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지음, 안정효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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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utopia) "이상향(理想鄕), 이상적인 나라"를 뜻한다. 영국 작가이자 정치가인 토머스 모어가 『유토피아(Utopia)』에서 사용한 말이다. 그리스어에서 따 만든 유토피아는 'not a place', 즉 'nowhere'라는 뜻이다.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는 뜻이다. 유토피아의 반대 개념인 암흑향(暗黑鄕)은 'dystopia(디스토피아)'다. '놀라운 신세계(Brave New World'(멋진 신세계)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폭풍』에 나오는 말이다. 1932년 영국 작가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 1894~1963)가 자신의 소설 제목으로 삼았다. 이 책 『멋진 신세계』의 원제이다. 이 소설은 현대의 기술 진보가 악몽과 같은 유토피아, 즉 디스토피아를 낳는 걸 그렸다. 헉슬리가 자신이 여행했던 미국을 염두에 두고 쓴 이 소설은 좌우를 막론하고 당시 풍미하던 유토피아에 대한 기대와 환상에 정면 도전했다. 이런 까닭에 출간 당시에는 대부분 혹평 일색이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훨씬 긍정적인 평가를 받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소설 발표 당시 미국은 1차 세계대전 특수로 풍요롭지만 도덕적으로 타락한 상태라고 한다. 흥청망청의 사회 분위기를 당시의 매체는 잘 남기고 있다. 오래 갈 것 같은 풍요는 1929년 경제 대공황을 맞이하면서 하루아침에 디스토피아로 변한다. 대공황기의 미국 사회를 신문 기사부터 문학작품, 영화 등 수많은 매체가 다루었지만 그야말로 실업 상태의 노동자들이 거리에 넘쳐나고 폭력 조직 '마피아'는 금주령을 이용해 밀주를 만들어 팖으로써 돈벌이를 하고 지하 세계를 장악하는 등 혼란기가 지속된다. 미국 사회는 혼란 속에서 폭력과 매춘 등이 성행하고 품격과 정의로운 길보다는 타락과 불법이 판치는 일순간에 디스토피아로 변하고 말았다. 이 예언적 소설 『멋진 신세계』는 20세기에 미래를 가장 깊이 있고 날카롭게 파헤친 작품 중의 하나라고 '세터데이 리뷰〈Saturday Review〉'는 평가했다. 현대식 에덴동산에서의 삶을 그린 이 이야기는 자유와 도덕 개념이 낡은 넝마가 되어버린 현대 문명사회를 회화적으로 묘사하여 그 속에 내포된 위험을 경고한다.

 


 

뼈아프게 비판하고 고결하게 지키려는 헉슬리의 '인간 선언'에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귀 기울여햐 한다. 유토피아를 그린 많은 작가와 사상가들은 "유토피아는 현실에서는 없는 간절히 원하는 이상향"일 뿐이라고 말한다. 과학 기술의 발전과 인간 지능은 21세기를 맞이하고서도 희망만 이야기하지 암울한 미래를 지적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현실적으로 당면한 문제를 외면한 채 말이다. 공산주의는 붕괴되었을지라도 자본주의의 승리라고 말하지 못한 이유는 일부 공산주의 국가가 잔존하고 있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고 독자는 생각한다. 빈부 격차 심화 등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방안조차 제대로 내놓지 못하고 있다. 눈앞의 혜택과 쾌락에만 시선이 닿아 있는 것이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표제어 자체가 패러독스다. 쉽게 표현하자면 반어법이란 것이다. 이 소설을 한 번 읽어보면 금세 알 수 있다.

이 소설은 'A. F.' 즉 헨리 포드(자동차왕)가 T형 자동차를 대량으로 생산해낸 해를 기원으로 삼은 시대의 세계국(World State)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소재로 한다. 이 세계국 사람들은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까지 다섯 계급으로 나뉘어, 필요에 따라 ‘맞춤형’으로 대량 생산된다. 이들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수면 학습과 전기 충격을 통한 세뇌로 각자의 신분에 만족하며 살아간다. 그들은 정해진 노동 시간을 끝내면 자극적이고 단순한 오락들로 시간을 보내며, 항상 소마(soma)라는 약을 통해 환각과 쾌락을 느낀다. 누구도 불만이 없고, 만인은 만인의 소유이며, 심지어 죽음까지도 무의미한 세계. 이 완벽한 유토피아에서는 모두가 다 만족스럽고 행복하다. 과연 그럴까?

그러던 어느 날, 신세계와 격리된 보호 구역에서 살고 있던 야만인 존이 이곳으로 초대된다. 존은 젊고 아름다운 사람들과 처음 보는 놀라운 과학 문명에 감탄하지만, 자유를 빼앗긴 채 아무 생각 없이 순응하며 살아가는 거짓된 행복에 점차 환멸을 느낀다. 결국 야만인 존은 고통과 불행을 달라고 부르짖고는 홀로 외딴 등대로 간다. 그곳에서 과연 그는 갈망하던 원시적인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인가.

 

 

간단하고 단순한 줄거리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이 소설에는 많은 과학적 지식이 포함되어 있다. 사실 과학이 인간 문명 발달의 결정적 힘이라고 믿고 살아온 사람들이 현대인 아닌가. 당연히 과학은 인간의 노동을 덜어주고, 풍요를 가져다 주었다. 과학자들은 현대 문명을 가져온 결정적 기여자들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전쟁에서 대량 살상 무기를 만들어 한 순간에 수십만 명을 죽이는 위력도 갖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지구 자체가 병들어 가고 있음을 밝히는 데에도 과학은 결정적 기여를 했다. 어떻게 지구를 되살리는 게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아직 연구가 안 된 듯하다. 그러나 가까운 미래에 지구는 병들어 가고, 속도마저 가속도가 붙은 상태로 빠르게 최악의 상태로 가고 있는 것을 많은 과학자들이 밝혀내고 있다. 지난 세기, 어쩌면 그 전부터 지구 오염이 불러올 폐해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지만, 눈앞의 풍요와 쾌락, 안전만 추구할 뿐 기후 변화 등 환경 변화에 대해서는 애써 외면하는 듯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지구는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면 인류 번영은커녕 존속마저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

암울한 미래 세계를 그린 뛰어난 현대 고전으로 평가받은 『멋진 신세계』는 제목과는 반대의 개념인 디스토피아 세계를 그리고 있다. 역설적으로 우리의 삶의 방식은 뭔가 잘못 됐다는 점을 부각한 것이다. 물론 우리의 현재가 소설 내용과 똑같은 것은 아니다. 헉슬리는 영국의 명문 집안 출신의 작가로서 광범위한 지식뿐 아니라 예리한 지성과 우아한 문체, 그리고 때로는 냉소적인 유머 감각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풍요와 쾌락을 추구한다면 마음껏 즐거운 인생을 살 수도 있는 입장이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가장 풍요롭고 거침없이 발전하고 있는 미국으로 여행을 갔다. 그러나 미국 사회에서 그가 보고 느낀 것은 '신세계'가 아닌 암울한 미래였을까? 소설 속에서는 정확한 시점을 명시하지는 않지만 약 100년 후의,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을 전망하고 그리고 있다. 이 소설은 미래를 가장 깊이 있고 날카롭게 파헤친 작품 중의 하나로 평가받는다.

 


 

소설 속의 『멋진 신세계』는 과학이 최고도로 발달한 사회다. 사회의 모든 면을 관리·지배하고, 인간의 출생과 자유까지 통제하는 미래 문명 세계다. 요즘 대세인 SF 소설의 성격이다. 인간성을 상실한 미래 세계를 신랄하게 풍자하는 한편, 신의 영역을 넘보는 인간의 오만함을 경고하고 비판한다. 이 소설은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1984』와 마찬가지로 충격적인 미래 예언을 통해 인간의 자유와 도덕성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미 『멋진 신세계』에서 인간이 구성해놓은 미래의 전주곡이 진행되는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풍자적이면서도 냉혹한 미래상이 앞으로 얼마나 현실로서 대두될지 사뭇 관심거리일 수밖에 없다.

헉슬리가 그리는 이 소름 끼치는 미래상은 더 이상 공상소설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성이 맞게 될 위기를 다루는, 인간을 소재로 삼은 작품이다. 소설 『멋진 신세계』에서는 전체주의 국가가 인간을 파멸시키는 참혹한 과정이 생생하게 드러나며 유토피아가 곧 파멸이라는 역설이 두드러진다. 또 문명의 발달과 인간의 몰락이라는 반비례 원칙을 제시한다. 지금,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에서 설정해놓은 악몽이 빠른 속도로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현대 과학 문명의 발달과 함께 점차 개성과 인격을 상실해가는 오늘날, 지금 세태의 종착지는 과연 어디인가.

저자 헉슬리는 20페이지가 넘는 긴 〈서문〉을 통해 인류가 종말을 향해 가는 현실을 결코 인류가 바라는 방향은 아니라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음을 내보인다. 물질적이고 외적인 세계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영혼과 육체 속에서 이루어지는 '혁명적인 혁명'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때마침 혁명적인 시기에 살았던 터라 마르키스 드 사드(Marquis de Sade)가 그의 독특한 광증의 양상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이 혁명의 이론을 동원했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할 따름이다. 로베스피에르는 가장 피상적인 종류의 혁명인 정치 혁명을 달성했다. 발뵈프는 조금 더 깊이 들어가서 경제적인 혁명을 달성했다. 사드는 자신을 단순히 정치와 경제를 초월한 참된 혁명적인 혁명의 사도라고 자처했다."(p.16~17)

 


 

이 소설 속에는 가족이라는 유대가 사라진 세계가 있다. 죽음까지도 익숙해지도록 길들이기 훈련을 받는 세상에서 인간은 최소한의 존엄성과 인간적 가치, 그리고 스스로 생각할 자유마저 박탈당한다. 이곳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까지 다섯 계급으로 나뉘어, 인류를 ‘맞춤형’으로 대량 생산한다. 하나의 난자에서 수십 명의 일란성 쌍둥이들이 태어나고, 이들은 끝없이 반복되는 수면 학습과 세뇌를 통해 어떠한 의문도 갖지 않고 정해진 운명에 순응한다. 노화도 겪지 않고, 책임도 도덕도 없이 문란한 성관계를 맺고, 정신적인 외로움도 느끼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쾌락과 만족감뿐이다. 정해진 노동 시간 이외에는 단순한 자극으로만 이루어진 오락들로 꽉 짜여 있으며, 혹 나쁜 기분이 들거나 고통스러운 일을 겪으면 항상 소마(soma)라는 가상의 약을 통해 즉각적인 쾌감을 경험한다. 마약과도 같은 소마는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하고, 사고할 능력을 빼앗는다. 때문에 이 완벽한 유토피아에서는 누구나 다 행복하다. 이런 세상을 원하지는 않았다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사실이다.

저자 헉슬리는 디스토피아라고 해야 어울릴 듯한 사회에서 드디어 탈출구를 제시한다. 어느 날, 신세계와 격리된 원시 지역(Reservation)에서 살고 있던 ‘야만인’ 존이 우연히 이곳에 초대받는다. 그는 처음 보는 고도의 과학 문명과 모든 것이 완벽하게 설계된 세계에 감탄하지만, 소수의 지배자들에게 통제받으며 조작된 행복에 길들여진 ‘백치’와도 같은 사람들의 모습에 점차 환멸을 느낀다. 결국 그는 문명에 절망하고 좌절한 채 다시 원시 지역으로 떠나간다.

 


 

“하지만 난 안락함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신을 원하고, 시를 원하고, 참된 위험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고, 그리고 선을 원합니다. 나는 죄악을 원합니다.”

“사실상 당신은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는 셈이군요.” 무스타파 몬드가 말했다.

야만인이 도전적으로 말했다. “나는 불행해질 권리를 주장하겠어요.”

“늙고 추악해지고 성 불능이 되는 권리와 매독과 암에 시달리는 권리와 먹을 것이 너무 없어서 고생하는 권리와 이(?)투성이가 되는 권리와 내일은 어떻게 될지 끊임없이 걱정하면서 살아갈 권리와 장티푸스를 앓을 권리와 온갖 종류의 형언할 수 없는 고통으로 괴로워할 권리는 물론이겠고요.”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나는 그런 것들을 모두 요구합니다.” 마침내 야만인이 말했다.(p.362~363)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에서 야만인 청년 존을 통해 두 세계, 즉 유토피아 세계와 원시 세계를 비교함으로써, 우리의 현재와 미래상을 병립시켜 보여준다. 오로지 최대의 능률과 발전만을 목표로 삼는 현대 과학 문명에 대해 신랄한 비판과 함께, 곧 도래할 섬뜩한 미래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낸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에게는 무엇이 참된 이상향이며, 우리들은 그곳에 다다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그 해답을 알아내는 것은 우리에게 여전히 중요한 숙제로 남아 있다.

역자 안정효는 "이 소설은 매끈하게 다듬어진 이상향이라는 부자연스러운 세계에 자연인을 투입시켜 인간의 미래를 이해하려는 하나의 예언적인 시도로서, 조지 오웰의 『1984』나 마찬가지로 미래의 공포라는 충격을 제시하고, 그러한 예언을 통해 인간의 자유와 도덕성을 주장하는 선언서 노릇을 한다."고 「현재를 예언하는 소설」이란 제목의 〈옮긴이의 말〉을 남겼다. 우리 사는 세상의 미래를 알고 싶다면, 현재의 지구 환경에 불안을 느끼는 독자들은 당연히 이 책을 읽을 것을 먼저 읽은 독자로서 추천한다.

 


 

저자 :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

 

광범위한 지식뿐 아니라 뛰어나고도 예리한 지성과 우아한 문체에 때로는 오만하고 냉소적인 유머 감각으로 유명한 영국 출신의 소설가이자 비평가. 1894년 7월 26일 서리 지방 고달밍에서 토머스 헉슬리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이튼 칼리지와 옥스퍼드 대학교를 졸업했다. 지적 정보와 함께 재치와 풍자로 가득 찬 다양한 방면의 저술 활동으로 유명한 헉슬리는 20세기 관념소설의 큰 줄기를 이룬 대표적 작가다. 소설가로서 널리 알려지기는 했으나 그 외에도 수필, 전기, 희곡, 시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멋진 신세계』는 그가 1932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한 미래 과학 문명의 세계를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야만인 청년을 통해 두 세계, 즉 유토피아 세계와 원시적인 세계를 제시한 작품으로 문명 비판적 풍자와 도덕적 교훈이 잘 맞물려 현대 문명사회를 희화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진보주의에 대한 위험을 경고하고 있다. 1958년, 『멋진 신세계』의 예언적 주제들을 심도 있게 검토한 『다시 찾아본 멋진 신세계』를 발표했다. 활동 후반기에는 힌두 철학과 신비주의에 깊이 끌렸으며 이 경향이 작품들에 반영되었다. 미국에 정착해서 살다가 1963년 11월 22일 캘리포니아에서 사망했다.

1916년 시집 『불타는 수레바퀴』를 출간한 이래 몇 권의 시집을 더 냈으나, 1921년 『크롬 옐로우』가 인정을 받은 후부터 일생동안 소설 창작에 심혈을 기울이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그의 대표작이라고 여겨지는 『연애대위법』(1928)은 다양한 1920년대 지식인들을 풍자적으로 묘사한 작품으로, 이 소설로 그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작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이 밖에도 과학문명에 지배되어 가는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식이 돋보이는 『멋진 신세계』(1932), 열여덟 살 때 완전히 실명했다가 차차 시력을 회복한 경험을 바탕으로 평화운동을 추구하는 작가 자신을 그린 『가자에서 눈이 멀어』(1936)를 발표했다. 이는 헉슬리의 ‘후기파’ 성향을 지닌 첫 소설로서, 그의 작품 세계에서 분기점 노릇을 한다. 또한 폭력의 부정을 역설한 『목적과 수단』(1937), 제3차 세계대전을 가상해서 쓴 『원숭이와 본질』(1948) 등의 저서가 있다.

또 1945년 《영원의 철학》을 통해 그때까지 서구 지성사에 전해오던 ‘영원의 철학’이라는 개념을 핵심적으로 통합하여 종교와 영성에 대한 이해를 혁명적으로 바꿔놓았다. 주요작품으로는 『어릿광대의 춤(Antic Hay)』, 『하찮은 이야기(Those Barren Leaves)』, 『연애대위법(Point Counter Point)』,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 『가자에서 눈이 멀어(Eyeless in Gaza)』, 『목적과 수단(Ends and Means)』, 『원숭이와 본질(Ape and Essence)』, 『루당의 악마(The Devils of Loudun)』, 『천재와 여신(The Genius and the Goddess)』, 『아일랜드(Island)』 등이 있다.

 

역자 : 안정효(AHN, JUNG-HYO,安正孝)

 

서강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코리아헤럴드』와 『코리아타임스』 기자를 거쳐 한국브리태니커 편집부장을 지냈다. 1975년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시작으로 130여 권을 번역했고, 1982년 존 업다이크의 『토끼는 부자다』로 제1회 한국번역문학상을 받았다. 1977년 수필 『한 마리의 소시민』을 발표했고, 1985년 장편소설 『하얀 전쟁』으로 등단해,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 『가을바다 사람들』, 『은마는 오지 않는다』 등을 선보였다. 영문판 『하얀 전쟁』과 『은마는 오지 않는다』가 각각 1989년과 1990년 『뉴욕 타임스』 추천 도서로 선정됐고, 그 외에 덴마크, 일본, 독일에서도 번역 출간됐다. 1992년 『악부전』으로 김유정 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가 겸 번역가 안정효는 2023년 향년 82세로 별세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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