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가 이 가운데 어떤 일을 했든 간에 그런 삶은 너무나 공허했을 것이다. 가족이나 남편이 없는 여자는 이해받기는 커녕 깊은 의심의 대상이 되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잭더리퍼를 백년 넘게 문화로 향유하고 누린 역사 밑에 깔린, 살해된 여자들이 있다. 그 여자들에게 이름도 있었고 삶도 있었다. 누구에게서 태어나 어떤 자식으로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어느 동네에 살았는지, 누구와 연애(결혼)했고 자식은 몇을 낳았던지, 일상은 어땠는지 모든 정황이 삭제되었고 살해된 매춘부 누구,로만 기록에 남았다.


책을 읽을수록 왜 이 책이 안 팔렸는지 이해가 된다.

여전히 여자에게 관심이 쥐뿔도 없기 때문이다.

구빈원에서 태어난 주인공을 통해 빈민의 삶과 사회의 병폐를 그려낸 고전 올리버 트위스트의 출생지, 혹은 조지오웰이라는 대작가 본인의 ‘체험 삶의 현장’으로서의 구빈원은 알려져 있지만 당시 노동 계급 여성에게 구빈원이 어떤 의미였는지 아직까지도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세가 몰락해 오갈데 없어진 노동계급 여자가 어떻게든 안 가보려고 애를 써도.. 구빈원을 들락거리며 매춘이나 성 노동과 접점을 가지게 될 수 밖에 없는 사회구조에는 누구도 호기심이 없기 때문이다. 희생자들의 삶처럼, 책 또한 가부장의 승인을 받지 못한 스토리텔링이다.

내게는 시대극 내용의 연재물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사료와 고증이 적절하게 어우러진 논픽션이라 꽤 재밌다. 저자가 인물들의 구체적인 삶에 대해 더 알 수 없는 부분은 그렇다고 솔직히 끊는데, 그런 부분이 오히려 상상을 더 자극하기도 한다. 일이백년전 여자들 상황을 유추하거나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다는 게 이젠 끊어져야 할 저주일텐데.
여하튼 책은 이런저런 이유로 술술 읽히고 내용 특성상 오디오북 콘텐츠로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내가 영국근대사를 더 잘 안다면 책에 대해 더 성의껏 적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해… 이 책은 더 많은 사람들이 보면 좋을 거 같아 다 읽으면 리뷰를 꼭 적으려고 한다. 지금은 밑줄만 옮겨두려고 했던 건데 썽내게 되었지만...

나이 든 사람, 쇠약한 사람, 아픈 사람, 버려진 사람, 신체 장애가 없는 사람 모두가 각자 다른 사정으로 구빈원에 들어왔을 텐데도 똑같이 멸시당했다. 흔히 가장이 돈을 벌지 못하면 가족 전체가 구빈원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다. 한 가족은 입소와동시에 남녀로 구분되어 서로 다른 공간에서 지내야 했다. 아주 어린아이는 어머니와 함께 지낼 수 있었지만 일곱 살이 넘은 아이들은 부모와 떨어져 구빈원 내 학교에서 지냈다. - P67

1880년 남편을 떠나 집을 나왔을 때 폴리는 앞으로 자신이 어떤 일을 겪을지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엄청나게 과감한 행보였다. 노동자계급의 별거가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지만, 여자 쪽은 "도덕을 중요시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착실한 아내로서 누리던 지위를 박탈당했다. 불화의 원인이 누구에게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쨌든 아내가 남편을 떠나는 것은 여자의 잘못이었다. 좋은 아내는 "언제나 변함없이 선하고, 본능적이고 절대적으로 현명한 여자, 그리고 "자기발전이 아니라 자기절제"를 추구하는 여자였다. 아내로서 여자의 의무는 "절대로 남편 곁을 떠나지 않는 것"이었다. 어머니로서 여자의 의무는절대로 자식을 버리거나 방치하지 않는 것이었다. 가족을 두고 집을나가는 여자는 무능하고 부도덕한 여자, 그야말로 망가진 여자였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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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나쁜 일 오늘의 젊은 작가 37
김보현 지음 / 민음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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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빌리는 책은 대체로 나만 빌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우리 동네 도서관에서 가장 인기있는 책이었다. 예약도 길고 그런. 다 읽고 나니 여행에 들고 가도 괜찮았을 거 같다. 이야기가 후루룩 읽히고 소재 자체도 내겐 감정이 북받치거나 하는 류가 아니라서. 줄 안치고 뭐 안붙이고 책읽는 게 오랜만이라 솔직히 여유있고 편아~안했다. 안 읽은 과거의 나에게, 여행 짐가방 여유있을 때 넣을 만한 책으로 추천… 뭔 쌉소린지 싶지만 여행 가방 챙길 때마다 책 뭐 넣지 고민 만번해서 그렇다.

추리할 건 없는 추리 소설이지만 완성된 그림을 알고 맞추는 직소퍼즐 같아 재밌게 읽었다. 장르의 매력을 반감시키는 말인지도 모르지만 꽤 친절하고 쉽다는 생각이 드는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메시지가 가벼운 건 아니다. 책을 덮고 나면 보이는 제목, ‘가장 나쁜 일’이 내게 남겼을 흔적(“인간은 모두 약하고, 지금보다 훨씬 더 약해질 수 있다는 뜻이라고 해두죠.”)을 생각하게 하고, 그렇게 다른 이들의 것도 한번쯤 헤아리게 한다. 이 주인공으로 사건을 전개해 나간다는 것이 읽으면서는 의아한데 마지막에 이르러선 어느 정도 설득되었다는 것도 장점이었겠지?

“정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가능성은 현실적으로도 확률적으로도 희박했다. 그녀의 삶이 그런 판타지로 작동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정희는 문득 억울해졌다. 어째서지? 한번쯤은 그래도 되잖아. 인생에 딱 한 번쯤은.”

“그녀는 스스로를 공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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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에서 연재되던 칼럼 재밌게 봤는데 책으로 나왔구나. 심조원 작가 알림 신청해놨을텐데 왜 3사 서점 아무도 안알려줬어요? 원망원망.. 팥죽할머니 칼럼 특히 좋았던 기억 있어서 일부 첨부. 사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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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나이는 없습니다> 중 밑줄

”더 한참 후에야 쇠락과 쇄락의 의미들이 나이듦의 양면성을 비유하는 것처럼 읽혔다. 우리는 상실 이후의 언어를 갖지 못한 채 헤어졌지만 마담 J 덕분에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나이듦은 쇠약하여 말라 떨어지는 일방향의 쇠락이 아니라 어떤 면에서 자유롭고 깨끗해지는 쇄락을 동시에 경험하는 과정이라는 것.“

쇠락과 쇄락 사이_김지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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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3-01-02 15: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희진쌤만 보이는 ㅋㅋㅋㅋㅋ 빨간 원피스를 입으신 분의 눈매 좀 봐주세요! 이 당참과 기개를 어쩌란 말입니까 ㅋㅋㅋㅋㅋㅋ

유수 2023-01-02 15:41   좋아요 1 | URL
정희진 샘 진짜.. 이 책 말고라도 예전 책 전자책으로 조금씩 보는데 문장들이 시차없이 저에게 달려오네요. 배울 게 쌓여있나봐요

유수 2023-01-02 15:46   좋아요 1 | URL
눈매 ㅋㅋㅋㅋ 생각도 못했네요 진짜. 왠지 장소는 썬베드 비치베드여야 할거같은데 자세가 아주 꼿꼿하니 ㅋㅋㅋ 마음에 드네요
 

<그런 나이는 없습니다> 중 밑줄

“노년기 여성들의 정체성은 얼마든지 다양할 수 있다. 무엇이든 하고 싶고, 또 될 수 있는 상상력과 실천력을 빼앗는 현실은 사양한다.”
‘할머니’ 롤 모델과 ‘황혼’_김영옥

늙은 여성 배우들의 배짱에 기대어 앞으로 늙어갈 여자들도 떵떵거리는 큰 웃음을 웃어본다. (…) 현실과 문화 텍스트 간의 기분 좋은 상호 미러링을 기대한다. - P15

손자를 돌보는 것과 외로운 밤을 누군가의 다정한 목소리와 함께 보내는 것이 왜 꼭 양자택일이어야 하는지? 이런 식의 양자 택일 주장은 정의롭지 못하고 퇴행적이다. 상투적인 선입견들을 전제하는 이 반전이 몹시 불편하다. 훨씬 더 복잡한 요소들이 얽힌 구조의 문제를 사적 혈연의 책임 문제로 치환하는 것이니 해결책으로도 너무 단선적이다. - P11

돌봄 사회로의 전환이라는 큰 그림을 그려야 할 때, 세대 간 돌봄 책임 이전이라는 정의롭지 못한 정책에 코를 박고 있으니,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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