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위대한 자유 아포리즘 시리즈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우르줄라 미헬스 벤츠 엮음, 홍성광 옮김 / 열림원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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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는 고등학교 이후로 철학 책을 읽은 적이 없다. 고등학교 때도 학과목 이름이 '국민윤리'였던 것 같다. 오로지 대입만을 위해 준비하던 고등학교에서는 철학은 아무 소용이 없는 과목이었다. 교과서 안에 서양 철학자와 동양 철학자가 나온 것을 보고서야 '철학' 과목인 줄 인식했을 정도다. 고등학교 필수과목이었지만 입시에는 들어가지 않은 과목이었던 듯싶다. 고등학교 1학년 때만 수업이 있었다. 그렇게 '철학'이란 단어만 듣고 이후 철학 책을 읽은 기억이 없다. 철학과는 먼 삶을 살았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인간의 본질과 삶을 배우는 학문이라는 철학이 사회 생활에서는 필요했을까? 생각할 틈도 없었고, 일에만 매달리기에도 개인적 시간을 갖기는 어려웠다. 졸업 이후, 자충수를 두는 말이겠지만, 진지하게 철학 책 한 권 오롯이 읽지 못했다. 

이후 수십 년이 지난 코로나 팬데믹 때 재택 근무를 권장할 때 출퇴근에 사용된 시간 등 아무래도 시간이 여느 때와 비해 훨씬 여유가 있었다. 때로는 여유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이 될 지경이었다. 이때 머리를 번쩍 스친 생각이 '책을 읽자'였다. 우선 온라인 서점을 뒤지다가 니체의 책과 니체와 관한 우리 작가들이 쓴 책이 굉장히 많아 깜짝 놀랐다. 전 세계를 휩쓴 감염병과 니체는 무슨 관계가 있어서 이렇게 많은 책이 지금 이 시기에 줄지어 출간됐을까? 궁금해서 조금 더 읽다보니 '열풍'이라는 단어가 눈에 띄었다. 코로나 팬데믹이 확산되고 기승을 부리다보니 대면 소통이 불가능해지자 정신적인 우울한 환자들이 많아졌다(코로나 블루라고 표현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니체의 철학에 대한 간단한 소개도 있었다. 니체 철학은 삶의 위기 상황에서 적절한 방향을 제시해 준다는 통상적인 이야기지만 독자에게는 가슴속에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이리저리 살피다가 한 권을 골라 구입했다. 책을 읽은 지 오래된 데다 어렵다는 니체의 책을 읽으려니 도무지 무슨 말인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것도 니체의 저서를 번역한 책이 아니라, 니체 철학을 바탕으로 우리 작가가 쓴 칼럼 등을 모아 에세이 형식으로 풀어 쓴 책이었는데도 어려웠다. 며칠에 걸쳐 한 번씩 펼쳐보다 결국은 끝까지 읽는 데는 실패했다.

기왕 책을 읽기 시작했으니 낯설기는 하지만 쉽게 읽히는 치유와 위로의 메시지를 담은 에세이를 읽기 시작했다. 조금 지나서는 소설도 읽고, 간혹 전문서적에 가까운 책도 읽었다. 조금씩 옛날 학창 시절 때 열심히 책 읽던 기억도 되살아나며 독서를 다시 시작하고자 결심도 했다.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소설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책에 한 번 관심을 가지게 되자 이후엔 온라인 서점을 수시로 기웃거리게 되었다. 생활의 변화를 가져온 명백한 계기가 된 것이다. 이 무렵 신문에 난, 이른바 '니체 열풍'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언급한 서평 기사를 읽었다. 지난 번 실패를 경험한 적 있었지만 묘하게도 신문 기사는 관심이 더 갔다. 니체 철학이 어려운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그것은 니체를 연구하는 학자나 후배 철학자들의 이야기라고 한다. 일반인들이 니체 철학을 어렵다고 하는 것은 철학을 조금 알다 말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리고 이 기사는 책 한 권을 추천하고 있다. 

출판계는 지금 니체에서 '쇼펜하우어'로 관심이 바뀐 것 같다. 독자는 최근 쇼펜하우어에 관한 책도 몇 권 선택해 읽었다. 독자는 사실 쇼펜하우어를 의식적으로 싫어했었다. 염세주의자란 말 때문이었다. 그것도 고등학교 국민윤리 시간에 선생님이 한 말이었으니 그대로 믿었다. 어쩌면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때 선생님 말씀이 "쇼펜하우어는 삶을 '고통'으로 전제하고, 염세적 세계관을 가진 철학자였다"는 말을 했다. 거기에 부연한 내용은 학생들의 관심을 보이지 않고 주목을 하지 않자, 농담을 섞어 한 말이었으리라. 그런데 독자가 듣기에는 철학자의 말 한마디에 삶을 끝낸다고? 하는 의문이었다. 선생님이 들려 준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염세주의적 세계관을 갖고 세상과 인간의 삶을 이야기했던 그는 유럽의 수많은 청년들을 자살하게 했다. 그리고 그는 90살까지 살았다"는 말이었다. 선생님의 말이었기에 더욱 놀랐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읽은 몇 권의 철학 책을 통해 지금은 '철학'에 대해 기본적 소양은 갖추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 『니체의 위대한 자유』에도 나오지만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고, 책에서도 감명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철학자라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말은 니체가 신을 부정했던 것은 아니라고 역자 홍성광은 이 책에서 말한다. 니체가 그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통해 주창한 말이며, 니체는 본능적으로 무신론자라고 주장한다. 역자에 따르면 니체는 젊었을 때 신의 힘을 확신해서 신이야말로 선뿐 아니라 악의 기원임에 틀림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의 말은 불경하고 때로는 독설적이기까지 한 것은 사실이다. 그는 통상적인 의미에서 신앙인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는 기독교의 신보다 그리스의 신들에 더 호의적이다. 그가 보기에 신은 약자들의 버팀목으로, 원한에 찬 사람들을 위한 힘으로 봉사한다. 그러나 그는 신성을 거부한다는 의미의 전형적인 무신론자는 아니었다고 역자는 강조한다.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니체의 가장 유명한 저서다. 니체는 이 책에 「모두를 위한 책이면서 그 누구도 위한 것이 아닌 책」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고 역자는 귀띔한다. 『차라투스트라~』는 플라톤의 대화편이나 신약성서를 참조한 많은 패러디를 담고 있다. 근본적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인간의 삶에 다가갈 것을 제안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소크라테스나 그리스도에 가깝다. 니체가 사도 바울은 싫어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존경한 것은 사실이다. 니체는 또한 종교적 삶을 추구한 몇몇 기독교인에게 개별적인 존경을 표하기도 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차라투스트라는 기원전 6세기 고대 페르시아에서 생겨난 태양 숭배 종교인 조로아스터교 교조의 이름을 딴 것이다. 니체는 전작 『즐거운 지식』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미 차라투스트라를 언급하고 있다. 역사적 예언가처럼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어떤 전언을 지닌 현인이다. 그런데 선과 악, 신과 악마라는 이원론을 주창한 조로아스터와는 달리 차라투스르라는 일원론의 주창자이다. 

책에 따르면 1883년 2월 3일부터 13일까지 니체는 『차라투스트라~』 제1부를 집필했는데, 이렇게 독창적이고 천재적인 작품이 단숨에 쓰여지던 신성한 시각에 바그너가 베네치아에서 사망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가 한때 숭배하던 스승이 사망한 날 그의 초인, 즉 '위버멘쉬'가 탄생한 것이다. 천재 숭배의 시기, 부정의 시기에 이어 니체 만년의 가장 창조적인 시기가 이렇게 시작된다.

이 책 『니체의 위대한 자유』는 니체의 본고장 독일에서 직접 대중을 위해 기획하고 엮은 열림원의 아포리즘 시리즈 두 번째 책이다. 이 책의 편저자 우르줄라 미헬스 벤츠는 브레히트, 아도르노, 벤야민 등 세계적인 지성들의 책을 소개해온 독일의 유명 출판사 〈주어캄프〉 편집자 출신으로, 니체의 전체 사상을 간추려 8장으로 묶고 저작에서 352문장을 엄선했다. ‘자아·행복·사랑·재능·정치·사유·평판·자유’로 각 장을 포괄하는 8개의 키워드는 삶에서 떨어트릴 수 없는 뼈대와 같은 요소로, 니체는 위와 관련한 문장들을 관통해 자신으로부터 끊임없이 탈피하고 새로워짐으로써 자유롭고 위대한 ‘나’가 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번역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도덕의 계보학』 『비극의 탄생』 등을 포함한 다수의 니체 원전과 독일 철학서를 번역한 홍성광이 맡았다. 니체의 저작에서 핵심만을 추출한 짧고 굵은 아포리즘에 이어 역자 홍성광의 구체적이고도 심도 있는 「니체와 초인은 누구인가」란 제목의 〈해설〉은 ‘위대함’과 ‘자유로움’에 대한 니체의 독창적인 사유를 더욱 풍부하게 읽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출판사 측에 따르면 『니체의 위대한 자유』는 편역자에 의해 임의로 수정되지 않고 철학자 본연의 문장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스무여 권에 이르는 니체의 저작과 유고, 편지까지 방대하게 선별해내어 그의 세계관을 낱낱이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편저자 우르줄라 미헬스 벤츠는 원제를 ‘스트레스 받는 사람들을 위한 니체’로 지어 어떻게 하면 우리가 느낄 필요 없는 과도한 스트레스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내가 될 수 있는지 묻는다. 그는 스트레스에 빠진 일반 대중을 위해 니체의 말을 빌려 “삶의 상황이 주는 부담에 대처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자신을 강한 인격으로 키우”고 “자신을 편하게 만들려는 습관적인 충동”을 이겨내 지속적으로 단련하라고 요구한다. 그와 동시에 니체처럼 “필연적인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모든 불만을 버리고, 더 잘 기뻐하는 법을” 배운다고 말한다. 니체가 “위대한 문제는 모두 위대한 사랑을 필요로” 한다고 말했듯이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이러한 ‘아모르 파티’ 정신과 끝없는 자기 극복을 통해 우리는 ‘내가 나로서’ 오롯이 존재할 수 있는 자유로움, 그리고 나만의 재능과 주체적인 노력을 통한 진정한 위대함을 얻을 수 있다.

〈해설〉은 독자들이 니체의 핵심적인 철학 세계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니체가 지나온 삶의 자취와 태도, 그의 철학에 큰 영향을 미친 스승들과의 관계, 니체의 주요 저작들이 집필 당시 그의 삶과 어떻게 맞물려 있었는지에 대한 세부적인 맥락, 시기에 따라 그가 중요시한 철학 세계의 변천 등을 깊고 구체적으로 풀어내어 우리를 니체의 삶과 철학에 더욱 가까이 인도한다. 「들어가며」에서 편저자 벤츠는 묻는다. “니체가 바로 일반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초인’을 향한 엄청난 노력을 요구함으로써 스트레스에 빠뜨리는 요인들을 더욱 강화하지 않았는가?” 이에 덧붙여 역자는 니체 철학의 핵심 개념인 ‘초인’은 “슈퍼맨 같은 초인적 능력을 지닌 인물이나 독재적 영웅이 아니라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는 자유롭고 창조적인 인간”임을 강조하고 있다. “스스로 주체적인 입장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여 같지만 조금씩 바뀐 모습으로 힘차게 자꾸 되돌아오는, 자유정신을 가진 인간이 바로 초인이다.”라고 정의한다. 자신을 극복하고 끊임없이 탈바꿈하는 ‘위대함’과 오직 나만의 가치를 세울 줄 아는 ‘자유로운’ 정신이 결국 이 책이 전하고자 하는 바라고 역설한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니체 본연의 목소리를 읽고 스스로 삶을 쟁취하는 법을 알 수 있을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이 책은 앞서 설명한 대로 8개의 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자신의 삶만을 읽으라-삶의 이유를 오롯이 자신 안에서 찾아야 한다」, 2장 「웃음을 발명하라-비통함 속에서 만들어낸 행복으로 인간은 시간을 잊는다」, 3장 「자애로운 열정을 지녀라-타자를 향한 사랑이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든다」, 4장 「다른 사람의 힘에 의지하여 오르지 마라-자신만의 참된 재능과 노력으로 위대함에 이를 수 있다」, 5장 「정치권력의 쳇바퀴가 되지 말아라-국가적 우상이 아닌 개개인의 인간성이 중요하다」, 6장 「뇌의 주인임을 믿고 주체적으로 사고하라-생각하는 것은 뇌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7장 「평판으로부터 자유로워져라-고난을 무릅쓰고도 자신의 경험과 열정만을 따라야 한다」, 8장 「그대 자신의 스승이자 창조자가 되어라-인생이란 숙명도 사기도 아닌 끝없는 깨달음을 위한 실험이다」 등이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법은 두 가지다. 바로 빠른 죽음과 오랜 사랑이다.(p.93)


사랑에 실패한 니체는 고통스러운 운명에 스스로 기쁨의 축복을 내리고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것으로 아픔과 우울증을 극복한다. 그것은 가장 낯설고 가혹한 삶의 문제들과 직면해 있으면서도 삶을 긍정하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의 몰락마저 사랑할 줄 안다. 그에게 사랑이란 삶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 핵심은 노래 부르고 춤추고 웃을 줄 아는 것이다. 니체는 이 삶을 다시 한번, 그리고 무수히 반복해서 살겠노라고 다짐한다. 운명이란 동일한 것, 자신의 삶에 영원히 회귀하는 것, 그것으로부터 탈주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p.180~181)


천민이란 신분적 의미에서의 천민이 아니라 스스로 가치 창출을 못하는 인간, 즉 권력, 명예, 돈, 쾌락을 좇는 노예가 된 현대인을 말한다. 따라서 니체가 말하는 강자나 고귀한 자는 스스로 사물과 행동에 가치를 부여할 줄 아는 인간을 말하는 것이지 귀족이나 단순히 물리적인 힘이 센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p.219)


저자 :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Friedrich Wilhelm Nietzsche)


19세기 독일의 철학자이자 음악가, 문학가이다. 1844년 독일 작센주 뢰켄의 목사 집안에서 출생했고 어릴 적부터 음악과 언어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집안 영향으로 신학을 공부하다가 포이어바흐와 스피노자의 무신론적 사상에 감화되어 신학을 포기했다. 이후 본대학교와 라이프치히대학교에서 언어학과 문예학을 전공했는데 박사 논문을 제출하기 전에 이미 명문대인 스위스 바젤대학교에 초빙될 만큼 뛰어난 학생이었다. 1869년부터 스위스 바젤대학교에서 고전문헌학 교수로 일하던 그는 1879년 건강이 악화되면서 교수직을 그만두었다. 편두통과 위통에 시달리는 데다가 우울증까지 앓았지만 10년간 호텔을 전전하며 저술 활동에 매진했다. 겨울에는 따뜻한 이탈리아에서 여름에는 독일이나 스위스에서 지내며 종교, 도덕 및 당대의 문화, 철학 그리고 과학에 대한 비평을 썼다. 그러던 중 1889년 초부터 정신이상 증세에 시달리다가 1900년 바이마르에서 생을 마감했다. 니체는 인간에게 참회, 속죄 등을 요구하는 기독교적 윤리를 거부했다. 본인을 ‘망치를 든 철학자’라고 부르며 규범과 사상을 깨려고 했다. “신은 죽었다. 우리가 신을 죽였다”라고 한 그는 인간을 끊임없이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창조하는 주체와 세계의 지배자인 초인(超人)에 이를 존재로 보았다. 초인은 전통적인 규범과 신앙을 뛰어넘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인간을 의미한다. 니체의 이런 철학은 바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로 집대성됐고 철학은 철학 분야를 넘어 실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에까지 영향을 크게 미쳤다.

『비극의 탄생』(1872)에서 생의 환희와 염세, 긍정과 부정 등을 예술적 형이상학으로 고찰했으며, 『반시대적 고찰』(1873~1876)에서는 유럽 문화에 대한 회의를 표명하고, 위대한 창조자인 천재를 문화의 이상으로 하였다. 이 사상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1878~1880)에서 더 한층 명백해져, 새로운 이상에의 가치전환을 시도하기에 이른다. 『여명』(1881) 『즐거운 지혜』(1882)에 이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1885)를 펴냈는데 ‘신은 죽었다’라고 함으로써 신의 사망에서 지상의 의의를 말하고, 영원회귀에 의하여 긍정적인 생의 최고 형식을 보임은 물론 초인의 이상을 설파했다. 이 외에 『선악의 피안』(1886) 『도덕의 계보학』(1887)에 이어 『권력에의 의지』를 장기간 준비했으나 정신이상이 일어나 미완으로 끝났다.


편역 : 홍성광


서울대학교 인문대 독문과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토마스 만의 장편 소설 『마의 산』의 형이상학적 성격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저서로 『독일 명작 기행』, 『글 읽기와 길 잃기』, 역서로 야스퍼스의 『정신병리학총론』(공역),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책 읽기와 글쓰기』, 니체의 『니체의 지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도덕의 계보학』, 토마스 만의 정치 에세이 『예술과 정치』, 『마의 산』(상·하),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상·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외』,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젊은 베르터의 고뇌』, 헤세의 『헤세의 여행』, 『잠 못 이루는 밤』, 『데미안』, 『수레바퀴 밑에』, 『싯다르타』, 카프카의 『성』, 『소송』, 『변신 외』, 하인리히 뵐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 페터 한트케의 『어느 작가의 오후』, 『헬렌 켈러 평전』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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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쓸모
로랑스 드빌레르 지음, 박효은 옮김 / FIKA(피카)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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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철학의 쓸모』, 읽을수록 배움이 있다. '철학' 하면 골치 아픈 학문이라고 해서 아예 쳐다보지도 않은 사람도 이 책은 꼭 읽을 필요가 있다. 사는 동안 철학책 한 번 제대로 읽은 적이 없는 독자로서도 이 책은 올해 읽은 책 가운데 최고의 책이란 치사를 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이 책은 철학을 모르는 사람이 읽어도, 조금은 안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누구나 사는 동안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한 번쯤 의문을 가질 때가 있다. 또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한 번쯤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러나 답은 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철학을 더 멀리 했을지도 모른다. 철학은 공부하거나, 생각한다고 삶의 해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철학하는 것은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철학하는 것은 고민하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은 철학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책의 저자 로랑스 드빌레르는 전작 『모든 삶은 흐른다』로 출간 후 40주 연속 베스트셀러, 예스24 ‘올해의 책’, 2023년 최고의 책 등 대한민국에 ‘바다’ 열풍을 불러일으켰었다. 던 작가의 책이다. 저자는 『모든 삶은 흐른다』에서 낯선 ‘인생’을 제대로 ‘항해’하려면 바다를 이해하라고 조언한다. 바다가 우리의 삶과 가장 흡사한 자연이기 때문이다. 고난과 역경, 환희와 기쁨, 탄생과 죽음이 공존하는 바다가 던지는 철학적 사유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독자들에게 말해 주었다. 때때로 삶이 곡예를 하는 듯해도, 저 멀리 삶이 몰아치듯 떠밀려와도, 삶으로부터 잠시 물러나더라도 좌절하거나 주저할 필요는 없다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모든 삶은 흐른다』는 에세이다. 잠시도 쉬지 않고 물결치는 바다처럼 삶도 자연스럽게 물결치며 흐른다고 표현한 이 책에서 철학하는 사람으로서 글도 바다처럼 넓고 물결치는 자연 자체를 닮았다.

우리의 삶 자체를 고통의 바다라고 표현한 저자 드빌레르가 이번에 출간한 책 『철학의 쓸모』는 육체의 고통, 영혼의 고통, 사회적 고통에 철학이 어떤 해결책을 제시할지 탐색하는 시간을 준다. 삶이라는 어려운 숙제를 풀어 나갈 때, 철학이 쓸모가 있을까? 우리가 원하지만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것을 마주할 때, 철학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까?라는 의문으로부터 해방을 위해 이 책은 쓸모가 있다. 저자는 철학은 백면서생의 사치도 전유물도 아니라고 귀띔한다. 이 책은 또 쓸모없는 것의 쓸모를,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행복을 예찬하지 않는다.

이 책은 오히려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것은 어떤 것도 사유하지 않는다는 저자의 생각이 담겨 있다. 사는 것 자체가 철학하는 것이란 생각에 닿아 있는 것 같다. 이 책에서 말하는 철학의 쓸모는 두 가지다. 하나는 여러 질병으로 고통받는 우리에게 진단과 소견을 제공하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스스로 건강하다고 믿는 우리에게 실제로는 병에 걸린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우리가 일생에 경험하는 대부분의 고통은 해결이 된다. 여전히 인간다운 삶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면, 이 책에서 ‘한 번뿐인 인생,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을 키워 준다.

저자 드빌레르는 책의 맨 앞 부분에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름을 들추면서 "그들은 단순하고 평온하게 생활할 때 오히려 가장 철학자다웠다. 정치에 관한 그들의 저술 활동은 광인들의 병원과도 같은 이 혼란스러운 세상을 통제하는 일이나 다름없었다."는 파스칼의 『팡세』를 인용했다. 저자는 이어 「삶은 결코 만만치 않다」라는 제목의 〈머리말〉을 통해 "산다는 것, 살아 있음을 느끼고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것, 누군가는 이것을 행복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삶이란 선물과 같고, 지금 이 순간은 신비로운 마법이자 한 편의 시와 같다고 말이다. (중략)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늘 어딘가에 매여 있고 겉모습에 신경 써야 하며 자기 의지와 상관없는 시간표에 따라 살아간다. 회사와 집을 오가는 단조로운 일상 때문이 아니다. 삶은 외모, 성격, 시대, 사는 곳, 이웃, 하루를 보내는 방식, 일하는 환경 등 우리가 갖고 있지 않은 것들, 적당한 선에서 우리가 선택한 것들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이로 인해 삶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생각보다 소란하며, 생각보다 쉽지 않다고 저자는 말한다. 삶이란 시작되었다고 해서 그냥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긍정하고 지속시켜야 하는 것이다. 즉 복잡하고 소란한 삶을 스스로 감당하며 살아내야 한다는 것이란 주장이다. 저자는 우리에게 제한도 제약도 없는 완벽한 자유란 없다고 단언한다. 자유란 적응하는 것, 즉 우리가 원하는 대로 만든 환경이 아닌 이미 존재하는 환경에서 우리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저자에 따르면 고통 없는 삶은 없다. 우리는 언제나 행복, 사랑, 성공을 원하지만, 우리가 가장 원하는 것이 우리를 불행하게 할 수도 있다. 삶의 대부분은 무상하고, 무엇도 예측할 수 없으며,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의 고통은 쉽게 뽑히는 잡초 같은 것이 아니기에 우리를 더 고통스럽게 한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가까운 사람과의 불화, 직업적 실패, 삶에 대한 염증 등 우리의 여러 고통을 진정시켜 주는 진통제 같은 역할을 하는 철학은 그 분야만의 다양한 진정제와 연고를 처방해주는 일종의 의학이라고 저자는 정의한다. 이처럼 결코 만만치 않은 삶이라는 어려운 시험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앞서 언급한 대로 우리는 일상과 현실에서 수많은 시련을 마주한다.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견디기 힘든 시련이 아닐까? 그런데 우리는 정말로 그런 시련에 맞설 준비가 되어 있을까? 우리 앞에 버티고 있는 거대하고 묵묵한 현실은 우리의 욕망을 가차 없이 짓밟기도 하고 실현시켜주기도 한다. 

철학자들은 본래 철학은 의학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말한다. '인간의 정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철학자의 이야기는 공허할 뿐'이라고 말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 에피쿠로스학파, 스토아학파, 혹은 스스로를 '문화의 의사'라고 칭한 니체 같은 몇몇 철학자들은 치유의 철학을 강조했다고 저자는 전한다. 진단명도 다르고 치료법 역시 다르겠지만 치료의 목적은 같다고 저자는 확인한다. 문제가 있는 곳, 통증이나 종양이 있는 곳을 파악하고, 나 자신으로 사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인지, 행복이든 진리든 나에게 주어진 것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치유가 필요한 질병이라는 의미다.

이로 인해 철학한다는 그 자체만으로 삶과 고통, 치유의 함수관계를 저자는 설명한다. 철학은 우리를 괴롭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주고, 심지어 우리를 치유하는 힘도 있다는 주장이다. 다만 철학으로 무엇을 치유하고 싶은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철학은 아픈 곳을 진단하고 또 치료한다는 등식의 성립을 이뤄낸다고 말한다.

이로써 철학은 ‘어떻게’라는 방법을 제시하지 않고, 특정한 행동을 권유하지 않으며, 기능 장애를 치료하지도 않는다. 다만 삶과 산다는 행위 자체를 치유한다. 철학은 무엇보다 자동차에 작용하는 공기역학 같은 역할을 한다. 공기역학이 자동차의 방향 전환에 영향을 주듯이, 철학은 현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바꾸는 데 도움을 준다. 그래서 철학은 단순히 오랜 상처를 치유하거나 미래의 불안을 달래주는 것이 아니라, 매우 현실적이고 성가시며 강박적인 현재의 고통을 치유해준다.

이 책에는 〈사용 설명서〉라는 철학의 의미를 이해하는 특별한 글이 책 앞 부분에 자리하고 있다. 저자는 이 글에서 키르케고르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저서 『죽음에 이르는 병』을 인용한다. 이에 따르면 키르케고르는 죽음으로만 끝낼 수 있는 질병을 치료하고자 햇는데, 그가 질병으로 인식한 것은 바로 '절망'이었다는 것이 제목이 뜻하는 바다. 우리는 사는 동안 절망으로 괴로워한다. 그러므로 철학의 역할은 '정신의 가장 큰 불행', 즉 인생을 살아가면서 절망에 빠져 고통을 겪는 우리를 치유하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둘 중 하나다. 절망하거나, 두려움 없이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거나, 병에 걸렸는데도 아프지 않은 사람은 없기 때문에 이도 저도 아닌 채로 살아갈 수는 없다. 절망할 것인가, 담대하게 나 자신으로 살아갈 것인가? 둘 중 하나는 선택해야 한다. 

그렇다면 철학이 치유하는 질병은 모두 치명적이고 극도로 심각하며, 특히 심리적인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철학보다는 심리학, 정신의학, 아니면 신경생물학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그럼 우리는 누구에게 의지해야 할까? 의사? 심리학자? 아니면 철학자? 한 분야가 다른 분야를 배제하지 않고, 각 분야가 필요에 따라 협진을 할 수만 있다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그럼에도 일각에서는 철학의 치유적 기능은 실질적인 치유의 힘이 없는 비유에 불과한 것이라며 반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시각이야말로 인간의 모든 실존적 문제를 심리적 문제로 치부하면서 불안을 그저 기질의 표출로만 여기고, 정신적 혼란을 정신병원에서 양질의 재활 치료로 고칠 수 있는 기능 장애로 여기는 과학만능주의가 아니겠는가. 저자는 여기서 되묻는다. 과학이 치유할 수 있는 질병만이 진짜 질병일까? 되묻는 저자는 다시 답을 한다.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예컨대 우리의 동기, 의도, 욕망 등 우리를 추동하는 것과 우리를 자제시키는 것이 무엇이지를 헤아려 볼 수 있어야 한다."

이 책 『철학의 쓸모』는 4개 파트로 나뉘어 있다. 1부 〈육체의 고통〉, 2부 〈영혼의 고통〉, 3부 〈사회적 고통〉, 4부 〈그리고 흥미로운 고통들〉 등이다. 각 부는 9~24개의 장(章)으로 각각 나뉘어 있다. 목차를 살펴보면 과연 삶은 '고통의 바다'구나 할 정도로 온갖 고통이 등장한다. 우선 각 부에서 육체·영혼·사회로 나뉘고, 1부는 육체·죽음·질병·늙음·열정·쾌락 ·뇌와 정신 등으로 구체적으로 나뉜다. 2부는 일상·의지박약·두려움·공포·사랑·위로·후회·자책·우울·권태·질투·시기심·실패·낙오·좌절·업·자아성찰·광기·고독·자살 등으로나뉜다. 3부는 노동·사회규범·돈·거리감·대화·친구·가족 등으로 나뉘어 있다. 4부엔 운동의 지나침·나이듦·소소한 쾌락·먹는 것·현재·어른이 되는 것 등 그야말로 삶을 둘러싼 모든 것이 고통과 연결되어 있다. 왜 고통의 바다로 표현하는지 쉽게 이해가 된다. 

이 책에서 논의하는 고통의 종류 가운데 우리가 흔히 그토록 겪어보고 싶은 '쾌락'이 어떻게 고통으로 연결되는지 짚어본다. 책에 따르면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애햐 한다는 명제는 굳이 복잡한 철학이 아니더라도 쉽게 납득이 된다.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는 반드시 쾌락이 필요하다. 뇌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쾌락이라는 논리는 과학적 연구에 의해 이미 진행된 바 있다. 우리가 쾌락을 경험할 때, 뇌는 우리의 몸과 외부 세계에서 온 신호를 선별해 우리의 행동을 환경에 맞게 적응시키면서 생존과 자율성을 보장한다. 그러므로 쾌락은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소위 이성을 가진 동물이라 불리는 인간의 삶과 행동의 본질적인 요소다. 그러나 고통과 마찬가지로 쾌락은 평정심을 잃게 하며 모든 것을 압도한다. 우리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 빠져 자신을 잃어버린다. 고통을 가장 생생하게 표출하는 것이 비명인 것처럼, 쾌락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의성어다. 

쾌락에 빠질 때 우리는 자신을 완전히 놓아버린다. 육체와 정신이 모두 안온함에 젖어들면서 언어가 필요 없는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나 쾌락은 받을 자격도, 받을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우리에게 갑작스럽게 주어지는 깜짝 선물과 같다. 그래서 예측 가능한 쾌락은 실망감을 안겨준다. 쾌락이 환희와 기쁨이라면, 욕망은 끊임없는 움직임이다. 욕망은 터빈을 도리고 작업을 하고 전진하며 끊임없이 움직인다. 욕망은 성실하고 부지런하지만, 쾌락은 게으르고 관조적이다. 허기, 갈증, 성적 이끌림처럼 충족되면 사라지는 욕구와 달리, 욕망은 충족되는 법이 없다. 욕망은 또 다른 욕망을 부른다. 하나의 욕망이 충족되면 열 개의 다른 욕망이 생겨난다. 

이 때문에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소망이 실현된다 해도 지속적이고 변치 않는 만족감을 주지는 못한다. 이는 마치 구걸하는 걸인에게 적선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거지에게 주는 적선은 오늘 그의 목숨을 살릴 수는 있지만, 그의 고통을 내일까지 연장시키는 것이므로." 이 책 『철학의 쓸모』의 내용은 철학적 사고와 논리적 전개에 정형화시켜 고통 하나하나에 대한 의학적 처방전을 내리듯 어떻게 치료할지를 알려준다. 간결하고 현실적이다. 삶의 근본적인 고통에 대하여 폴 리쾨르는 인생에서 경험하는 고통을 미화시키지 말고, 간결하고 직관적으로 “하소연하라”고 조언했다. 또 늙어가는 슬픔에 대해 한나 아렌트는 인간은 비록 죽음을 맞는다 해도 죽기 위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새롭게 거듭나기 위해 태어난다는 것을 마음속 깊이 새기고 간직해야 한다며 “새로운 것에 뛰어들라”고 말한다. 매일 밤 잠자리에서 밀려드는 후회와 자책에 고통스러운 이들에게 몽테뉴는 머릿속에서 맴도는 후회와 자책은 삶에 어떤 의미도, 가르침도 없으니 “순간에 몰두하여 온전해지라”고 말한다. 

이처럼 인생에서 휘청일 때마다 쓰러지지 않도록 붙잡아줄 나만의 철학이 단 하나만 있어도, 힘들어도 우리는 살아낼 수 있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누구에게도 말하기 어려운 수많은 고민과 고통, 정답을 알 수 없어 헤매는 매일. 더 윤리적이고 지혜로운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면 이 책을 꼭 읽어볼 것을 먼저 읽은 독자로서 추천한다. 요즘 시대에 가장 필요한 인생 지침서가 될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자아 성찰은 가식이나 거짓말, 변명을 허용하지 않고 과감하게 자신과 대면하는 일이다. 또한 고독이라는 시련을 견디는 일이기도 하다. 고독 속에 있을 때 고통을 느끼는 이유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자기 자신과 함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p.230)


저자 : 로랑스 드빌레르(Laurence Devillairs)


“인생을 제대로 배우려면 바다로 가라”고 말하는 프랑스 최고의 철학과 교수. 그동안 박식하면서도 대중적인 철학 도서를 다수 집필하며, 사는 동안 누구에게나 철학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해왔다. 그동안 파스칼, 데카르트 등 인물 철학에 관한 도서를 집필해온 저자가 이번에는 자연이 주는 철학적인 가르침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철학을 한다는 건 삶의 문제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것이다. 저자는 철학을 아는 삶이 우리를 얼마나 이롭게 하는지를 이야기하며 프랑스에서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이처럼 철학과 함께하는 삶의 가치를 알려온 저자는 오래전부터 바다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파도와 때에 맞춰 밀려오고 물러나는 밀물과 썰물 등 바다의 생태에서 우리의 삶과 유사한 모습을 발견하면서 바다가 인생을 가장 잘 표현하는 자연이라고 생각했다. 삶이란 이미 그 자체로 가치 있다. 바다가 존재만으로 완벽한 것처럼 말이다. 때때로 고난과 역경이 삶의 전체를 휘감아도, 들뜨고 환희로 가득한 순간들도, 그 모든 순간이 인생이다. 잠시 눈 감고 싶을 만큼 힘들다고 해도 그것이 삶이 아닐 리 없다. 저자는 잠시도 쉬지 않고 물결치는 바다처럼 삶도 그렇게 물결치며 자연스럽게 흐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철학과 삶, 바다라는 테마를 한데 녹여 프랑스 현지 언론에서 극찬을 받은 『모든 삶은 흐른다』가 국내 독자들에게도 삶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는 데 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역자 : 박효은


프랑스어를 한국어로, 한국어를 프랑스로 옮기는 일을 한다. 현재는 바른번역에서 번역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옮긴 책으로 《바보의 세계》, 《오징어 게임 심리학》, 《지옥》, 《숲속의 철학자》, 《세상 친절한 이슬람 역사》, 《시베리아의 숲에서》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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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당신이 원했던 미스터리 문명 2 : 잃어버린 문명 - 미스터리 대표 채널 <김반월의 미스터리>가 소개하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어쩌면 당신이 원했던 미스터리 문명 2
김반월의 미스터리 지음 / 북스고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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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아이 석상, 스톤헨지, 피라미드 등은 누구나 알고 있는 세계의 대표 유적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스톤헨지의 건설 이유와 모아이 석상을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뚜렷하게 말할 수 없다. 아무런 단서 없이 불가사의한 유적만 남기고 사라진 고대 문명. 신의 경계를 넘어선 듯한 그들은 대체 누구이며 어디로 떠난 것일까? 평균 높이 5m, 무게는 약 15~90톤에 육박하는 모아이 석상은 대체 누가 만들고 운반했을까? 여러 연구를 통해 ‘주변국인 칠레에서 제작했다.’, ‘멸망한 원주민 부족이 제작했다.’ 등 수많은 가설이 나오고 있지만, 그 무엇도 확실한 답을 주지 못한다. 찬란한 문명을 꾸렸지만 이제는 신화로 만나는 잉카와 마야 문명, 하늘에서만 보이는 거대한 그림, 현대의 기술로도 건축할 수 없는 피라미드 등 세계에는 설명되지 않은 불가사의한 일들이 존재한다.

이 책 『미스터리 문명 2 : 잃어버린 문명』(이하 『미스터리 문명 2』에서는 신빙성 있는 자료와 다양한 사진을 수록해 수수께끼투성이인 세계의 불가사의를 집중해서 다루었다. 불가사의는 과학의 한계를 뜻하는 것이 아닌 우리의 상식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기하는 것을 뜻한다. 이 책을 통해 경이로운 유적과 초자연적인 현상을 따라가며 세상에 무한한 의문점을 파헤쳐본다. 

이 책 『미스터리 문명』의 ②권 「잃어버린 문명」으로 모두 3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신이 남긴 흔적〉, 2장 〈세상에 존재하는 신비의 공간〉, 3장 〈초자연 현상의 목격자〉 등이다. 1장은 '모아이 석상은 누가 세웠는가' 등 7개 소항목, 2장은 '미스터리의 전설, 쿠푸왕 피라미드' 등 8개 소항목으로 구성돼 있다. 3장엔 '교황청 타임머신' 등 13개 소항목이 있다. 1장에서는 수많은 이가 풀어내려 했지만, 그 누구도 비밀을 밝히지 못했던 세계 7개 불가사의를, 2장에서는 한 번쯤은 들어 봤거나, 혹은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세상에 존재하는 신비의 공간을, 3장에서는 전 세계에서 일어난 초자연 현상을 다룬다.

1장 〈신이 남긴 흔적〉에서는 '버려진 정원 마추픽추'는 웬만한 사람이면 다 아는 페루 잉카문명의 유적지 마추픽추에 대한 이야기다. 독자도 어려서부터 들은 이야기지만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힌 문명 중의 하나다. 이곳은 지구상 가장 거대한 산맥 중의 하나로 불리는 안데스산맥에 있다. 해발 2,400m라는 높은 고원 정상에 있는 고대 잉카제국의 성지 마추픽추이다. 산 밑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아 현지인에게는 '공중 도시'라 불리는 마추픽추의 또 다른 별명은 '잃어버린 도시' 혹은 '버려진 정원'이다. 과거 약 2,000명의 주민이 한날 한시에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렸기에 지어진 별명이라고 한다. 

책에 따르면 찬란했던 문명이었던 잉카제국은 1533년 멸망해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힌다. 잉카제국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마추픽추가 다시금 재조명받은 건 1911년 미국의 한 고고학자에 의해서다. 당시 미국 예일대 역사학 교수였던 하이럼 빙엄은 칠레에서 열린 학회에 참석 후 미국으로 돌아가려던 중, 지역 주민으로부터 신비한 도시 전설 하나를 듣는다. "저기에 높은 산 하나 보이지? 저기 산꼭대기에 희한한 도시가 하나 있어···" 빙엄 박사는 쥔이 가리킨 산을 보며 반신반의했다. 저 높은 산꼭대기에 도시가 있다고? 믿기 힘든 사실이었다. 하지만 원주민들 사이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기도 하였고, 무엇보다 고고학자의 심장을 두드리는 말이었기에 안데스산맥을 오르기로 했다. 그렇게 약 5시간쯤 지났을까, 해발 2,400m에 있는 안데스산맥 정상에 다다른 빙엄 박사는 멍해졌다.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눈을 몇 번 비비며 정말이지 믿을 수 없는 놀라운 광경을 바라보았다. 원주민의 말이 사실이었다.

이렇게 세상 앞에 모습을 드러낸 마추픽추의 놀라운 사실은 수천 개의 계단식 밭과 평균 20톤 정도의 암석으로 구성된 건물 200여 개가 정확히 신전과 궁전, 주택으로 구분되어 지어진 것이 마치 현대의 계획도시처럼 보였다. 

하지만 빙엄 박사를 무엇보다 놀라게 한 것은 건축의 정교함이었다. 건물에 사용된 양식의 틈 사이가 종이 한 장조차 들어갈 수 없을 만큼 매우 정교하게 제작되었고, 그중 가장 큰 돌의 길이는 무려 5m가 넘었으며 무게는 360톤에 육박했다.

당시 버려진 정원 마추픽추에는 막대한 보석과 장신구가 있었는데, 미국은 당시 페루가 유물을 보관할 환경이 안 된다고 생각해 몇천 개의 유물을 연구 목적으로 가져왔다. 그렇게 1911년 빙엄 박사의 지휘 아래 본격적인 마추픽추 발굴 작업이 진행되었고, 발굴을 진행할수록 마추픽추의 미스터리는 더욱 커져만 갔다. 최대 360톤에 이르는 돌을 운반한 기술력 그리고 정교한 제련 방법은 당시의 기술력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일어었으며 무엇보다 이상했던 건 해발 2,400m라는 높디높은 안데스산맥의 정상에 마추픽추라는 도시를 건설한 이유였다. 도대체 마추픽추는 누가 만들었으며 왜 만들었을까? 여기에 더욱더 미스터리한 사실은 마추픽추에서 발굴되는 유물의 추정 연도가 들쑥날쑥하다는 점이었다. 이를 통해 하계에서는 마추픽추가 잉카제국 시기에 완성된 도시가 아닌 선사시대부터 후기 잉카제국까지 총 세 번의 시기에 걸쳐 만들어졌다는 설을 주장하는 이도 생겼다.

여기서 저자는 의문을 제기한다. 독자도 마추픽추를 가보진 못했지만 TV나 각종 영상 매체를 통해 보고 나서 가장 의문이었던 점은 누가 지었느냐였다. 그러나 미스터리 부분을 중심으로 보는 시선은 당시 기술에 대한 원초적 질문을 갖는 게 아닌 듯하다. 바로 건축에 사용된 기술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고, 어떻게 발전한 것인지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 마추픽추나 피라미드 같은 고대 건축물이 불가사의로 규정된 이유가 바로 건축물들의 시초를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과학과 기술 정보는 이전 단계가 분명히 존재하고, 일련의 발전 과정이라는 인과관계를 거쳐 세상에 나타난다는 데 시선을 모으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이 점이 미스터리를 대하는 학자나 전문가들의 기본적인 시각이라고 저자는 덧붙인다.

저자에 따르면 마추픽추에는 후대를 위한 어떠한 기록도 찾아볼 없었다. 기록을 남길 문자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건 이러한 기술과 정보를 후대에 전달할 방법도, 선대로부터 습득할 방법도 없었다는 의미다. 문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문자가 필요하다. 하지만 마추픽추에서는 문자를 찾아볼 수 없었다. 도대체 마추픽추는 어디서부터 그리고 누구로부터 세상에 존재하게 된 것일까.

마추픽추에 이어 아메리카 대륙에는 또 하나의 유명한 문명이 있다. 마야 문명이다. 멕시코 유카타반도에 있는 치첸이트사에는 마야인의 고도화된 문명을 알려 주는 수많은 건축물이 남아 있다. 그중 가장 운에 띄는 건 도시 심장부에 우뚝 솟아 있는 '엘 카스티요'라는 피라미드 형태의 건축물이다. 한눈에 보기에도 정교하게 건축된 엘 카스티요는 당시 마야 문명의 고도화된 천문학과 수학적 지식의 정수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독보적인 문명은 마야는 세계 7대 불가사의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들은 신성함이라는 명목하에 아주 잔악했던 풍습으로 유명하다. 

한눈에 보기에도 정교하게 건축된 엘 카스티요는 4개 면에 신전으로 오르는 계단이 각각 존재하는데, 이 계단의 개수는 한 면당 94개이며, 총 364개다. 여기에 신전으로 통하는 최상단의 계단 1개까지 포함하면 정확히 365개가 된다. 바로 마야인이 엘 카스티요의 계단을 통해 1년의 일수를 나타낸 것이다. 당시의 천문학적 지식으로 여간 일수를 알고 있다니 놀라운 사실이다. 하지만 엘 카스티요의 실상을 알게 되면 마냥 감탄이 나오지 않고, 오히려 거북하기까지 하다. 엘 카스티요는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제단이었으며, 신에게 바치는 제물은 바로 '인간'이었다.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그들만의 신성한 의식을 위해 365개의 계단을 강박적으로 건축한 마야 문명과 엘 카스티요를 살펴보면 공포스러움까지 느껴진다고 저자는 기록하고 있다.

마야인의 천문학적이고 치밀한 설계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엘 카스티요에는 매년 봄과 가을에만 나타나는 형상이 있다. 농사의 시작을 알려 주는 춘분이 되면 피라미드에는 마치 뱀의 신 쿠쿨칸이 내려오는 듯한 형상이 만들어진다. 마야인은 이것을 신의 계시로 받아들여 한 해의 풍요를 기원하고자 인신공양을 진행했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마야인 모두는 성스러운 마음으로 기꺼이 제물이 되고 싶어 했을까? 인간의 본능인 생명을 바치는 일을 기꺼이 한다는 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맞은 편에는 공놀이를 위한 커다란 구기장이 마련되어 있는데, 여느 구기 종목과 마찬가지로 골대에 골을 넣는 간단한 경기가 펼쳐진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 힌트다. 

이 구장은 단순한 여가를 즐기기 위해 마련된 곳이 아닌 목숨을 바치기 위한 곳이었다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패자들의 목숨을···? 승자에게는 가장 명예로운 상이 수여된다. 바로 인신공양의 제물이 될 기회다. '그러면 경기를 일부러 지면 되지 않나?' 애석하게도 경기에서 패배한 이들은 즉시 처형되었다고 한다. 요즈음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일이지만 마야 문명에서는 이렇게 유지 발전되었다고 한다.

'전설의 도시, 아틀란티스'에 관한 미스터리도 기존의 독자가 알고 있던 지식을 뛰어넘는다. 아틀란티스의 어원은 대서양을 가르킬 때 쓰인다. 즉 대서양을 '아틀란틱 오션(Atlantic Ocean)'이라고 부른다. 이 전설의 도시 아틀란티스는 어떻게 지구의 가장 큰 5개의 바다 중 하나인 대서양의 이름에 붙여졌으며, 현대에도 전 세계인이 열광하는 것일까. 최초로 아틀란티스를 이야기한 사람은 바로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자 플라톤이라고 저자는 밝힌다. 독자로서는 "그렇구나!" 했지만 처음 듣는 이야기이다. 플라톤은 『타마이오스』와 『크리티아스』라는 책을 통해 아틀란티스에 관해 이야기했는데, 자세한 내용을 저자는 책에 인용했다.

"아득한 옛날, 풍요로움을 바탕으로 강대한 세력을 누리던 아름다운 섬, 위대한 전쟁 기술로 유럽과 아프리카를 발아래 둔 대제국은 훌륭한 문화마저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거대한 제국 역시 도덕적 부패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리고 그에 대한 벌로 바다에 삼켜져 멸망하고 말았다."(p.110)

플라톤은 글의 말미에 섬의 위치를 헤라클레스의 기둥, 즉 현대의 지브롤터 해협에 있다 적었다. 아틀란티스에 관한 이야기는 자신의 조상 솔론에 의해 전해 내려왔으며 솔론은 고대 이집트의 한 신관으로부터 이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아틀란티스는 지금까지도 실존 여부에 대해 많은 학자의 의견이 갈린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아틀란티스는 이상적인 국가를 강조하기 위함이며, 대중에게 도덕적 교훈을 주기 위한 허구일 뿐이라고 말했다고 하니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는 일이긴 하다. 플라톤이 책에서 묘사했던 아틀란티스의 모습 중 '사하라의 눈'을 보면 꽤 유사하다. 플라톤이 묘사처럼 동심원의 모양을 하고 있으며 3개의 바다로 나뉘어져 있다. 도시 건물에 사용된 돌의 크기를 주목해 보면 더욱 놀랍도록 정확하다. 플라톤이 말한 아틀란티스의 크기는 127스타디아다. 1스타디아는 현대 수치로 환산하면 약 185m가 되어 127스타디아는 총 지름 23.5km가되는 셈이다. 사하라의 눈은 위성사진을 통해 길이를 측정해 봤을 때 그 지름이 정확히 23.5km가 나온다. 아틀란티스는 바다 아래에 가라앉았는데 사하라는 사막이 아니냐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많은 학자는 사하라 사막의 수많은 모래가 고거 바다에서 기원한 것이라 주장한다. 즉 사하라 사막이 아틀란티스가 존재하던 당시에는 사막이 아니었단 사실이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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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당신이 원했던 미스터리 문명 1 : 풀지 못한 문명 - 미스터리 대표 채널 <김반월의 미스터리>가 소개하는 초고대 문명 어쩌면 당신이 원했던 미스터리 문명 1
김반월의 미스터리 지음 / 북스고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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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다닐 때 인류 문명의 기원에 대해 배우는 과목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중학교 때는 교과서에 실렸는지 아닌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고등학교 교과서가 확실히 기억나는 이유는 아마 세계사 수업이 따로 있었고, 가장 앞 부분에 인류 문명의 기원이 나와서 첫 수업 때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대학 입시에 작은 비중이지만 가끔 나온다고 선생님이 별도로 일러주셨던 것 같다. 이집트·메소포타미아·그리스·황하 등 4개 지역이었다. '4대 문명'이라고 배웠다. 그 이전의 시대는 구석기·신석기 시대라고 언급되었을 뿐 '문명'이라고 지칭하지 않았던 것 같다. 국어 시간에 문학의 원형이 고대 그리스의 신화 〈일리어드〉·〈오딧세이아〉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배웠다. 지금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수메르 점토판이 발굴, 일부 해석됨으로써 〈길가메시〉가 최초의 문학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교과서는 바뀌었는지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아마 바뀌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현생 인류의 조상은 '호모 사피엔스'로서 약 15만~25만년 전에 출현했다고 들은 바 있다. 300만~150만 년에 출현한 인류기원설은 원숭이에 가까운 '오스트랄로피테쿠스'를 최초의 인류로 보는 것은 직립보행했다는 이유라고 한다. 이들은 지능도 낮은 데다 키마저 1m 안팎으로 추정한다. 문명을 이룰 수 있는 인간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인류 출현 등 인류기원설이 확실히 정립되어 있는데도 만일 인류의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인류 문명이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 4대 문명의 훨씬 전에도 고도의 지능을 가진 인간이 존재했다는 흔적이 지구에 남아 있다면? 심지어 현대 문명과 버금가는 기술력을 가졌다면? 그들은 대체 누구이고, 어떤 이유로 멸망했을까? 

이 책 『어쩌면 당신이 원했던 미스터리 문명』(이하 『미스터리 문명』)은 이런 우리의 궁금증과 호기심을 자극하는 미스터리한 문명의 흔적을 찾아내 상세한 설명을 곁들여 독자들 앞에 펼쳐낸다. 한 우주 비행사가 인도와 스리랑카 사이를 지나다 충격적인 물체를 발견한다. 50km에 달하는 거대 다리였는데, 연구 결과 연대가 무려 170만 년 전으로 밝혀진 것이다. 170만 년 전에 이미 인공다리가 존재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이 밖에도 20만 년 된 타일 바닥, 1,400만 년 된 자동차 바퀴 자국, 1억년 된 손가락 화석까지 믿을 수 없는 흔적들이 전 세계에서 속속히 발견되고 있다.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지구의 역사에 고도 문명의 인간이 정말 존재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들은 현대 인류보다 더 뛰어난 찬란한 문명을 가꾸었을지도 모른다.

『미스터리 문명』은 ①, ②권 세트로 출간됐다. ①권은 「풀지 못한 문명」, ②권은 「잃어버린 문명」으로 부제를 달았다. 아직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한 문명을 적절하게 구분했다. ①권 「풀지 못한 문명」에는 3개의 장(章)으로 나뉘었다. 1장 〈시대를 벗어난 기술〉, 2장 〈지구 리셋설〉, 3장 〈외계 문명의 흔적〉으로 구성돼 있다. 1장에서는 '2,000년 전 천체를 관측한 장치' 등 7개 소항목이 있고, 2장엔 '170만 년 된 초고대 인공다리' 등 15개 소항목이 있다. 3장은 '남극 심해 안테나' 등 7개의 소항목이 독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저자 '김반월의 미스터리'는 독자들의 궁금증 해소와 실존의 증명을 위해 연구진들의 실제 조사 내용과 함께 초고대 문명의 증거 사진을 수록하였으며, 당대에 존재할 수 없는 기이한 유물과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뛰어난 기술들을 소개한다. 독자들은 이 책을 읽으면 한 가지 의문점이 들지도 모른다. ‘인류 문명은 멸망과 탄생을 반복하는가?’ 이 책은 바로 그 의문점에 부합하는 풍부한 지식과 무한한 상상을 독자들에게 갖게 해줄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저자는 ①권 「풀지 못한 문명」에서 〈인간의 문명은 처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제목의 서문에서 "지구 리셋설이란 먼 옛날부터 인류 문명은 핵전쟁과 같은 이유로 멸망과 탄생을 계속해서 반복 중이며, 우리의 문명 또한 n번째 문명이라는 가설이다. 그리고 당시 수백 수천만 년 전에 존재했던 고도의 문명을 초고대 문명이라 칭한다. 허무맹랑한 소리라 생각할 수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실제로도 초고대 문명의 증거는 수도 없이 많고, 현재까지도 끊임없이 발견되고 있다."고 밝힌다.

저자는 또 '오파츠'에 대한 설명도 덧붙인다. 당대의 기술력으로는 절대로 존재할 수 없는 유물, 시대를 초월한 유물을 일명 '오파츠'라 부른다는 것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오파츠의 개수만 해도 최소 수백 개에 달한다고 덧붙이고 있다. 지구의 나이로 생각을 거슬러 올라간다. 지구의 나이는 지구의 탄생이라는 의미다. 무려 46억 년 전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46억 년이라니 사실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다. 앞서 언급한 호모 사피엔스는 고작 20만 년 전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생 인류의 역사로 보자면 최초 문명인 수메르 문명이 발생한 시점은 고작 6,000년 전이다. 현생 인류의 역사가 굉장히 길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따지고 보면 농경을 막 시작했던 신석기 시대부터 전기차를 타고 다니는 21세기 현재까지 고작 1만 년도 안 되는 시간이다.

지구 전체의 역사로 보면 인류의 역사는 정말 티끌만큼 작은 시간이다. 과연 우리 문명이 탄생하기 이전인 45억9,999만 년 동안의 지구에는 우리가 모르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 정말 우리가 지구 최초의 인류일까?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 저자는 이 책에서 고대 오파츠와 초고대 오파츠를 더불어 다양한 미스터리를 다룬다고 말한다. 1장에서는 현대의 과학기술로도 해석할 수 없는 고대의 오파츠와 로스트 테크놀로지, 2장에서는 지구가 리셋되었다는 증거를 모아둔 지구 리셋설, 3장에서는 어쩌면 우리 곁에 있을지도 모르는 외계 문명을 다룬다. 

1장의 첫 번째 소항목으로 '2,000년 전 천체를 관측한 장치'에 대한 이야기다. 1900년 에게해를 항해 중이던 디미트리오스 콘도스 선장의 선박이 위기에 처한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폭풍우는 콘도스 선장과 선원의 생명을 위협했고 그들은 결국 어쩔 수 없이 근처 안티키테라섬에 정박했다. 선박에 실린 식량마저 몽땅 폭풍우에 잃어버린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번갈아 가며 직접 바다에 들어가 식량을 구하게 된다. "이 섬의 바다 밑에 보석과 수많은 유물이 잔뜩 있습니다!" 바닷속에 뛰어든 선원이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내민 것은 물고기가 아니라 해저 유물이었다. 보고를 받은 그리스 왕국은 왕립 해군을 파견하여 해저 유물을 인양하기 시작했다. 1900년에 시작된 조사는 1901년까지 이어졌고, 약 2년 간의 조사 끝에 30개의 유물이 그리스 아테네 국립고고학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여기서 끝난 게 아니다. 1902년 5월 고고학자 발레이오 스티스는 난파선의 추가 조사를 진행하던 중 독특한 유물을 하나 발견한다. 형태만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부식이 진행된 하나의 청동 톱니바퀴였다. 표현에 적힌 그리스어 비문 외에는 용도와 제작연대를 알아볼 수 있는 어떠한 사료도 없었다. 그렇기에 스티스는 이 청동 톱니바퀴에 인양된 지역의 이름을 따 안티키테라 기계라고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러나 스티스의 발견은 이때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부식으로 형태만 고작 알아볼 정도였기 때문이다. 

70년이 흐른 1977년, 프랑스의 잠수부 자크 쿠스토가 꾸린 잠수팀이 안티키테라섬을 향했다. 이들은 난파선의 연대를 추정할 만한 중요한 단서를 많이 찾아냈다. 그중에서도 주화의 발견은 안티키테라의 난파선이 난파된 시기가 약 2,000년 전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안티키테라 기계 역시 2,000년 전에 제작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약 20여 년 전인 1951년 영국으로 돌아가 본다. 당시 예일대의 교수였던 데릭 솔라 프라이스는 안티키테라 기계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안티키테라 기계의 외형이 매우 복잡했고 내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프라이스 교수는 그의 동료 카라칼로스 교수와 함께 82개의 안티키테라 기계 조각을 엑스레이와 감마선을 통해 검사한다. 그후 작성된 2명의 교수의 논문은 놀라웠다. "안티키테라 장치는 세 가지 주요 다이얼로 구성되어 있다. 앞면의 다이얼에는 2개의 눈금 바늘과 25개이 톱니바퀴로 구성된 매우 복잡한 기계 장치다. 최초 발견 당시 외부가 나무 박스로 포장되어 있었기에 이 기계는 어떠한 장치의 부품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우리는 조심스레 이것을 아날로그식 천체 관측용 컴퓨터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2021년 유니버시키 칼리지 런던 UCL 연구팀은 안티키테라 기계의 모든 조각을 복원하는 데 성공하였고, 이내 안티키테라 기계의 환정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p.16~17)

앞서 언급된 '170만 년 된 초고대 인공다리'의 실체에 접근해 본다. 2장 〈지구 리셋설〉의 첫 번째 소항목이다. 책에 따르면 모든 것은 1995년 한 우주 비행사가 촬영한 사진 한 장에서 비롯되었다. 공중에서 바라본 그 장면은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인도와 스리랑카 사이 바다를 가로지르는 50km에 달하는 거대한 다리 형상이 육안으로 확인된 것이다. 인도와 스리랑카 사이에 펼쳐진 거대한 다리 아담스 브릿지는 오랫동안 과학계의 뜨거운 논쟁거리였다. 자연 현상일까, 인공 구조물일까? 

다리를 구성하는 암석들의 연대가 무려 17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170만 년 전이라면 호모 사피엔스 출현 이전이다. 지구에는 원시인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연구진들은 다양한 가설을 펼쳤다. "고대 외계인들이 지구를 방문했거나 인류 이전에 이미 초고대 문명이 존재했을 수도 있다." 또 다른 이들은 종교적인 해석이나 신화적 해석을 내놓았다. 인디애나 대학을 비롯한 여러 대학 연구진이 발표한 충격적인 사실은 아담스 브릿지가 자연 현상이 아닌 인공 구조물일 가능성을 높였다는 점이다. 발굴조사는 시간이 갈수록 놀라운 결과를 내놓았다. 유적지 지하에서 발견된 거대 구조물은 현대의 원자로 시설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용도는 분명하지 않지만 상당한 기술력이 동원되었던 것만은 분명하다는 것이다.

연구진의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그들은 이 신비의 문명에 대해 더욱 깊이 있게 파고들었다. 유적지 발굴이 계속되면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유물들이 속속 드러났다. 정교한 기하학 문양의 석관, 금속 주조 도구, 천문 관측 기록들이 그것이다. "이 유물들을 보면 상당한 수준의 과학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천문학, 기하학, 금속 공학 등 여러 방면에서 발달했던 것 같아요." 연구진은 이 문명이 현재 인류 문명을 능가하는 수준의 과학 기수을 가지고 있었음을 실감했다. 그들의 지적 수준과 문화적 성취는 상상을 초월했다. "만약 이 문명이 지속되었다면 우리의 모습은 지금과 전혀 달랐을 겁니다. 아마도 지금보다 훨씬 발전한 모습이었겠죠."(p.71)


인류 문명의 탄생과 멸망이 반복되고 있다. ‘천동설’이 주류였던 16세기에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하며 우주의 중심을 바꾼 것처럼 누군가의 새로운 발견은 우리가 굳게 믿어 왔던 상식을 송두리째 바꾸곤 한다. 이 책 『미스터리 문명 1 : 풀지 못한 문명』에서 다루는 ‘지구 리셋설’은 우리의 상식을 크게 뒤엎는다는 면에서 현재의 지동설이라고 저자는 진단한다. 고고학자 한 명이 1억 년 전의 공룡 화석에서 인간의 발자국을 발견한다. 이는 기존 상식을 완전히 뒤엎는 발견으로 과학계에 어마한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공룡과 인간이 공존했다고 말하면 믿을 수 있겠는가? 아마 그 누구도 믿지 못할 테지만, 이를 증명하는 흔적들이 무수히 존재한다. 그리고 이 흔적을 근거로 문명은 몇 번씩이나 리셋됐다는 ‘지구 리셋설’이라는 가설까지 만들어졌다. 『미스터리 문명 1: 풀지 못한 문명』에서는 그 증거가 되어 주는 흔적을 따라 초고대 문명의 존재 가능성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시대를 초월한 유물인 ‘오파츠(Out-Of-Place Artifacts)’가 수십~수백 건에 달한다고 한다. 


저자 : 김반월의 미스터리


밤하늘을 볼 때마다 무한한 호기심을 느끼는 ‘김반월의 미스터리’는 세상을 뒤흔드는 미지의 사건을 소개한다. 특히나 여전히 비밀스러운 인류 문명을 파헤치며 세상에 대한 의구심과 궁금증을 자아낸다. 유튜브 채널 <김반월의 미스터리>는 믿기 힘든 초자연 현상, 미제사건, 괴담을 다루는 대표적인 미스터리 스토리텔링 채널이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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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아나의 이단자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 지음, 이관우 옮김 / 작가와비평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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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조아나의 이단자』를 읽으면서 독자는 유럽 문명의 근간에 기독교라는 종교가 짙게 배어 있다는 생각이 깊어진다. 이 책은 독일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의 소설 작품 2편을 묶었다. 표제작인 「조아나의 이단자」와 함께 「선로지기 틸」 등 두 편이 수록돼 있다. 「조아나의 이단자」는 하우프트만의 가장 성공적인 산문으로 인정받는 작품이라고 알려져 있다. 당시 유럽에 가장 널리 퍼져 있던 가톨릭 신부가 어느 남매의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딸을 사랑하게 되는 과정과 결과를 액자형 소설 구조로 풀어간다.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으며 혼란하고 궁핍했던 시대에 독자층이 빈약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던 작품집이다. 두 세계대전에서 모두 전쟁을 일으킨 측의 독일은 패전함으로써 사회·경제적 분위기가 매우 경직되고 어두웠을 것으로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야기를 끌어가는 화자로서의 가톨릭 신부는 성직자로서 신과 인간 중 어느 쪽에 서야 하는지 갈등하고 고뇌하는 프란체스코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복잡한 내면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다. 

「선로지기 틸」은 전쟁 이전에 발표된 작품으로 저자 하우프트만을 문학적으로 인정받게 한 첫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 소설은 첫 번째 여인과의 결혼으로 낳은 사랑하는 아들이 둘째 부인에 의해 죽음에 이르자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마침내 정신이상자가 되어 살인을 저지르는 선로지기 틸의 이야기이다. 우리가 아는 전형적인 독일인(윈리원칙적이며 융통성 없는)인 하우프트만은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 하층민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고 그들의 편에 서 왔기에 가난한 소시민의 비극적 운명을 다룬 소설을 쓴 것은 자연스러운 맥락이었다고 당시 문학계는 평가했다고 한다. 이 작품은 틸의 내면에 내재하고 있는 대립적이며 분열적인 성향을 부각함으로써 본질적으로 지식계급의 주인공을 다루어 온 전통적인 독일 노벨레(소설)의 틀을 깬 의미 있는 작품이다. 이 두 작품을 통해 하우프트만의 문학적 특성을 더욱 새롭고 깊이 있게 체감할 수 있을 것으로 출판사 측은 기대하고 있다. 또 인물과 환경을 지나칠 정도로 세밀하고 객관적으로 묘사한 문장을 직접 접함으로써 독일 자연주의 문학이 가진 특별한 면모도 살펴볼 수 있을 것으로 독자는 기대한다.

저자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은 솔직히 독자가 잘 몰랐던 작가이다. 더욱이 1912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인데도 이름이 다소 낯설었다. 더욱이 표제어에 있는 '이단자'란 단어 때문에 종교 소설 같은 느낌이어서 더 낯설었다. 유럽은 로마 제국 시대 기독교를 공인함으로써 이후 유럽 문명 내내 사회와 정치에까지 종교의 영향력이 컸다. 특히 우리가 잘 아는 십자군 전쟁을 200년 동안 치렀다. 뿐만 아니라 수장인 교황은 전쟁과 왕에 대한 영향력도 끼쳤다. 이슬람교의 오스만 제국이 대단한 위세를 떨칠 때는 유럽 많은 나라의 중심으로 맞서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조아나의 이단자」는 작은 마을의 가톨릭 신부가 겪는 종교적 갈등을 다뤘다. 이 책의 초판은 1918년에 출간됐고, 이후 1945년까지 100판이 출판됐다고 한다. 이 작품이 이렇게 인기를 끈 것은 섬세하고 관능적인 성애 묘사라고 이유를 설명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당시 가톨릭의 종교적 위세가 대단했던 때이니만큼 함부로 접근하기 어려운 성직자의 일탈을 소재로 했기 때문에 더 독일의 서민층에게 인기를 끌었던 이유가 아닐까로 생각해볼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작품의 가치는 신앙의 세계와 세속, 정신과 감각, 현실과 신화 등 양립하기 어려운 요소들을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작가적 역량이 탁월했기 때문으로 분석되고 있다. 가톨릭 신부의 일탈은 권위에 대한 반항이며 저항으로 읽힐 수 있고, 독일의 권위적이고 억압적 권력에의 저항 의식이 짙게 깔려 있었던 사회 분위기도 일조를 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의 복합적 내면 심리와 그것의 결과를 치밀하고 유려하게 그려나가면서 공감 영역을 최대화해 깔끔하게 마무리했다는 것이다. 

결혼과 순결에 있어 특별히 엄격한 가톨릭교의 신부가 알프스 고산목장에 은거하는 남매의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딸을 사랑하게 되는 과정과 결과를 그린 이 작품은 소재의 희귀성만으로도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지 않았을까. 저자 하우프트만이 극단적 소재와 내용을 취한 데에는 육체와 성애에 대해 지나치게 적대적인 가톨릭교의 경직성과 완고함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하우프트만은 신부와 소녀의 합일을 통해 세로운 창조적 세계의 중심으로 들어섰다고 묘사는 데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신부가 하느님을 버리면서까지 이룬 소녀와의 결합이야말로 모든 것을 뛰어넘는 창조적 사랑의 구현이며, 그럼으로써 말이 아닌 행동으로 저주받고 버림받은 삶에서 소녀를 진정으로 구원한 성직자의 역할을 다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 작품에 대해 이 책의 역자 이관우는 〈옮긴이의 말〉을 통해 "이 작품은 성직자가 신과 인간 중 어느 쪽에 더 가까이 서야 하는지에 대한 쉽게 풀기 어려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며 "신부와 소녀와의 사랑이 낳은 깊은 산 속에서 염소치기 목자로 사는 둘만의 은둔적 삶이 비루하기보다는 순수하고 고상하게 보이는 이유"라고 설명한다. 역자는 또 1차 세계대전 발발 5년째에 발표된 이 작품은 자연, 사랑, 신화라는 테마를 통해 전쟁의 공포에 대한 대안을 제시했다고 말한다. "자연이나 사랑을 통한 시간초월성의 체험은 사람을 문명의 시간에서 끌어내 신화 속으로 이끌었다. 비평가 만프레트 슈니히트는 하우프트만이 이 작품을 통해 대립을 주관적이고 유토피아적으로 중재하는 신비적이며 원초적인 세계인 '제2의 현실'을 개척했다고 평가한다. 신화와 현실을 한꺼번에 바라보는 것, 즉 신화적 형식과 자연주의적 형식의 특별한 병립은 이 작품의 매력과 문화적 가치를 높인다고 평가했다"고 전한다.

책에 따르면 좁은 성직의 세계를 떠나 자연과 사랑에서 시간의 초월을 체험하는 것은 신부 프란체스코가 문명의 시간을 벗어나 신화 속으로 들어가는 출발점이 된다. 그는 매혹적이 자연을 접하면서 내면에서 열정적인 사랑이 싹트는 것을 체험한다. 또한 그는 야성적인 자연 그대로의 아잉이자 근친상간으로 추방당한 고산지대 목자의 딸인 아가타에 대한 사랑을 통해 새로운 인간이 된다. 감정과 체험이 신화적 원형 속으로 흘러들어간 그는 낙원에서 지은 원죄에서 벗어나 아담과 이브를 통해 인간이 된다. 프란체스코와 아가타는 새로운 아담이며 새로운 이브로서 서로의 합일을 완수한다. 

"프란체스코는 더 이상 프란체스코가 아니었고, 막 하느님의 숨결에 의해 단 하나의 아담으로, 단 하나의 에덴동산의 주인으로 깨어난 최초의 인간이었다. 그를 빼고는 죄 없는 창조의 충만함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별들이 천상의 음을 울리며 행복을 노래했다. 구름은 게걸스럽게 풀을 뜯어먹는 소들처럼 흥얼거렸고, 자색 과일들은 달콤한 황홀감과 맛있는 생기를 내뿜었으며, 나무둥치들은 향기로운 진액을 땀으로 흘렸고, 꽃들은 맛있는 향신료를 흩뿌렸다.(p.134)

이 과일 속에는 힘차게 뛰는 씨가 들어 잇어 경쾌하게 움직이는 맥동이 세차게 고동쳤다고 저자는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이 과일을 먹을 때면 그것은 하늘에서 부여받은 자신의 풍요로움을 잃지 않으면서 점점 더 맛있고 정선된 기쁨을 선사했다고 덧붙인다. 즉 저자는 이 창조물과 다시 얻은 낙원에서 가장 맛있는 것은 창조주 가까이에서 찾아낼 수 있었다고 쓰고 있다. 하느님은 여기에서 자신의 작업을 끝내지도 그대로 놔두지도 않았고, 쉬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창조적인 손, 창조적인 정신, 창조적인 힘은 사라지지 않았고, 작품 속에서 창조적인 상태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낙원의 모든 부분과 사지 하나하나가 창조적인 상태로 머물고 있었다. 방금 도자공의 작업장에서 만들어져 나온 프란체스코-아담은 자신이 주변을 창조하는 자라고 느꼈다. 바깥세상적인 황홀함에 젖어 그는 하느님의 딸인 이브를 감지하고 바라보았다. 그녀를 형성했던 사랑은 여전히 그녀에게 달라붙어 있었고, 아버지가 그녀의 몸을 위해 사용했던 온갖 소재들 중 가장 훌륭한 소재는 아직도 어떤 흙먼지로도 더렵혀지지 않는 초지상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창조물 또한 몸을 떨고, 부풀어 오르고, 불꽃 같이 열렬한 천상의 창조력에 의해 빛을 내면서 아담과 한몸으로 융화되기를 재촉했다. 아담은 그녀와 함께 새로운 완성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다시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아가타와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코와 아가타, 신부이자 좋은 집안 태생의 젊은이와 배척받고 멸시받는 양치기 아이는 손에 손을 맞잡고 밤중에 비밀통로를 따라 언덕을 기어오른 최초의 인간 커플이었다. 그들은 가장 깊숙한 은신처를 찾고 있었다. 그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경이로움으로 가득 찬 영혼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황홀감을 느끼며 세속의 달콤한 기적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빠져 들어갔다.

그들은 감동했다. 그들은 은혜와 선택을 받았다고 느꼈고, 이런 느낌이 끝없는 행복과 섞여 진정으로 장엄하게 여겨졌다. 그들은 서로의 몸을 느꼈고, 입맞춤으로 결합되었지만 자신들이 향하고 있는 알 수 없는 운명을 느꼈다. 그것은 마지막 수수께끼였다. 그것은 하느님은 어째서 창조를 했으며, 어째서 세상에 죽음을 가져와 그것을 받아들이게 했느냐는 것이었다.

이후 이들은 움막으로 자리를 옮겨 정사를 나눈다. "그는 아가타의 벌린 입술 사이로 뿜어 나오는 유혹의 입김을 들이마셨다. 그는 소녀의 속눈썹에서 흘러나오는 뜨거우 욕정의 눈물에, 뺨에 흐르는 뜨거운 눈물에 연달아 입맞춤했다."(p.142~143) 이 대목까지가 아마 관능적 표현과 성애의 희열을 적나라하게 묘사해 가톨릭계의 반발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당시 크게 문제되지는 않았던 듯하다. 독일 등 유럽의 상황이 이를 문제 삼을 한가한 형편이 아닐 수도 있었을지도, 혹은 세기말적 분위기에서 보자면 오히려 비유적 표현의 완성도를 높였다고 평가했을지도 독자로서는 알 수 없지만.

「선로지기 틸」은 1888년에 발표한 단편 소설이지만 하우프트만을 문학적으로 인정받게 한 첫 작품이라고 한다. 저자 자신도 "그것과 함께 나는 작가로서 세상에 발을 들여놓았다."고 밝혔다고 역자는 전한다. 이 작품은 첫 번째 여인과의 결혼으로 낳은 사랑하는 아들이 둘째 부인에 의해 죽음에 이르자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마침내 정신이상자가 되어 살인을 저지르는 선로지기 틸을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은 19세기 말을 배경으로 한다. 틸의 근무지인 베를린과 프랑크푸르트/오더 사이에 있는 조그만 간수초소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선로지기 틸은 당직을 서거나 아파서 눕는 날을 빼고는 일요일마다 언제나 노이-치타우의 교회 안에 앉아있었다. 10년이 흐르는 동안 그가 아팠던 적은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열차의 화차에서 떨어져 내린 석탄덩이 때문이었다. 그는 그것에 맞아 다리가 박살난 채 철길 옆 도랑에 내동댕이처졌다. 또 한 번은 쏜살같이 달려가던 급행열차에서 그의 가슴 한가운데로 날아든 포도주병 때문이었다. 이 두 가지 사고 외에는 어떤 것도 그가 시간이 날 때면 곧장 교회로 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p.156)

하우프트만은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를 하층민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고 그들의 편에 서 왔기에 그가 가난한 소시민적인 선로지기의 비극적 운명을 다룬 이 작품을 쓰게 된 것은 결코 새삼스런 일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옮긴이의 말〉에서 역자 이관우는 설명한다. 

틸의 운명은 내면을 양분하고 있는 정신과 본능의 양극적 대립에 의해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틸이 내면의 양극성을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발생하는 비극적 사태의 전개 과정은 틸, 첫 부인을 만나, 둘째 부인 레네 등 세 중심인물들 간의 상호관계를 통해서 정확히 관찰할 수 있다. 첫 부인이 낳은 아들 토비아스 또한 결정적 역할을 한다.

몇 시간이 흐른 후 사람들이 아이의 사체를 들고 돌아왔을 때 그들은 대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깜짝 놀라 계단을 타고 올라가 위층 거실로 들어갔는데, 그곳의 문 또한 활짝 열려 있었다. 

그들은 여러 차례 부인의 이름을 불렀지만 대답을 듣지 못했다. 마침내 그들은 벽에 있는 성냥으로 불을 켰고, 번쩍이는 불빛이 끔찍스런 파괴의 모습을 드려내 주었다.

"살인이다! 살인!"

레네가 피투성이로 누워 있었는데, 두개골이 파괴되어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p.206)


저자 : 게르하트 하우프트만(Gerhart Hauptmann)


슐레지엔의 바트잘츠브룬 출생하였다. C.하우프트만의 동생인 그는 어릴 때 경건한 종교적 환경에서 자라나 한때 조각을 공부하다가 후에 예나대학·베를린대학에서 생물학·철학을 공부하였다. A.홀츠, J.슐라프가 제창하는 ‘철저한 자연주의’의 영향하에 처녀희곡 『해뜨기 전』(1889)을 발표하고, 일약 자연주의 문학의 기수가 되었다. 이어 가정비극 『쓸쓸한 사람들』(1891)에서는 삼각관계로 고민하는 무력한 남편을 묘사하였고, 직공들의 반란을 다룬 군중극 『직조공들』(1892)로 극단에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걸작 희극 『비버 모피』(1893)를 비롯하여 『마부 헨셸』(1898) 등의 사실극이 발표되었다.

한편, 점차 상징적·낭만적 경향이 짙어져 몽환극 『한넬레의 승천』(1894), 서정미 넘치는 낭만적 상징극 『침종』(1896), 『그리고 피파는 춤춘다』(1906) 등을 거쳐 후년의 인형극 『축전극』(1913), 최후의 대작 『아트리덴 사부극』(1941∼1949)에 이르는 작품계열이 있다. 그 밖에 단편소설로는 에로스의 승리를 구가한 걸작 『소아나의 이단자』(1918), 장편으로는 종교적 사상체험을 담은 『기독광』(1910) 등이 있다. 서정시인 『틸 오일렌슈피겔』(1927)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 민족의 도의적인 분기를 일깨웠으며, 서정시집으로 『오색서』(1888) 등을 남겼다. 하우프트만은 자연주의에서 출발하였으며, 그 완성자인 동시에 그 초극자이기도 하다. 그는 독일문학에 공통된 관념적인 묘사를 피하고 하층민에서 영웅에 이르기까지 살아 있는 인간과 생의 고뇌 그 자체를 사실적이면서도 구상적으로 부각시킨 점에서 독일로서는 독자적인 작가였다. 191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기독광』과 『소아나의 이교도』는 박찬기 번역으로 을유문화사에서 간행되었다.


역자 : 이관우


공주사범대학 독어교육과와 고려대학교대학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마인츠대학교에서 독문학을 연구했으며, 독일 뮌헨대학교 객원교수로 활동했다. 공주대학교 독어독문학과 학과장, 신문방송사 주간, 언어교육원장, 평생교육원장 등을 역임하고 현재 공주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독일 단화의 이론과 실제』, 『독일문화의 이해』, 『볼프강 보르헤르트의 삶과 문학』, 『ARD 방송독일어』, 『독일의 역사와 문화』, 『시사독일어』, 『문학 속의 삶』, 번역서로는 『인류사를 이끈 운명의 순간들』(슈테판 츠바이크), 『붉은 고양이』(루이제 린저 외), 『괴테 자서전』(괴테), 『압록강은 흐른다』(이미륵), 『윤무』(아르투어 슈니츨러), 『톨레도의 유대여인』(프란츠 그릴파르처)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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