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부학자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7
페데리코 안다아시 지음, 조구호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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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00년대 중반. 부유하지만 프란체스카 수도회의 교리에 따라 엄격한 금욕생활을 지키고 있는 미망인 이네스 데 토리몰리노스가 피렌체의 산 가브리엘 대수도원 인근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네스는 부유한 남편의 포도밭과 성城 등의 재산들을 유산으로 물려받았으나, 남편의 성姓을 잇지는 못했다. 딸만 셋을 나은 것이다. 

 한편, 베네치아에서 가장 비싼 곳이자 서양 전체에서 가장 호화로운 집창촌인 파우노 로소 유곽에 베니치아에서 가장 비싼 창녀 모나 소피아가 있었고, 파도바 대학에서 가장 저명한 외과의사이자 해부학자인 마테오 레알도 콜롬보는 대학의 자기 방에 유폐되어 종교재판을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이 종교재판은 사실상 결과가 정해졌고, 절차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파도바 대학의 학장 알레산드로 데 레냐노에게 콜롬보는 눈엣가시 같은 인간이었다. 콜롬보는 명성과 의사로서의 뛰어난 역량, 경력으로 자신이 학장으로 있는 대학에 큰 명예를 가져다 주었지만, 그만큼 그에 대한 질투의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콜롬보가 종교재판에 회부된 이유는 콜롬보가 '여성의 사랑을 지배하는 기관', 스스로 "비너스의 사랑" 이라 이름붙인 여성 고유의 신체기관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발견은 위험했다. 비너스의 사랑이라는 기관은 '항상 모호한 여자의 자유의지를 지배할 힘을 가진 진정한 도구' 였기 때문이다.

 그의 발견에 "만일 악마의 군대가 죄의 대상인 여자를 장악해버린다면, 기독교가 어떤 불행을 겪게 될지 알겠습니까?" 라며 가톨릭교회의 의사들이 분개했다. "가난한 곱사등이라도 가장 비싼 고급 창녀와 사랑을 할 수 있다면. 매춘이 돈 버는 사업이 될 수 있을까요?" 라고 유곽 주인들이 물었고, "여성들이 자신들의 가랑이 사이에 천국의 열쇠와 지옥의 열쇠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비너스의 사랑' -클리토리스의 발견은 해부학적이었지만, 동시에 이단적이었다. 클리토리스는 여성들의 것이었지만, 그것이 초래한 결과는 여성들의 것이 아니었다. 

그 시대에는, 여성이 스스로의 주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지성과 예술의 시대였지만, 여성들에게는 암흑의 시대였다. 

가장 어두울 때, 빛이 가장 잘 보이는 법. 여성들이 스스로 설 수 있는 작은 실마리가 바로 이 때 발현되었다.

그로부터 수백년. 지난한 세월동안 여성들은 스스로 빛을 밝혀가고 있다.


 사유를 시작한 이래 인간의 지성은 크게 나아졌을까?

근력은 확실히 약해졌다. 두뇌학자들은 기억력도 상당히 쇠퇴했을 것으로 예상한다. 실제로, 기록들을 보면 중세의 사람들은 책 너댓권쯤은 거뜬히 외운 것으로 보인다. 기억력이 생존에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자와 각종 기록장치가 발달한 현대엔 기억력이 생존과 크게 관련이 없다. 그 대신, 응용력은 엄청 발달했을 것이다. 맥락을 파악하는 통찰력도 나아졌으리라. 

 하지만, '지성', 생각하는 힘 그 자체를 논한다면, 문명사회를 시작한 인류의 지성은 그 단계에서 이미 최고점을 찍은 상태였을 것이다. 아마 앞으로도 인간의 지성에는 큰 변화가 없을 것이다. 그리스 시대의 인간들에게도 무한한 가능성이 있었고, 지금도 역시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인류의 지성 그 자체는, 지구에 머무는 한은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을 것이다.

인류의 문명은 지성을 바탕으로 지식을 쌓아가는 과정이었다. 인류의 역사로 따지면 인간 한명 한명의 수명은 짧다면 짧지, 길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짧은 기간동안 개별적으로 쌓은 지식을 정리하여 기록한다. 그 개별 기록들을 한데 모아서 또 정리하고, 또 기록한다. 그 과정 안에서 여러 기술들이 파생되고, 산업으로 발전한다. 지식의 축적이 정체되는 시기는 없었다. 언제나, 어느 분야에서나 특출난 인간이 태어났다. 이들은 수많은 지식들 속에서도 고정관념에 빠지지 않으며 지식의 결손부위를 찾아내 논리적 연결고리를 찾아냈다. 범인들은 하지 못할 시도로 놀라운 발견을 해냈으며, 참신한 가설을 통해 논리 전개 방식들을 개발해냈다.   

 그리고 지식은, 안타깝게도 '지배' 혹은 '정복' 이라는 단어와 연관될 때 시너지를 일으킨다.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강력하게. 


 90년대 중반에 발표된 이 작품은, 책 말미를 통해 역자가 소개하듯 안다아시의 모국에서는 출간 자체가 안 될 정도로 논란을 낳은 작품이다. 특히 가톨릭 국가인 아르헨티나에서는 종교 지도자들의 권력 암투와 시기, 질투로 얼룩진 14세기의 종교재판과 여성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낳은 성서의 오독, 또는 몰이해에 대한 노골적인 풍자와 희롱이 가득한 이 작품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을터다.

처음 읽었을 때는, '무슨 이런 작품이 세계문학씩이나!' 라고 느꼈었지만, 두번째 읽고 난 뒤에는 작품의 여러 부분들이 마음속에서 웅웅 울려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 작품은 첫 문장부터 조롱으로 가득찬 한편의 풍자극이다. 풍자의 대상은 위에 언급했듯 당대 가장 큰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종교 지도층과 지식층이다. 문학으로서의 가치는 이 신랄한 풍자에서 비롯된다. 그 당시에는 결코 쓸 수 없었을 내용들이다.

 당시에 가장 강력한 권력은 무엇이었을까?

돈? 명예? 무엇보다 가장 강력한 권력은 '지식' 으로부터 파생됐다.

당시 세상의 진리는 성서였다. 평범한 사람들을 성서로 '지배' 했다. 성경에 관련된 지식들이 힘이었다. 라틴어로 쓰여진 성서는 결코 대중들의 문자로 번역되지 않았다. 번역은 커녕 모사조차 할 수 없었다. 라틴어를 배운 일부 성직자만이 성서를 읽을 수 있었고, 성서의 내용은 종교인들만 공유했다. 해석에 이견은 달 수 없었다. 성서의 내용 그 자체가 신의 말씀이었으므로, 평범한 대중들의 일상은 성서의 문장에 따라 재단됐다. 상황에 따른 해석은 오로지 교황만이 할 수 있었다. 일부는 주교들이 했다. 때로는 수도원장이나 작은 교구의 교구장이 하기도 했다.

역사, 문화, 윤리는 물론 일반 법도 모두 성서에 기반했다. 종교 지도자들이 관장했던 것이다.

수많은 왜곡들이 서양 역사를 지배했다.

대표적인 것이 '여성' 에 관한 내용이었다.

성서에서 여성은 남성의 뼈에서 '추출' 된 일부이자, 사탄의 꾀에 빠진 어리석은 존재이자, 그로 인해 인류가 '원죄' 를 짓게 한 원흉이다. 지성과 지식이 뛰어난 여성들은 마녀로 매도당했다. 가톨릭 세계관에서 여성은 욕망에 좌우되는 동물, 남성들을 죄의 길로 이끄는 연약한 존재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 동화같은 일화로 여성들은 서양사에서 영영 낙오되고, 그 여파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현재까지도 가열차게 이어지고 있다.    

결국 이 작품은 인류의 역사에 암울한 한 획을 그은 왜곡된 지식의 시대, 특히 가톨릭. 그 전체에 대한 조롱이자 비하, 희화화인 것이다.

서슬 퍼렇던 당대에는 결코 할 수 없었을, 현대에만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조차도 가톨릭이 국교나 다름없는 작가의 모국, 아르헨티나에서는 출간을 거절당했고, 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었을 때에도 비평가들의 강력한 반대에 시달려야 했다.



바야흐로 젠더 감수성의 시대이다.

굳이 '젠더' 라는 외래어와 '감수성' 이라는 한자어가 섞인 이 묘한 조어는 최근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큰 화두이기도 하다. 

이것은 아마도 '미소지니misogyny' 라는 단어를 '여성혐오' 라고밖에 치환할 수 없는 것과 같은 맥락일터다. 우리사회에서는 지금까지 여성 차별에 대한 사회적인 논의조차 시도된 적이 없었으니까. 미소지니처럼 넓은 의미를 지닌 단어를 적절하게 번역할 단어조차 없을 것이고, '젠더 센서빌리티Gender Sensibility' 를 대처할 단어는 물론 개념조차 없었을 터다. 

남성이 보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해부학자] 가 젠더 감수성이나 여성혐오라는 측면에서 자유로운 작품은 아니다. 이는 셰익스피어와 그 시대의 작품 전반에 대한 재평가와 맥을 함께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남성이 여성의 삶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음을, 다름을 인정하듯이, 남성 작가의 작품에 드러나는 여성에 대한 편향된 시각을 어느정도 인정하는 것 역시 '젠더 감수성'의 본질일 것이다. 물론, 지금처럼 남녀 갈등이 엄혹한 시기에는 날카로운 비평과 지적이 '더욱' 필요하겠지만, 그렇다고 다른 모든 가치들을 거세시키고, 한 목소리로 비난해야 한다는 주장, 나아가 그 '가치'의 '잣대'가 남성 중심 사고에서 비롯된 잣대이므로 모두 왜곡되었기에 무의미하다는 주장 역시 지나친 비약이다.

이것은 혐오에는 혐오로, 비약에는 비약으로 맞선다는 주장과 다름없다. 왜곡을 다른 방향에서 왜곡한다고 정상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또다른 왜곡일 뿐이다.  

또한, 지나치게 저자와 화자를 동일시 함으로 인해 저자가 작품을 통해 표현하려 했던 이야기나 메시지 전체를 곡해하는 일 역시 피해야 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 작품 역시 저자가 나름대로 성별에 대해 균형적 시각을 견지하려 노력한 대목들이 있고, 여성문제에 대한 진지한 문제제기와 메시지가 존재한다. '여성혐오' 로 단순히 뭉개기엔 아까울 정도이다. 


 물론, 나 역시 이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 고개를 갸우뚱 했던 부분은 지나치게 남성 중심의 시각 때문이었다.

두번째 읽을 때엔 보다 많은 것들이 읽혔고, 곱씹다보니, 또 다른 것들이 텍스트 위쪽으로 떠올랐다. 

이 작품은 여러 분야에서 아주 논쟁적일 수 있는 소재들을 과감하게 활용했다. 국가, 인종, 성별을 떠나 인류를 지배한 한 시대의 패러다임이다.

그리고 그 시대는 아직 저물지 않았다.

이 작품은 여성들이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던 시대의 이야기이다.

인류 전체의 역사를 놓고 보면 가장 화려하고, 지성이 폭발하던 시기였지만, 그것은 우리 사회 공동체의 절반 이상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역사였다. 성별 차별 뿐 아니라 인종차별도 극도로 심했던 시기다. 화려함과 지성은 1%의 백인 남성들에게만 해당된 시기였을터다.

인류의 문명과 역사라고 부르는 대부분은 사실 그들의 기록일뿐이고, 이 작품에 그에 대한 거대한 풍자를 담고 있다.

암흑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최근 헐리우드를 지배하던 인종차별과 여성차별이 조금씩 파괴될 조짐이 보인다.

평소에 행실이 안좋던 '지배적인' 남성들이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한 죄, 자신의 권력으로 약자들을 희롱한 죄의 댓가를, 미미하지만 받기 시작했다. 여성의 참정권은 우리 사회의 공동체 중 가장 마지막에서야 허가됐다.

제 2차 세계대전동안 남성이 전쟁터로 끌려간 사회를 지킨건 여성들이었고, 광기에 휘어잡힌 남성들을 추스른 것도 결국은 여성들이었다.

영국 사회는 이를 통해 가까스로 여성이 우리 구성원의 가장 중요한 일원임을 받아들였고, 여성을 하원으로 들여보냈다.

하지만, 여전히 유리천장은 단단하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아직 가슴으로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좋은 기회가 한번 있었으나, 허무하게 날려버렸다. 다행히 찬스 뒤에 또다른 찬스가 와서, 가장 중요한 외교안보 분야에 정말 훌륭한 여성 리더가 자리잡았다.  유리천장은 힘으로 부술 수 없다. 여성들의 힘만으로는 가능할리 없다. 사회 구성원 전체를 아우르는 설득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 설득이 혐오로 가능할 리 없다. 비약으로 가능할 리 없다. 왜곡으로 가능할 리 없다. 

1500년대까지 여성은 영혼이 없는 존재로 받아들여졌다. 오죽하면 클리토리스가 남성의 음경과 비슷한 매커니즘이라는 표면적 관찰의 결과를 주장한 것 만으로 콜롬보는 공식적인 사형선고를 받을 뻔 했다. (물론, 이 작품은 픽션이지만, 콜롬보가 클리토리스의 해부학적 역할에 중대한 발견을 한 부분만은 역사적 기록이다.)  

  

결국 돌고 돌아 인류의 지성만이 이 모든 갈등을 해결할 수 있을것이다.

토론하고, 설득하고, 사유하고. 좋은 논리를 개발하고, 방법을 찾고.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남성 중심의 사회가 저지르는 실수들을 그대로 밟을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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