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의 미래 “좋은 삶”
김인회 지음 / 준평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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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공동체가 자신의 생명과 안전을 유지하는 데 개인 스스로 지키는 것보다 훨씬 유리하다는 것을 알아내고 일찍부터 공동체를 구성해 살아왔다.

그 공동체의 최초 단위는 가족이고 가장 큰 단위는 국가다. 개인 생활과 달리 공동체 사회는 구성원의 다양함과 다른 의견의 존재로 서로 다른 생각과 의견을 조율해야 한다. 의견이 다르다고 법으로 처벌할 수 없고,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회적 처벌을 할 수는 없다. 공동체의 이런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비로소 윤리가 필요하다. 여기서 윤리란 인간의, 인간으로서의 삶을 위한 최소한의 구성원 모두가 인정하는 규약이나 다름없다.

구성원의 잘못된 행위에 대해서는 국가가 법에 의해 처벌할 수 있지만 생각과 종교, 이념 등의 무형의 가치에 대한 처벌을 국가가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이런 문제는 윤리에 기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윤리 중 일부는 사회에서 구성원 모두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행위에 대해서는 국가가 법에 의해 위임된 권한을 행사하도록 했다. 윤리적 문제는 국가가 나서 제한하는 것은 권력 남용이고 이는 개인 권리나 이익을 제한할 수도 있는 모순 위에 국가가 있는 꼴이어서 인정되지 않는다. 이처럼 국가 단위 공동체는 다른 국가나 공동체의 침범을 받았을 때는 힘을 모아 대적하면 되지만 내부 의견의 차이나 다양한 주장에 대해서는 취약할 수밖에 없는 문제점도 내포하고 있다. 국가가 나서서 어느 한 편의 주장을 들어주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는 윤리에 기댄 법을 제정하고 법에 위배되는 행위로 타인의 권리나 자유를 침범하지 못하도록 공동체 내의 질서 유지와 개인 이익간의 충돌 문제를 다뤄왔다. 인간다운 삶을 국가가 보장하거나 지켜주는 데는 법에 의해 가능할 뿐 윤리적 문제까지 강제 제한할 수는 없다. 이 때문에 윤리란 공동체를 유지하는 최고의 가치가 된다. 가장 강력한 국가는 개인의 생명과 재산의 위험을 다른 국가나 공동체로부터 지키는 데 앞장서지만 개인과 개인의 윤리적인 문제는 법에 규정된 것 이외에는 강제할 수 없는 것이다. 윤리는 무형의 인간 가치를 지키는 데는 최고의 규범이라 할 수 있다.

법처럼 글로써 제한하지 않지만 인간만이 가진 양심,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타인에 대한 배려, 희생 등의 관한 사회적 규범이기 때문에 사회 구성의 최고 규범이라 말해도 무방할 듯하다. 윤리는 원래 제한적 규정을 갖지 않는다. 다만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만 규정한다. 예를 들어 일부일처제 사회에서개인의 생각과 이익을 위해 둘 이상의 배우자를 선택해 같이 살 수 없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은 윤리적 규범에 어긋난다고 규정한다.

그러나 어떻게 처벌해야 한다는 규정은 두지 않는다. 그러나 국가는 법에 윤리를 바탕해서 처벌할 수 있는 법 조항을 비로소 가질 권리가 생기는 것이다. 이상은 윤리에 대한 독자의 견해일 뿐임을 미리 밝히고 이 책을 읽어나간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서 윤리가 무엇인지, 그리고 현대사회에서 윤리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탐구한다. 저자는 주제에 썼듯이 윤리가 '좋은 삶'이라고 주장한다. 윤리는 삶과 떨어질 수 없고, 고통 없는 삶,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윤리, 좋은 윤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윤리를 정립하기 위해서는 먼저 윤리가 삶과 뗄 수 없는 존재이며 좋은 삶 그 자체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얘기한다. 좋은 삶과 좋은 행위가 행복을 보장하고, 윤리적인 삶은 바로 좋은 행위와 좋은 생각을 낳고, 좋은 행위와 좋은 생각은 좋은 삶을 낳는다는 선순환적인 삶으로서의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윤리를 탐구하는 이 책은 저자의 이전작인 '정의의 미래 - 공정'과 연결되어 있어 먼저 윤리를 정의와 비교하면서 윤리의 성격을 드러내고 있어 함께 읽어보면 윤리와 정의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저자는 착하고 친절하고 마음 약한 사람들이 의지해야 할 것이라고 윤리를 규정한다. 가장 강조하는 부분이다. 윤리와 삶은 떨어질 수 없다는 점, 좋은 윤리를 가져야 좋은 삶을 살 수 있고, 윤리가 없다면 좋은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한다. 윤리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윤리는 모두에게 필요하지만 특히 착하고 친절하고 마음 약한 사람들을 위해 필요하다. 착하고 친절하고 마음 약한 사람들은 압도적인 다수다. 이들이 행복하면 사회는 행복해진다. 윤리는 개인과 공동체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특히 개인에게는 '좋은 삶'을 보장한다. 윤리는 여러 얼굴, 여러 단계를 가지고 있다.

좋은 삶이 여러 가지로 구성되듯이 윤리도 여러 가지 얼굴, 단계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개인과 세상을 움직이는 큰 가치들이 모두 여러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하나의 의미로 고정할 수 없다. 다양한 측면을 탐구함으로써 윤리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다. 저자의 명쾌하고 통찰력 있는 윤리관이다. 독자도 공감하고 동의한다. 다만 사회 구성원이 친절하고 마음 약한 사람들이 많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아지는 특수한 상황에 대한 고민은 엿보이지 않아 약간은 아쉽다.



그러나 저자의 윤리에 대한 탐구는 굉장한 통찰력이 있고, '윤리적인 삶'이 이뤄지는 좋은 사회이라는 주장에 적극 동의한다. 윤리를 탐구하는 이 책은 먼저 윤리를 정의와 비교하면서 윤리의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윤리는 정의에 비하여 따뜻하고 공동체를 중시하고 보편적이고 영적인 측면이 강하다. 정의는 제도와 가깝고 윤리는 삶과 가깝다. 정의는 부분적이지만 윤리는 삶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윤리의 출발점은 마음이다. 마음에서 생기는 느낌, 감정 등이 출발점이다. 양심, 측은함, 부끄러움, 수치심 등이 출발점이므로 정의나 다른 제도에 비하여 훨씬 자연스럽다. 자연스러운 만큼 피하거나 무시하기 어렵다. 윤리가 항상 강조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마치 윤리가 상대방을 비판할 때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되는 것은 바로 윤리가 삶, 사람의 마음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마음에서 출발하는 윤리를 다섯 가지로 구성된다고 밝힌다. 독자가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이다. 편의상 다섯 가지로 구분하고 있지만 서로 서로 연결성을 갖고 윤리의 의미부터 고도의 윤리의 방향, 현실에서의 적용 등이 모두 집약돼 있다.

첫째, 법률준수, 범죄 저지르지 않는 것이 윤리다. 이것만으로도 착하고 친절하고 마음 약한 시민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다. 이 분명한 이치도 최근 법률을 경시하고 범죄를 일상적으로 저지르는 탐욕과 분노의 사회에서는 소중한 가치가 되었다. 탐욕과 분노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법률을 준수하는 것만으로도 평화가 보장된다. 그러나 이 측면만이 있다면 윤리는 법률과 다르지 않다.



윤리는 둘째, 예의, 공손, 품위로 드러난다. 사람사이의 관계는 법률만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암묵적인 수많은 질서와 태도가 있다. 그 질서가 잘 운영될 때 사람 사이의 관계도 잘 유지되고 개인의 삶도 좋아진다. 다른 사람을 대하는 기본태도인 예의, 공손, 품위는 모든 윤리강령에 포함되어 있다.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자신에게 좋은 삶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덕목도 최근 중요해졌다. 남에 대한 공격은 독해졌고 표현은 거칠어졌다. 고성과 욕설이 난무한다. 분노가 넘치는 사회에서 예의, 공손, 품위는 더욱 필요하다.

윤리는 셋째, 존중, 공감, 신뢰로 나타난다. 이 단계는 상대방을 적극적으로 이해하는 단계다. 이 단계에서 윤리는 상대방에 대한 무관심을 벗어나 상대방의 행복, 건강, 평화, 복지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상대방을 이해함으로써 상대방에게 중요한 것을 준다. 이렇게 서로에게 중요한 것을 주고받음으로써 신뢰를 교환하고 공동체를 형성한다. 신뢰가 태어나 사회적 자산으로 발전할 수 있다. 사회적 자산인 신뢰는 개인의 행복, 건강, 평화, 복지를 위한 무형의 자산이다.



윤리는 넷째로 개인의 정체성을 구성한다. 개인의 정체성은 여러 가지 부분 정체성으로 구성된다. 부분 정체성 중의 하나가 바로 윤리 덕목이다.

윤리 덕목을 제대로 익히느냐 익히지 못하느냐에 따라 개인의 생존 및 출세가 결정된다. 그리고 개인의 통일성도 좌우된다. 정체성에는 좋은 정체성과 나쁜 정체성이 있다. 그리고 정체성은 부족해서도 안되고 넘쳐서도 안된다. 부족한 정체성은 외부 사물에 자신의 행복을 맡기고 과잉 정체성은 타인을 희생시킨다.

윤리는 마지막, 다섯째로 영적인 삶으로 이끈다. 좋은 삶은 행복한 삶이고 행복한 삶은 바로 영적인 삶과 연결되어 있다. 사람은 영적인 삶, 인생의 목적과 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 윤리는 완전히 영적인 가치는 아니지만 영적인 삶의 기초를 이룬다. 모든 종교가 윤리적인 계율을 가지고 있는 이유다. 위 다섯 가지를 독자가 왜 가장 좋아하는 부분으로 뽑았는지는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이해할 것으로 믿는다.



윤리에 대한 이런 정의는 저자가 이 책에서 가장 강조하는 생각이다. 윤리의 여러 얼굴, 여러 단계를 봄으로써 윤리의 성격을 분명하게 이해한다. 윤리는 삶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좋은 윤리가 있어야 좋은 삶을 살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윤리는 경제와 정치를 견제한다. 경제와 정치가 중요해지는 현대사회에서 윤리가 경제와 정치를 견제하지 않으면 경제의 폭주, 정치의 폭주가 발생한다. 좋은 삶을 적극적으로 지향하는 윤리를 통하여 경제와 정치가 좋은 삶이라는 궤도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경제는 과학과 함께 스스로 자제할 줄 모른다. 자본의 힘으로 과학의 힘으로 한계를 확장하지만 정작 중요한 문제는 윤리의 힘으로 통제되어야 한다. 핵무기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지만 만들어서는 안되고 치명적 바이러스도 만들 수 있지만 만들어서는 안된다. 인간복제 역시 같다. 정치는 주권의 표현이므로 자제를 모른다. 하지만 정치 역시 통제되어야 한다. 국회가 모든 청년을 고용하는 법률을 만들더라도 실제로 청년을 고용하는 것은 기업과 행정부다. 국회는 피부색에 따라 사람을 달리 대하는 불평등한 법을 만들 수 있다. 그렇지만 윤리적인 시민, 민주시민은 이를 용납하지 않는다. 윤리의 힘으로 통제될 때 국가는 인간의 얼굴을 한 권력이 된다.



이에 따라 현대사회는 윤리에게도 도전이다. 윤리가 해결해야 할 현대사회의 문제는 공동체의 붕괴, 단기주의, 초과잉과 불평등, 직업윤리 등장, 인구감소, 세계화 등이다. 이들 문제는 현대 사회의 핵심문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많은 지식인, 지성인들이 노력하고 있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문제들은 경제적 관점, 정치적 관점과 함께 윤리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점이다. 경제를 성장시킨다고 하여 공동체 붕괴나 단기주의, 초과잉과 불평등을 해소할 수는 없다. 정치 역시 불충분하다. 개인에게 좋은 삶을 보장하는 윤리가 경제, 정치와 함께 역할을 해야 한다. 이 부분에서 저자는 현대사회의 문제점을 윤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이 부분 역시 저자가 핵심적으로 강조하는 분야다. 공동체의 붕괴에 따른 실존의 위기는 심각하다. 인간은 타인, 동물, 환경, 자연과 연결되어 있는 유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연결성, 총체성을 잃을 때 인간은 고통을 겪는다.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고 궁극적 행복을 이룰 수 없다. 단기주의 역시 현대 자본주의의 핵심적인 사조로서 경계해야 한다. 이동시간은 더 단축되었지만, 그리고 같은 물건을 더 빨리 생산하지만 현대인에게 시간은 항상 부족하다. 이것은 단기주의를 부추기는 정치, 경제적 구조 때문이다. 단기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적인 공동체가 필요하다. 직업윤리 등장 역시 충분한 정보 제공에 따른 자기결정권, 프라이버시 보호라는 측면에서 현대 윤리에 큰 영향을 미친다.



윤리는 삶과 떨어질 수 없다. 고통 없는 삶,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윤리, 좋은 윤리가 반드시 필요하다. 윤리는 제대로 정립해야 하고 공유해야 한다.

윤리가 위기일수록 윤리의 중요성은 높아진다. 윤리를 정립하기 위해서는 먼저 윤리가 삶과 뗄 수 없는 존재이며 좋은 삶 그 자체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좋은 삶과 좋은 행위가 행복을 보장한다. 윤리적인 삶은 바로 좋은 행위와 좋은 생각을 낳는다. 좋은 행위와 좋은 생각은 좋은 삶을 낳는다. 삶과 행위는 모두 윤리와 관련되어 있다. 이점을 각성하는 것이 윤리의 출발점이다.

한국인에게는 윤리친화적인 경험이 있다. 산업화와 민주화 성공의 경험은 좋은 삶을 가능하게 만드는 풍부한 원천이다. 근면하고 성실하고 남을 위해 희생할 줄 아는 자세, 좋은 제도를 만들어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고 모두가 평등하게 살 수 있는 민주주의를 향한 불퇴전의 자세는 한국인의 윤리를 위한 중요한 원천이다. 이를 더욱 발전시켜야 한다. 산업화와 민주화는 여전히 우리의 큰 자산이다.

윤리는 정의, 공정, 개혁과 같이 가야한다. 윤리가 정의, 공정, 개혁의 내용을 채우고 정의, 공정, 개혁으로 윤리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야 한다. 개혁 없는 윤리는 공허하고 윤리 없는 개혁은 더 공허한 법이다. 윤리적 삶은 행복한 삶과 동의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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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밤마다 수다를 떨었고, 나는 매일 일기를 썼다 - 어느 페미니스트의 우한 생존기
궈징 지음, 우디 옮김, 정희진 해제 / 원더박스 / 2020년 11월
평점 :
절판



온 세계를 팬데믹 상황으로 몰아넣은 코로나 감염병이 진앙지는 중국 우한이었다. 독자는 첫 환자 발생이 올해 1월 하순으로 기억한다. 코로나의 정체도 몰랐으나 호흡기 감염병이라고 했던 것도 똑똑히 기억난다. 시장이었던 것 같은데 중국의 시장은 사람과 물건의 양을 보면 상상을 초월하는 곳이 많다. 인구가 1000만 명이나 되는 대도시 우한은 이때부터 공포의 도시가 되고 말았다. 도시 봉쇄령이 내려짐과 동시에 거리는 유령의 도시처럼 썰렁했고, 인구 1000만의 활기는 찾을 수 없었다. 가끔 순찰 도는 경찰(공안)차만 카메라에 잡힐 뿐이었다. 이때부터 우한은 보도를 통해 본 것밖에 없게 됐다.

도시가 봉쇄된 만큼 아마 보도도 쉽지 않은 탓이리라. 그렇다고 인구 1000만 명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을 리는 없다. 무언가 할 것이다. 보도만 안 될 뿐이지. 에세이집 제목 같은 이 책 『우리는 밤마다 수다를 떨었고, 나는 매일 일기를 썼다』의 저자 궈징은 2019년 11월 우한으로 이사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한 달쯤 지난 12월 30일 원인 불명의 신종 폐렴이 우한에서 발견되고, 이 병의 전파로 이듬해 1월 10일 첫 사망자가 발생한다. 당시 우리가 접했던 보도는 한참 뒤의 일이다. 왜 정확하게 보도되지 않았는지는 중국의 언론 자유라든지, 정치 제제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훗날 코로나19(COVID-19)로 명명된 이 전염병은 중국 전역으로 급격히 번졌으며, 2020년 1월 23일 진원지인 우한시는 전격 봉쇄된다. 우리에게 보도되기 시작한 것은 봉쇄령이 떨어진 이후인가 보다.




‘어느 페미니스트의 우한 생존기’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은 1월 23일부터 3월 1일까지 39일 동안 궈징이 봉쇄된 우한에서 SNS에 올린 일기 모음이다.

1인 가구주, 서른 살, 여성,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우한에서 겨우 한 달 남짓 지낸 이방인 신분인 궈징은, 사회적 자원이 전무한 극도로 고립된 상황에서 어떻게든 스스로 살길을 찾아야 했다. 고립감을 이겨내고 정보를 모으기 위해 매일 밤 친구들과 화상 채팅을 하고, 아프지 않기 위해 꼬박꼬박 밥을 챙겨 먹고, 틈틈이 산책을 나가서는 낯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연결지점을 만들고, 봉쇄된 도시에서 관찰한 비상식적인 일과 일상의 소소한 풍경을 기록했다. 읽다보니 우리가 잘 아는 『안네의 일기』가 연상된다. 물론 상황은 다르지만 봉쇄되고 밖에 돌아다니지 못한 채 집안에 갇혀 연명하면서 일기를 썼다는 점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른 것이다.

SNS에 게재된 그의 일기는 200만 회에 달하는 조회수를 기록했고, 《뉴욕 타임스》, 《뉴요커》, 《가디언》, BBC 뉴스, 《서울신문》 등 세계 여러 언론에 소개되어 봉쇄된 우한의 현실을 알리고 연대를 넓히는 데 기여했다는 점에 대해 이견이 없다. 여성학자이자 평화학자인 정희진은 팬데믹 시대에 “국가의 역할, 개인의 자유, 경제 활동, 봉쇄와 방역의 조건, 극도로 성별화되고 계급화된 ‘집’의 의미, 정치 지도자나 자본가 들이 ‘결정할 수밖에 없는’ 현재 자본주의 시스템” 등에 대한 '근본적인 사유의 전환이 요청'되는데, 이 책이 그 논의의 출발점으로 모범을 보인다고 말했다고 외신은 전했다.




이 상황을 일기로 써서 알린 궈징 역시 페미니스트이며 사회활동가다. 아까 독자가 언급한 안네와는 다른 신분이지만 일기 작성자의 신분이 일기의 내용에 미치는 큰 영향을 주지는 않으리라 독자는 믿는다. 한 일기는 독일 점령하의 유태인 소녀가 집안에 갇혀 지내며 쓴 일기이고, 다른 일기는 감염병 진앙지에 따른 국가의 봉쇄령 하에서 집안에 갇혀 지내며 쓴 일기일 뿐. 대학을 졸업한 2014년, 신동방요리학교 문서 작성 담당직에 지원했다가 남성만 채용한다는 이유로 거절당한 뒤 해당 학교를 법정에 고소, 중국 최초로 제기된 취업 성차별 소송에서 승리를 거머쥔다. 3년 뒤인 2017년, 뜻이 맞는 동료들과 함께 ‘074직장여성법률핫라인’을 만들어 취업 성차별에 시달리는 여성들에게 법률 지원을 해 주는 활동을 시작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광저우에서 거주하다가 2019년 11월 우한으로 이사했다. 그로부터 한 달쯤 지난 2019년 12월 말, 원인 불명의 폐렴이 우한에 퍼지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코로나19의 시작이었다. 코로나19가 급격히 확산되던 2020년 1월 23일 우한이 봉쇄되었고, 이날부터 궈징은 봉쇄된 우한에서의 소소한 일상과 전염병 시대 보통 사람들의 현실을 생생하게 기록한 일기를 써서 위챗 모멘트와 웨이보를 비롯한 SNS에 올리기 시작한다.

궈징의 일기는 웹에서의 활동을 기반으로 물리적 봉쇄를 깨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연결해 사람들 사이의 연대를 구축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책에 따르면 2019년 11월 우한으로 이사한 궈징은, 한 달쯤 뒤인 12월 30일 원인 불명의 신종 폐렴이 자기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 발생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훗날 코로나19(COVID-19)로 명명된 이 전염병은 이듬해 1월 10일 첫 사망자를 낳았고, 우한시를 비롯한 중국 전역으로 급격히 번져 나갔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중국 정부는 2020년 1월 23일 우한시 봉쇄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내린다.

봉쇄는 전격적으로 시행되었다. 봉쇄에 임박해서 공고가 난 데다 봉쇄 기간과 생필품 공급에 대한 계획조차 공지되지 않아 사람들은 패닉에 빠졌다. 거리에서 사람과 자동차가 사라지고, 가게들은 전부 문을 닫았으며, 약국과 마트에서 순식간에 물품이 동나는 가운데 사람들은 식량이며 생필품을 구하려고 여기저기 길게 줄을 섰다. 전염병에 대한 공포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 우한 사람이 격리되거나 폭력의 대상이 되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 우한에서도 더 가장자리에 궈징이 있었다. 1인 가구주, 서른 살, 여성,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곳에서 겨우 한 달 남짓 지낸 이방인. 사회적 자원이 있으려야 있을 수 없는 신분, 기능을 멈춘 도시라는 극도로 고립된 상황. 하지만 궈징은 어떻게든 스스로 살길을 찾아야 했다.

전염병에 대한 정보도, 재난 상황에서 살아가는 방법도 모두 턱없이 부족했던 그는 웹을 통한 연결을 시도한다. 그것을 통해 물리적 봉쇄를 깨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절박함이 있었다. 그렇게 그는 친구들과의 화상 채팅과 일기 쓰기를 시작한다.



‘어느 페미니스트의 우한 생존기’라는 부제를 이 책은 봉쇄가 시작된 2020년 1월 23일부터 3월 1일까지 39일 동안 궈징이 SNS에 올린 일기 모음이다. 고립감을 이겨내고 정보를 모으기 위해 매일 밤 친구들과 나눈 화상 채팅 이야기, 아프지 않아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꼬박꼬박 밥을 챙겨 먹고 운동을 한 이야기, 틈틈이 나간 산책 그리고 길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 이야기, 봉쇄된 도시에서 일어나는 비상식적인 사건과 일상의 소소한 일들, 고립된 채 지내는 그의 내면 풍경이 담겨 있다.

하지만, 거리뿐 아니라 사람들의 목소리까지 봉쇄되던 중국에서 궈징의 개인적인 일기는 더 이상 개인적인 것에만 머물지 않았다. 총 조회수가 200만 회에 달하는 그의 일기는 어느새 중국 각지의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연결되어 불의한 사회를 고발하고 연대하며, 앞날이 불투명한 시기에 위안과 희망을 주고받는 통로가 되어 있었다.

“인터넷에서 어떤 사람이 리원량 추모 활동을 제안했는데, 밤 8시 55분부터 9시까지 불을 끄고 묵념한 뒤, 9시부터 9시 5분까지는 빛을 내는 거면 뭐든 손에 들고 창밖을 비추면서 다 같이 호루라기를 불자는 것이었다. (중략) 내 방 창문 밖으로 보이는 건물은 평소 빛이 드문드문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런데 9시가 되니 몇몇 건물 귀퉁이에서 미약한 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빛이 되었다. 그건 봉쇄를 뚫는 빛이었다.”(p. 140)



팬데믹의 한복판에서 경험하는 내일을 알 수 없는 막막함, 삶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는 무력감, 시민을 책임지지 않는 국가에 대한 분노가 뒤섞인 채로 지내던 궈징에게는 삶을 붙잡아 주는 닻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 닻이자 부조리한 현실에 맞서는 무기는 매일 쓰는 일기, 그리고 친구들과의 수다인 ‘밤의 채팅’이었다. 궈징은 이 두 가지가 자신의 하루하루를 붙잡아 주었다고 몇 번이고 고백한다.

구체적인 상황과 정도야 제각각이겠지만 우리 역시 그처럼 고립된 현실 속에서 겨우겨우 살아 내고 있다. 하지만 궈징의 말처럼 “그래도 열심히 살아가야 한다. 열심히 살아가는 것도 일종의 투쟁이다.”(p.135) 그러려면 우리를 삶에 정박시키는 닻, 그 고립을 깰 수 있는 무기가 필요하다. 글쓰기, 수다, 규칙적인 식사, 산책, 운동, 독서, 반려종과 함께 살기 등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 괜찮다. 중요한 건 직접 시도하는 것이다.

봉쇄된 우한에서 39일 동안, 궈징은 가끔만 실의에 빠지고 대체로 명랑하게 이 일을 해냈다. '안네의 일기'가 다시 떠오른다. 직접 보진 않았지만 안네도 그랬으리라 생각한다.



여성학자이자 평화학자인 정희진은 〈팬데믹 시대 인간의 조건〉이라는 이 책의 해제를 통해 코로나 시대에 우리에게 지워진 과제를 이야기한다.

“국가의 역할, 개인의 자유, 경제 활동, 봉쇄와 방역의 조건, 극도로 성별화되고 계급화된 ‘집’의 의미, 정치 지도자나 자본가 들이 ‘결정할 수밖에 없는’ 현재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진단, 인류의 미래에 대한 구상은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 근본적인 사유의 전환이 요청되는 이때, 그 출발점으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각자의 구체적인 기록이라고 강조하며 이렇게 글을 맺는다. “그러므로, 다양한 『우리는 밤마다 수다를 떨었고, 나는 매일 일기를 썼다』들이 나와야 한다. 이 책은 그 모범적 선구이다.”

많은 이들이 이 책에 공감하길 바란다. 그리하여 더 많은 수다와 더 많은 기록으로 이어지기를, 그리고 그것들이 이 시대를 슬기롭게 건널 수 있도록 우리를 안내하기를 기대한다.



'코로나 19' '코로나 팬데믹' 등으로 불리우는 이번 감염병 사태는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이라고 정부나 언론은 발표했다. 감염병 전문의사들 주축으로 방역 기구가 만들어지고 적극 방역이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정부는 '선제 방역'을 실시했다. 감염 경로를 찾아들어가 그 경로에 있는 확진자를 찾아내 치료하고, 더 많은 확진자가 발생하는 것을 미리 막는 방역 방법이다. 다행히 국민들의 대대적인 협조로 대한민국은 '방역 모범국가'로의 영예로운 칭호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일부일 뿐이었다는 것을 우린 경험했다. 잠깐 방역 대책이 느슨해지면 어김없이 확진자 대량 발생 사태가 이어졌다. 집단 집합 장소인 유흥업소를 통한 확진, 대중 집회를 통한 대량 확진, 이제는 무증상 감염자에 의한 확진자의 대량 발생으로 10개월 간 해온 방역 활동이 무위로 돌아가는 상황에 이르렀다. 지금은 하루 확진자 300명 안팎의 추세가 연일 이어지고 정부는 연말까지 다중 이용 업소, 사설 학원 등 10명 이상의 집회 등을 전면 억제하기로 해 또다시 자영업자 등 사회적 약자 계층의 생계가 막연해지게 됐다.


집에 돌아와 촛불 하나를 켜 놓고 리원량을 애도했다. 샤워를 하다가 휴대폰으로 〈인터내셔널가〉를 반복 재생시켜 놓고 목놓아 울었다.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슬픔이자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분노였다.(p. 136)



우한은 봉쇄되었지만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생활했다. 매일 일을 하며 점점 올라가는 물가에 겨우 채소와 필요한 물품을 사며 살아가고 있었다. 점점 봉쇄된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다리에서 뛰어내리는 사람도 생겨났다. 코로나19 확진자로 판명되었지만 병원에서 더 이상 받아주지 않자 막다른 지경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이런 안타까운 이야기는 우리에게 하나의 영감을 주기도 한다. 방역에 있어서, 국가에게 그리고 개인에게도. 책에서는 또 한 가정의 어른들 모두가 코로나19에 걸려 격리되어 있었고 집에는 어린 아이 둘만 남게 된다. 어린 아이들을 돌봐 달라는 부탁을 받기도 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마스크 구하기도 힘들어진다. 인터넷을 통해 마스크를 구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지만 마스크는 구할 수 없었다. 저자는 채팅방에서 친구들과 소통하며 우한 봉쇄가 풀리는 4월초까지 일기를 썼다고 한다. 궈징은 그 상태에서도 살아 있음을 증명하려 했다.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면서... 안네와 같다. 그것은 우리에게 이젠 희망의 불씨를 살린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면 살아갈 수 있다. 그러니 버티고 살아내야 한다.


한 부부가 입구에서 마스크가 있느냐고 물었다. 남자가 입구에서 좀 떨어진 곳에 서 있으니까 여자가 말했다. “이제 보니까 당신 말이야, 사람 많은 곳에만 오면 매번 한쪽에 뚝 떨어져 있더라.”(p. 87)

친구가 물었다. “도대체 잔인한 게 바이러스니, 아니면 인간이니?”(p. 320)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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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불행한 대통령들
라종일 외 지음 / 파람북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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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누구나 "우리나라 대통령들은 왜 모두 불행했을까"를 생각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독자도 정치에 뜻은 없지만 선거를 할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물론 독자가 투표한 대통령도 있고 표를 주지 않은 대통령도 있다. 박정희 대통령까지는 독자에게 선거권이 없었지만 노태우 대통령부터는 독자에게도 선거권이 있어 대통령 선거 때는 빠짐없이 투표해왔다. 그때마다 누구에게 투표하는지와 관계 없이 퇴임 후에도 존경 받는 대통령이 되기를 바랐다. 당연히 민주 정치가 안정돼야 우리의 삶이 안정되고 경제적으로도 더 나아질 수 있을 거란 기대 때문이지만 결과는 늘 불행한 모습을 갖고 왔다. 무사히(?) 대통령직을 마친 후에도 대통령의 불행은 계속됐다. 대체로 정치적 이유가 원인이다.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도 5.18 이후 엄청난 부담을 안고 차례로 대통령을 했지만 결국 대통령을 그만 둔 후에는 감옥을 가고 최고 사형까지 선고 받은 바 있고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 두 사람은 지금도 영어의 신세다. 그나마 민주화 투쟁을 했던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등은 정치적 이유로 불행하지는 않았지만 가족이나 주위 사람들에 의해 어려움을 겪었다. 자신이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동안 자식이 감옥에 가고 형제가 가고... 결과적으로 결코 행복한 대통령의 모습은 보여주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같은 민주주의 대통령제를 갖고 있는 미국은 역대 대통령이 불행한 길을 걸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초대 워싱톤 대통령부터 현직 트럼프 대통령까지. 물론 이런 저런 문제로 사임을 한 대통령은 있고, 암살 당한 일도 있지만 개인적 비리나 정치적 이유로 불행한 대통령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린 왜? 민주주의 역사가 짧아서인가, 아니면 몸에 맞지 않은 민주주의란 옷을 억지로 입어서인가. 그런 말은 설득력도 없고 역사상 그런 일도 없다. 이 책 『한국의 불행한 대통령들』은 이유를 살펴보고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쓰인 책이다.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국정을 운영하는 최고 책임자일 뿐 아니라, 정치인 개인적 차원에서도 다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사전 검증과 공개 경선이라는 험난한 과정을 통과한 후, 국민 다수의 선택까지 받아야만 비로소 가능하다. 하지만 이런 역경을 뚫고 전 국민에게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여 한 나라의 최고 책임자 자리에 오른 대통령의 끝은 끊임없이 불행했다.

이러한 현실은 한반도의 반대쪽에 있는 북한과 비교해보면 더욱 역설적으로 다가온다. 모든 면에서 최악의 상황인 북한의 역대 지도자들은 평생 안정된 집권을 누리며 신처럼 추앙을 받다가, 죽은 후에는 자기 자손에게 고스란히 그 절대 권력을 물려주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어디에서 생겨난 것일까? 한국 역대 대통령들의 불행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인 걸까?




“우리의 첫 번째 대통령은 망명을 간 후 작고했다. 두 번째는 측근에게 살해당했다. 세 번째 네 번째 대통령들은 모두 감옥에 갔다.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대통령의 경우는 자신들은 감옥에 가지 않았지만, 자손들이 감옥에 갔다. 자 살펴보자. 분명히 상황은 조금씩이라도 좋아지고 있지 않은가. 처음 자유롭고 공개적인 민주 정치를 해보는 나라로서는 이 정도는 긍정적인 발전이 아닌가.”

이 책의 기획자이자 공동저자인 라종일이 영국에서 대사로 근무할 때, 당시 당선된 노무현 대통령을 돕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별의 자리에서 한 지인이 한국의 대통령들은 대개 그 끝이 좋지 않았다며 걱정하는 말에 대한 그의 대답이다. 하지만 그 이후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까지 불행은 어김없이 반복되었다. 도대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식민지 지배와 전쟁의 폐허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루고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성장한 대한민국. 하지만 한국을 성공적인 나라로 이끈 역대 대통령들은 왜 한결같이 불행했을까? 『한국의 불행한 대통령들』은 정치, 외교, 언론, 리더십 등 각 분야 최고의 전문가들이 역대 대통령들이 불행한 말로를 겪게 된 다양한 원인들을 분석하고, 이러한 불행을 더 이상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처방과 대안을 제시한다.



우리나라 대통령들은 외교에서 특별히 많은 부담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서쪽에는 세계 최대의 인구와 2위의 경제력을 가진 중국이 있고, 동쪽에는 한때 한반도와 동아시아를 점령했고 지금도 세계 3위의 경제력을 가진 일본이 있다. 북쪽에는 세계 최대의 영토와 2위의 핵전력을 보유한 군사 대국 러시아가 있으며, 세계 패권국인 미국은 우리나라와 일본을 동맹으로 묶어 동아시아 전략의 핵심으로 삼고 있다. 게다가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단되어, 북한에는 주체사상과 핵무기로 무장한 세습 정권이 3대를 잇고 있다. ‘외교 함정’이라고 불릴 정도로 힘겨운 우리의 외교 현실은 늘 대통령의 정치적 입지와 국정 과제 추진 동력을 빼앗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지정학적 이유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나라 대통령이 되면 누구나 겪어야 할 숙명적인 의무이고 책임이다. 그 과정에서 잘못된 정책이 있었다고 해도 처벌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대통령직 수행하다 결과가 잘못된 데 따른 것이고, 이 문제는 언제까지나 지속될 문제이기 때문이다. 또 국민의 의사에 반했다고 볼 수도 없다.



이 책은 우리나라 대통령들의 불행에 대해 한 가지 이유만 지적하지 않는다. 앞서 말한 '외교 함정'뿐만 아니라 언론과의 관계, 정치 구조, 리더십 등으로 나뉘어 각 분야의 전문가들의 글을 실었다. 그만큼 우리나라 대통령직은 다방면에 권한과 책임을 모두 갖고 있기 때문이다.

언론과도 관련이 깊다는 점도 부각된다. 1970년대 이후 한동안 권위주의 지배 체제가 한창일 때, 국민들은 언론의 자유가 권위주의 독재에 맞서는 데 반드시 필요한 도구라고 인식했다. 하지만 언론이 정치 권력과 협력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오히려 언론을 민주주의 발전의 장애 요소라 여기게 되었다. 특히 한국 정치에서 권위주의 체제와 군사 정권에 맞선 대표적인 인물인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과 언론의 관계에는 험악한 적대적 순간이 여러 번 존재했다. 이 부분은 전두환 집권 당시 언론통폐합을 통해 소수 언론만 특혜를 주는 식으로 입을 틀어막았기 때문이란 말과도 동의어다. 가장 큰 피해를 본 세 분이니까. 이른바 보수 언론에 의해서... 사실 박정희 대통령 때는 언론에 대한 강경한 자세였지만 지배하지는 않았다.


한국 정치에서 권위주의 체제와 군사 정권에 맞서며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대표적인 인물인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과 언론의 관계는 드라마틱한 면이 있습니다. 언론과 이 세 대통령과의 관계는 그들의 정치 역정만큼이나 극적이었으며, 심지어 험악한 적대적 순간도 여러 번 존재했습니다. 실제로 이들은 권위주의와 군사 정권 아래에서 야당 정치인으로 심한 탄압을 받았던 인물이었는데, 그런 이유 때문인지 정치 권력과 유착 관계에 있던 언론을 몹시 불신했으며 그 사실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습니다.(p. 115)




또 정치 제도적인 측면에서 보면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와 ‘5년 단임제’, ‘승자 독식 제도’의 부작용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나라에 대통령제가 도입되기 전 국민이 경험해본 정치 체제는 왕조 지배 체제뿐이었다. 그렇기에 국민이 대통령을 왕조 시대의 군왕과 동일한 존재로 이해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하지만 대통령 1인에 대한 지나친 권력 집중은 산업화 시기에는 민주주의를 희생시켰고, 민주화 이후에는 소통과 타협을 부정하는 권위주의의 잔재로 남아 민주적 정치 문화의 정착을 어렵게 만들었다. 더불어 장기 독재를 막기 위해 도입한 ‘5년 단임제’는 장기 독재를 막는 데에는 기여했으나 국정 운영의 불안정성과 비효율성을 초래했고, 상대방에 대한 관용과 포용이 설 자리가 없는 ‘승자 독식 제도’로 이어졌다. 이 점은 앞으로도 개선될 여지는 많지만(선거제도 개선)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는 없다. 지금 문재인 정권 때도 마찬가지다. 여와 야의 정치적 속셈이 다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권위주의 사회에서 자라난 역대 대통령들에게는 민주적 리더십이 부족했다. 청와대가 국민과 소통하는 방식은 지극히 일방적이고 단순했으며, 국민에게 그저 통고하는 행위를 국민과의 소통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짙었다. 국민과 공감을 나누는 양방향 소통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이 점은 가장 아쉬운 부분이다. 앞선 대통령들이 잘못해 왔기 때문에 양방향 소통이 어렵게 된 것이다. 그것은 권위 의식이라고 말할 수밖에 달리 표현할 방법이 그리 많지 않다. 대통령은 일반인과는 특별히 다른 사람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생각의 출발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대통령 자신이 그렇다기보다는 대통령의 측근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독자는 생각한다. 대통령의 권위가 클수록 자신들의 권위도 그만큼 커지니까.

민주적 헌정 질서에 의한 국민 선거로 이루어진 대통령인데도 막상 대통령직 수행에는 자신을 대통령으로 있게 해준 수행 측근들의 공도 무시할 수는 없을 테니. 이 점은 정당 정치가 올바로 서지 못했다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고 독자는 생각한다. 아니 이 책을 통해 확실히 알았다는 말이 훨씬 정확하다.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정치 제도가 대통령의 개인 리더십 스타일에 따라 정치에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겉으로 드러난 민주 사회의 모습과는 달리 우리의 대통령제 통치 구조는 일방적 하향식 형태인 중앙 집권적 형태로 운영되고 있으며, 행정부에 대한 입법부와 사법부의 견제 기능이 미약한 상태에서 임기 초반 대통령의 리더십에 의해 일방적 전횡과 독선적 행태가 구조화되는 제도라 하겠습니다.(p. 156~157)




역대 대통령들의 정치적 역정과 행태를 돌아보면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을 보려 하고, 정치 공학적 차원에서 국민이란 이름을 내세울 때가 적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정치 문화 역시 그에 맞추어 ‘대권’이란 이름으로 전근대적으로 형성되어왔다. 그러나 현재의 지도자란 자기희생을 통해 국민들의 신뢰와 존경심 속에서 국민적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지도자가 된다는 것, 특히 한 국가의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개인에 게 축복이면서도, 더 좋은 후보자들이 국가와 국민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정치적 기회를 빼앗은 채무일 수도 있다. 겸허한 마음으로 국민과 소통하고 후진적 정치 문화를 개선해나갈 때 비로소 대통령의 불행을 멈출 수 있을 것이다. 보스턴 필하모닉 지휘자 벤자민 젠더의 말은 우리 시대 진정한 대통령의 의미를 생각하게 만든다. 이 책에서 쓴 말이 끝내 귓전을 맴돌다 머릿속으로 박힌다.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지휘자는 자기는 정작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 그는 얼마나 다른 이들로 하여금 소리를 잘 내게 하는가에 따라 능력을 평가받는다. 다른 이들 속에서 잠자고 있는 가능성을 깨워서 꽃피게 해주는 것이 바로 리더십이 아닐까?”


대통령에게는 동양에서 전통적으로 군림해온 왕 또는 황제의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 있어서, 일반 국민들은 대통령과 직접 대화하는 것에 적잖은 어색함을 느낍니다. 또한 왕조 국가에서 지도자의 메시지는 미리 계획되는 것은 물론이고 국민을 압도하는 위엄이 있어야 했으니, 사전 계획 없이 대통령이 국민과 소통하는 것은 대통령의 권위에 금이 간다고 느끼게 됩니다. 왕조 국가의 의식이 낳은 잔재가 사람들의 잠재적 인식 속에 깊이 자리한 것입니다. 이런 사고의 고착이 결국 그동안 한국의 대통령이 국민과 소통하는 방법을 획일적으로 제한하고, 측근과 정치적 동지, 즉 개인의 사적 관계에 기반한 비공식적 채널들로 대통령의 창을 한정하는 전근대적인 모습을 보여준 이유 중 하나가 될 터입니다.(p.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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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성 수업 - 보통 사람들을 위한
신성권 지음 / 미래북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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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계 최고 수준의 지능과 풍부한 창의력를 가지고 있는 민족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객관적으로 타당성을 갖고 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 한국인들이 머리가 좋고, 근면하기 때문에 창의성 높은 제품을 만들어내는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별로 없다.

이는 최근의 문화적 결과와 경제적 성취를 이룬 바탕에 근거한다면 이견은 별로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 한국인들은 근대화 이후 100년 동안 왜 창조성을 발휘하지 못했을까라는 의문에는 쉽게 답하기 어려울 뿐이다. 독자는 나라를 빼앗기고 일제의 교육 제도 아래서 받은 집단주의적, 획일주의적 교육이 주범이라고 생각한다. 독자의 생각은 깊은 연구 결과가 아니기 때문에 어디에 내세울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반대의견을 과감하게 낼 사람도 별로 없으리라.

그런 교육은 ‘창조성’이라는 단어에, 타고나야만 하는 절대적인 능력을 부여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창조성은 평범한 사람들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그리고 이제 발휘해야만 하는 당위성의 능력이라고 이 책 『보통 사람들을 위한 창조성 수업』의 신성권 저자의 주장이다.






이에 따라 『보통 사람들을 위한 창조성 수업』은 평범함을 타고난 대다수의 사람들이 창조성을 발휘하는 데 실용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내용을 담았다.

특별한 재능으로서가 아닌, 자기실현으로서의 창조성을 강조하며 어떻게 그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는지, 왜 발휘해야만 하는지를 전달한다.

창조성이 거창한 것이 아닌, 누구나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그리고 창조성 발현의 아주 작은 물꼬를 발견하게 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미래가 간단치 않음을 기대하게 될 것이다.

IQ 156(PERCENTILE : 99%) 이상으로 INTERTEL과 MENSA의 회원이기도 한 저자는 인간의 지능과 창조성, 무의식에 대한 각종 저술 활동을 하고 있으며 철학, 경영학, 인공 지능 분야로 그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저자의 주장에 공감하는 것은 멘사 회원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멘사 회원으로서의 경험과 미래에 대한 고민을 끊임없이 해온 사색의 결과를 바탕으로 우리 민족의 창의성을 보탠다면 우리나라 미래뿐 아니라 전 세계 인류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데 독자도 동의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대한민국이 선진국의 단계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지배적 이념과 상식에 따라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인간보다는 탁월한 사상적 높이로 정신적인 독립을 이뤄내고 기존 질서와 부조화를 자초할 수 있는 인간들이 많아져야 한다고 진단한다. 스스로를 자각하는 인간이야말로 이 세계에서 특별한, 유일한 존재가 될 완벽한 특권을 부여받기 때문이다. 이들은 내면에 자신만의 세계를 건설하여 사회의 지배적 이념과 관습을 넘어서는 창의적인 생각을 한다. 알고 보면 오늘날 존재하는 인류의 모든 문명은 이들이 내면에 품었던 꿈의 결과물이다.

자신을 탐구해 보지 못한 인간은 언제나 ‘반응하는 자’, ‘변화를 수용하는 자’로 남을 뿐이다. 자신의 특수한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다수와 동일하다는 사실에서 기쁨과 안락함을 발견한다. 이들은 소통과 공감을 빌미로 사상의 경직을 초래한다. 저자의 주장과 언급은 독자의 기대에 한 치 어긋남이 없어 보인다. 독자가 저자를 대한민국, 전 세계 인류의 창의성을 모아 위대한 창조물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주장하는 '전도사'로 인정함을 주저하지 않은 이유다.



한 마디로 대한민국이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유형의 산업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각 개인에 내포된 고유한 기질이 더욱 선명하고 탁월하게 발현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고 허락해야 한다는 이 그의 지론이다. 교육의 목적은 인간을 권위에 순응하는 존재가 아닌 자립적, 독립적 존재로 만드는 데 있다.

무의식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능력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창조성을 타고나는 것으로, 일부의 혁신가들에게 집중되어 있는 특별한 능력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창조성’이라는 개념을 우리 자신으로부터 멀리 두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창조성은 ‘누구’에게나 있다. 창조성의 발현은 이 전제를 믿고 ‘누구’ 안에 당신을 대입시키는 것에서 시작된다." 특별하고도 매우 명쾌한 전제다.




우리는 흔히 창조성을 타고나는 것으로, 일부의 혁신가들에게 집중되어 있는 특별한 능력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창조성’이라는 개념을 우리 자신으로부터 멀리 두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창조성은 ‘누구’에게나 있다. 창조성의 발현은 이 전제를 믿고 ‘누구’ 안에 당신을 대입시키는 것에서 시작된다. 5년 뒤, 10년 뒤 당신의 모습을 떠올려 보라. 여전히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고 있을 것 같은가? 주어진 일만 열심히 하는 당신이 설 곳은 없다. 이제 창조성의 발현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인공 지능 시대를 살게 될 미래에 반드시 갖춰야 할 생존 요소이다. 창조는 타고나는 것 못지않게 기술을 연마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창조성은 DNA가 아니라 DIY다. 이 얼마나 설득력 있고 흥미로운 주장인가.



이어지는 언급에 귀를 기울여 본다. 어쩌면 미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창조성이 필요하다는 것은 알지만 그 발현의 시작을 찾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보통 사람들을 위한 창조성 수업』은 그런 사람들에게 더없이 좋은 책이다. 당신의 내성적인 성격, 당신이 가진 결핍감 등이 창조성을 발현하는 데 있어 어떤 강점이 될 수 있는지를 비롯하여 구체적인 창조의 기술과 창조적 인간이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세상과의 부조화에 맞서는 배짱을 키우며 어쩌면 당신은 권위에 도전하고 실패를 당연한 수순으로 받아들이는 모험을 하며 당신을 불편하게 바라보는 타인들의 눈초리에 희열을 느낄지도 모른다.

창조의 형식과 기술을 연마하는 것은 재능을 타고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 책의 독자들이 스스로 정한 한계를 깨고 자신의 창조력을 회복하여 자신의 청사진을 좀 더 밝고 크게 그려나가길 바란다는 것이 이 책을 쓴 이유이기도 하다.



저자에 따르면 이 시대, 이 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이른바 자기계발을 하며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정작 그것은 자기 없는 자기계발에 그치고 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자기계발은 사회경제적으로 쓸모 있는 인적 자원이 되기 위해 스스로를 소진시키는 형태로 행해지며 그 중심엔 자본의 논리가 있을 뿐 '진짜 나'는 없었다고 말한다. 이 책은 진정한 자기계발이란 자신의 잠재된 개성과 가능성을 발견하고 발휘하는 것이며, 내가 남들과 다른 차별성을 토대로 나만의 색깔을 가진 삶을 살아가는 조건이 계발하는 것이라 강조한다.

이 책은 또 창의성과 창조성에 대해서 두 단어 사이의 의미의 차이를 설명하며 우리에게 왜 창의성을 넘어 창조성이 필요한지 언급한다. 창의성은 한 개인의 독창적이고 독특한 생각과 의견을 지칭한다. 이 때문에 그것은 외부로 표현되거나 제작되지 않은 하나의 아이디어에 그치는 것이라 단언한다.

이에 반해 창조성은 그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현실의 결과물로 창작하여 현실에 없는 것을 만들거나 또는 새롭게 바꾸기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책은 우리가 창의성을 가질 것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그것을 뛰어넘어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창조적인 활동이 가능하며 어떻게 시작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발전시키며 더 확장시킬 수 있는지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내용들을 설명하고 있다. 창의성과 창조성이 빛나는 사람을 요구받지만 그것이 어떻게 발현되는지 배우지 못한, 이 시대를 어느 때보다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한국인에게 이 책은 창의성과 창조성의 원리와 기술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이기를 권유한다.

창의적인 생각을 하며 창조적인 삶을 살아가길 꿈꾸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텍스트로서 한몫을 담당하리라 기대된다.

바야흐로 인류는 4사산업 시대에 시작점에 서 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비대면 사회로의 전환이 급격히 이루어져 연착륙은 어려워졌지만 지금이라도 창의성 발휘, 창조적 정신을 가다듬어 4차산업 시대를 이끌어간다면 대한민국에게 4차산업 시대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대가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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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네가 감히 우리 집안을
장병주 지음 / 맥스밀리언북하우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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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가 옛날 가문 앞세워 위세 떠는 양반집안이 생각난다. 『네가 감히 우리 집안을』은 중견소설가 장병주의 산문집이다. 우선 소설을 써온 작가가 산문집을 낸 이유가 궁금하다. 소설 쓰기가 벅차서인가?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불과 3년 전 장편소설 『벨자를 쓴 여자』를 발표한 바 있다.

이에 앞서 『스칼렛 길리아』도 썼다. 특히 '스칼렛 ~'은 사랑의 부정이라는 소재를 전면에 내세워 가부장 세대의 도덕성을 비판하며 상처받은 여성의 생존가치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런 일련의 작품 활동을 통해 이번 산문집 출간은 제목처럼 작가가 결혼해 들어간 시집의 현상을 압축해 보여주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책은 자신의 일대기를 담은 자전적 에세이, 혹은 자서전이라 봐도 무방할 듯하다.



저자의 약력에 따르면 낙산(駱山) 아래 동숭동에서 태어난 서울토박이로 숙명여고와 연세대학교 기악과를 졸업한 그녀는 음악에 대한 열정 대신 문학·미술 등에 한눈을 팔며 오랜 기간 방황한 끝에 「잃어버린 말」이 문학사상 신인상(1994년)에 당선되어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그 여자의 축제」, 「아가야 걸어라」, 「카멜레온의 눈」 등 중·단편을 잇달아 발표하였으며 첫 창작집 『비로용담을 찾아가다』(2001)를 출간, 장편 「스칼렛 길리아」(2007)와 장편 「벨자를 쓴 여자」(2017)를 발표했다.



등단 이후 인간지성의 타락, 거짓 사회에 대한 이중적 태도 등에 대한 통렬한 질문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발표했다. 현실과 상상의 공간인 새장 속의 새 날리기를 반복하며 진실을 추적해가는 “잃어버린 말”, 뻐꾸기 탁란(托卵)을 소재로 입양의 가치를 묘사한 “그 여자의 축제”, 우리 사회 부조리한 교육현장을 희화화한 “아가야 걸어라”, 진실을 외면한 죄의식으로 절필 상태에 빠진 작가의 고뇌를 다룬 “카멜레온의 눈”과 같은 중. 단편을 잇달아 발표하며 첫 창작집 『비로용담을 찾아가다』를 출간했다. 특히 사랑의 부정이라는 소재를 전면에 내세워 가부장 세대의 도덕성을 비판하며 상처받은 여성의 생존가치를 제시한 장편 『스칼렛 길리아』를 발표해 호평을 받았다는 게 문단의 설명이다.

이 산문집에는 어릴 때의 집안 분위기, 결혼 후 시가(媤家)의 시부모님과의 생활, 네 자녀와 작가로서의 활동 등 현재까지의 삶에서 작가가 집안의 행복을 위해 치열하게 노력해온 내용을 담은 14개의 '이야기'가 있다.



시어머니는 작가가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여전히 만족해하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나라 전통적 양반 집안의 생활과 관혼상제에 따른 고집이 연상된다.

어렵고 힘든 시집살이 가운데 무뚝뚝한 남편과 그리고 아이들 넷을 키우기까지 자신을 돌아볼 틈이 없었을 것이란 일반의 예상은 빗나간다. 더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끊임없는 정체성 확립을 위해 고민하고 사색한 것으로 보인다. 작가로 등단하고 지금은 중견 작가가 됐다.

세상도 변했고, 작가는 자녀에 대한 교육은 훨씬 탄력성 있게 했나보다. 심지어 제사를 마뜩찮아하는 자녀들에게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가족 여행이나 가족 행사를 대신할 정도로 시대 흐름에 따른 자녀 교육을 한 것 같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단란한 가정을 이루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자아를 찾기 위해 몸부림쳤고 꿈속에서 시어머니의 환영을 볼 정도로 억눌리며 살았지만, 그녀는 절대로 자신의 딸이나 며느리만은 그렇게 살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하나하나 해결했다고 한다. 3대 독자인 아들과 며느리에게 아들 낳는 부담은 절대 갖지 말라고 당당히 말해주고, 모든 제사와 명절 모임을 없애고 대신 자식들의 우애를 위해 아이들이 갖고 싶어하는 만남이나 여행을 준비한다. 딸들에게는 남자에게 의존하는 전통적인 모습보다는 먼저 자신의 꿈과 일을 찾으라고 교육시킨다. 쉽지 않은 일이다. 작가는 어떻게 말보다 쉽게 이런 일을 했을까. 그동안 작가가 발표한 작품 속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으리라. 사회 지식인의 타라과 이중적 생활태도, 부조리한 교육 현장에 대한 비판적인 소설을 썼다. 비판에서 그치지 않고 개선하고 바꾸어야 사회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고 강조한 것이다. 자신의 경험과 사회 발전에 대한 이념이나 철학이 이미 확고했던 것 같다.



작가는 이 책을 아직도 시댁과의 불화 속에 있는 젊은이들과 어른들이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녀의 40여 년간 며느리로, 아내로 그리고 엄마로서 고군분투한 내용이 위트 있게 그린 『네가 감히 우리 집안을』에서 세대를 조금 더 앞서가고자 노력하는 작가가 이끌어내는 한 가정의 변화를 볼 수 있다. 작가는 ‘82년생 김지영’의 엄마 세대로 보면 될 것 같다. 작가가 겪은 희생과 진정한 자아 찾기를 통해 우리들의 엄마를 보다 깊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으며, 또한 사랑하는 자식들과 사위, 며느리를 곤경에 몰지 않고 곁에 오래도록 함께 있도록 만들 수 있는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작가는 이제야 말한다. 젊은 날의 삶을. 상처와 회복 노력으로 점철된 젊을 때의 삶을 통해 오늘날 자신이 여기 있다는 듯이.

"내가 밟고 지나온 길이 아득히 멀어보였다. 계속 빠르게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처럼. 어리석고 건방졌지만 그 징그럽도록 자신 없었던 젊은 날의 삶처럼."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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