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개 탐정 2 - 사이드킥
다니구치 지로 지음, 정은서 옮김, 이나미 이츠라 원작 / 애니북스 / 2015년 7월
평점 :
품절



 다니구치 지로의 별세 소식과 추모 리뷰대회 소식을 듣고 다시 한 번 내가 소장하고 있는 다니구치 지로의 작품들을 들춰봤다. [고독한 미식가] 부터 [아버지], [선생님의 가방], [에도산책] 그리고 [사냥개 탐정]. 국내에 발간된 책들을 꼼꼼히 수집한 것은 아니지만, 다니구치 지로의 작품 색깔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은 없었다. 

그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단연 [사냥개 탐정] 이다.

무엇보다 동물들이 많이 나와서 즐겁고, 전혀 생소한 직업을 체험하는 느낌이라서 더욱 즐겁다.

다니구치 지로의 작품 전반적으로 그다지 '특별한' 직업이 다뤄지지 않기 때문에 이 작품은 더욱 특별한 느낌이 든다.


 전에 언급한 적이 있지만, 작화가(그림 담당)와 원작자(이야기 담당)가 또렷하게 분리되어 있는 일본 망가판에서도 다니구치 지로 작가는 특별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그가 담당하는 원작은 항상 이미 출간된 도서라는 점이다. 물론 원소스 멀티유즈가 그 어느 곳보다 활발한 곳이 일본이지만, 다니구치 지로에게 제안되는 원작은 거의 대부분 문학성을 인정받는 작품이다. 

물론 인터뷰에도 언급된 적이 있지만, 다니구치 지로 작가 본인이 그런 작품만을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기획을 담당하는 실무자가 권하는 경우가 많은데, 여러 이유 중 하나는 다니구치 지로 작가가 원작을 최대한 깊이 숙지하고, 원작자를 최대한 배려하는 자세가 묻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대사 하나, 지문 하나도 원작의 흐름을 확실히 이해하고, 가급적 크게 변형하지 않은 상태로 컨버전을 시도한다. 때로는 원작에 있는 지문 전체를 가져다 쓰는 경우도 있다. 상황과 때에 따라 다르지만 지문은 최소화 하는 것을 지향하는 것이 일본 만화임에도 말이다.

 

 텍스트로 이루어진 내러티브를 시각화 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어려운 일이다. 만화는 텍스트로 이루어진 정적인 내러티브를 그림을 통해 아주 조금 더 동적으로 만들어주지만, TV드라마나 영화에 비하면 아주아주 미미한 수준이다. 결국 텍스트가 다시 들어갈 수 밖에 없다. 애초에 만화는 글과 그림이 공존하는 매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업에서는 특히나 작화가와 원작자가 충돌할 수 밖에 없다.

작화가는 원작의 독자이기 이전에 또 한명의 작가이기 때문이다. 원작자가 글을 쓰면서 상상했던 이미지와 작가가 글을 읽으면서 상상했던 이미지가 같을 리가 없다. 대사나 지문 역시 마찬가지다. 원작자가 쓸 때는 완벽했지만, 만화로 옮길 때는 불완전할 수 있다. 수많은 작화가와 원작자가 실제로 충돌하고 갈등을 일으키고 대판 싸우고 프로젝트가 엎어지는 일이 부지기수다. 욕설과 주먹, 고소가 오고가기도 한다. 책이 출간된 원작이 아니라, 시나리오만 있는 원작에서도 그런 일이 잦은데, 작품성과 문학성까지 인정받은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면 훨씬 더 많은 난관이 도사리고 있을터다. 

 하지만,  [아버지의 가방] 뒷면에 원작자와 작화가가 동석한 대담을 보면 다니구치 지로의 그림이 원작자 자신의 이미지와 달랐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이것은 다니구치 지로의 작화가 안정적이고 뛰어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원작을 그만큼 잘 이해하고, 원작자의 의도 역시도 충분히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냥개 탐정]은 장르적인 특성에서도 무척 훌륭한 작품이다.

아마 원작 소설도 정말 재미있었을 것 같다.

주인공 '타쿠'는 단서들을 수집해 흔적을 찾고, 목표를 추적한다. 하지만, 목표물이 사람이 아니라 '개' 이다. 그는 산에서 잃어버린 개만을 찾아주는 '사냥개' 전문 탐정이다. 때문에, 사람의 추리력으로 수집할 수 있는 흔적은 극히 제한적이다. 사냥개 탐정 타쿠는 '늑대개' '조' 의 도움을 받는다. 사람과 개의 페어. 

 이 콤비가 이 작품의 첫번째 즐거움이다. 

타쿠는 조의 능력을 이용해 개의 습성을 따라잡는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개가 갖고 있는 여러가지 성격과 인간과의 관계가 흥미롭게 그려진다. 집 안에만 갇혀 사는 애완용 개들은 대부분 본성을 거세당한 상태로 길러진다. 하지만, 자연속에서 살아가는 사냥개들은 조금 다르다. 그들은 조상이 가지고 있던 사냥에 대한 본능을 마음껏 떨칠 수 있는 시간과 기회가 부여된다. 좀 더 야생성이 살아있다.

이러한 개들을 통해 우리가 평소 만나보지 못한 '개' 의 다른 모습들을 만나볼 수 있다.     

 타쿠는 사냥개 탐정을 지향하지만, 항상 사냥개만 찾게 되는 것은 아니다.
개는 인간과 너무너무 밀접한 동물이라 어디를 둘러봐도 개가 있기 때문이다. 타쿠는 사냥개 탐정으로 이름을 조금씩 알리고 있지만, '개를 잘 찾는 사람' 은 정말 희귀한 직업이라, 개를 잃어버린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찾아온다.
 이러한 아이러니가 두번째 즐거움이다.
산에서 잃어버린 사냥개나, 누군가 산에서 훔쳐간 사냥개를 찾아주기도 하지만, 이야기의 대부분은 인간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종류의 개들을 찾는 과정이다. 1권에서는 눈 먼 소녀의 길안내를 해주는 맹도견이 등장하고, 2권에서는 말 농장에서 기르는 개를 찾는 내용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사냥개는 야생의 상징이다. 산속에서 맷돼지 사냥을 하다가 복귀하지 못한 사냥개를 찾는 일과 도시에서 잃어버린 맹도견을 찾는 일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작품의 구성도 사냥개를 찾는 일과 다른 개를 찾는 일이 교차되면서 서로 다른 분위기를 뚜렷하게 보여줌으써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흐름을 적절하게 밀고 당긴다. 이것은 아마 원작의 탄탄함 덕분일텐데, 다니구치 지로도 그 점을 간과하지 않고 훌륭하게 살려낸다. 

 작품의 완성도 자체도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하지만, 이 작품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사람을 사랑하는 개와, 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통하는 이야기도 물론 재미있지만, 사람과 동물이 통하는 이야기는 가슴 속 깊은 어딘가를 자극하는 원초적인 감동이 있다. 
 개와 사람은 본질적으로 완전하게 다른 존재이다. 
 무수한 통계를 들이밀고, 노하우를 들이밀며 서로의 마음을, 생각을 '짐작' 할 뿐이다. 개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표정을 통해 기분을 '짐작' 하고, 사람은 개의 반을릉 통해 역시 '짐작' 할 뿐이다. 내가 "손" 이라고 했을 때, 개가 앞발을 척 내미는 순간,  내가 "이리와" 했을 때, 천진한 눈동자로 도도도도 달려와서 품에 안기는 순간, '기다려' 했을 때, 몇시간이고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나를 기다리는 순간, 그러한 순간들을 맞이할 때 우리는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받는다. 이것은 단순한 소통의 증명이 아니라, 서로에게 들인 시간과 노력, 정성의 대가이자, 짐작과 기대가 맞아 떨어지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은 부드럽고 연약한 피부와 날카롭지 않은 손발톱을 가진 인간이,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망망한 자연 속에서 처음으로 튼튼한 털가죽과 날카로운 손발톱을 가진 동료를 얻었을 때의 기억 때문이 아닐까? 우리의 유전자 속 깊이 각인되어 있는 그 언젠가의 따뜻한 기억.  

 아니다. 역사적으로 개와 사람이 처음에 어떻게 함께 하게 됐는지, 이제는 별로 상관이 없다.
어쨌든 사람과 개는 이제 단순히 필요에 의해 공존하는 관계가 아니라, 또다른 가족으로 여겨지고 있으니까. 이미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애완견을 '아기' 라고 말하고, 자신을 '엄마' 혹은 '아빠' 라고 말한다. 개들 역시 사람들 앞에서 언제나 강아지 처럼 행동한다. 죽음을 앞둔 순간에도 애정을 갈구하는 눈동자가 그 증거일터. 어떤 짓을 당해도 사람에 대한 사랑을 갈구하는 학대당한 개들의 눈동자는, 어떠한 짓을 당해도 부모의 애정을 갈구하는 학대당한 아이들의 눈동자와 닮아있다. 
두려움, 공포, 고통, 피로, 하지만 더 깊은 믿음. 

 하지만, 작품 안에서 다니구치 지로 작가는 동물들에 대한 감정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전체적으로 담백하고 안정적인 구도에, 가급적 프레임 안에 동물의 얼굴과 표정을 풀샷으로 디테일하게 표현하지 않았다. 이것은 작가의 실력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작품 속에 등장하는 동물들의 '생각' 또는 '마음' 을 섣불리 재단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다니구치 지로의 작화는 굳이 나누자면 리얼리즘에 바탕을 둔 극화체에 가깝다. 현실에서 우리는 동물들의 표정을 알 수 없다. 단지, 사람의 표정과 비슷해 보일 때 제멋대로 동일시 하는 것일 뿐. 동물들과 동물들에게 느끼는 감정은 사람 등장인물의 대사와 표정만을 통해 표현된다. 개를 사랑스럽게 끌어 안는다거나 함께 어우러져 뒹구는 등의 장면도 거의 없다. 그래서 오히려 류몬에게 개를 찾아달라고 의뢰하는 사람들의 감정과, 찾은 뒤의 감정이 깊이 있게 다가온다. 특히 1권의 말미를 장식하는 '세인트 메리'  에피소드에서 죽은 타로를 앞에 두고 독백처럼 읊조리는 리처드의 모습은 작품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감동적인 장면이다. 

"자네도 잘 알다시피 개는 사람에 비해 수명이 짧아. 계속해서 개를 기르다보면 여러 개들의 생과 사를 지켜보고 이별을 겪게 되지. 사람은 개의 빛나는 생명과 피하기 힘든 종언을 자신의 인생에 비춰 보면서 살게 되지. 사람은 개의 생과 사를 통해 배우는 것이 많아."
1권 p 220~221 

 어디 개 뿐일까. 굳이 고양이를 들먹이지 않아도,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동물들은, 이제 아주 많다.
마하트마 간디가 그랬다지. 
'그 나라의 동물들이 받는 대우를 보면 국민들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라고. 
물론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가 가득한 말이긴 하지만, 정서적으로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인류의 진보란 단순히 '인간만' 진보하는 것을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성별과 인종이 평등하게, 지구의 자연을 보호하고, 자연 속에서 함께 하는 다른 동물들과 조화롭게 발전해나가는 것일테니까. 지구가 멸망하고 자연이 파괴되고, 모든 동물들이 죽는다면 인류만 덩그러니 황무지 위에서 뭐하려고??(ㅋㅋ) 
 일본 만화 시스템에서 시작한 글이 인류의 진보에 다다랐다. 이제 그만 말(글)을 줄이라는 뜻일 터. 
[사냥개 탐정] 봐도봐도 좋은 만화였다. 다니구치 지로 작가가 그렇게 그려보길 염원했다던 '로보'가 등장하는 [시튼] 도 그렇겠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70생애동안 정말 많은 작품을 치열하게 그려냈고, 수많은 국가에서 사랑받았다.
이정도면, 다니구치 지로의 생도 찬란하달 수 있을 터다. 
 비슷한 업종에 있는 자로서 그의 빛나는 생에 존경과 부러움을 보내며 미숙한 글을 닫는다.
 그곳에서도, 실컷 그리시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