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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 세계금융위기와 자본주의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성호 옮김 / 창비 / 2010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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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존 메이너드 케인즈는 주식시장을 어떤 바보 같은 대회에 견주면서 이런 자기지시성을 절묘하게 제시한 바 있다. 대회에서 참가자들은 미녀 사진 100장을 보고 그중 몇명의 미녀를 뽑게 되어 있는데 평균적 의견에 가장 근접한 여성들을 선태간 사라미 우승자가 된다. "이는 자시의 최선의 판단에 따라 정말로 가장 예쁜 얼굴을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며, 심지어 평균적 의견이 가장 예쁘다고 진정으로 생각하는 얼굴을 선택하는 문제도 아니다. 평균적 의견이 어떤 평균적 의견을 예상하고 있는가를 예견하는 데 지력을 쏟는 세번째 단계에 우리는 도달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훌륭한 선택을 가능하게 할 지식을 구비하지 못한 채 선택을 하도록 강요된다. 혹은 존 그레이의 말대로 "우리는 마치 자유로운 듯이 살도록 강요된다."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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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만 하지 말고 뭔가 행하라'는 옛말은 상식의 낮은 기준에 비추어서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말 가운데 가장 어리석은 말에 속한다. 오히려 근래의 문제는 아마도 우리가 자여네 개입하거나 환경을 파괴하거나 하는 등의 너무나 많은 일을 행하고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아마도 이제는 뒤로 물러서서 올바른 일을 생각하고 말할 때이리라. 물론 우리는 종종 무엇을 행하는 대신 그에 관해 말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어떤 것들에 관해 말하고 생각하기를 회피하려고 그것을 행하기도 한다. 어떤 문제가 애초에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를 따져보는 대신 그 문제에 7천어달러를 쏟아붓는 것처럼. (2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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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수준의 누진과세 등을 통한) 평등주의적 재분배에 반대하는 표준적 논변인 저 '하방침투 효과'(trickle-down)론을 상기하라. 재분배가 빈자를 부유하게 만들어주는 대신 부자를 빈곤하게 만든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태도는 단순히 반개입주의적이기는커녕 실제로는 경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에 관하여 아주 정확한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 모두가 빈자가 부유해지기를 바라기는 하지만 그들을 직접 돕는 것은 역효과를 내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사회의 역동적이며 생산적인 요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요구되는 종류의 개입은 부자가 더 부유하게 되도록 돕는 그런 것이며, 그럴 때 이윤은 저절로, 자동적으로 빈자들 사이로 퍼질 것이다. (3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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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철학의 시늉을 내지 않는 체제, 행복을 찾아나서지 않는 체제다. 자본주의가 하는 말은 오로지 이것이다: '자, 이건 제대로 작동한답니다.' 만일 사람들이 더 잘살기를 원한다면 이 메커니즘을 이용하는 편이 나을 텐데 이는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유일한 기준은 효율성이다"[...]문제는 의미에 관한 것이며, 바로 이 지점에서 종교는 지금 자기 역할을 재발명하고 있다. 즉 자본주의 기계의 의미없는 작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의미있는 삶을 보장해야 할 그 사명을 재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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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면 합법적 업무를 피라미드 사기로 '변형'시키려는 유혹은 자본주의적 순환과정의 본질 자체에 속한다. 루비콘강을 건너는 정확한 지점, 합법적 업무가 비합법적 계략으로 변형되는 정확한 지점은 없다. 자본주의의 원동력 자체가 '합법적' 투자와 '무모한' 투기 사이의 경계를 흐리는데, 왜냐하면 자본주의적 투자란 그 핵심에 있어 어떤 계략이 돈벌이가 될 것이라는, 실패의 위험을 무릅쓰는 내기이며 미래로부터의 차용행위이기 때문이다. 상황의 어떤 통제 불가능한 갑작스런 변화가 '안전한' 투자로 간주된 것을 파산으로 이끌 수 있다 -- 이것이 자본주의적 '위험'의 핵심이다. (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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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권리들에 대한 요구(이는 권력의 진정한 재분배를 의미했을 터인데)는 수용되었으나 이러한 수용은 오로지 이런저런 '허용'의 모양새를 취하였다. '관대한 사회'(permissive society, 허용하는 사회)란 주체들에게 실질적으로 권력을 더 나눠주지 않으면서 그들이 할 수 있게 허락된 것의 범위를 확대하는 바로 그런 사회였던 것이다. [...]이혼, 낙태, 동성애 결혼 등등의 권리가 작동하는 방식은 이와 같다 -- 이것들은 모두 권리의 가면을 쓴 허용이며, 어떤 식으로도 권력의 분배에 변화를 가져오지 않느나. (12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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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진실로 급진적인 해방정치와 포퓰리즘정치 사이의 궁극적 차이는 (여기에 딱 들어맞는 니체의 용어를 썻)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 즉 해방정치는 자신의 비전을 강요하고 강제하는 것으로서는 능동적인 반면 포퓰리즘은 불안을 야기하는 침입자에 대한 반동의 결과로서 근본적으로 반동적이다. 다시 말해 포퓰리즘은 언제나 일종의 두려움의 정치다. 그것은 부패한 외적 행위자에 대한 두려움을 조장함으로써 군중을 동원하는 것이다. [...]푸꼬와 대조적으로 라깡은 "근대에 있어 지식과 권력 사이의 이접(disjunction), 갈라짐, 불화를 제시한다. (...) 문명의 불안에 대한 라깡의 진단은 지식이 '권력의 효과에 비례하지 않는 성장'의 양상을 띠어왔다는 것이다." (12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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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물신은 사실상 징후의 일종의 이면(envers)이다. 다시 말해 징후는 거짓 외양의 표면을 어지럽히는 예외, 억압된 다른 장면이 분출하는 지점이며, 반면 물신은 우리로 하여금 견딜 수 없는 진실을 지탱할 수 있게 하는 거짓말의 구현체다. [...]물신의 경우에는 그와 반대로 나는 죽음을 '합리적으로' 완전히 받아들이지만 물신에, 즉 내게 있어 죽음에 대한 부인을 구현하는 어떤 특징에 매달린다. 이런 의미에서 물신은 우리로 하여금 가혹한 현실에 대처할 수 있게 하는 건설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물신주의자는 자신의 개인적 세계에 빠져 있는 몽상가가 아니라 철저한 '현실주의자'로서, 자신의 물신에 매달림으로써 현실의 거대한 충격을 완화할 수 있기에 사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1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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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의 발흥과 같은 현상이 보여주는 것은 "매 경우 파시즘의 발흥은 실패한 혁명을 증언한다"는 발터 벤야민의 오래된 명제가 오늘날 여전히 진실일 뿐 아니라 어쩌면 이전 어느 때보다 더 적실하다는 것이다. 자유주의자는 좌파 우파 '근단주의' 사이의 유사성을 지적하기를 좋아한다. [...]맞는 말이지만,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어떻게 파시즘이 좌파 혁명을 문자 그대로 대체(자리를 대신)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다. 파시즘의 발흥은 좌파의 실패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좌파가 동원할 수 없었던 혁명적 잠재력, 불만이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14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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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의 동력이 근본주의적 포퓰리즘으로 바뀐 이러한 역전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진정한 맑스주의에서 총체성은 이상이 아니라 비판적 관념이다 -- 하나의 현상을 그 총체성 속에 위치시킨다는 것은 전체의 숨은 조화를 본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의 체제 안에 그것의 모든 '징후들', 그 적대와 모순들을 체제의 필수적 구성요소로서 포함시킨다는 뜻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유주의와 근본주의는 하나의 '총체'를 형성하느네, 왜냐하면 그들의 대립은 자유주의 자체가 그 대립항을 생성하는 식으로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자유주의의 핵심가치 --자유, 평등 따위 -- 는 언제 효과를 발휘하는가? 역설은 자유주의 자체는 자신의 핵심가치를 근본주의적 살육에서 구해내기에 충분히 강하지 않다는 점이다. 자유주의의 문제는 제 힘으로 버티고 설 수 없다는 데 있다 -- 자유주의적 건축물에는 뭔가가 빠져 있다. 자유주의는 바로 그 관념에 있어 '기생적'인데, 그것은 그 자신의 발전과정에서 자신이 허물어뜨리는, 어떤 전제된 공동체적 가치들의 네트워크에 의존하는 것이다. 근본주의는 자유주의에 내속하는 실제적 결함에 대한 반동 -- 물론 허위에 찬 기만적 반동 -- 이며 이것이 근본주의가 자유주의에 의해 자꾸만 생성되는 이유다. 혼자 내버려두면 자유주의는 서서히 스스로 허물어져 갈 것이다 -- 자유주의의 핵심을 구해낼 수 있는 것은 일신(一新)된 좌파뿐이다. (15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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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예가 명확히 보여주느 것은 냉소적 태도의 한계다. 냉소주의자는 속지 않으나 오류를 범하는 자로서, 그들이 인식하는 데 실패하는 것은 환각의 상징적 효능, 환각이 사회적 현실을 생성하는 활동을 규제하는 방식이다. 냉소주의는 대중적 지혜의 입장을 취한다 -- 전형적 냉소주의자가 당신을 따로 불러 비밀스러운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모르겠어? 결국에는 다 [돈, 권력, 쎅스...] 문제라는 것을, 고매한 원칙이나 가치라는 건 다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는 공허한 말잔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159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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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개 이상의 국가에서 나온 자료를 분석한 결과 캠브리지와 예일 대학 연구자들은 이 국가들에 대한 IMF의 차관과 결핵 발생건수의 증가 사이에 뚜렷한 상호연관성이 있음을 확인했다 -- 차관이 종료되자 결핵의 유행은 잦아들었다. 희한해 보이는 이런 상호연관성은 간단히 설명된다. IMF 차관의 조건은 그 수혜국이 '재정규율'을 도입해야 한다는 것, 즉 공공지출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며, '재무건전성'을 재확립하기 위한 조치들의 첫번째 희생자는 바로 건강 자체, 다시 말해 공중보거써비스에 대한 지출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서구 인도주의자들이 이 나라들의 의료써비스의 파국적 상황을 개탄하고 자선 형식으로 원조를 제공할 공간이 열린다. [...]분명한 목소리로 클린턴은 [...]수십년간 세계은행, IMF, 그밖의 국제기관들이 실행에 옮긴 서구의 장기적 정책들에 책임을 돌렸다. 이 정책들 이 정책들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나라들이 비료와 개량종자, 그밖의 농장 투입물에 대한 정부 보조를 중단하도록 압력을 가했으며, 그리하여 최상의 토지가 수출농작물의 재배에 이용될 수 있는 길을 열고 그럼으로써 이 나라들이 식량생산에 있어서의 자급자족 능력을 상실하도록 만들었다. [...]자국농산물이 더 많이 수출될수록 나라들은 점점 더 수입식량에 의존해야 했으며, 한편 토지를 잃고 쫓겨난 농부들은 어쩔 수 없이 슬럼가로 흘러들었는데[...] 이러한 방식으로 많은 나라들이 탈식민지적 의존의 상태에 묶여 있으며 점점 더 시장변동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고 있다[...] (164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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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에너지 위기와 물 부족 사태에 있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 아닌가? 이런 문제들에 알맞게 대응하려면 대규모 집단행동의 새로운 형식으 발명할 필요가 있다. 국가개입의 표준적 형식들 또는 많은 칭송을 받는 지역적 자기조직화의 형식들은 이 일을 해내기에 역부족일 것이다. 그런 문제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되지 않을 경우 가장 그럴 듯한 씨나리오는 풍부한 식량과 물, 에너지를 누리는 세계의 외딴 지역이 널리 퍼진 혼돈과 기아, 그리고 끝없는 전쟁으로 특징지어지는 혼란스런 '바깥'과 분리되는 아파르트레이트(인종격리정책)의 새 시대가 될 것이다. 식량부족으로 고통받는 아이띠와 그밖의 지역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격렬한 반란을 일으킬 완전한 권리가 그들에게 있지 않은가? 공산주의가 다시금 문 앞에 와 있다. [...]물, 에너지, 환경 그 자체, 문화, 교육, 건강 등이 포함된다. 여기서 무엇이 우선인지를 -- 만일 그 결정을 시장에 맡겨둘 수 없다면 -- 누구, 그리고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공산주의의 문제가 다시금 제기되어야 하는 것은 이 지점에서다. (170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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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비에뜨 국가의 성취들과 실패들을 열거한 후 레닌은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환상을 품지 않고, 낙담하지 않으며, 극도로 힘든 과업에 다가서면서 몇번이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힘과 유연성을 유지하는 공산주의자는 운이 다하지 않는다(그리고 십중팔구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레닌의 베케트(S. Beckett)적 면모가 가장 잘 드러난 대목으로, 베케트의 <최악을 향하여>에 나오는 구절, "다시 시도하라. 또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의 울림을 지닌다. 레닌의 결론 -- "몇번이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것 -- 은 그가 말하려는 바가 단지 이미 성취된 것을 강화하기 위해 진보의 속도를 늦추는 것이 아니라 '출발점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더욱 급진적인 내용임을 명확히 해준다. 우리는 지난번 시도에서 성공적으로 도달했을 수도 있는 정상에서부터가 아니라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키르케고르의 표현을 쓰면, 혁명의 과정은 점진적 진보가 아니라 반복적 운동, 몇번이고 시작을 반복하는 운동이다. (1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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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가 말하면, 공산주의 이념에 계속해서 충실하기만 한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 이념에 실천적 긴박함을 부여하는 적대를 역사적 현실 안에서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유일한 진짜 문제는 이것이다 -- 우리는 자본주의의 압도적 자연화를 승인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오늘날 세계자본주의는 그것이 무한정 재생산되는 것을 막을 만큼 충분히 강력한 적대를 담고 있는가? (1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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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면에서 우리는 모두 자연으로부터 그리고 우리의 상징적 실체로부터 배제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 잠재적으로 호모 싸께르(homo sacer)이며, 그것이 현실이 되는 것을 막는 유일한 길은 예방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이것이 종말적으로 들린다면 우리는 종말론적 시대에 살고 있다고 대꾸하는 수밖에 없다. 프롤레타리아화의 세가지 과정 각각이 어떻게 종말론적 종점을 가리키고 있는지는 분명하다. 생태계의 와해, 인간의 조작 가능한 기계로의 유전공학적 환원, 우리 삶에 대한 총체적 디지털 제어......이 모든 차원에서 상황은 제로 지점에 다가서고 있다[...]
[...]이러한 위협들에 대처하기 위해 지배이데올로기는 무지에의 의지를 포함하는 위장과 자기기만의 메커니즘을 동원하고 있다. "위협 받는 인간사회들 사이에 일반적인 행위 패턴은 실패할수록 위기에 더 시선을 집중하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더 외면하게 되는 것이다." 현 경제위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1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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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세계의 비대칭과 불균형의 근원입니다" -- 이는 우리의 목표는 '자연적' 균형과 대칭의 회복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공격과 배격의 대상은 근대적 주체를 탄생시킨 바로 그 과정, 실질적이며 '모성적'인 자연질서 안에 우리의 뿌리가 있다는 발상과 더불어 어머니 대지(및 아버지 하늘)라는, 성별이 주어지는 전통적 우주론을 페기하는 그 과정이다.
그리하여 공산주의 이념에 대한 충실성은 아르뛰르 랭보의 말을 빌리면, "절대적으로 현대적이어야 한다" -- 우리는 언제나 절대적으로 현대적이어야 하며, 자본주의 비판을 '도구적 이성'이라든가 '근대 기술문명' 비판으로 왜곡하는 말만 번지르르한 일반화를 배격해야 한다. 우리가 네번재 적대 -- 배제된 자와 포함된 자를 가라는 간극 -- 와 다른 세가지 적대 사이의 질적 차이를 강조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오직 배제된 자와 관련해서만 공산주의라는 용어의 사용이 정당화되는 것이다. [...]
그러므로 네가지 적대의 계열에서 포함된 자와 배제된 자 사이의 적대가 핵심적이다. 그것 없이는 다른 모든 적대도 전복적 효력을 상실한다 [...] 우리는 포함된 자와 배제된 자 사이의 적대와 전혀 마주하지 않고서도[...] 이러한 방식으로 진정한 보편성은 주어지지 않고 오로지 칸트적 의미에서 '사적인' 관심사만 주어진다. '홀 푸즈'(Whole Foods)나 '스타벅스' 같은 기업은 반노조활동에 관여하고 있어도 자유주의자들 사이에서는 계속 인기를 누리는데, 비결은 그들이 자기네 상품을 판매하면서 거기에 진보적 색채를 덧입히는 데 있다. [...]
앞의 세가지 적대와 네번째 적대 사이에는 또다른 주요한 차이가 있다. 앞의 세가지는 사실상 인류의 (경제적, 인류학적, 심지어 물리적) 생존의 문제에 관여하는 반면 네번째는 궁극적으로 정의의 문제에 해당한다. (1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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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전통적인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면, 푸꼬의 접근법이 포착하지 못하는 것은 양면을 지닌 징후적 요소의 관념으로서, 그 한 면은 한 상황의 주변적 우발사건이며 다른 면은 바로 그 이 상황의 진리(를 표상하는 것)이다. 동일한 방식으로, '배제된 자'는 물론 가시적인데, 역설적이지만 그들의 배제 자체가 그들의 포함 양식이라는 엄밀한 의미에서 그러하다. 사회조직체 안의 그들의 '고유한 자리'는 (공적 영역으로부터의) 배제의 자리인 것이다.
라깡이 맑스는 이미 징후의 (프로이트적) 관념을 발명했다고 주장했던 것은 그 때문이다. 맑스와 프로이트 양자에 있어 (사회나 심리) 체계의 진리에 이르는 길은 이 체계의 '병적인' 주변적, 우발적 왜곡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 가령 말실수, 꿈, 징후, 경제위기 등을 통과해 지나간다. (2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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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속 업데이트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