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 2 (완결) 노아 2
대런 아로노프스키 & 아리 헨델 지음, 이현희 옮김, 니코 앙리숑 그림 / 문학동네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혹시...혹시 이 세상에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은 건 아닐까? 

어쩌면 조물주께서는 우리가 함과 야벳에게 짝을 찾아주는 걸 바라지 않으실지도 몰라.

여기 이 동물들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주는 것. 그걸로 인간의 임무는 끝인 거야.

그리고 인간은 사라지는 거지.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1권 100~101p

 

 

우리는 살아가며 가끔씩 - 아니면 매우 자주 - 생각한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엄마 뱃속에서 나와서 무덤 속으로 간다는 매우 명쾌한 답이 있지만, 이 질문의 본질이 그것뿐이 아님은 모두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필이면 우리에겐 사유의 능력이 존재한다. 만약 이 능력이 없었다면, 엄마 뱃속에서 나와서 무덤 속으로 간다는 답 만으로 모두가 만족했을 텐데. 이와 거의 비슷하지만 만인에게 공감대를 끌어내는 답이 있다.

'신의 손 끝에서 태어나서 신의 품안으로 간다.'  는 답이다. 

생각이고 자시고, 이렇게 믿어버리면 제일 속 편하다. 누군가 나를 만든 고차원의 존재가 있고, 그 존재가 나의 삶에 목적을 부여했으며, 나는 삶을 통해 그 목적에 부합해가기 위해 노력하면 된다. 그리고 그 목적인 수천년전에 신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어떤 사람들이 방대한 양의 책으로 남겨두었다니, 명쾌하고 속 시원한 해답이 된다. 

 

반면 '그런거 생각하지 말고 눈 앞의 현실에 집중해' 라고 일갈한 성인도 있다.

'시장통에서 독화살에 맞았는데, 치료하기는 커녕 독이 퍼져가는 상황에서 독화살을 쏜 사람을 찾고 있는 격' 이라고 일깨워 주셨단다. 

 

인간을 만든 상위 존재; 조물주 가 있건 말건, 문제는 직면한 '현실'이다. 

 

 

 [노아]는 기독교 세계관을 독창적으로 해석하며 성경 안의 노아 이야기를 원형 그대로 가져오되 노아가 했음직한 고뇌를 디테일하게 풀어낸다. 무엇보다 조물주에 대한 접근이 같으면서도 다른 뚜렷한 차별성을 보인다. 

기독교의 신은 세상과 인간들을 창조해내고 삶의 목적은 주었지만 '자유의지' 라고 부르는 충분한 선택권을 허락했다. 기독교의 신은 성경 안에서 인간의 부모처럼 묘사된다. 구하면 주고, 두드리면 열어주고, 부르면 응답하고, 때로는 믿음을 시험하기도 한다. 자애와 사랑의 존재이며 때로는 엄하게 회초리를 들기도 하는 대화가 통하는 인격적 존재로 받아들인다. 

 [노아] 에서의 조물주는 그렇지 않다.

작품 안에서의 조물주는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일방적으로 노아에게 환상을 통한 메시지를 전달할 뿐이다. 노아는 처음 몇번은 환상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신앙이 깊었기에 비로소 그 환상들이 명확한 조물주의 메시지임을 알아채고 스스로의 선험적 지식에 기인한 해석을 시도한다. 

작품 안에서의 조물주는 거대한 섭리이고, 노아는 그 섭리를 먼저 접한 선각자인 것이다. 선각자는 언제나 외롭고 고통스럽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며, 아무도 가보지 못한 곳으로 먼저 발을 내딛는 선구자, 선도자가 되어야 한다. 노아는 주도면밀하게 조물주의 환상을 해석하고, 그 메시지와 스스로의 역할을 깨달았다. 그 과정중에 살아오면서 느꼈던 인간에 대한 끝없는 불신과 인간사회에 대한 절망이 개입되며 다른 생명들에겐 구원자를, 인류에겐 심판자의 길을 선택한다. 단지 조물주의 말씀을 대신 하던 인간에서 조물주의 힘을 이용하는 대행자, 화신으로 거듭나게 된다. 

 인간의 존재 자체를 거부하기 시작한 노아는 결국 자기 자식들의 생사여탈에 관여하게 되고, 스스로가 해석한 조물주의 뜻과 스스로가 행해야 할 마땅한 행동 사이에서 고뇌하기 시작한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영원히 볼 수 없는 미래와 바로 두 손에 올려진. 지금 자신이 당면한 현실. 오지 않은 미래를 위해서는 그 어떤 것도 희생할 수 있는 두터운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막상 희생의 순간을 직면하자 노아는 크게 흔들린다. 


 지금은 거의 발을 뗐지만, 개신교에 깊이 빠졌던 시기가 있었다.

교회활동을 열심히 하면서 봉사도 열심히 따라다녔고, 청년부 회장도 하면서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논의에 깊은 흥미를 가졌더랬다. 하지만 나는 결코 감화될 수 없는 벽이 존재했다. 그것이 그들이 말하는 '구원의 순간' , 혹은 '신을 영접하는 순간' , 또는 '접신', '만신', 그리고 ' 열반' '대오각성' 일지도 모르는, 어쩌면 모든 종교와 철학이 일맥상통하게 가지고 있는 벽일터다.

 정해진 신앙의 훈련을 착실히 받았던 노아는 결국 조물주와 완벽하게 맞닿는 순간을 경험하고 세상과 자신의 운명을 깨우친다. 노아로 인해 노아의 가족들은 구원을 받고, 새로운 민족의 기틀을 마련한다. 

그리고 누구는, 다른 길을 떠난다.  



[프라이드 오브 바그다드] 라는 작품으로 큰 찬사를 받았던 니코 앙리숑은 묵직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림으로 옮겨냈다. 동물의 시점과 시각, 화각을 자유자재로 활용한 다이내믹하고도 드라마틱한 연출이 돋보였던 [프라이드 오브 바그다드] 에 비해서는 전반적으로 평범하지만, 묵직한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1권을 통해 예고되었던 함과 야벳의 형제간의 갈등, 함과 노아의 부자간의 갈등은 내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풀려갔다. 개인적으로는 노아의 가족이 사방이 물로 막힌 200여일간의 표류가 보다 농밀하고 파괴적인 감정을 이끌어 내리라 생각했었는데, 뜻밖의 제3자가 개입되어 갈등의 표출이 그를 통해 표출되었다. 무엇보다 전사인 노아와 달리 함과 야벳, 셈은 너무 나약했다. 당시의 강력했던 부권을 표현하기 위한 의도였을 수도 있겠다 싶다. 노아가 조물주의 충실한 종이라면, 함은 조물주와 같은 아버지에 대항하는 구도를 좀 더 부각시켰어도 상당히 재미있는 드라마가 탄생했을 것 같다.

 1권 리뷰의 서두에도 언급했었지만, 신화는 창작자들에게 끝없이 샘솟는 영감의 샘이다. 

그 샘에서 퍼올린 맑고 시원한 한 바가지의 이야기.   

이 안에는 인간 개체의 존재론에서부터 신학, 개개인의 믿음과 행동에 관한 묵직한 화두들이 가득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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