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그타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5
E. L. 닥터로 지음, 최용준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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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초반. 비교적 상류층 가정에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잘나가는 사업체를 운영하는 아버지와 아름다운 어머니, 외삼촌과 이야기의 화자인 아들로 이루어진 백인가정. 이야기의 줄기들은 바로 이 가정을 중심으로 뻗어나간다. 당대 최고의 퍼포먼스 아티스트이자 마술사였던 후디니가 우연히 이 가정을 방문하게 된다. 그리고 외삼촌이 사랑했던 여인 에벌린 네즈빗, 에벌린 네즈빗을 사랑했던 스탠퍼드 화이트와 그를 총으로 쏘아 죽인 에벌린 네즈빗의 남편 해리 K 소. 그리고 에벌린 네즈빗이 만나게 되는 차별받는 이민자 가족인 타테와 그의 어리고 예쁜 딸. 그리고 타테가 에벌린을 이끈 모임에서 만나게 되는 무정부주의 운동가 옘마 골드만. 그리고 옘마 골드만과 만나게 되는 외삼촌. 소년의 어머니가 우연히 구해낸 산채로 땅속에 묻혀있던 유색인 갓난아기와 그 아이의 엄마였던 세라. 그리고 세라를 사랑했던 남자이자 산채로 땅속에 묻혀 죽을 뻔 했던 갈색피부 아이의 아빠인 품위있던 니그로 피아니스트 콜하우스 워커 주니어. 콜하우스 워커 주니어가 타고 다니던 포드 자동차의 주인인 헨리 포드와 그와 함께 하고싶었던 미국 금융업계의 지배자 피어폰트 모건. 


 수많은 인물들이 소년의 가족들 주변에서 점멸하고, 소년은 담담하게 인물들의 뒤를 좇는다. 얼핏, 소설이 아니라 르포같은 느낌이지만, 분명한 소설이다. 그것도 완벽한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의. 하지만, 시간과 장소의 흐름의 기준점을 이 '소년' 으로 잡음으로서 마치 소년의 입을 통해 나오는 것 처럼 느껴진다. 대단히 독특한 경험이었다. 소년의 아버지와 어머니, 외삼촌은 먼저 후디니라는 인물과 만나면서 심경에 작은 파문을 경험한다. 후디니는 미국사회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한두번쯤 이름을 들어봤을 것이다. 탈출묘기의 명수. 미국은 물론 유럽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던 마술사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피어리와 함께 북극 탐험에 동행한다. 피어리 역시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북극점을 정복한 미국의 위대한 탐험가이다. 에벌린 네즈빗은 '빨강머리 앤'의 실존모델로 유명한 당대 최고의 슈퍼모델, 핀 업 걸이었다. 그녀는 강렬한 매력은 당시 브로드 웨이 무대에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켜 무대의 구성과 연출을 뒤바꿀 정도였다고 한다. 옘마 골드만은  알렉산더 버크만과 함께 당대의 노동운동을 이끈 무정부주의 운동가였으며, 콜하우스 워커 주니어는 미국 사회를 발칵 뒤집은 흑인 테러리스트였다. 이렇게 당시 미국 사회의 전반에서 큰 영향을 끼친 인물들이 한 작은 가정에 일으킨 변화를 살피는 일이 상당히 흥미롭다. 

 

 뿐만 아니라 당시 미국 사회에 나뉘어있던 계층, 앵글로 색슨 계열의 백인 가정과 유럽의 이민자, 노예에서 벗어난 흑인들, 최 상류층 은행가와 사업가, 인기 절정의 여배우와 공연가등 각계 각층의 인물들의 삶이 단편적이지만 명확하게 그리고, 빠르게 정리되어 지나간다. 현대 미국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금융과 기업, 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 산업 등 문화의 시초를 잠깐씩이나마 맛볼 수 있다. 중간 중간, 미국 대륙을 횡단하는 거대한 철로와 필라델피아의 대규모 공업단지도 구경할 수 있다. 

 이 작품은 마치 기차를 타고 지나가는 풍경을 구경하는 듯한 느낌이다. 허나, 차창을 통해 지나가는 문장의 풍경들은 그저 피상적인 '스크린' 이 아니다. 창 밖으로 거대한 역사가 도도하게 흘러간다. 미국 현대소설의 특징이랄 수 있는 부사나 형용사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 간결한 문장은 빠르고 군더더기 없는 이야기의 흐름과 어우러져 상당한 시너지를 발휘한다. 적당한 호흡으로 인물들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분절되며 시종일관 지루할 새 없이 이야기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산발적으로 흩어져있던 인물들의 점은 이야기의 중반에 등장하는 콜하우스 워커 주니어와 함께 하나의 선으로 모아진다. 역자 후기에도 등장하지만, 짧고 간결하고 빠르다고 깊이가 없고 함의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의 문장과 문장들이 모인 문단들, 심지어 문단 사이의 여백에까지도 작가의 함의가 깊이 배여있다. 당연히 그 함의를 찾아내는 것은 독자들의 몫일터다. 까메오처럼 등장하는 미국의 정치가들과 1달러지폐에 그려있는(각종 음모론의 소재가 되는) 피라미드와 눈 심볼의 기원으로 추측되는 사건, 미국 노동조합의 탄생과 여성인권운동과 아나키즘의 접목,  제1차 세계대전의 불씨가 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황위 계승자 프란츠 대공의 암살까지, 가볍게 넘길 문장들이 단 한 줄도 없다. '천천히 읽으라' 는 역자의 말과, 역시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맨 앞장의 인용 문구 "이 곡은 빨리 치지 말게. 래그 타임은 절대 빨리 치면 안 돼..." 라는 스콧 조플린의 문구까지, 충분히 이해된다. 

 

 문학은 독자들에게 해답을 주지 않는다.

작가는 사람들을 선도하거나 꿈과 희망을 주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건 정치가들의 몫이다. 소설가는 단지 현실을 그려낼 뿐이다. 어떤 독자들은 그 현실을 보고 해답을 찾거나, 꿈이나 희망을 얻기도 하겠지만, 그것은 당연히 독자 개인의 몫이다. 당연히 작가에게는 독자를 감동시킬 의무도 없고, 깨달음을 줄 의무도 없다. 위로를 받건, 절망을 하건, 모두 독자의 몫이다. 

 이 책을 읽고 당신은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평생에 한번쯤은 일독을 해 볼 만한 작품임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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