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울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2
메도루마 슌 지음, 유은경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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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이 지명을 들으면, 나는 어렸을 때 봤던 만화의 영향으로 햇살이 쨍쨍 내리쬐는 남국의 풍경이 먼저 떠오르고, 그 다음 거대한 부지를 차지하고 있을 미군기지가 떠오른다. 그와 함께 수년 전, 평택에서 있었던 미군기지 확대.이전 반대 시위도 떠오른다. 개간지 사이로 난 너른 길 주변으로, 벽면에 페인트로 '미군 기지 이전 반대' 등의 문구가 휘갈겨져 있는 주인 잃은 주택들이 드문드문 터를잡고 있었고, '미군기지 이전 부지' 라는 팻말이 붙은 철조망 또한 단단히 자리잡고 있던 그 날의 그 텅 빈 거리. 그 동네 주민 몇분과 몇몇 교회 청년부가 연합해 유인물을 나누고 깃발을 높이 들었지만, 그 소리를 듣는 사람도 우리 뿐이었고, 유인물을 읽는 사람도 우리 뿐이었으며, 거리를 걷는 사람도 우리 뿐이었다. 오키나와. 일본 제일의 휴양지이지만, 원자폭탄이 떨어진 나가사키와 히로시마만큼 큰 아픔을 지닌 지역. 

 우리 역사에 크나큰 고통의 이름인 일본이라는 나라에 속한 오키나와이지만, 오키나와는 사실 우리나라와 무척이나 닮아있다. 오키나와는 사실 메이지 유신 전까지 독립된 국가였다. 예전 모 신문을 통해 일본의 영토 분쟁과 함께 오키나와의 역사에 대해 읽었던 적이 있다. '류쿠' 라는 이름으로 중국 대륙과 일본 본토를 잇던 해상 무역국가로 시작해서, 메이지 유신때 일본군에 의해 겪었던 참혹한 학살 장면으로 전환되고,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군과의 격렬한 육상전과 해상포격, 자살 특공대의 참상으로 이어지다가,  2차 세계대전 패망 이후 겪었던 미군정, 그 이후 여지없이 무너져내렸던 일본으로부터의 독립 계획으로 마무리되는 길고도 참혹한 기획 연재물이었다.

 때문에, [물방울] 이라는 작품집이 오롯하게 '오키나와' 라는 공간에 천착할 수 밖에 없었던, 오키나와 출신 작가의 대표작 모둠이라는 사실에 강하게 이끌렸더랬다. 

 

 인간은 망각의 존재라고 하지만, 아무리 잊으려해도 잊을 수 없는 일도 무수히 많다.

이 적당한 두께의 작품집 안에는 총 세편의 단편작품이 자리잡고 있다. 작품집의 제목을 맡을 [물방울] 과 [바람 소리] 그리고, 가상의 책 리뷰 형식을 빌린 [오키나와 북 리뷰] 이다. 

[물방울]과 [바람소리]는 비슷한 주제의식을 갖고 있는 작품이다. 두 작품이 함께 대를 이어 연결되는 기억의 되물림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고, [바람 소리]의 경우에서는 부자세대의 이야기를 펼쳐냄으로써 그 느낌이 더 강하게 완성되기도 한다. 이 두 작품이 가지고 있는 주인공들의 기억과 정서가 오키나와의 전쟁 세대 전체를 아우르는 것으로 보인다. 성급한 일반화가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걸 인정받았으니 일본 전체에서 큰 사랑을 받았을 것이고, 문학작품에 주는 상도 여럿 받았을터다. 

평화로운 섬 안에서 각자의 꿈과 희망을 갖고 삶을 영위하던 평범한 소년, 소녀, 고등학생, 대학생, 혹은 농부들. 전쟁이란 이들은 순식간에 다른 세계로 이끌고 간다. 포탄을 피해 도망온 어두운 동굴 안에서 죽어가는 고향 친구를 버려야 하며, 친구들과 함께 수류탄으로 자결을 해야 하기도 한다. 폭탄을 실은 비행기를 조종해서 미군 군함에 돌격하는 임무를 위한 훈련을 받아야 하기도 한다.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삶과 죽음의 경계 또한 모호해진다. 이러한 경계를 드나든 사람의 삶은 과연 어떻게 될까? 

'외상후 스트레스' 라는 단어의 의미가 지극히 협소하게 느껴질 만큼, 엄청난 내상을 입은 사람들이 돌아간 '일상' 이란 얼마나 끈적일까. 시커멓게 진득이는 타르처럼 늘러붙은 전쟁의 기억들을 안고,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아낼 것인가? 

 

 하지만, 메도루마 슈운이 그려내는 오키나와의 전쟁세대의 일상은 그렇게 불쾌하지만은 않다. 

[물방울]의 도쿠쇼는 진득이는 과거의 내상들을 깨끗하게 흘려버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바람 소리]의 세이키치 역시 비일상의 기억들을 아들인 아키라를 보며 씻어낸다. 아마도 이 작품들을 통해 일본의 수많은 전쟁세대들은 크나큰 위로를 얻었을 터다.

전설과 요괴 이야기의 왕국인 일본 작가답게 만화적인 상상력이 현실과 절묘하게 이뤄내는 균형추가 주사 역할을 하며 사람들의 마음속에 따뜻한 치유의 약물을 밀어 넣는다. 게다가 [오키나와 북 리뷰]라는 작품은 풍자와 해학으로 가득 차있다. 끊임없이 키득거리며 읽어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괴롭고 힘들었던 기억들을 깊이 묻으려 한다. 기억을 퍼올리는 순간, 당시에 느꼈던 고통과 공포가 고스란히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뇌는 방어적으로 가장 깊숙한 곳에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묻고 몇 겹 콘트리트를 부어 덮어낸다. 역사란, 우리의 부모님과 조부모님들이 겪었던 시대에 대한 기억이다. 우리 민족은 유난히 괴롭고 힘든 역사를 지니고 있다. 끊임없었던 외세의 침략, 일제 강점기와 미군정을 거쳐, 한국전쟁과 민주화 투쟁, 군사 쿠데타와 군부 독재시대까지. 잊고 싶지만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이다. 그래서인지, 우리 역사를 다루는 문학가들은 지나치게 엄숙하다. 그도 그럴것이, 아직 그 고통의 기억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마 일본에서도 오키나와나 나가사키, 히로시마등을 다룰 때는 비슷한 정서가 공유될 것이다. 

 하지만, 메도루마 슈운은 그 고통의 기억들을 수면위로 끌어 올리되, 그 고통스러운 감정들을 기발한 상상력으로 상쇄시켜낸다. 사건들을 객관적이고도 담담하게 그려내되, 만화적이고 설화적인 소재를 차용하여 정서의 분위기를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생생한 등장인물들의 섬세한 감정묘사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단편이라는 제한된 지면 안에서 간결하면서도 섬세하게 표현된 인물들이 풍성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낸다. 

 

 서두에 언급했듯, 오키나와의 역사는 일본 역사와 별개로 본다면 우리 민족의 역사와 굉장히 닮아있다.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속에서 어이없이 바스라져간 수많은 생명들이 참 덧없게 느껴진다. 그때도, 지금도 힘없는 민초들은 누군가의 제물이 되어 덧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하지만, 살아있는 한,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밝은 햇볕 위로 끌어올려 바라보고, 받아들이고, 느끼고, 생각해야 한다.

억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을 일으켜야 하고, 절벽 위에 뚫린 새까만 공간으로 바득바득 기어 올라가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우리는 삶 속에서 새까만 죽음의 그림자를 밀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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