸: 흑인부터 난민까지, 인종화된 몸의 역사》를 썼다. 최근에는 자신의 소유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소유가 아닌 ‘몸’을 역사학의 주제로 어떻게 다룰까를 고민하고 있다. 인종주의나 이주, 이민에 대한 관심도 몸에 대한 관심의 연장선 위에 있다. 현재 경희대학교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자 : 조영태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교수. 사람들이 태어나고, 이동해 다니고, 사망하는 인구현상을 통해 사회의 특성과 변화를 읽어내는 인구학자다. 고려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텍사스 대학교에서 사회학으로 석사를, 인구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04년부터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인구학을 공부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있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보건환경연구소 인구정책연구센터장을 맡고 있다. 또 2015년부터 베트남 정부의 인구정책자문으로도 활동 중이다.

2016년 가을에 출판한 첫 저서 《정해진 미래》를 통해 한국사회가 인구변동으로 인해 어떤 변화를 경험하게 될지 예측했다. 당시 생소했던 인구학이 정부는 물론이고 기업과 개인이 미래를 준비하는 데 얼마나 유용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지 소개하여 인구학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2021년 현재, 지도교수로 있는 서울대학교 인구학연구실에서 학생 및 박사연구원들과 함께 우리나라 초저출산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을 탐구하는 작업, 지방자치단체들의 미래전략 수립을 돕는 일, 기업들이 국내외 시장변화를 정밀하게 분석하고 예측하는 데 필요한 자문을 하고 있다.

《정해진 미래》 이외에 《정해진 미래 시장의 기회》, 《아이가 사라지는 세상(공저)》, 《2020-2040 베트남의 정해진 미래(공저)》 등을 집필했고, 《정해진 미래》로 2017년 정진기언론문화상 대상을 수상했다.

 

저자 : 장대익(잔가지)

가천 대학교 창업 대학 석좌 교수. KAIST 기계 공학과를 졸업하고 서울 대학교 과학사 및 과학 철학 협동 과정에서 생물 철학 및 진화학을 연구해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터프츠 대학교 인지 연구소 연구원, 서울 대학교 과학 문화 센터 연구 교수, 동덕 여자 대학교 교양 교직 학부 교수, 서울 대학교 자유 전공학부 교수를 역임했다. 한국 인지 과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서울 대학교 인지 과학 연구소 소장, 비대면 교육 플랫폼 스타트업 ㈜트랜스버스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문화 및 사회성의 진화에 대해 연구한다. 저서로는 『다윈의 식탁』, 『다윈의 서재』, 『다윈의 정원』, 『울트라 소셜』 등이 있고 『종의 기원』, 『통섭』 등을 번역했다. 2009년 제27회 한국 과학 기술 도서상 저술상과 2010년 제11회 대한민국 과학 문화상을 수상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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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나그네 2
최인호 지음 / 열림원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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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은 다혜의 대학 졸업 이후로 들어간다. 민우는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출소 후 이모가 운영하는 술집 〈나이아가라〉에서 일하며 지낸다. 이미 순수한 청년 민우는 악에 물들어가고, 자신의 자존감과 내면이 무너지는 것을 알아챈다. 그럴 때마다 술과 담배는 늘어만 간다. 졸업 후 직장 생활을 하면서 다혜와의 함께 산다는 것도 아련한 꿈이었을 뿐 기억조차도 가물가물하다. 술과 마약, 방탕한 생활은 계속되니 일상이 없다. 일상이 없으니 내일도 없다. 하루하루 그저 생물학적으로 살아갈 뿐이다. 젊은 나이의 청년의 모습은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몸과 마음이 망가져 간다. 그러나 작가는 다혜와 민우의 마음속 사랑은 가슴 한 켠에 자리 잡은 채 시도 때도 없이 스멀스멀 기어나온다. 기억이라는 것이 아름다울수록, 현실이 힘들수록 슬픔으로 다가오는 법. 두 사람의 거의 모든 이야기를 알고 있는 친구가 바로 현태다. 민우는 한때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현태를 도와줬고 현태는 그런 민우에게 빚을 갚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것 같다. 친구니까 빚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지도 모르겠지만. 사라진 민우를 현태가 가장 적극적으로 찾는다. 그를 되돌리려고 노력한다. 현태의 마음속은 그렇다고 믿어지지만 사실 작가의 표현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민우와 다혜의 사랑을 방해한 사람은 다름아닌 현태와 은영(제니)이다.

현태는 친구의 연인인 다혜를 사랑하게 됐다. 친구의 연인을 가로채는 것이 걸리기는 했지만 현태의 사랑의 마음까지 빛이 바래게 할 수는 없었을까? 저자의 마음을 짐작할 만한 단서를 소설 속에서 찾아내지 못한 독자의 속마음은 안타깝기만 하다. 다혜를 의정부 기지촌으로 데리고 간 사람이 현태다. 민우의 망가진 민낯을 보게 해서 첫사랑의 환상을 깬 것도 현태다. 반면 다른 방해꾼 제니(은영)는 노골적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민우를 바란다. 자기를 무시한다고 자해하고, 상상임신으로 민우를 자기 곁에 옭아매려고 한다. 결국 성적으로 유혹해서 아이를 가짐으로써 민우를 옭아매는 데까지 성공한다.

 


 

또 민우의 성격도 요즘 청년 같지 않다. 매우 유약하다. 다혜를 사랑하기 때문에 다혜 앞에서 유약해진 모습인지 모르겠지만 '용기'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순수함을 지녔으니 당시 시대상으로는 '좋은 남자'였을지 모르겠다. 독자도 그런 적이 있으니까 그 심정을 잘 안다. 이런 사람이 연애에 실패하면 오히려 스스로 타락하고 자신을 더럽힘으로써 연인을 보내려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기 때문이다. 민우를 '피리부는 소년'이라고 부르던 현태는 사랑 앞에 친구를 걷어찬 꼴이 아닌가. 민우는 다혜와의 만남을 현태를 통해 완강히 거절한다. 몸과 정신이 모두 망가진 민우가 자신감도, 자존감도 모두 잃었다는 증거다. 이제 이야기는 민우는 순수한 다혜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로 흘러간다. 고민하고 멀어져가게 된다.

다행히 소설은 '다혜의 예감'을 통해 하나의 복선을 드러낸다. 다혜는 민우의 내면이 어두워서 왠지 선뜻 그와 사랑한 만큼 맺어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그러나 친구인 현태가 방해가 될지는 생각하지 못한 다혜. 예감일까, 아니면 작가 최인호의 소설 구성의 스킬일까. 현태의 배신적 행위가 당시 사랑의 모습의 단면을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다. 돈과 여자를 위해서는 '친구'는 끼어들 틈이 없다는 사실 말이다. 당시는 사회 분위기 상 전혀 아니고 지금의 관점으로 볼 때는 다혜는 영리하지 못한 것이다. 젊은 독자들이 이 소설을 읽으면 우리(아날로그 세대)가 꿈꾸던 사랑 이야기을 어떻게 들을까? 미련하거나 혹은 바보이거나? 민우의 죽음은 '다혜와 현태의 결혼' 이후에 발생한다.

사실 이 소설의 내용보다 이 소설을 지금 젊은 세대가 읽는다면 감동할까? 아날로그 독자로서는 그것이 더 궁금하다. 독자는 아날로그 세대로서 소설의 끝이 '해피 엔딩'이 아닐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경험과 그때의 사회 분위기, 연애 감정을 안다면 대부분 독자와 공감하리라고 믿는다.

 


 

이 책이 또 하나 눈에 띄는 점은 삽화가 너무 현대적이라는 것. 물론 요즘 젊은 세대에게 읽히기를 원하는 출판사 측의 결정이겠지만 삽화의 그림이 남녀 주인공 모두 현대적 감각이어서 소설의 내용과 조금 덜 어울린다는 느낌이 든다. 애절하고 비극적 연애, 사랑의 느낌을 주기 위해 갸날픈 느낌의 '청순가련형'을 묘사하려는 의도인 줄 알지만 너무 만화 같은 느낌의 삽화가 이때의 느낌을 아는 아날로그 독자에게는 오히려 낯설다.

소설이 마지막으로 치달으면서 독자의 감정은 오히려 푹 내려앉았다가 알 수 없는 슬픔이 깃든다. 민우의 아들(제니와의 사이에 낳은)을 안고 현태와 다혜 부부가 안고 무덤을 찾는 일에서다.

현태가 무덤 위를 살아 있는 사람의 머리처럼 쓰다듬었다.

"미안하다, 민우야. 너무 늦었다. 너무 네 소식을 모르고 있었다. 용서해다오."

현태는 무덤가에 앉아서 손으로 무성한 잡초를 쓸어내렸다. 그리고 무덤 주위를 돌면서 봉분 주위로 웃자란 잡초들을 뜯어냈다. 마치 그렇게 함으로써 옛 친구에 대해 속죄라도 하는 듯이.

소년은 소나무숲에 앉아서 물끄러미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중략)

그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 사랑하고 그토록 생각하고 그토록 기도하던 그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 그 사람이 저 무덤 속에 있다는 것은 거짓이다. 그 아름답던 젊음은 저 무덤 속에 묻혀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의 헛간 속에 채집되어 있다.

그 사라은 어디에 있는가. 그 사람은 어디로 갔는가. 옛날을 말하던 기쁜 우리들의 젊은 날은 어디로 갔는가.(2권 p.324~325)

 


 

저자 : 최인호(崔仁浩)

 

1945년 서울에서 3남 3녀 중 차남으로 출생한 최인호는 서울중·고등학교를 거쳐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다. 서울고등학교(16회) 2학년 재학 시절인 1963년 단편 「벽구멍으로」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가작 입선하여 문단에 데뷔하였고, 1967년 단편 「견습환자」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이후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시작하였다. 작가는 1970~80년대 한국문학의 축복과도 같은 존재였다. 농업과 공업, 근대와 현대가 미묘하게 교차하는 시기의 왜곡된 삶을 조명한 그의 작품들은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확보하며 문학으로서, 청년 문화의 아이콘으로서 한 시대를 담당해 왔다. 1975년부터 월간 샘터에 연재소설 『가족』을 연재하여 자신의 로마 가톨릭 교회 신앙과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가족』은 한 편 한 편이 짧은 연작소설이지만 우리 인생의 길고 긴 사연들이 켜켜이 녹아있는 한국의 ‘현대생활사’이다. 1990년대 들어서부터는 우리의 역사에 천착하며 한민족의 원대한 이상에 접목하는 날카로운 상상력과 탐구로 풍성한 이야기 잔치를 열어왔다. 1973년 스물여덟의 나이에 파격적으로 조선일보에 소설 『별들의 고향』을 연재하게 되었다. 이 소설은 신문에 연재될 때부터 화제가 되더니 단행본으로 묶여 나오자 단숨에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또 얼마 뒤에는 이장호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져 크게 인기를 모은다. 이후 「술꾼」, 「모범동화」, 「타인의 방」, 「병정놀이」, 「죽은 사람」 등을 통해 산업화의 과정에 접어들기 시작한 한국사회의 변동 속에서 왜곡된 개인의 삶을 묘사한 최인호는 "1960년대에 김승옥이 시도했던 ‘감수성의 혁명’을 더욱 더 과감하게 밀고 나간 끝에 가장 신선하면서도 날카로운 감각으로 삶과 세계를 보는 작가"라는 찬사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호스티스 작가’, ‘퇴폐주의 작가’, ‘상업주의 작가’라는 달갑지 않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도 일간지와 여성지 등을 통해 『적도의 꽃』, 『고래 사냥』, 『물 위의 사막』, 『겨울 나그네』, 『잃어버린 왕국』, 『불새』, 『왕도의 비밀』, 『길 없는 길』과 같은 장편을 선보이며 지칠 줄 모르는 생산력과 대중적인 장악력을 보여준 최인호는 2001년 『상도』의 대성공 이후 제 2의 전성기를 맞으며 거듭나는 작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밖에도 군부독재와 급격한 산업화라는 1970년대의 특수한 시대적 상황에서 관심을 끌지 못하던 장르인 시나리오에도 관심을 가져 『바보들의 행진』『병태와 영자』『고래 사냥』 등을 통해 시대적 아픔을 희극적으로 그려냄으로써 그 만의 독특한 시나리오 세계를 구축하였다. 이렇게 꾸준한 관심의 결실로 1986년엔 영화 「깊고 푸른 밤」으로 아시아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하며, 분야들의 벽을 허물고 다양한 길을 보여주었다.

 


 

〈샘터〉지에 34년 6개월 간 연재한 '가족'을 건강상의 이유(2008년 발병한 침샘암 투병중)로 2010년 2월을 기해 연재중단을 선언하였다. 2010년 1월에는 죽음과 인생에 대해 성찰하는 내용을 담은 에세이집 『인연』을 출간하였고, 2010년 2월에는 어린이를 위한 동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를 선보였다. 2011년에는 투병 중 집필한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발표하며 등단 이후 왕성하게 활동을 했던 ‘제1기의 문학’과, 종교·역사소설에 천착했던 ‘제2기의 문학’을 넘어, ‘제3기의 문학’으로 귀착되는 시작을 알렸다. 이 소설로 2011년 동리목월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암 투병 중에 병세가 악화되어 2013년 9월 25일 오후 7시 10분에 향년 68세로 사망하였다.

소설집으로 『타인의 방』, 『잠자는 신화』, 『개미의 탑』, 『위대한 유산』 등이 있으며, 『별들의 고향』, 『도시의 사냥꾼』, 『잃어버린 왕국』, 『길 없는 길』, 『상도』, 『해신』, 『유림』,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등의 장편소설을 발표했다. 수필집으로는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 『천국에서 온 편지』, 『최인호의 인생』 등이 있다. 작고 이후 유고집 『눈물』, 1주기 추모집 『나의 딸의 딸』, 법정스님과의 대담집 『꽃잎이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네』, 문학적 자서전이자 최인호 문학의 풋풋한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작품집 『나는 나를 기억한다 1, 2』, 세 번째 유고집 『누가 천재를 죽였는가』, 네 번째의 유고집 『나는 아직도 스님이 되고 싶다』와 5주기 추모작 『고래사냥』이 재간행되었다.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 가톨릭문학상, 불교출판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동리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2013년 ‘아름다운 예술인상’ 대상 수상자로 선정되었고,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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