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쇄를 찍자 4
마츠다 나오코 지음, 주원일 옮김 / 애니북스 / 2016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아마, 고등학생 시절이었을 것이다.
교과목 선생님이었는지, 교생 선생님이었는지, 기억이 명확하지는 않다. (이야기가 명확히 기억나는 것으로 보아 '여자' 교생 선생님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세대도, 나이도 상대적으로 더 비슷했을테고, 남고였던 우리 학교엔 여선생님조차 한 분도 안 계시던 시기였기에, 여자 교생 선생님의 말씀이셨을 가능성이 엄청나게 높다!!!!! )
할튼, 그 때 쯤 들었다. 고2 땐가, 고3 땐가, 누구에겐가. 
칠판에 하얀 글씨가 기억나니까, 누군가는 했을거다. 

그 내용이 더 중요하니까, 일단 풀어보자면

'앞으로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해야만 하는 일' 사이에서의 갈등이 생길거다' 

는 내용이었다. (아니면 그냥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 둘 만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내용은 이후로 수십년간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중이다. (수많은 윤색을 거치면서) 

'하고 싶은 일' 이 "희망" 이라면, '할 수 있는 일' 은 본인이 현재 가지고 있는 "능력" 혹은 "재능". 그리고 '해야만 하는 일' 이란 '지금 당장 선결해야 할 과제' 일 것이다.
이 세가지가 딱 맞아 떨어지기란, 차라리 로또에 당첨되기가 쉬워 보일 정도로 어려운 일이다. 
아무리 위대한 재능을 타고 났어도 운과 타이밍이 맞지 않으면 꽃피울 수 없다.
예전에 친한 형들과 비슷한 이야기를 하다가 
"타케히코 이노우에가 50년 전 쯤 콩고에 태어났다고 생각해봐. 그가 그렇게 위대한 만화가가 될 수 있었겠어? " 
라고 말한 적 있다. 
베토벤, 모차르트가 조선에서 노예의 자손으로 태어났다면 그 재능이 발휘될 수 있었을까?
아마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해야만 하는 일' -새끼줄 꼬기 따위의- 만 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런 시대에 비하면 현대 일본과 한국에서 태어난 만화가 지망생들은 차라리 나은 것일 수도 있겠다.
그만큼 더 심한 경쟁이 도사리고 있긴 하지만, 확률적으로 '하고 싶은 일' 을 찾을 수 있는 기회가 많은 것이니까. 

한 명의 작가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 '해야만 하는 일' 을 너무 늦지 않게 딱 찾아내고, 꾸준히 기량을 갈고 닦아 작품을 한 편 완성하기까지도 큰 운이 필요하지만, 그 작품이 지면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되기까지는 더 큰 운이 필요하다.
아무리 기량이 뛰어난 이라도 정식으로 데뷔하여 작품을 발표하기까지는 역시 꽤나 험난한 과정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기량을 알아봐 주는 좋은 편집자를 만나서, 좋은 지면에 알맞게 실려야만 비로소 독자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선보여, '작가'라는 명찰을 달 수 있다. 즉, 내 작품을 독자들에게 전달해줄 수 많은 다른 사람들이 필요하다. 
세상에 독자가 없는 작가는 있을 수 없다. 작가의 작품은 독자와 만나야만 '작품' 으로서 첫 호흡을 떼고, 그 후에야 작품과 작가는 '작품'과 '작가' 로서 가치를 지니게 된다.
독자에게 읽히지 않는 작품은 어디 사는 어떤 누군가의 취미활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고, 독자가 없는 작가에게 작가라는 명찰은 자뻑에 지나지 않는다. 
태생부터가 '대중들을 위한' 것인 '만화'는 매체의 특성상 더더더더욱 그렇다.
 
[중쇄를 찍자!]는 바로 그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작가와 작품을 발굴해서, 지면으로 옮겨 독자들과 만나게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출판사 만화 잡지 부서의 편집자들과, 만들어진 책을 서점으로 실어 나르는 영업부원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도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해야만 하는 일의 갈등을 거친 사람들일 터다. 

△표지의 캐릭터들부터 유쾌상쾌발랄~

 
[중쇄를 찍자!]는 일본 출판계를 소재로 한 작품으로, 최근의 우리나라는 넓은 웹 인프라를 통해 개인 블로그를 통해서도 작품을 발표하고 온라인을 통해 데뷔까지 할 수 있긴 하지만, 출판물 시대 잡지 역할을 하는 대형 포털이나 만화 전문 사이트들이 엄연히 존재하므로 아주 동떨어진 이야기라고 볼 수만은 없다.

[중쇄를 찍자!]는'만화왕국' 일본 안에서 한 편의 만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수고를 거쳐 독자들에게 전달되는지, 리얼하고 디테일하면서도 명랑한 필치로 그려지고 있다. 

주인공 코코로는 전도유망한 유도선수로 진지하게 올림픽 국가대표를 노리던 체육대 학생이었지만, 불의의 부상으로 사랑하는 유도를 접고 출판사의 문을 두드리게 된다.
서두에 언급했던,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 모두가 오롯하게 한 방향이었던 새파란 청춘이 모든 삶의 계획이 순식간에 어그러진 것이다.
코코로는 펑펑 울고 난 뒤에 잠시 방황의 시간을 거치고 그 모든 일들을 리셋 시킨 상태에서 다시 생각해본다. 펑펑 울던 시기 코코로를 지탱해 준 것은 만화였고 만화에 관련된 일을 하고 싶어진다. 
이제 한가지는 찾았다. 
하고 싶은 일.
하지만 평생 유도만 해 온 체육소녀가 하루 아침에 만화가가 될 수는 없다. 
할 수 있는 일은, 만화 잡지를 출간하는 회사에 들어가는 것이다. 
해야만 하는 일은 출판사에 입사하기 위한 시험 공부를 시작 하는 것이다. 
여러 군데의 면접에서 낙방하면서, 코코로는 사회생활의 엄정함을 깨닫지만, 작품 안에 그러한 내용들이 구구절절 담겨 있지는 않다. 단지, 아래의 몇 컷으로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통찰은 참 디테일해서, 작가가 진짜 유도를 했나!!! 했더니, 운동엔 젬병이란다.ㅎㅎ
아마 취재의 결과물이었던 듯. 만화는 발로 그리는 것이라던 모 작가님의 말씀도 떠오른다.




명랑만화체의 가벼운 필치로 그려지지만, 담고 있는 이야기들은 그리 만만치 않다.
우리나라보다 조금 더딘 속도기는 하지만 일본도 온라인 매체의 출현으로 종이 잡지는 침체 일로를 걸어가고 있다. 
한 때는 '잡지왕국' 이라 불릴 정도로 엄청나게 다양한 - 스포츠나 연예, 취미는 물론 우리가 쉽게 상상조차 하기 힘든 바리스타 전문 잡지라던가, 유치원 전문 잡지, 커텐이나 벽지, 사무용품은 물론 월간지까지!!! - 잡지들이 엄청나게 생산되어 불티나게 팔렸던 곳이 바로 일본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시장이 여성잡지와 만화잡지였을 텐데, 이 잡지들도 점차 그 종 수가 눈에 띄게 줄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한 일본 출판계의 현실도 충분히 담아내고 있고, 생업과 꿈 사이에서 방황하는 기성, 신인 작가, 작가 지망생들의 이야기도 만만찮게 실려 있는데, 아무래도 내 개인적인 상황과 맞물려 쉬이 웃어 넘길 수 만은 없었다. 




△우리는 콘티라고 부르지만, 일본에서는 '네임' 이라고 부른다. 
나는 콘티를 거의 러프 데셍 수준으로 만들어서 보내는 편이다. 대사도 다 타이핑해서 알아보기 쉽게.... 신인의 자세랄까...ㄷㄷ 

  
무엇보다 [중쇄를 찍자!] 의 전체를 관통하는 명확한 주제는 오직 한가지이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선. 그 선 위에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작품을 매개로 하지만 작품을 독자에게 선보인다는 것은 결국, 사람(작가)과 사람(독자)을 연결시켜 준다는 의미이다.
소설과 만화를 불문하고, 작품 속 주제는 대개 작가의 말과 동일시된다. 예를들어, 폭력적인 만화를 그리는 작가는 폭력적인 성향이 강할 것이라고 여긴다거나, 남녀 차별적인 에피소드를 다룬 작가가 여성혐오의 시각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여기는 등 말이다. 
작가는 때론 비폭력을 주장하기 위해 폭력을 그리고, 남녀 차별을 반대하기 위해 남녀 차별을 그리기도 하지만,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작중 인물의 모든 대사들이 작가의 사상에서 나온다고 오해하는 것이다. 
특히 댓글을 통해 독자와 1:1 소통이 가능한 작금의 대한민국에서는 그런 경향이 더욱 도드라져서, 때로는 작가가 작품이 아닌 자신의 입으로 직접 해명해야 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이렇게 작가와 독자가 1:1로 맞닥뜨리다 보니 작가들은 종종 독자와의 거리를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작가가 온라인을 통해 공개한 작품이라고 할지라도 분명히 독자와의 관계를 연결시켜주는 '선' 은 존재한다.
우리는 이것을 '인프라' 라고 부르고, 역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간에 꼼꼼하게 메여진 선들이다. 
전기를 발명한 사람이나 인터넷, 월드와이드 웹을 개발한 과거의 사람들까지 운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적어도 지금 현재 작품이 실려 있는 포털 사이트의 서버를 관리하는 직원부터 독자의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조립하여 파는 사람은 물론, 작가를 픽업하고 원고를 전달받는 웹 사이트의 담당 편집기자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를 통해 독자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인식하지 못하는 작가는 쉽게 자만한다. 
오로지 나의 재능만으로, 내 작품이 뛰어나서, 독자들에게 전달된다고 생각한다.
막말로 어느 순간 EMP 라도 터져서 모든 전자장비가 마비된다면, 거리에 나가 펜과 종이로 사람들에게 만화를 팔아먹을 수 있는 웹툰 작가가 몇이나 될까? 
거리의 시민들 앞에 만화를 들이밀고, "보기 싫으면 보지 마시던지 ㅎㅎ " 할 수 있을까? 


이 작품은 '혼밥' '혼술' 에 익숙한 나에게도 새삼스레 큰 울림을 주었다.
뭐든 혼자 다 하고 있었고, 혼자면 다 좋다고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수 많은 사람들의 수고를 받아 살고 있었다.
또한,  
우리 각자는 자기 일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일들이 대부분 남을 위한 일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게 열심히 책 읽고 리뷰 쓰는 행위만 해도 그런데, 나는 언제나 리뷰는 오로지 나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내가 책 읽은 감상을 잊지 않고, 나중에 돌이켜 보려고 쓰는거였다.
하지만, 네이버 블로그 사업자를 위한 것이기도 하고, [중쇄를 찍자!]의 원 저작자 쇼가쿠칸과 마츠다 나오코, 한국 저작권자 애니북스와 애니북스 마케터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겠지. 어쩌면 이 리뷰를 읽고 책을 사는 독자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겠고.
혼자 다 할 수 있을 것 같고, 혼자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정말로 새삼스럽지만, 책을 읽다 보니 그런 메시지들이 와닿았다. 
다른 이의 작품을 팔기 위해, 이렇게 치열하게 노력하고 고민하는 사람들이라니.
그러고 보면 당신도 그렇고 있고, 거기 당신도 그러고 있는데.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물건을 만들고, 다른 사람의 물건을 팔고, 다른 사람의 편의를 위해서 자신의 시간을, 청춘을 바치고 있었지. 
우리 모두는, 비록 어쩔 수 없을지라도, 각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서로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거였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간만에 보는 참 착한 만화였다.
한없이 밝은 코코로를 보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고. 



그래, 누가 되었든, 뭐가 되었든.

누구나 '하고 싶은 일' 과 '할 수 있는 일', '해야만 하는 일' 사이에서 갈등한다.

모든걸 충족시킬 수는 없으니, 하나씩, 포기해 가는 것이다.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잡을지는 오롯하게 자기 자신의 몫이다.

 

그리고,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자신의 삶을 살아낸다.

당신과 나 뿐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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