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속의 항해 창비세계문학 66
진 리스 지음, 최선령 옮김 / 창비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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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페미니즘과 탈식민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도미니카 태생 영국 작가 진 리스의 자전 소설“의 서평으로는 생뚱맞지만ㅋㅋ 편지가 이렇게 비정한 매체일 수 있겠구나, 싶다. “친애하는”으로 시작해 “당신의 누구로부터”로 한껏 정중히 말을 맺으면서도 소설 안에는 돈을 대줄 수 없다, 밀린 돈을 내라, 돈 달라는 내용의 편지들이 계속 나온다. 유일하게 돈을 준다는 사람은 (아마도 다른 여자가 따로 있을) 변심한 연상의 전 연인. (칵퉷!)

고향 카리브해에서부터 런던에 이르기까지 열아홉살 애나 모건은 정처없이 부유하고 무엇보다 스스로가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다는 걸 가장 잘 알고 있다. 사랑에 빠져 가장 고조된 순간에조차도.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된 애나의 외부 상황과 내면은 뒤로 갈수록 더 분열적으로 묘사된다. 카리브해(서인도제도)에서의 분절된 기억과 런던 풍경이 교차한다. 책 소개에 늘 등장하는 페미니즘 문학과 디아스포라의 경계도 이 연장선에 있지 않을까. 어디가 시작인지, 정착지인지. 소설 속에서 애나는 어디에 있는 건지 계속 생각하게 한다. 여기는 떠나온 곳일지, 현실인지.
어둠, 속의, 항해. 제목 좋다.

회상 중에, 흑인 하녀 프랜신의 노랫소리를 떠올리는 장면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프랜신이 들어와 (… )그녀는 내 머리에 감긴 붕대를 갈아 주었고 (…)나무 잎사귀로 내게 부채질을 해주기 시작했다. 바깥은 밤. 거리를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소리 - 가늘고 슬픈 쓸쓸한 목소리들. 그리고 마치 살아 있는 무엇이라도 되는 듯 사람을 짓누르는 그 열기.
나는 흑인이 되고 싶었다. 난 항상 흑인이 되고 싶었다. 프랜신이 거기 있어서 나는 행복했다. 나는 그녀의 손이 부채질을 하느라 까딱까딱하는 모습을 보았고, 그녀의 손수건 밑으로 떨어지는 구슬같은 땀방울을 보았다. 검다는 것은 따스하고 유쾌하며 희다는 것은 차갑고 슬프다. 그녀는 이런 노래를 부르곤 했다. - P39

안녕, 내사랑, 잘 있어요.
소금에 절인 소고기와 정어리도
내가 남기고 떠나는 모든 좋은 시절도,
안녕, 내 사랑, 잘 있어요.

이것이 그녀가 아는 유일한 영어 노래였다.
- 배 위에서 뒤돌아 마을의 일렁이는 불빛들을 보는 순간 나는처음으로 내가 떠난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밥 삼촌이 자 이제 가는거야 하고 말했고 나는 내가 우는 것을 아무도 보지 못하게 고개를 돌렸다ㅡ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듯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바닷속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안녕 내 사랑 잘 있어요―나는 일렁이는 불빛들을 지켜보았다 ㅡ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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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2-12-27 19: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를 아직도 읽지 않은(못한) 1인으로서 이 책 또한 영원히 저의 숙제 같은 책이에요. 유수님 글 읽고 나니 더는 미루지 말자 결심하게 됩니다.

‘책 소개에 늘 등장하는 페미니즘 문학과 디아스포라의 경계‘라는 대목에 눈이 가네요. 너무 어려울 것 같고 그러면서도 매력적으로 느껴져요 ㅎㅎㅎ

유수 2022-12-27 20:12   좋아요 1 | URL
앗 제가 말을 잘못 인용했는데 이 책 페미니즘 문학작품으로 늘 언급되는데 저는 디아스포라 문학이기도 하지 않나 싶어서 혼자 느낀ㅋㅋ경계는 어딜까 하는 의문인데요. (전문가가 아니라 조심스럽ㅋㅋ)
단발님께 이 소설 어렵진 않을 거 같아요. 동일시하기에 (제가) 넘 멀어졌지만 젊은 여자가 겪는 불안, 외로움 그게 메인이라서요.
사르가소 언젠가 읽으실 때 저도 따라 읽어야지~~~♥️

수이 2022-12-27 20: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두 분이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를 아직 읽지 않으셨다는 사실이 제겐 좀 충격적이지만 그래도 저도 뭐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게 하나도 없으니까 ㅋㅋㅋㅋ 어둠 속의 항해_ 저도 찜해서 내년에 읽도록 하겠습니다.

유수 2022-12-27 22:15   좋아요 0 | URL
저도 기억속에 남은 게 없어요. 그래서 밑줄이나 알라딘 서재가 중헌 것이군… 두 분께 보고 배우죠.. 또 뭐 읽으시나 구경갈게요숑로롱

수이 2022-12-27 22:31   좋아요 1 | URL
아 지금 보니 유수님은 읽으신 거구나 ㅋㅋ 쏘리;;;;; 저도 다시 읽을게요!!! 두 분과 함께!!

유수 2022-12-27 23:32   좋아요 0 | URL
중요하지 않아요 수이님♥️ 같이 읽기 n번째 책으로 찜…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