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서각 - 한밤에 깨어나는 도서관 보름달문고 43
보린 지음, 오정택 그림 / 문학동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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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는 바야흐로 스토리의 시대이다. '컨텐츠' 의 시대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세상 모든 것에 '이야기' 를 담고자 한다. 심지어 자동차의 타이어 하나에게도 스토리를 담아내기 위해 노력한다. 이야기는 생명이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통해 사물을 인지하고 받아들여간다. 게임 속에 등장하는 아바타에 유저를 이입시키기 위해서도 설득력있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이야기의 설득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사람들은 대상에 이입된다. '설득력 있는 이야기'. 그것은 결국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만한 '충분한 인과관계' 속에서 가능하다. 사실, 우리의 현실은 논리적인 개연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일들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깊이있게 살펴보면 무슨 일이든 뚜렷한 인과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런 뚜렷한 인과관계를 보여주는 이야기는 오히려 리얼리즘을 표방하는 작품들에서는 쉽게 보이지 않는다. 그런 작품들 속에서 인과관계를 찾으려면 작품 밖의 상황들까지 파악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장르소설은 바로 그 속에서 잉태되었다. 머리로 이해되지 않는 현실의 부조리. 부조화. 현실의 부조리와 부조화를 드러내기 위해서. 때로는 인간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나 감정, 상황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야말로 완벽하게 가공된 세상을 그리고자 했다. 공상 과학 소설을 포함한 판타지 소설들. 그리고 각종 미스테리 추리물들. 그 안에서는 모든 것들이 논리적인 개연성을 가지고 있고, 그 무엇보다 뚜렷한 인과관계를 가지고 있다.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세계. 그곳이 바로 장르소설의 세계이다.

 

 발상, 캐릭터, 이야기, 흐름과 호흡. 장르소설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미덕들은 바로 그것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모든 소설들이 추구하는 미덕일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소설 작가들은 스스로를 "사기꾼, 뻥쟁이" 라고 일컫지 않던가?? 얼마나 진짜 같은 거짓말이냐에 따라 소설의 역량은 결정된다. 그렇다면 장르 소설이야 말로 독자들과 가장 정정당당한 대결일 수도 있다.)   

 '장르' 자체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발상과, 그 발상으로 만들어진 세계관 속에 불협화음 없이 녹아있는 설득력있는 캐릭터, 그리고 그 세계관 속의 캐릭터들이 펼쳐내는 또렷한 인과관계를 가지고 있는 이야기와 독자들을 이해시키기 위한 '설명' 과 캐릭터들이 풀어나가는 '에피소드' 의 적절한 분배, 그리고 독자들의 호흡을 잡아 당겼다가 밀었다가, 모았다가 터뜨리는 완급조절. 이 모든 것들을 단순하게 스토리 텔링이라고 부를 수 있을것이다. 뛰어난 이야깃꾼들. 위대한 스토리 텔러들은 이것들을 적절히 갖추고 있었고,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단 다섯줄의 글로도 독자를 울릴수도, 웃길수도. 때로는 호흡하는 것을 잊게 만들수도 있다.

 

 [귀서각] 은 이 모든 것들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상당히 훌륭하게 품고 있다. 이 작품의 본질은 성장소설이지만, 그 토대는 장르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것이다. 그것도 판타지. 게다가 한국의 여러 전통 설화들을 양분삼고 있는 거대한 나무이다. 먼저 작품이 갖고있는 세계관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한국의 전통 세계관에 기인하기 때문에 크게 새로울 것은 없다. 귀신과 도깨비들. 귀신들이 갖고있는 몇몇 규칙들. 그리고, 귀신과 대치관계에 있는 신령들. 그 모든 설정들은 우리가 어느정도는 알고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크게 거부감이 일지 않는다. 작가가 새로 창조해낸 것은 아니지만, 기존의 것들을 잘 조합해 익숙하지만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냈다. 그 안에 들어있는 캐릭터들 또한 그 디테일이 놀랍다. 말 더듬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 '구오' 와 뭔가 비밀을 숨기고 있는 소녀 '제이'. 부모님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구오의 행동이나 반응은 전형적이지만 대단히 디테일하기때문에 누구나 쉽게 설득된다. 일체의 위화감 없이 구오가 받아들여지고, 쉽게 이입된다. 구오와 제이가 [귀서각] 의 세계에서 겪는 사건들은 마치 롤플레잉 게임의 그것과 같다. 퀘스트가 주어지고, 그것을 해결하면 아이템이나 경험치가 쌓인다. 이런 익숙한 패턴 또한 거부감 없이 독자들을 작품 속으로 안내한다. 

 작가는 '재미' 를 위한 조합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 역시 특별할 것 없지만, 완벽한 균형을 유지하며 독자들을 차근차근 이야기의 끝으로 이끄는데, 마치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 를 보는 느낌이다. 교과서적이고 군더더기 없는 완벽한 이야기. 독자들을 쥐었다 놓았다 하는 완벽한 호흡. 충분한 볼거리. 거기에 교훈과 감동까지.

 

 이 모든 것들을 가능케 하는 것을 딱 한가지만 꼽자면, 결국 주인공. 즉 화자일 것이다.

다시 언급하지만, 이 작품은 소년 '구오' 의 성장 스토리이다. 부모님과 말더듬 때문에 인간관계 자체에 대한 트라우마가 그득한 소년 구오. 누구나 한번쯤 거쳤을 어린시절.그 중 가장 '어두운 부분' 만을 모아서 발현 시킨듯한 구오와 제이. 어린 아이들의 세계는 한정적이다. 자신이 가장 오랫동안 머무는 곳. 집, 학교, 학원. 아이들의 세계는 그처럼 좁고 제한적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받는 변화로 인한 충격은 어른들이 받는 그것보다 훨씬 날카롭고 깊으며 치명적이다. 아이들의 세계의 인간관계 또한 제한적이다. 그렇기에 아이들은 자신들이 속한 세상의 작은 변화에도 민감하며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더욱 강렬하며, 그것은 심리적인 외상을 남기고 결국 영원히 남는다. 그 중 부모에게서의 무관심, 혹은 상실은 아이에게 있어 세상 전체가 뒤집어지는 어마어마한 충격이다. 아이에게 부모란 신이고, 세상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어른에게도 마찬가지 이다. 부모에게 아이의 상실은 역시 인생 전반의 상실과도 같다. 작품속에서 구오와 대립각을 이루고 있는 대상인 '송헌' 은 바로 가족을 상실한 가장의 표상이다.

 

 성장이란 통찰력이다. 구오는 눈 앞에 부모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단순히 부모가 자신을 버린것으로 받아들인다. 그것은 당연하다. 아이들에게는 그 이상을 바라볼 통찰력이 없다. 대부분의 통찰력은 선험적 지식, 즉 경험을 통한 지식으로 쌓여 나가기 때문이다. 부모에게 안기고, 챙김 받고, 혼나고, 사랑한다는 말을 듣지 않으면 자신이 사랑받고 있음을 알 수가 없다.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더 좋은 것을 먹이고, 더 좋은 환경에서 살게 해주기 위해 매일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찰할 수 없는 것이다. 당연히 구오는 자신이 버림받고 미움받는 존재라고 인식하게 되고, 그로 인한 트라우마는 폭력이나 말더듬 같은 행동으로 표출된다. 제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제이는 구오와는 반대로 심리적 상처가 아닌 육체적 상처로 인한 충격에 쌓여있던 아이였다. 결국 구오와 제이 모두 귀서각에서의 하룻밤을 통해 자신이 알지 못하던 세계, 즉, 부모의 세계를 엿보게 된다. 그럼으로 한단계 성장하게 되고,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되고, 들리지 않던 것을 듣게 되며, 맡을 수 없던 냄새를 맡고, 할 수 없었던 말을 하게 된다.

바로 "원망하지만 그리워한다는 것" 도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래, 역시 2011년에 문학동네에서 발표된 [가노코와 마들렌 여사] 라는 작품속에서 저자인 마키에 마나부가 작중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지혜를 깨쳐 세상이 훨씬 넓어지는 것" 처럼 말이다. 머리에서 '뽁' 라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바로 '통찰' 이라는 능력을 습득하게 되는 순간이다. 마치 온라인 게임에서 레벨업을 하며 없었던 기술이 생겨나듯.

 

 전형적인 플롯에 교과서적인 스토리텔링 기법으로 씌여졌지만, [귀서각] 은 대단히 독창적인 작품이다. 작가 '보린' 의 세계는 논리적이고 규칙적이며 규칙에 맞춰 논리를 무시하고, 논리적으로 규칙을 무시하기도 하는 등, 대단히 변화무쌍하고 설득적이다. 뿐만 아니라, 게임 시나리오로 데뷔한 작가답게 마치 롤플레잉 게임처럼 미션을 하나씩 클리어 해 나가며 작은 에피소드들을 모아 큰 이야기의 흐름으로 이끌어가는 과정이 정말 세련됐다. 특히 클라이맥스의 반전들은 소름돋을 정도로 인상적이다.  

 그 안에 등장하는 수많은 도깨비와 귀신, 그 밖의 존재들도 전통적인 냄새를 풀풀 풍김과 동시에 환상적이고 매력적이며 익숙하면서도 신선하다. 마치 '해리포터' 를 처음 봤을때의 느낌이랄까. 충분히 '해리포터' 에게 불꽃 싸닥션을 날리며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만한 작품이다. 개인적으로는 좀 더 긴 호흡으로 보다 디테일하게 서술해 나갔어도 좋았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보린 작가의 앞으로의 작품들이 더더욱 기대된다. 한국의 전통 세계를 기반으로 한 [귀서각] 의 완성도 높은 세계관 속에서 새로운 이야기들이 더 나와도 좋을 것 같고, 좀 더 보완된 새로운 세계관을 들고 나와도 충분히 맛있게 잘 살릴 것 같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클라이맥스 부분에서의 호흡 속도라고나 할까. 아마 아이들용 책이라 분량에 제한이 있어서 클라이맥스 부분은 지나치게 힘겨운 느낌이었다.

 허나 충분히 모두에게 추천하고 싶은 대단한 작품임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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