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하는 사람
텐도 아라타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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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달 그믐날, 화창한 겨울의 파란 하늘에 구름이 흩어져 있다. 그 모습이 적당히 디자인한 무늬처럼 보인다.
준코는 다카히코에게 근처 산사에 가자고 했다. 다카히코는 내일 다 같이 가는 게 어떻겠냐고 대꾸했다.
"내일은 붐빌 테고......가끔은 단둘이 데이트하는 것도 좋잖아요."
(그리고 예감이 들어요. 내일이면 내가 밖에 나갈 수 없을 것 같다는......)
산사에는 이미 새해맞이 단장이 다 끝나 있었지만, 사람은 없었다.
다카히코에게 휠체어를 밀어달라고 해서 돌계다 옆 오르막길을 올라가 새전함 앞으로 갔다. 준코는 다카히코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종을 치고 새전을 던졌다. 그리고 가족의 행복과 태어날 아기의 건강과 시즈토의 무사함을 기원했다. 휠체어로 돌아오자, 이번에는 다카히코가 기도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편에게서 흰머리가 부쩍 많아진 것을 보며, 이참에 이 말만은 해두어야겠다고, 얼마 전부터 눈치채고 있던 일을 말했다.
"다카히코......당신......내 뒤를 따를 생각이죠?"-508쪽

(이어서)
다카히코의 등이 떨렸다. 준코가 병원에서 위 검사를 받고 로비로 나왔을 때 "그렇게 하면 되는 거야"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던 것은 준코가 잘못되면 자기도 바로 뒤따를 거라고 결심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그후로 다카히코는 준코의 상태에 일희일비 하는 일 없이 침착하게 간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절대 안돼."
"......어째서?" 다카히코가 어깨 너머로 물었다.
"어째서라니요. 미시오가 있고, 손자가 태어나요!"
"......레지한테 맡기면 돼. 미노리도 있고."
"부모를 한꺼번에 잃으면 미시오가 얼마나 힘들겠어요? 아기한테도 분명 안 좋을 거라고요."
"나는 못하겠어......당신 없이 사는 거......"
가슴속이 요동쳤다. 마주 보고 있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준코는 간신히 마음을 다잡고 말을 이었다. [......]
다카히코가 새전함에 손을 짚고 몸을 가누었다.-508쪽

(이어서)
"다카히코......올 한 해 참 좋았죠. 손자도 생기고, 미시오를 부탁할 상대도 생기고, 시즈토를 만나진 못했지만, 건강하다는 소식은 들었잖아요. 그렇죠? 좋은 한 해였어오."
준코는 다카히코의 허리를 부여잡았다. 준코의 손길을 느낀 다카히코가 앞을 향한 채 아내의 손을 꼭 잡았다.
"나요, 부모님 만나면 자랑할 거에요."
준코는 남은 힘을 쥐어짜듯 다카히코의 손을 맞잡았다.
"어때요? 저 남자 보는 눈은 있었죠, 하고 말이에요."
그 자리에 주저앉는 남편의 모습에 가슴이 쓰려와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508쪽

"넌 다섯 살 무렵에는 좋아졌지만, 태어나자마자 우유 알레르기가 있다는 걸 알고부터 한 번도 분유를 주지 않았어. 시즈토는 분유도 곧잘 먹어서 일찍 모유를 끊었지만...... 너는 만 두 살이 될 때까지 젖을 먹였지. 그렇게 낳은 것이 엄마인 나니까 너한테 미안해서 항상 신경 썼는데...... 만 두 살이 된 직후에 네가 습진이 생긴 데를 마구 긁어서 약을 받아왔었어. 근데 그 약이 맞지 않아 설사를 했고...... 우유 성분이 섞여 있는 걸 모르고 정장제를 받아서 먹였더니 온몸이 새빨개진 거야. 아나필락시스 (주: 항원 병체 반응이 원인이 되어 일어나는 급성 알레르기성 반응) 직전 상태라며 의사는 최악의 경우도 각오하라고 했어. 미안해, 엄마가 제대로 못해서 미안해, 하고...... 병원에서 손을 꼭 잡고 있는데 네가 방긋 웃어주더구나. 그 웃음이 정말로 부드러워서...... 천사가 정말 있네, 그런 생각이 들더라. 다행히 회복되어서 집에 돌아왔을 때, 널 꼭 껴안고는 신에게 부탁했단다. 만약 다시 태어나는 일이 있다면 한 번 더 이 아이, 우리 미시오의 엄마가 되게 해주세요 하고......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없어."-6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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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11-16 0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이책을 읽어 봐야하겠군요. 이것도 애도라. 얼마전 로쟈님의 책 <우울과 애도>를 좀 읽다가 엎어놓았는데, 엎어놓았다고 했더니 엎드려뻗쳐놓았느냐 하시더라구요. ㅎ 그책의 맥락과 같은 애도인가요? 잘 보았습니다. ^^

허스키 2011-11-16 12:20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우울과 애도>를 읽지 않아서 같은 맥락의 '애도'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 참 좋다고 자신있게 추천할 수 있습니다. 요즘 쉽게 보이지 않는 가슴 따뜻하게 만드는 소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