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에서 밥하면서 읽었다. 바다 앞에서 해방감을 누리는 소녀의 뒷모습을 그린 장면에, 좁은 공간을 왔다리 갔다리 어설프게 칼질하는 주부가 벅차오르는 거 뻔하긴 하다. 그런데 단지 그거 때문만은 아니라고 하고 싶다. 요즘에 아이와 옛이야기 그림책들 읽다가 지쳐버린 지점이 있는데 그런 스트레스를 해소해주는 책이었다.
옛이야기는 동일 문화권 사람들의 집단 무의식의 원형이 되고, 설화 자체에도 옛사람들의 핵심가치를 보존하고 전승한다는 역할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 치더라도 읽는 사람들, 특히 어린이들의 무의식에 자취를 남기는 서사로써 치명적 결함이 있다고 한다면 교과과정에 싣는 등의 관행은 개정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선녀와 나무꾼이 1학년 교과서에 지금 있다는데…)
옛이야기를 읽으면서 가부장제, 성차별주의, 제국주의, 물질만능주의, 엘리트주의, 비장애 중심주의를… 그렇다 친다고 쳐서 치더라도(안댐) 개인적으로 늘 답답했던 지점은 구원의 일방향성이었다.
구원은 왜 한 방향으로만 이루어질까. 미션을 극복하고 성공하는 남자가 보상(주로 여자, 누구 딸)을 받는 얘기에서든지, 왕자를 기다리던 여자가 결혼해서 해피엔딩을 맞는 이야기에서든 혹은 고난에 처한 주인공을 위해 온갖 수난을 감수하는 여자의 위대한 자기 희생이 됐든지 말이다. 위험에 처한 동물을 도와주고 보답으로 선녀 잡는 치트키 알려주는 식의 교감 말고, 왜 사람들 간의 위계를 초월하는 우정, 선한 의도에서 생겨나는 상호 신뢰와 사랑 같은 건 그려지지 않을까. 옛이야기 이론서를 읽어 봐도 나는 설득되지 못했다. 이해 관계가 작동하지 않는 사이, 우정(이 얼마나 큰데!), 그걸 작아보이게 만드는 이야기들에 질려버림..
조이스 박은 <빨간 모자가 하고 싶은 말>에서 인어공주를 “두 개의 구멍으로 환원되는 이야기”라 말한 바 있다. 여자가 목소리를 내기로 선택하면 다리를 잃을 것이고 다리를 선택하면 목소리를 잃는다는, 어떤 구멍이 될지를 선택하기 요구받는다는 것이다.
“가부장 사회는 여자가 두 개의 구멍을 다 가지고 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말을 하고 싶은가? 그러면 하반신의 구멍이 없는 물고기 하체를 입으면 된다. 그러나 남자의 파트너가 되어 그에게 사랑받고 싶은가? 그렇다면 혀를 내주고 다리 사이의 구멍을 얻으면 된다. 그렇게 하나의 존재는 두 개의 구멍으로 환원된다. 온전히 구멍 두 개를 다 쓰며 살 수 없다. 버젓이 쓰라고 달린 두 개 중 하나만 쓸 수 있다.”143
페미니즘으로 다시 쓰는 이야기들은 자주 실패한다. 검열과 삭제, 재구성이라는 과제 때문에 일단 재미 면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입에 오르내릴 수 없으니 시간성이라는 절대 권력을 획득할 수도 없다. 페미니즘으로 다시 쓴 차별, 혐오 없는 전래동화 <선녀는 참지 않았다>의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한계점을 적어뒀는데, 뼈 아프고 의미있는 지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써내려간 이야기를 수차례 검토하며, 맞닥뜨린 한계점들은 우리의 서사가 진정 뿌리 깊은 차별의 문제를 해소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 우리는 기존의 전래 동화와는 다른 주체적인 여성상을 구현하고 싶었다 (…) 높은 사회적 부나 지위를 가지는 것만이 성공이고, 성공하기 위해 끊임없이 경쟁해야 한다는 사고에 익숙해진 우리는 단순히 ‘성공하는 인간’의 범주에 여성을 끼워넣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고, 권력을 쟁취하는 것이 곧 모든 문제에 해답이 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더불어 잘못된 남성 인물을 벌주는 것도 하나의 해소 방안으로 그려냈지만 과연 그것이 마땅한, 혹은 유일한 해결책일지에 대해서는 반드시 고찰이 필요하다(…) 즉, 우리는 기존의 성차별주의를 풍자하고 비판하는 것을 넘어서, 부조리한 사회구조를 대체하는 새로운 사회를 상상하는 것에는 이르지 못하였던 것이다.” 에필로그(<선녀는 참지 않았다>)
같은 책 추천사에서 정희진은, “사실 동화는 단어의 어감과 달리 공포와 단죄에 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권선징악의 결말이 교훈을 주는 것 같지만, 문제는 누구의 입장에서 권선징악이고 사필귀정이냐는 것이다. 동화처럼 당파적인 서사도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인어 소녀>로 돌아가서.. 책 속 인어소녀 미라는 넵튠왕이라 자처하는 어부에게 바다의 왕인 본인이 인어인 자기를 거둬키웠다는 이야기를 믿고 자란다. 미라는 넵튠의 수족관에서 신비한 인어공주를 재현하고 보일 듯 말듯 자취를 숨기는 게임으로 손님을 끌고, 소원 동전을 줍는 일을 하며 산다.(가해자 진짜 한심하고 그릇 작은 새끼다) 단 한번도 건물밖으로 나온 적이 없는 인어소녀의 유일한 낙은 넵튠이 들려주는 자기의 (지어낸) 어린시절과 인어 어머니 이야기이다. 미성년자 감금 착취 범죄 현장.. 대환장..
가스라이팅의 전형적인 케이스라 할 만한데 이런 상황을 탈출할 계기는 우연히 사귀게 된 친구 리비아에게서 온다. 또래로 짐작되는 둘 사이에 서로에 대한 호기심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물 속의 인어소녀에게 다가가기 위한 리비아의 노력이 특히 정성스럽다. 물에 젖지 않게 그림을 코팅해 선물하는데 인어소녀는 넵튠에게 들키지 않게 잘 숨겨둔다. ‘내 방에서 보이는 나무는 이렇게 생겼어’, ‘내 개는 방바닥에 꼬리를 찰싹대서 찰싹이라 이름 붙였어’ 사사프라스 나무와 개 그림, 그리고 이런 것까지 네가 궁금해할지는 모르겠는데 본 적 없을 거 같아 그려봤다는 참치 상추 샌드위치 그림까지. 리비아를 보고 이렇게 말 많은 인간은 처음 봤다는 인어소녀의 내적 놀라움이 너무 와닿는다 ㅋㅋㅋ 둘의 대화는 조건(인어소녀에게 목소리가 없고, 공통 문화권에서 자라지 않았다는)에 비해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다시 만나는 것,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것, 그러려면 탈출할 것. 인어소녀는 혼자서 걷기를 훈련하고 나가기로 마음 먹는다. 당연하다. 두 소녀 사이에 흐르는 케미스트리가 얼마나 강력할 수 있는지 우린 아니까. 인어소녀가 수족관을 탈출한 것은 스스로 해낸 일이지만 그 동력은 친구와 스스로의 세계를 오가는 순수한 우정에서 왔다.
인어소녀의 미라, 라는 이름은 리비아가 지어주는데, 미라클에서 따왔다. 네게 미라클은 발음하기 어려울까, 그렇다면 미라는 어때?라고 제안한 것. 안데르센이 쓴, 왕자를 구하고도 대신 죽기를 자청해 바다의 거품으로 이름도 없이 사라진 인어공주의 사랑이 아름다운가. 상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야말로 사랑의 가장 정직한 시작일텐데. 정희진의 말대로 “동화도 다른 담론처럼 치열한 정치적 경합의 장”이다. 읽고 거르고 다시 읽는 것이 현재 양육자들의 소명이다. 다시 쓰인 이야기를 찾아내 읽어주는 것이 쉽지는 않아도 이런 책을 만날 때의 짜릿함에 비하면 감수할만한 고생이다.
북플앱은 왜 상품넣기로 책 순서 편집도 안되고.. 안되는 건지 방법을 못찾는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