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의 사회적 논쟁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섹슈얼리티와 여성 문제에 관련한 논쟁도 그 논의 구도 자체가 ‘정답’을 찾지 못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 ‘북핵 문제’처럼 이러한 용어들은 자신의 고통을 지배자의 언어로 표현해야 하는, 자기 언어를 갖지 못한 모든 사회적 약자의 딜레마를 압축한다.”132

그래서 매번 질문에 성의껏 답해주려고 하지 말고 질문의 축을 돌려야 한다. 자주 까먹지만 말이다.

예를 들면 결혼한 지 얼마 안됐을 때 받은 “그래서 **이가 아침밥 잘 해줘?”라는 질문 말이다. 나도 아니고 같이 있는 자리에서 배우자에게 하는 질문이었는데 내가 앞서서 “어. 저는 안 먹어서 안합니다.”라고 대답했을 때. “으이그 밥도 못 얻어먹는 새끼”라고 남편을 향한 웃음 어린 타박. 더 대화가 이어지기 전에 나는 되물어야 했다.

1. 이 질문은 배우자에게 했지만 나에게 묻는 질문이다. 답안과 행동강령이 정해져 있다는 점에서 명령문이다.
2. 내가 남편에게 아침밥을 해줘야 한다는 주장을 질문의 형태로 바꾼 것이다.
3. 남편은 여성이 아침밥을 해줘야만 밥을 얻어먹을 수 있는 존재다. 일찍 일어나지 않는다, 본인이 아침을 꼭 먹을 필요는 없다는 여자의 개인성향은 고려할 필요가 없다.
4. 고로 마누라한테 밥도 못 얻어먹고 다니는 남자는 한심한 놈이다.
5. 결혼을 했다는 것은 이 모든 논리에 동의했다는 뜻이다.

얻어먹는다는 표현도 상당히 재밌는데. 한남들의 주장 속 모순을 그대로 흡수한 단어로다.
자리에 앉아 차려준 밥을 떠먹는 행동일 뿐인데, 남편들이 잡혀살고 의무와 도리를 다할 것을 요구받는 여성상위시대^^이기 때문에 그 편하게 잡숫는 밥을 ‘얻어먹는다’고 비틀어 말하는 것이다. 주부는 집에서 편하게 있기 때문에 직장인 남편에게 밥을 해주는 게 응당 맞는데 또 그 밥을 빌붙어 “읃어”먹어야 한다는 아이러니가 거기에 있다. 말해주면 이 질문자가 내게 다른 문제로 후에 그랬듯 또 아 말은 잘하네, 라고 했겠지.

얼마전에 다른 부부를 만나 각자의 아이들을 재우고 술을 먹으면서 본인 어머니와 자기 부인이 얼마나 잘 맞는지, 술을 자주 먹고, 편하게 대하는지 떠드는 남자를 만났는데. 나는 역시 “오, 부인이 대단하시네요.” 했던 것이다. 남편의 인간관계의 연장선인 남자에게 구석구석 어디가 잘못된 말인지 설명해주기에는 내가 너무나 피곤하고 귀찮았다. (넌 떠들어라. 술이나 먹고 난 자련다) 한가지 더, 외향적이고 직장에서도 분위기 메이커로 유명한 그 여성이 정말 시어머니와의 술자리를 좋아하고 자주 같이 술먹고 싶은 걸 수도 있으니까, 내 관점에서 그건 어쩌구저쩌구, 하는 게 실례일 수 있다. 나는 페미니즘으로 훈장질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 행동은 가부장제 작동원리를 내면화한 거야, 결혼을 했다고 해서 누구를 모셔야 하고 기쁨조가 되어야 하는 것은 별개야, 위에서 내려다 보는 식의 말은 하고 싶지 않다. 내가 뭐라고, 내가 뭐라고..
아무튼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어느새 대화가 흘러 흘러 그 남성이 본인의 엄마가 얼마나 대단한 여장부인지를 설파하는 데 이르렀을 때 아차싶었다. “우리 엄마 대단하시지. 소주 **병을 마시고 가장 끝까지 자리에 남으시고 아침에 가족들 해장을 다 챙겨주시니까. 숙취도 없으셔~(으쓱으쓱)”하는 걸 보고는 속이 메스꺼워져서 그냥 술핑계를 대고 방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훈장질 했어야지. 나놈 새키야.

귀찮지만 어쩌다가 말상대해주면 꼭 나오는 말이 있는데, “말싸움 참 잘 하시네요”와 “우리 어머니~”운운이다. 나는 싸운 적이 없는데. 그쪽과 똑같은 태도와 어법으로 답했을 뿐이다. 내 언어는 싸움의 도구가 아니다. 어머니 운운에 대해서는, 앞으로 그냥 밑에 문장들로 갈음해 들려주려고 한다. 나도 니가튼 애비 없었다고 말해봤자 정말 싸움밖에 더 나겠어.











“어머니는 대단히 고도의 정치적 목적을 가진 픽션이며, 따라서 예측할 수 없는 임의적인 이데올로기다.”86

“이제 아들은 어머니에 대해 말하는 것을 그만 두어야 한다.”86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몸은 남성들 간 권력 관계의 표지이며 점령지로 간주된다. 남성 정치학의 연대와 계승은 ‘전쟁시’에는 적군이 소유한 여성에 대한 집단 강간을 통해, ‘평화시’에는 부계 가족을 통해 어머니의 몸을 빌려 작동한다. 모성은 본능이 아니라 정치학이다. 모성은 어머니와 자녀의 관계를 설명하는 말이다. 모성은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의미한다. - P76

가부장제는, 가족은, 국가는, 민족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통제하고 활용, 매개, 동원함으로써만 유지된다. 우리 사회가 여성을 그토록 어머니로 호명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머니로 간주되는 여성은 성적 주체가 될 수 없고, 자신의 몸을 가질 수 없다. 그의 몸은 남성만이 주체가 되는 가족과 국가의 소유다. - P78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지배 이데올로기나 대중매체에서 떠드는 것 이상을 알기 어렵다. 알려는 노력, 세상에 대한 애정과 고뇌를 유보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 - P56

나의 주장은 남성을 적으로 상정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남성은 적이 아니라는, 여성들의 자기 다짐과 남자를 안심시키는 발언들, 그리고 남성과 대립하고 싶지 않은 자기 최면의 배후에, 혹시 ‘가부장제는 정치적 문제가 아니다.’라는 무의식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질문해 보자는 것이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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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10 12: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1-10 14: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모두 감사한 일이지만,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세 번째 서문의 의미는 단 하나다. 지난 15년간 한국 사회가 얼마나 바람직하지 않은 방식으로 급변했는가에 대한 일종의 기록으로서 가치를 지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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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복 신앙의 역할을 수행하는 제도 종교 그 이상을 알고 싶은 비종교인(종교 문외한)의 호기심이 늘 있어서 이런 제목을 보면 끌릴 후 밖에 없다. 박정은 수녀의 <사려 깊은 수다>를 흥미롭게 읽은 기억이 있는데 이 책도 어느 정도 그런 갈증을 해소해주기를 기대하게 됨.  


























남성 페미니스트의 글을 읽을 때도 비슷한데, 내부자가 이런 말을 하다니(해주다니) 류의 고마움? 같은 게 내 안에서 고개를 들 때가 있다. 앞으로는 내가 아는 한에서 냉정하게 봐보려고 한다. 그게 외부인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응원일 것이다.




가톨릭 신자이기 때문에 페미니스트의 진정성을 의심받기도 했고, 진보적이지 못한사람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 P5

책은 나 자신이 페미니스트이자 제도종교의 신자로서 혼란을 겪으면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쓴 글이다. 종교가 여성 억압에서 눈을 흐리는 ‘아편’이 될 수도 있지만 진정한 자유와 진리를 찾을 수 있도록세상이 제시하지 않는 통찰력을 부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 P5

남성중심 문화와 그 상징들은 힘이 세고 여성들은 침묵 속에서 고통을 받거나 피학적인 여성상의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다. 나는 여성들이 용기를 낸다면 자유와 해방을 누릴 수 있다는 희망으로 글을 썼다.

남성중심 문화에서 여성들은 종교에 무엇을 기대하고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는가

한국 여성은 몇몇 무슬림 국가의 여성보다 성평등한 사회에 사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한국 여성이 평등한 사회에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전통적으로 한국 여성들은 제사 음식을 정성껏 준비하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제례에 참여할 수 없었다.

남성중심 문화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종교는 어디에도 없다. 어느 종교가 얼마나 더 성차별적인가를논하기보다 모든 종교 안의 성차별을 인식하고 시정해나가야 한다.

여성 신자는 미사 시간에 미사포를 써야 한다. 이 전통은 성서에 제시되어 있다. 남성의 머리는 하느님을상징하지만, 여성의 머리는 남성의 머리를 상징하기 때문에 머리를 가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종교는 매 맞는 여성에게, 남편의 외도로 분노하는 여성에게 ‘내 탓’으로 돌리라고 말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종교는 우리를 눈멀게 하고 불의한 현실을 정당화하는 아편과 같다. 실컷 울고 난 여성들은 일시적으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고 가족에게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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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매 - 조각 천을 이어 붙여 바느질하는 아이
이가을 글, 신세정 그림 / 한림출판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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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책을 사랑할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다.

명주부인의 노블리스 오블리주(새삼 낡고 오래된 말처럼 느껴지네;;), 공동체의 가치를 아름답게 그려낸다. 근데 적으면서 넘 아득해….
어리고 가난하고 오갈 데 없는 “흙수저” 예술가로서의 쪽매와, 그의 작품의 가치를 알아보고 존중한 명주부인의 우정(쪽매를 결국 거둬 키웠지만 둘의 관계를 우정이라 표현하고 싶음)에 주목해 읽는 재미도 있겠고. 책의 메시지가 바느질과 길쌈이라는 책의 소재와도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그 중에서도, 나는 왜 좋아할까 굳이 꼽아본다면 스스로가 투덜이라 쪽매가 좋고 부러운 거지 싶다. 부당하고 억울한 상황에서도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는 모습에 반해 버리는… 나의 헤프고 뻔한 버튼 중 하나를 누른다고 할까 ㅋㅋ(하지만 함께 읽는 내 아이가 저도 그런 어린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말릴 것ㅋ)

아이는 바늘 부인을 악인으로 받아들이는 듯한데, 이 역시 여러가지로 대화거리가 되리라 생각한다. 앞으로도 종종 읽고 이야기하고 싶은 그림책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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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능에 집중한 문진 - 리딩

평점 :
절판


길이 ,모양, 색깔 모두 투박하지만 기능에 충실하다. 더 길면 보관이 불편했을 거 같아서 이 정도로 만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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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3-01-08 00: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문진은 다 별 다섯이구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