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4
윌리엄 포크너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2월
평점 :
절판


끝없이 펼쳐진 광야.

하늘의 독수리가 보기에 마치 신이 연필로 선을 그은 듯, 얇고 검은 선이 때론 직선으로 곧게, 때론 완만한 원을 그리며 벌판을 가로지르고 있다. 황야를 가로지르는 검은 선은 이윽고 드문드문 연둣빛이 보이는 초원지대에 접어들고, 곧이어 무성한 침엽수림을 만난다. 수백년, 어쩌면 수천년 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을 것 같은 고고한 침엽수림. 

검은 선을 따라 시커먼 기운을 토해내며 느릿느릿하게 달려가던 쇳덩어리는 그 앞에서 멈춰서고 만다. 

이 숲은 통과할 수 없다.

아직은.

쇳덩어리는 잘 몰랐지만, 쇳덩어리의 창조주이자 검은 선을 그린 인간들은 알고 있었다. 이 숲은 누가 누구에게 팔았고, 또 그 누가 다른 누군가에게 팔았기에, 함부로 나무들을 베어 넘겨 계속 선을 그릴 수 없었던 것이다. 

인간들은 소유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매매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매매권을 주장한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소유할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고, 매매할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지만, 아무도 그만큼 생각하지 않거나, 생각했으나 생각하지 않은 척 했다.


 거대한 숲의 관점에서는 개미나 여우, 토끼등과 구별하기 힘든 크기였으나 개미나 여우, 토끼의 시점에서는 마치 태산처럼 거대한 곰 한마리가 있었다. 곰의 발 밑에 깔려 으스러진 잡목 부스러기와 각종 낙엽, 나무 그루터기와 드러난 뿌리의 일부, 흙 등은 곰의 한 쪽 발에 발가락이 없다는 사실을 눈치챘지만 개의치 않았다. 곰도 그다지 개의치 않았는데, 곰을 뒤쫓는 인간들은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곰에게서 발가락을 앗아간 그 인간들이었다. 

 곰은 인간들이 두렵지도, 밉지도 않았다. 곰이 연어나 토끼, 여우, 나무 따위를 두려워하거나 미워하지 않는 것 처럼 말이다. 미워서 나무를 긁는게 아니었고, 두려워서 연어를 잡거나 토끼를 죽이는 것이 아니었다. 

곰의 뒤를 쫓는 것은 수 년 간 같은 인간들이었다. 

 1년 내내 뒤쫓는 것은 아니었고, 한차례. 긴 잠에 빠져들기 전에 찾아왔다. 그들은 해마다 몇 주간 숲에 머물며 사냥을 했다. 숲 한쪽에 지어놓은 튼튼한 오두막은 꽤나 아늑해 보였고, 곰은 몇 차례 그 주변을 어슬렁거리기도 했다. 인간들은 매번 적당한 수의 짐승을 사냥하고 오두막을 떠났다. 물론 인간들의 최종 목표는 곰임을, 그 곰은 잘 알고 있었지만, 아직 인간들은 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비록 그들에게 많은 상처를 입었지만, 생명이 생명을 사냥하는 일은, 숲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러웠기에 곰은 인간들을 미워하지 않았다. 약해지면 먹힌다. 곰은 인간들이 무기로 삼는 개들을 해치웠고, 인간들의 개는 곰을 두려워했기에, 곰은 인간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어느날 곰은 지난 해 처음 온 새파랗게 어린 인간과 마주쳤다.

소년은 자기 몸 만큼이나 긴 쇠붙이를 쥐고 있었고, 눈동자는 두려움에 가득차 있었다.

그 쇠붙이는 제법 매서웠지만 애초에 인간은 곰에게 너무나 허약한 존재였다. 어디든 베어물면 두부처럼 으깨어졌고, 앞발로 후려치면 마른 덤불처럼 으스러졌다. 피로 가득찬, 움직이는 가죽부대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이 지니고 다니는 쇠붙이들은 제법 매서웠지만, 애초에 인간은 곰에게 두려움이 대상이 아니었다. 곰은 적의를 보이지 못하는 소년이 하찮았다. 구태여 앞발을 휘둘러 경직된 가죽부대를 터뜨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어쩌면 곰은 소년의 눈빛에서 다른 느낌을 읽었을지도 모른다. 두려움이나 미움, 증오 같은 감정이 아니라, 곰이 한번도 느껴본 적 없는 그런 것. 지금은 잃었지만, 언젠가 본 적 있던 갓 태어난 자신의 새끼를 보았을 때 느꼈을 지도 모르는 그런 것. 


소년은 언젠가 이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깨닫게 될 것이다. 

그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 자신의 몸뚱이 하나 말고는 다 무의미할 것이며, 인간이 인간을 사고 팔 수 없듯, 대지와 수목도 사고 팔 수 없으며, 종국에는 자신의 몸뚱이 하나조차 흙으로 돌아가게 될 것임을. 모든 것을 버리고 자연의 품 안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그럴 수 없게 될 것임을. 사고 팔 수 없는 것을 사고 팔 수 밖에 없게 만드는 누군가, 무언가가 생기게 되리라는 것을. 인간들이 기묘한 쇳덩어리를 이용해 어머니 대지 위에 흩뿌린 피와 살점들이 그 댓가가 되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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