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일은 어쩌면 서울을 찍고 싶어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괴테의 이야기를, 도스토에프스키의 이야기를 2008년의 한국에, 한국의 서울에 가져다 놓음으로써 2008년의 서울의, 21세기 지금 현재 우리 서울의 공기와 시간을 붙들어 담고자 하였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서울의 모습을 보여주는 쇼트들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러한 쇼트들은 이후에도 종종 삽입되어 보여진다. 마치 물 위를 부유하듯이 카메라는 서울의 이곳 저곳을 흐르며 무심한 듯, 혹은 뭔가를 아쉬워하는 듯한 느낌으로 서울을 바라본다. 서울을 향한 애도, 혹은 연민. 청계천을 따라 흐르던 카메라가,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이어지던 트래킹 쇼트가 교회에 이르러 문득 끝나는 순간, 청계천은 거기서 죽은 것이다.

영수가 죽은 후, 영수의 집 문에 등이 걸린다. 죽은 영수가 누워있고 어머니가 그를 부여잡고 서럽게 통곡한다. 사각의 프레임. 그리고 그 안에 양쪽으로 조금씩 닫힌 방문이 만들어내는 또 하나의 프레임 안으로 카메라는 둘을 바라본다. 프레임 안의 프레임. 그리고, 그 둘 뒤로 작은 창문이 또 하나의 프레임을 만들어낸다. 그 작은 프레임 안으로 보이는 서울 타워. 죽음의 시간을 바라보는 프레임 안에서 우리는 서울 타워를 함께 바라보는 것이다. <극장전>에서 동수의 입을 빌려 말하자면 '아무데나 있는' 서울 타워.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그냥 '서울.' 영수의 죽음. 혹은 서울의 죽음. 정성일은 인터뷰에서 "이 영화의 상영시간이 죽음을 미루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영수의 죽음을 미루는 시간. 하지만, 어쩌면 서울의 죽음을 미루는 시간. 영화의 첫 쇼트. 아기를 임신한 어린 소녀는 죽기 위해 햄버거를 우적우적 씹어 먹는다(고 보도자료에 밝혀져 있다고 한다). 영화의 마지막. 영수가 죽고 이제 영화가 끝난게 아닌가하고 느껴지는 순간 소녀는 다시 등장한다. 소녀는 친구와 함께 케이블카를 타고 남산에 오른다. 이제 어떡할거야? 낳아야지. 그래서 어떡할건데? 길러야지. 낳아서 어떡할건데? 살아야지. 친구의 물음에 소녀는 고개를 들고 떳떳이 앞을 바라보며 살아가겠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들은 뱃속의 아이에게 인사한다. 해피 버스데이. 정성일은 어쩌면 지금 서울의 죽음을 목도하면서도 동시에 차마 손을 놓지 못하고 서울이 계속 살아나아가 주길 원하는지도 모른다. 혹은, 소녀가 남산에 오르기 전 소녀를 임신 시킨 것이 분명한 소년을 찾아가 그를 때리려다 말고 문득 한번 껴안고서 떠나갈 때, 서울은 거기서 죽은 것이다. 그리고, 남산을 올라가며 정성일은 서울이 거기서, 그러니까 어디서나 보이는 그곳에서 서울이 곧 태어날 아기와 함께 다시 새로 태어나 주길 바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가 지금 이명박의 시대에, 혹은 오세훈의 서울에서 개봉한 것은 어쩌면 기적일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는 밤중에 별을 잃고 선화여인숙 앞에 맥 없이 앉아 있는 저 동방박사 세 사람처럼 길을 잃고 헤매는 일 없이 소녀와 함께 해를 향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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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11-16 0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영화 봤는데요, 관람객이 너무 없어 정말 한산하더라구요. 정치 시스템 (이명박시대, 오세훈등)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관심이 거기에 미치지 않는 것 같아요.

허스키 2011-11-16 12:22   좋아요 0 | URL
영화는 어떠셨나요? 저에겐 작년의 영화 베스트 10에 들어가는 영화였습니다.
 

먼저 밝혀두어야 할 것 몇 가지.

나는 올해 개봉한 영화 중 중요한 영화들을 많이 놓쳤다. <엉클 분미>도 <경계도시 2>도 보지 못하였다. 혹은, <계몽영화>도 <예언자>도 보지 못했다. 어쩌면, 내가 놓친 그 영화들이야 말로 BEST 10이라는 목록 아래 어울리는 영화들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여기에 적는 올해 개봉작 중 BEST 10은 올해의 나를 향한 부끄러운 반성 이상의 다른 의미는 없을 것이다.

또한, 이 목록은 지극히 사적인 목록이다. 즉, 이 목록은 올해 내게 '개인적'으로 기억되는 영화의 목록이지, '객관적'으로 바라본 올해 개봉한 '좋은 영화'의 목록은 아닌 것이다. 아니, 내가 '좋은 영화'의 목록을 거론할 처지나 되던가.


1. 카페 느와르 / 정성일 

2. 옥희의 영화 / 홍상수 

3. 하하하 / 홍상수 

4. 허트 로커 / 캐서린 비글로우 

5. 클래스 / 로랑 캉테 

6. 시 / 이창동 

7. 시라노; 연애조작단 / 김현석 

8. 부당거래 / 류승완 

9. 인 디 에어 / 제이슨 라이트먼 

10. 아저씨 / 이정범 

...................... 

'영화노트' 카테고리를 추가하며 예전에 써 둔 글을 옮기고 있다. 2010 Best라. 어느새 시간이 슬슬 2011 Best 10을 골라볼 때가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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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부 중 마지막 <옥희의 영화>. 여기서 우리는 옥희가 각각 다른 남자, 그러니까 젊은 남자와, 그리고 나이 든 남자와 각각 다른 시간(12월 31일과 1월 1일)  한 장소(아차산) 에 찾아간 일정을 번갈아 가며 따라간다. 다시 말해, 여기서 옥희와 나이 든 남자의 씬을  A라 하고, 옥희와 젊은 남자의 씬을 B라 한다면, 이야기는 A-B-A-B-A-B 식으로 계속 번갈아 가며 진행된다. 그런데, 이야기가 끝나갈 즈음,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휴게소에서 한번은 막걸리를 마시고, 다른 한 번은 잔치국수를 먹고 내려오는 길에 이르러 우리는 옥희와 나이 든 남자의 길을 내려가는 모습은 보지만 옥희가 젊은 남자와의 기억을 나래이션으로 얘기하는 부분에선 그 둘을 보는게 아니라 아무도 보이지 않는 수풀만을 보게 된다.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이 부분에서 왜 이런 선택을 하였는지 궁금했다. 영화를 두 번째 보았을 때에도 이 부분을 왜 그렇게 하였는지 궁금하여 질문을 하였다. 왜 거기에서 그런 선택을 하셨나요? 그것은 어떤 의도가 있으셨나요? 아니면, 촬영 현장에서 발생한 어떤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셨나요? 만약, 어떤 의도가 있었다면, 거기서 우리가 옥희를 보지 않는게 중요한가요? 아니면, 수풀을 본다는게 중요한 것인가요?
 

그건 기분 좋은 실수였습니다. 이선균씨와 정유미씨가 내려오는 장면은 실수로 안찍었거든요. 그런데, 수풀을 찍은게 있었어요. 그래서 그게 거기 들어가도 괜찮겠다 싶었습니다. 그 부분 뒤로 두세 장면이 더 있는데 거기서 한번 그렇게 깨주고 갈 수 있어서 좋았어요.
 
그러니까, 옥희와 젊은 남자가 내려오는 장면은 실수로 안찍었기 때문에 거기에 없는 것이다. 홍상수 감독은 그래서 그 자리에 수풀을 넣었다. 이렇게 그의 대답에서 의문을 끝낼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겐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홍상수 감독의 말처럼 단순히 젊은 남자와 옥희가 내려오는 장면을 깜빡하고 찍지 않은게 이유라면 앞에서 나오는 나이 든 남자와 옥희의 장면을 좀 더 길게 유지하면서 그 위에 “하지만”으로 시작하는 앞의 내용과 대조적인 옥희의 젊은 남자와의 기억에 관한 나래이션을 얹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한 번 깨주고’ 가는게 좋았다고 언급하는 지금의 구조에서조차 홍상수 감독은 어찌되었든 두 개의 쇼트로 나누어 가고 있다. 그럼에도 둘로 나눈다는 것. 그럼에도 옥희의 나래이션이 두 개의 다른 쇼트 위로 말해져야 한다는 것.
 
이렇게 감독의 대답을 들은 후에도 나에겐 여전히 질문이 남고,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고자 한다. 그리고 그게 바로 내가 영화를 보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그리고 마지막에 글로 적어보고자 하는 이유이다. 그러니까, 난 영화를 이미 이해하고 있다거나, 대답을 안다거나, 영화를 누군가에게 설명하고 안내하고자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그럴 능력도 없다. 글을 쓰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영화를 보며 생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노력하는 일. 그것을 하고자 함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영화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으리나, 영화와 나의 거리가 조금씩 더 가까워지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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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처럼 세지 않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에겐 확실히 셌다. 결정적인 한 방이 가해지는 순간에 예외없이 고개를 돌렸던 것 같다. 예전엔 미이케 다카시의 피가 난무하고 내장이 쏟아지는 영화를 낄낄거리며 봤는데 갈수록 이런 장면을 마주하는게 힘들어진다. 극장에서 나와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집에 돌아와 가족들의 웃는 얼굴을 보며 마음을 간신히 추스려야했다. 그런데 이게, 그러니까 이 불편한 감정이 단순히 영화에서 보여주는 액션의 강도의 세기 때문인지 의심스럽다.

먼저, 이해할 수 없는 죽은 주연의 동생의 첫 등장의 방식. 수현의 약혼녀 주연이 시체로 (정확히 말하자면 머리만) 발견된 후. 벤치. 주연의 아버지 장반장이 담배를 태우고 있다. 수현이 그에게 다가와 옆에 앉는다. 잠시간 둘의 대화 후 장반장은 수현의 손을 잡고 계속해서 미안하다고 한다. 자신의 딸에게 미안하고, 수현에게도 미안하다고 한다. 가까이에서 이 둘을 보여주던 카메라는 여기서 문득 멀리 빠져나가 이들을 바라보는 어느 여자의 등 뒤에서 둘을 바라본다. 갑자기 등장한 어느 여자의 등. POV. 일반적으로라면 여기서 다음 숏은 이 여자의 얼굴을 보여주어야 하는게 맞다. 하지만, 카메라는 여자의 얼굴을 건너뛰어 곧바로 화장터 안으로 들어가 타들어가는 주연을 보며 오열하는 가족과 수현을 보여준다. 즉각 떠오르는 질문. 도대체 이 여자는 누구지? 그리고 다시 납골당에서의 수현. 그런 수현을 ‘형부’라고 부르며 다가와 위로하려는 여자. 그제서야 우리는 먼저 보았던 뒷모습의 주인이 (아마도) 이 처제일 것이라 짐작한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짐작’할 뿐이다. 이 주연의 화장터 시퀀스에서 주연의 여동생, 그러니까 수현의 처제(가 될 여자. 주연과 수현은 아직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다)가 등장하는 두 장면은 아무리 생각해도 왜 굳이 그곳에 있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마도 처음 그녀의 뒷모습이 등장했을 때 만약 다음 숏에서 그녀의 얼굴로 이어진다면 이 ‘처제’의 존재가 느닷없이 영화에서 중요하게 부상하는 효과를 일으킬 수 있으므로 그냥 건너뛰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 그런 이유라면 애초에 그녀의 뒷모습을 건 그 숏은 없었어야한다. 혹시 우리가 바라 본 시점은 처제의 그것도, 우리의 그것도 아닌, 죽은 주연의 자리에서 우리가 둘을, 혹은 셋을 바라봄이 아닐런지.

이후에도 처제는 몇 번 더 등장하여 수현으로 하여금 그녀의 눈치를 보게 한다. 난 여기서 이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왜 수현은, 그리고 주연의 아버지 장반장은 처제의 , 딸의 눈치를 그토록 보는 것이고 어찌보면 그녀의 반응에 저리 쩔쩔매는 것일까. 마치 나쁜 짓을 하다 선생님께 들킨 아이들처럼 말이다. 화장터 이후 그녀가 처음 등장하는 씬은 장반장이 수현에게 유력한 용의자 정보를 주고 있을 때이다. 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처제가 들어오고 수현과 장반장은 급히 탁자 위의 자료들을 숨긴다. 그리고 처제에게 말을 돌리는 수현의 모습은 다소 말을 더듬기까지 하는 느낌. 그의 직업이 국정원 경호요원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지나치게 당황하는 모습이다. 다른 가족에게 안좋은 일을 보여주지 않기 위함이라고 이해한다고 해도 여전히 좀 지나친 면이 있다. 국정원 요원들은 비밀을 만들고 그것을 지키는게 일상인 사람들이다. 두번째 등장. 차를 타고 가는 수현에게 장반장이 전화를 걸어 이제 그만하자고, 그러는게 좋겠다고 한다. 여기서 그의 표정과 말투는 마치 누군가에게 협박을 받은 듯한 느낌이기까지 하다. 그럴 수 없다는 수현의 대응에 수화기 너머에서 장반장의 수화기를 가로채는 것은 옆에 함께 있는 처제이다. 처제는 이제 의미 없는 복수는 그만두라 한다. 처제의 목소리를 들은 수현은 또 당황하고 애써 침착해하며 이것은 의미없는 복수가 아니라고 한다. 선생님께 결정적으로 들켜 꼼짝없이 혼나는 아이들. 한 아이는 교무실에 벌서고 있지만, 다른 아이는 선생님은 이해 못한다며 투정을 부리고 있다. 복수를 꿈꾸는 둘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며 한편으론 그 둘을 그만두게 하려는 처제의 몸짓. 혹은 죽은 주연이 내려와 그만두라고 말하는.

영화의 마지막. 장경철이 장반장을 죽이기 위해 그의 집으로 찾아와 그를 죽이기 직전 처제가 집에 온다. 뒤늦게 도착한 수현. 다행히 장반장은 죽지 않았다. 뭐? 죽지 않았다고? 일단 다음으로 넘어가자. 분노에 가득차 경철을 쫓는 수현과 경철의 사이로 죽은 처제의 숏이 들어온다. 이불 같은 것에 꽁꽁 싸여서 어딘가에 죽은 채 버려진 모습. 그녀는 장경철의 다른 희생자들과는 달리 신체가 훼손되지 않은 상태이다. 이 숏은 아주 짧게 스치듯이 지나간다. 마치 눈길을 돌려 그녀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듯이. 

그러니까, 나는 여기서 처제와 죽은 주연이 자꾸만 겹친다. “하나면 되요?” 칼을 들고 그녀의 옆에 앉은 장경철에게 주연은 자기 팔 하나면 되느냐며 그정도라면 기꺼이 내어줄테니 새 생명을 안고 있는 그녀를 살려줄 것을 부탁한다. 자기가 살고자 부탁하는게 아니라 아이를 살리기 위해 부탁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녀라면 죽어서도 수현이 자신의 복수를 위해 또 다른 악마가 되어가는 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화장터에서 차마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여동생의 자리에 내려와 수현의 주변을 맴돌며 그녀는 계속해서 사인을 보내는게 아닐까? 이제 그만두라고. 이것은 ‘의미 없는 복수’일 뿐이라고. 처제의 주검은 훼손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된다. 이야기상 장경철이 수현과 맞닥뜨리기 전에 자수를 하기 위해 급히 일을 처리하느라 그럴 시간이 없었다는게 보이는 설명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건 좀 이상하다. 장경철은 이미 그녀를 한 번 사지절단 하였기에 또 다시 그럴 필요가 없던 것은 아닐까. 주연은 자기를 다시 한 번 죽여서 아버지를 구한게 아닐까. 죽은 자가 다시 돌아와 산 자의 입을 빌어 산 자에게 계속 말을 건넨다. 하지만, 산 자는 죽은 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자신의 자리를 자꾸만 죽은 자의 자리로 끌어내리려고 한다. 그리고 결국엔 성공한다. 수현이 영화에서 죽지는 않지만 과연 그가 영화가 끝난 후에도 여전히 살아있다고 말할 수가 있을까. 장반장은 이 일의 후에도 살아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장경철의 절단된 목을 부둥켜 안아야 했던 그의 부모는 그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장경철의 아들은 그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결국, 모두가 죽은 자의 자리로 들어가는 것을 우리는 영화에서 목격해야 한다. 나는 그래서 이 영화가 내내 불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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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18 2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허스키 2011-11-23 16:26   좋아요 0 | URL
이 영화를 다시 볼 용기는 나질 않아 확인은 못했지만, 인간아께서 지적해 주신 부분이 맞다면 이 글은 상당히 수정이 필요한, 혹은 폐기 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 듯 합니다.
 

엘리베이터. 모자를 깊이 눌러 쓴 남자가 먼저 올라타 있다. 하루코는 타지로 출장을 가는 남편을 아이와 함께 배웅하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올라탄다. 잔뜩 주눅 든 사람처럼, 혹은 뭔가 숨기려는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자. 아이가 장난을 치다 남자와 부딪히고 하루코와 남편은 그에게 사과한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그들은 각자의 길을 간다. 아이는 잠시 사라졌다 이내 나타나고, 하루코와 아이는 남편을 떠나보낸다.

여기까지가 <골든 슬럼버>의 첫 시퀀스이다. 다음 숏은 건널목에 서있는 아오야기. 아오야기는 대학 친구 모리타를 오랫만에 만나고 그에게서 이상한 말을 들은 후 총리의 암살범으로 몰려 쫓기기 시작한다. 여기서 의문점. 첫 시퀀스의 하루코는 영화가 한참 진행된 후에야 다시 나타난다. 왜 굳이 그녀가 아이와 함께 남편을 배웅하는 씬, 그러니까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엘리베이터에서 이상한 남자와 마주치는 그 씬은 왜 굳이 맨 처음 나타나는 것인가. 이야기의 순서 상 아오야기와 모리타의 재회가 먼저 나와야 하는게 아닐까? 심지어, 엘리베이터 씬과 그에 이어지는 하루코의 남편 배웅씬은 필요없는 잉여의 씬, 이야기와 전혀 상관없는 씬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잠시 이 엘리베이터 씬에서 또 하나 이상한 점. 여기에서 카메라는 처음엔 마치 CCTV의 그 앵글로 이 세 사람을 바라본다. 마치, 어떤 범죄 현장의 증거 화면처럼. (그리고, 엘리베이터에서 나와서 우리가 하루코의 남편으로부터 듣는 바에 의하면 아마도 이 즈음 연쇄 살인이 자행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 숏. 낮은 곳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앵글. 우리는 한 번도 이 공간에서 그들을 정상적인 각도로 바라보지 못한다. 좁은 공간에서 촬영해야 한다는 기술적 문제? 우리는 이 엘리베이터 씬과 이어지는 하루코가 남편을 배웅하는 씬, 그러니까 이 첫 시퀀스가 이야기의 순서상 가장 마지막이라는 것을 마지막에 가서야 알게 된다. 다시 한 번 질문. 왜 이야기 순서상 가장 마지막에 와야 할 시퀀스를 이야기의 맨 처음에 가져다 놓은 것일까. 물론, 이러한 방식은 영화의 끝에 ‘사실은 이러했다’라는 식으로 관객들이 무릎을 탁 치게 만들기 위해 종종 보이는 방식이긴 하다. 하지만, <골든 스럼버>에서의 이 방식은 왠지 이상하다. 총리 암살범으로 몰린 아야나기가 도주를 계속하는 모습을 보여주다가 영화는 하루코와 아이가 총리가 암살되는 순간 집에서 TV를 보는 씬으로 넘어간다. 하루코는 (타지로 출장을 가 있는)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조금 더 빨리 돌아올 수 없느냐고 묻는다. 아직 영화의 끝을 보지 못한 우리는, 그러니까 영화의 첫 시퀀스가 지금 여기서 하루코와 남편의 전화상의 대화보다 이야기상 더 나중에 위치한다는 것을 모르는 우리는 이 씬을 당연히 첫 시퀀스에서 출장을 가는 남편의 모습과 이어서 생각하게 된다. 의도적인 속임수. 단순히 마지막에 놀라움을 배가시키기 위한 장치라고 설명이 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왜 굳이 그렇게 해야 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왜 굳이 남편이 출장가는 모습을 처음 보여주고, 남편이 출장 간 사이 하루코가 총리 암살을 목격하여 (다른 시간에)출장을 가있는 남편과 전화 통화를 하게 했는지. 또 다른 가능한 설명. 하루코로 하여금 조금 더 자유스럽게 사건에 개입할 수 있도록 남편을 부재 상태로 만들기 위해. 그러나, 이것도 역시 뭔가 부족하게 느껴진다.

그러니까, 결국 <골든 슬럼버>는 마치 하나의 거대한 플래시 백과 같다. 첫 시퀀스 이후, 그러니까 하루코가 남편을 배웅하고 나서부터 우리가 보는 모든 것들은 첫 시퀀스의 플래시 백이다. 과거를 되돌아 보는 플래시 백. 과거를 회상하는 아오야기, 모리타, 카즈, 그리고 하루코. 과거로 돌아가려는 고위층. 골든 슬럼버. Once there’s a way to get back home. 어쩌면 거대한 하나의 불꽃놀이. 그 아래에 모여 앉아 어깨동무를 하고 옛날을 생각하는 친구들. 하지만, 마치 성형수술을 하고 다른 얼굴이 된 아오야기처럼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아오야기의 손목에 찍히는 ‘참 잘했어요’ 도장은 돌아갈 수 없는 과거에게 고하는 작별 인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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