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팔이 소녀 말로센 시리즈 3
다니엘 페낙 지음, 이충민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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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이런 작품일거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못했다.

카피에 나와있듯, 코믹 - 스릴러 - 판타지라길래, 쑥쑥 잘 읽히겠거니, 하며 헬스장에서 고정 싸이클에 앉아 읽을 책으로 찜해둔 터였다. 계획대로 헬스장에 들고가서 고정 싸이클에 앉아 가볍게 펴들었는데, 잠깐 사이에 땀을 뚝뚝 흘리며 숨을 헐떡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책을 좀 더 읽기 위해 워밍업으로는 꽤 과한 30분동안 페달을 돌렸고, 그 뒤로부터는 헬스장에 갈때마다 고정 싸이클을 꼭 30분 이상씩 하게 되었다.(집에 가지고 가서 읽을 생각은 안했다. 사실 내겐 그 시간이 가장 집중이 잘 되는 시간이라서.) 

 

 끔찍하게 난자당한 샹프롱 교도소의 소장 생티베르의 시체에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결혼식날 천국같은 교도소에서 천사같은 신랑을 잃어버린 신부 클라라와 그의 오빠 뱅자맹 말로센, 그리고 그의 연인 쥘리와 그의 사랑스러운 가족들, 그리고 뱅자맹의 일터인 탈리옹 출판사의 여러 사람들이 폭풍같은 연쇄살인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작품은 평이한 소재와 신선한 아이디어들, 평범한 서사와 유려한 묘사들이 모두 적재적소에서 놀라운 효과를 발휘한다. 작가인 다니엘 페냑의 문장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우며, 문장마다 위트와 유머가 송알송알 박혀있다. 게다가, 주인공인 뱅자맹 말로센의 가족 구성원들이 참 재미있다. 장르소설에서 종종 등장하는 예지력을 지닌 꼬마가 등장해 이야기의 큰 흐름에는 영향을 주지는 않지만, 이야기 전체의 정서를 절묘하게 컨트롤 해 내고, 산전수전 다 겪은 종군기자 출신의 연인 쥘리는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미스테리 스릴러는 조율하는 역할을 한다. 작품의 주인공 격인 뱅자맹 말로센을 이야기 초반부터 배재시키는 대담함도 놀랍다. 무엇보다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뱅자맹의 일터인 탈리옹 출판사의 '자보 여왕' 이다. 그녀가 바로 타이틀의 주인공인 '산문팔이 소녀' 이다. 

 

 이 작품은 장르소설의 관점으로만 보아도 대단히 잘 짜여진 수준높은 이야기이다. 여러 복선과 트릭을 심어 독자의 뒷발을 잡아채고, 뒤통수를 후려치고, 코와 입을 막고, 개성강하고 사랑스러운 인물들을 등장시켜 마음을 잡아끌고, 손을 잡아당기고, 반전에 반전으로 독자들을 와락 껴안았다, 확 밀쳐낸다. 뿐만 아니라, 이 작품의 전체를 관통하는 소재인 '상업적인 소설' 에 대한 이야기와 '다른 사람의 탈을 쓰고 살아가는 현대인' 에 대한 주제가 작품 전반을 묵직하게 잡아당기고 있다. 

 

 각종 SNS가 범람하는 요즘에는 '온라인 인격, 사이버 인격' 이라는 것이 발현된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실제 만나보면 얌전하고 조용하지만, 인터넷 공간 안에서는 활발하고 넉살좋기도 하고, 파괴적이고 인신공격적인 댓글을 남기는 사람들을 실제 만나보면 착하고 온순한 사람인 경우도 많다고 한다. 나 역시 내가 올리는 글들을 봐도 '이게 내가 썼나?' 싶은 것들이 많다. 지나치게 공격적인 어조로 글을 쓰고, 잰체, 난체하는 글을 쓴다던지, 실제 만나면 결코 못 건넬법한 오글거리는 댓글을 달기도 한다. 평소에 컴플렉스가 많아 조금 내성적이고 소심한 면이 있는 나는 항상 자신감에 차있고, 아는게 많고, 매사에 쿨한 사람들이 좋았고, 닮고 싶어했다. 인터넷 공간 안에서 닉네임의 뒤에 숨어 내가 원하는 나를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대부분의 생활 공간에서 연기를 하며 살아간다. 직장 상사 앞에서는 얌전한 부하직원이어야 하고, 한편, 이런 업무 저런 업무들이 잔뜩 몰려들때엔 무능한 사원을 연기해야하는 경우도 있다. 인사평가가 달린 프로젝트 앞에서는 자신만만한 연기를 해야하고, 맘에 드는 소개팅녀 앞에서는 뭔가 있는 든든한 남자를 연기해야 한다. 만원 지하철 안에서 간신히 찾아내 비집고 앉은 의자 위에서는 잠자는 연기를 해야 하기도 하고, 명절 즈음에는 회사일이 잔뜩 쌓인 연기를 해야 하기도 한다. 그런 모든 연기들이 어쩌면 모두 각자의 본질일수도 있다. 

 소설이란, 그런 것 아닐까?

작가라는 한 사람이 익힌 모든 삶의 경험과 교훈들, 보고 듣고 느낀 것들, 순간마다 했던 수많은 연기들, 사회의 통념과 정해진 윤리관 안에서 밀어넣고, 숨겨놓고, 밀봉하고, 상상했던 그 모든 일들.

 

 뱅자맹 말로센은 좋은 오빠이자, 좋은 아빠이자, 좋은 연인이자, 좋은 편집자이자, 좋은 부하직원이자, 좋은 친구였다.

그 모든게 어쩌면 다 다른 탈과 연기였을 수도 있고, 다 뱅자맹이 가지고 있던 본질일 수도 있다. 그런 그가 '소설'을 만드는 일을 했고, 다른 작가인 척 연기를 했으며, 결국 정말로 다른 사람의 장기를 몸 안에 넣기도 했다니. 본질을 찾는 과정을 참으로 멀고도 험하고, 복잡했고, 다난했다. 그리고 그가 다시 돌아간 자리는 좋은 아빠이자, 좋은 연인이자, 좋은 편집자이자, 좋은 부하직원이자, 좋은 친구로 연기하는 바로 그 자리였다.   

 

 사람들은 소설을 읽는다.

소설을 읽으며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자기 친구를 발견한다.

자기 과거를 발견하고, 자기 현재를 발견하며, 자기 미래를 발견한다.

인류의 역사를 발견하고, 지구의 역사를 발견하고, 인류의 미래를 발견한다. 

'산문팔이 소녀' 자보여왕이 책에 빠져든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녀는 작품'들' 안에서 한 작가의 삶 전체를 느껴냈다.

 

 사실, 딱히, 내가 꼭 '나' 일 필요는 없어도 상관 없지 않을까 싶다.

연인에게는 영원히 든든하고 사랑스러운 연인이어도 좋고, 자식들에게는 영원히 이 자리에 서 있는 버팀목이어도 좋고, 가끔은 쿨하고 시크한 척 해도 좋고, 소심하게 삐진 척 해도 좋고, 부모님 앞에서는 언제나 재롱떨고 귀염떠는 아이인 척 해도 좋고, 힘들고 지칠땐 병약하고 허약한 척 해도 좋다. 사회가 용인하는 범주를 벗어나거나 도덕적, 법적 기준을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그 어떤 연기를 해도 된다. 

타인과 사회에 맞춰 각기 다른 자신을 연기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인간의 본질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가장 '나 다운 것' 이란 것은 연기하고 또 연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최악 중에서도 최악은 최악의 일을 기다리는 것이다."

p.81

 

"사랑이 죽고 나면 인생은 끝없는 고통뿐이야."

 p.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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