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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들뢰즈의 시간기계 - 영화를 읽는 강력한 사유, <시네마>에 대한 예술철학적 접근
데이비드 노먼 로도윅 지음, 김지훈 옮김 / 그린비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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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는 영화 이미지가 그 자체에 관해서건 그 관찰자에 관해서건 언제나 현재내에 있다는 관념을 부정하면서, 오히려 이미지가 시간적 관계들의 묶음이라고 주장한다.-39쪽

그들은 모두 쇼트를 정적인 형상이 아닌 움직이는 집합으로 조직한다. "쇼트(plan)가 운동을 변화하는 전체와 관련짓는 한, 그것은 지속의 움직이는 단면이다."(MI, 22/36) 쇼트는 상대적으로 개방된 가변적 공간을 정의하며, 여기서 프레임화(cadrage) 과정이 잠정적, 인위적으로 닫힌 공간을 결정한다. 에이젠슈타인이 몽타주-세포 개념이 그 좋은 예다. 프레임화는 영화화 이전의 공간에서 대상들을 분리한 다음 유도된 집합 내에서 그 대상들을 행동, 몸짓, 몸체, 무대장치 등으로 분류하는 것이다.-44쪽

그러나 들뢰즈에게 화면 밖 공간(offscreen space)이라는 확장된 개념은 몽타주 못지않게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공간은 집합이 본질적으로 열려 있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45쪽

대상들의 위치는 공간 속에 있지만 변화하는 전체는 시간 속에 있다. 운동-이미지가 쇼트에 동화될 때, 프레임화가 대상으로 향하는 쇼트의 한 면이라면 몽타주는 전체로 향하는 쇼트의 다른 한 면이다. (...)시간은 반드시 간접적으로 재현된다. 왜냐하면 시간은 한 운동-이미지를 다른 운동-이미지와 연결하는 몽타주에서 나오기 때문이다(TI, 34~35/50~51)-45쪽

들죄즈가 유기적 운동-이미지를 '고전 시기'에, 그리고 시간-이미지를 '모던 시기'에 대응시킬 때, 이는 전자가 자연적으로 진전해서 후자가 도출됐다는 말도 아니고, 모던 형식이 고전 시기 영화에 대한 비판으로서 반드시 그에 대항한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 전이는 사유의 가능성 및 믿음의 본성에서 일어나는 점진적 변형을 뚜렷이 재현한다. (...)운동-이미지의 정신기호는 행동의 가능성과 진리의 고정성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의 여파가 유럽 영화계에 몰아치면서 이에 변화가 생겨났고, 그 결과 이전과는 다른 '상상적 관찰' 형식이 나타났다. 들뢰즈에 따르면, 네오리얼리즘의 출현은 행동과 운동의 영화에 닥친 위기의 재현한다. 특히 로셀리니의 <독일 영년>과 <이탈리아 여행>은 모든 것이 뿔뿔이 흩어진 공허한 현실을 재현한다. 선형적 행위는 우연을 따르는 산책 속에 용해된다. 더이상 작용하거나 반작용할 수 없는 사건들이 발생한다.(...)그 결과 운동-이미지의 작용 -> 반작용의 도식이 붕괴되기 시작하고, 지각과 정서의 본성에 근본적 변화가 일어난다. 행동이 더 이상 이미지의 연결을 유도하지 않기 때문에,-47쪽

공간은 근본적으로 변화해서 단절되고 텅 비워진다. 보기와 듣기의 행위가 운동 작용을 통한 이미지의 연결을 대체한다. 즉 순수 묘사가 지시적 고정을 대체한다.-47 이어서쪽

더 이상 이미지의 연합적 연쇄는 없다. 오직 독립적 이미지들의 재연쇄만이 있을 뿐이다. 한 이미지에 다른 이미지가 뒤따르는 대신, '한 이미지 더하기 다른 이미지'의 관계가 존재한다. 각각의 쇼트는 다음 쇼트의 프레임화와 관계 맺으면서 탈프레임화한다.-50쪽

공약 불가능하며 결정 불가능한 쇼트들 간의 관계는 엔트로피의 내러티브를 낳는다.-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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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9.11테러 이후의 세계 뉴아카이브 총서 4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현우.김희진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1월
구판절판


세계무역센터가 붕괴한 이후 공포에 대한 동일한 '탈현실화'가 이어졌다. 희생자 수가 삼천 명이라고 계속 반복되는데도, 우리가 보게 되는 실제 참상은 놀랄 만큼 적었다[...]이는 제3세계의 재난을 보도하는 태도와는 명확히 대조적이다[...]이는 비극적인 순간에서조차 우리가 '우리'를 '그들'과 그들의 현실로부터 분리하고 거리를 유지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가 아닌가? 진정한 공포는 '그곳'에서 일어나는 것이지 '이곳'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라며 말이다.-26쪽

따라서 우리는 세게무역센터의 폭파가 우리의 가공적 영역을 산산조각 낸 실재의 침입이었다는 표준적 해석을 전도시켜야 한다. 실은 그 정반대다. 우리가 우리의 현실 속에 살았던 것은 세계무역센터가 붕괴되기 이전이었다. 우리는 제3세계의 참상이 사실은 우리 사회 현실의 일부가 아니라고, (우리 입장에서는) TV 화면에 나오는 유령 같은 환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인식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9.11 사태는 이 환상과도 같은 화면의 환영이 우리의 현실에 들어온 것이었다[...]이미지가 우리의 현실(우리가 무엇을 현실로 경험하느냐를 결정하는 상징적 좌표)에 들어와 그것을 산산조각 낸 것이다.-30쪽

'징후' -- 혁명적 개입의 '기적'을 통해 사후에 보상받은 과거의 흔적들 -- 는 "잊힌 행위라기보다 '행동하지 못한' 잊힌 실패, 사회의 '타자들'과의 연대행위를 제지하는 사회적 결속의 힘을 중지하지 못한 실패"이다.
[...]그리고 옛 동독의 많은 지식인들이(그리고 심지어 '보통 사람들'마저도) 느끼는 오스탈지아(공산주의 과거에 대한 향수)의 궁극적 이유는, 과거 공산주의 시대와 공산주의 치하에서 실제 일어났던 일에 대한 동경이 아니라 거기서 '일어날 수 있었던 일', 또 다른 독일에서 가능할 수도 있었던 잃어버린 기회에 대한 동경 아닐까?-38쪽

'실재에 대한 열정'의 핵심은 권력의 더럽고 외설적인 이면과의 동일시 -- 완전히 그것을 떠맡는 영웅적 제스처 -- 이다. 이는 '누군가 그 더러운 일을 해야만 한다면, 그래 하자!'라는 영웅적 태도이며, 그 결과에서 자기 자신을 알아보길 거부하는 '아름다운 영혼'의 뒤집힌 거울상이다.-47쪽

보이지 않는 전쟁의 이런 편집증적 편재의 뒷면에 해당하는 것은 전쟁의 탈실체화 하닌가? [...]이제 전쟁도 그 실체가 박탈된 전쟁이 된다. 즉 컴퓨터 화면 너머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가상의 전쟁, 그 참여자들이 비디오 게임처럼 경험하는 전쟁, 사상자 없는 (적어도 아군 사상자가 없는) 전쟁인 것이다. [...]이런 전쟁에서 --우리가 언제나 유념해야 할 측면인데 -- 우리 일반 시민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를 정부 당국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우리는 아무것도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다.-58쪽

9월 11일, 미국은 자신이 그 일부로 속해 있는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미국은 그 기회를 잡을 수 있었지만 잡지 않았다. 대신 미국은 그 전통적인 이데올로기적 헌신을 재천명하는 편을 택했다. 가난한 제3세게에 대한 책임과 죄의식에서 벗어나, 이제 '우리가' 피해자다!라는.-70쪽

'테러와의 전쟁'은 단순히 자신을 방어하고 반격한다는 것만으로 적을 범죄자 취급하는 이상한 전쟁이다.-133쪽

'테러와의 전쟁'은 미국이 유럽을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식민지화하는 길고 점차적인 과정이 가공할 만한 결말, 그 마무리 작업 아닌가? 유럽은 다시 한 번 서양에, 즉 이제 세계적인 기준을 설정하고 있으며 사실상 유럽을 그 속주로 취급하고 있는 미국 문명에 납치당한 것 아닌가?-199쪽

세계 자본주의느 그 유명한 '자유로운 순환'의 물꼬를 텄지만, 여기서 자유롭게 순환하는 것은 '사물들'(상품들)이며, '사람들'의 순환은 점점 더 많은 통제를 받고 있다. 선진국 세계의 이런 새로운 인종주의는 어떤 면에서 과거의 인종주의보다 훨씬 더 잔혹하다.-2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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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 세계금융위기와 자본주의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성호 옮김 / 창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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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존 메이너드 케인즈는 주식시장을 어떤 바보 같은 대회에 견주면서 이런 자기지시성을 절묘하게 제시한 바 있다. 대회에서 참가자들은 미녀 사진 100장을 보고 그중 몇명의 미녀를 뽑게 되어 있는데 평균적 의견에 가장 근접한 여성들을 선태간 사라미 우승자가 된다. "이는 자시의 최선의 판단에 따라 정말로 가장 예쁜 얼굴을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며, 심지어 평균적 의견이 가장 예쁘다고 진정으로 생각하는 얼굴을 선택하는 문제도 아니다. 평균적 의견이 어떤 평균적 의견을 예상하고 있는가를 예견하는 데 지력을 쏟는 세번째 단계에 우리는 도달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훌륭한 선택을 가능하게 할 지식을 구비하지 못한 채 선택을 하도록 강요된다. 혹은 존 그레이의 말대로 "우리는 마치 자유로운 듯이 살도록 강요된다." (25쪽)

 
   

 

   
   '말만 하지 말고 뭔가 행하라'는 옛말은 상식의 낮은 기준에 비추어서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말 가운데 가장 어리석은 말에 속한다. 오히려 근래의 문제는 아마도 우리가 자여네 개입하거나 환경을 파괴하거나 하는 등의 너무나 많은 일을 행하고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아마도 이제는 뒤로 물러서서 올바른 일을 생각하고 말할 때이리라. 물론 우리는 종종 무엇을 행하는 대신 그에 관해 말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어떤 것들에 관해 말하고 생각하기를 회피하려고 그것을 행하기도 한다. 어떤 문제가 애초에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를 따져보는 대신 그 문제에 7천어달러를 쏟아붓는 것처럼. (27쪽)   
   

 

   
  (높은 수준의 누진과세 등을 통한) 평등주의적 재분배에 반대하는 표준적 논변인 저 '하방침투 효과'(trickle-down)론을 상기하라. 재분배가 빈자를 부유하게 만들어주는 대신 부자를 빈곤하게 만든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태도는 단순히 반개입주의적이기는커녕 실제로는 경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에 관하여 아주 정확한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 모두가 빈자가 부유해지기를 바라기는 하지만 그들을 직접 돕는 것은 역효과를 내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사회의 역동적이며 생산적인 요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요구되는 종류의 개입은 부자가 더 부유하게 되도록 돕는 그런 것이며, 그럴 때 이윤은 저절로, 자동적으로 빈자들 사이로 퍼질 것이다. (32쪽)  
   

 

   
 

"자본주의는 철학의 시늉을 내지 않는 체제, 행복을 찾아나서지 않는 체제다. 자본주의가 하는 말은 오로지 이것이다: '자, 이건 제대로 작동한답니다.' 만일 사람들이 더 잘살기를 원한다면 이 메커니즘을 이용하는 편이 나을 텐데 이는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유일한 기준은 효율성이다"[...]문제는 의미에 관한 것이며, 바로 이 지점에서 종교는 지금 자기 역할을 재발명하고 있다. 즉 자본주의 기계의 의미없는 작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의미있는 삶을 보장해야 할 그 사명을 재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54쪽)

 
   

 

   
 

다시 말하면 합법적 업무를 피라미드 사기로 '변형'시키려는 유혹은 자본주의적 순환과정의 본질 자체에 속한다. 루비콘강을 건너는 정확한 지점, 합법적 업무가 비합법적 계략으로 변형되는 정확한 지점은 없다. 자본주의의 원동력 자체가 '합법적' 투자와 '무모한' 투기 사이의 경계를 흐리는데, 왜냐하면 자본주의적 투자란 그 핵심에 있어 어떤 계략이 돈벌이가 될 것이라는, 실패의 위험을 무릅쓰는 내기이며 미래로부터의 차용행위이기 때문이다. 상황의 어떤 통제 불가능한 갑작스런 변화가 '안전한' 투자로 간주된 것을 파산으로 이끌 수 있다 -- 이것이 자본주의적 '위험'의 핵심이다. (77쪽) 

 
   

 

   
  새로운 권리들에 대한 요구(이는 권력의 진정한 재분배를 의미했을 터인데)는 수용되었으나 이러한 수용은 오로지 이런저런 '허용'의 모양새를 취하였다. '관대한 사회'(permissive society, 허용하는 사회)란 주체들에게 실질적으로 권력을 더 나눠주지 않으면서 그들이 할 수 있게 허락된 것의 범위를 확대하는 바로 그런 사회였던 것이다. [...]이혼, 낙태, 동성애 결혼 등등의 권리가 작동하는 방식은 이와 같다 -- 이것들은 모두 권리의 가면을 쓴 허용이며, 어떤 식으로도 권력의 분배에 변화를 가져오지 않느나. (122쪽)  
   

 

   
  그렇기 때문에 진실로 급진적인 해방정치와 포퓰리즘정치 사이의 궁극적 차이는 (여기에 딱 들어맞는 니체의 용어를 썻)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 즉 해방정치는 자신의 비전을 강요하고 강제하는 것으로서는 능동적인 반면 포퓰리즘은 불안을 야기하는 침입자에 대한 반동의 결과로서 근본적으로 반동적이다. 다시 말해 포퓰리즘은 언제나 일종의 두려움의 정치다. 그것은 부패한 외적 행위자에 대한 두려움을 조장함으로써 군중을 동원하는 것이다. [...]푸꼬와 대조적으로 라깡은 "근대에 있어 지식과 권력 사이의 이접(disjunction), 갈라짐, 불화를 제시한다. (...) 문명의 불안에 대한 라깡의 진단은 지식이 '권력의 효과에 비례하지 않는 성장'의 양상을 띠어왔다는 것이다." (126쪽)  
   

 

   
 

반면 물신은 사실상 징후의 일종의 이면(envers)이다. 다시 말해 징후는 거짓 외양의 표면을 어지럽히는 예외, 억압된 다른 장면이 분출하는 지점이며, 반면 물신은 우리로 하여금 견딜 수 없는 진실을 지탱할 수 있게 하는 거짓말의 구현체다. [...]물신의 경우에는 그와 반대로 나는 죽음을 '합리적으로' 완전히 받아들이지만 물신에, 즉 내게 있어 죽음에 대한 부인을 구현하는 어떤 특징에 매달린다. 이런 의미에서 물신은 우리로 하여금 가혹한 현실에 대처할 수 있게 하는 건설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물신주의자는 자신의 개인적 세계에 빠져 있는 몽상가가 아니라 철저한 '현실주의자'로서, 자신의 물신에 매달림으로써 현실의 거대한 충격을 완화할 수 있기에 사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134쪽) 

 
   

 

   
  탈레반의 발흥과 같은 현상이 보여주는 것은 "매 경우 파시즘의 발흥은 실패한 혁명을 증언한다"는 발터 벤야민의 오래된 명제가 오늘날 여전히 진실일 뿐 아니라 어쩌면 이전 어느 때보다 더 적실하다는 것이다. 자유주의자는 좌파 우파 '근단주의' 사이의 유사성을 지적하기를 좋아한다. [...]맞는 말이지만,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어떻게 파시즘이 좌파 혁명을 문자 그대로 대체(자리를 대신)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다. 파시즘의 발흥은 좌파의 실패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좌파가 동원할 수 없었던 혁명적 잠재력, 불만이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148쪽)  
   

 

   
  해방의 동력이 근본주의적 포퓰리즘으로 바뀐 이러한 역전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진정한 맑스주의에서 총체성은 이상이 아니라 비판적 관념이다 -- 하나의 현상을 그 총체성 속에 위치시킨다는 것은 전체의 숨은 조화를 본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의 체제 안에 그것의 모든 '징후들', 그 적대와 모순들을 체제의 필수적 구성요소로서 포함시킨다는 뜻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유주의와 근본주의는 하나의 '총체'를 형성하느네, 왜냐하면 그들의 대립은 자유주의 자체가 그 대립항을 생성하는 식으로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자유주의의 핵심가치 --자유, 평등 따위 -- 는 언제 효과를 발휘하는가? 역설은 자유주의 자체는 자신의 핵심가치를 근본주의적 살육에서 구해내기에 충분히 강하지 않다는 점이다. 자유주의의 문제는 제 힘으로 버티고 설 수 없다는 데 있다 -- 자유주의적 건축물에는 뭔가가 빠져 있다. 자유주의는 바로 그 관념에 있어 '기생적'인데, 그것은 그 자신의 발전과정에서 자신이 허물어뜨리는, 어떤 전제된 공동체적 가치들의 네트워크에 의존하는 것이다. 근본주의는 자유주의에 내속하는 실제적 결함에 대한 반동 -- 물론 허위에 찬 기만적 반동 -- 이며 이것이 근본주의가 자유주의에 의해 자꾸만 생성되는 이유다. 혼자 내버려두면 자유주의는 서서히 스스로 허물어져 갈 것이다 -- 자유주의의 핵심을 구해낼 수 있는 것은 일신(一新)된 좌파뿐이다(156쪽)  
   

  

   
  이러한 예가 명확히 보여주느 것은 냉소적 태도의 한계다. 냉소주의자는 속지 않으나 오류를 범하는 자로서, 그들이 인식하는 데 실패하는 것은 환각의 상징적 효능, 환각이 사회적 현실을 생성하는 활동을 규제하는 방식이다. 냉소주의는 대중적 지혜의 입장을 취한다 -- 전형적 냉소주의자가 당신을 따로 불러 비밀스러운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모르겠어? 결국에는 다 [돈, 권력, 쎅스...] 문제라는 것을, 고매한 원칙이나 가치라는 건 다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는 공허한 말잔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159쪽)  
   

  

   
  20개 이상의 국가에서 나온 자료를 분석한 결과 캠브리지와 예일 대학 연구자들은 이 국가들에 대한 IMF의 차관과 결핵 발생건수의 증가 사이에 뚜렷한 상호연관성이 있음을 확인했다 -- 차관이 종료되자 결핵의 유행은 잦아들었다. 희한해 보이는 이런 상호연관성은 간단히 설명된다. IMF 차관의 조건은 그 수혜국이 '재정규율'을 도입해야 한다는 것, 즉 공공지출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며, '재무건전성'을 재확립하기 위한 조치들의 첫번째 희생자는 바로 건강 자체, 다시 말해 공중보거써비스에 대한 지출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서구 인도주의자들이 이 나라들의 의료써비스의 파국적 상황을 개탄하고 자선 형식으로 원조를 제공할 공간이 열린다. [...]분명한 목소리로 클린턴은 [...]수십년간 세계은행, IMF, 그밖의 국제기관들이 실행에 옮긴 서구의 장기적 정책들에 책임을 돌렸다. 이 정책들 이 정책들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나라들이 비료와 개량종자, 그밖의 농장 투입물에 대한 정부 보조를 중단하도록 압력을 가했으며, 그리하여 최상의 토지가 수출농작물의 재배에 이용될 수 있는 길을 열고 그럼으로써 이 나라들이 식량생산에 있어서의 자급자족 능력을 상실하도록 만들었다. [...]자국농산물이 더 많이 수출될수록 나라들은 점점 더 수입식량에 의존해야 했으며, 한편 토지를 잃고 쫓겨난 농부들은 어쩔 수 없이 슬럼가로 흘러들었는데[...] 이러한 방식으로 많은 나라들이 탈식민지적 의존의 상태에 묶여 있으며 점점 더 시장변동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고 있다[...] (164쪽)  
   

 

   
  다가오는 에너지 위기와 물 부족 사태에 있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 아닌가? 이런 문제들에 알맞게 대응하려면 대규모 집단행동의 새로운 형식으 발명할 필요가 있다. 국가개입의 표준적 형식들 또는 많은 칭송을 받는 지역적 자기조직화의 형식들은 이 일을 해내기에 역부족일 것이다. 그런 문제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되지 않을 경우 가장 그럴 듯한 씨나리오는 풍부한 식량과 물, 에너지를 누리는 세계의 외딴 지역이 널리 퍼진 혼돈과 기아, 그리고 끝없는 전쟁으로 특징지어지는 혼란스런 '바깥'과 분리되는 아파르트레이트(인종격리정책)의 새 시대가 될 것이다. 식량부족으로 고통받는 아이띠와 그밖의 지역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격렬한 반란을 일으킬 완전한 권리가 그들에게 있지 않은가? 공산주의가 다시금 문 앞에 와 있다. [...]물, 에너지, 환경 그 자체, 문화, 교육, 건강 등이 포함된다. 여기서 무엇이 우선인지를 -- 만일 그 결정을 시장에 맡겨둘 수 없다면 -- 누구, 그리고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공산주의의 문제가 다시금 제기되어야 하는 것은 이 지점에서다. (170쪽)  
   

  

   
 

쏘비에뜨 국가의 성취들과 실패들을 열거한 후 레닌은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환상을 품지 않고, 낙담하지 않으며, 극도로 힘든 과업에 다가서면서 몇번이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힘과 유연성을 유지하는 공산주의자는 운이 다하지 않는다(그리고 십중팔구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레닌의 베케트(S. Beckett)적 면모가 가장 잘 드러난 대목으로, 베케트의 <최악을 향하여>에 나오는 구절, "다시 시도하라. 또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의 울림을 지닌다. 레닌의 결론 -- "몇번이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것 -- 은 그가 말하려는 바가 단지 이미 성취된 것을 강화하기 위해 진보의 속도를 늦추는 것이 아니라 '출발점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더욱 급진적인 내용임을 명확히 해준다. 우리는 지난번 시도에서 성공적으로 도달했을 수도 있는 정상에서부터가 아니라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키르케고르의 표현을 쓰면, 혁명의 과정은 점진적 진보가 아니라 반복적 운동, 몇번이고 시작을 반복하는 운동이다. (175쪽) 

 
   

 

   
 

다시 돌아가 말하면, 공산주의 이념에 계속해서 충실하기만 한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 이념에 실천적 긴박함을 부여하는 적대를 역사적 현실 안에서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유일한 진짜 문제는 이것이다 -- 우리는 자본주의의 압도적 자연화를 승인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오늘날 세계자본주의는 그것이 무한정 재생산되는 것을 막을 만큼 충분히 강력한 적대를 담고 있는가? (182쪽)

 
   

 

   
 

[...]어떤 면에서 우리는 모두 자연으로부터 그리고 우리의 상징적 실체로부터 배제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 잠재적으로 호모 싸께르(homo sacer)이며, 그것이 현실이 되는 것을 막는 유일한 길은 예방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이것이 종말적으로 들린다면 우리는 종말론적 시대에 살고 있다고 대꾸하는 수밖에 없다. 프롤레타리아화의 세가지 과정 각각이 어떻게 종말론적 종점을 가리키고 있는지는 분명하다. 생태계의 와해, 인간의 조작 가능한 기계로의 유전공학적 환원, 우리 삶에 대한 총체적 디지털 제어......이 모든 차원에서 상황은 제로 지점에 다가서고 있다[...]  

[...]이러한 위협들에 대처하기 위해 지배이데올로기는 무지에의 의지를 포함하는 위장과 자기기만의 메커니즘을 동원하고 있다. "위협 받는 인간사회들 사이에 일반적인 행위 패턴은 실패할수록 위기에 더 시선을 집중하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더 외면하게 되는 것이다." 현 경제위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186쪽) 

 
   

 

   
 

"자본주의는 세계의 비대칭과 불균형의 근원입니다" -- 이는 우리의 목표는 '자연적' 균형과 대칭의 회복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공격과 배격의 대상은 근대적 주체를 탄생시킨 바로 그 과정, 실질적이며 '모성적'인 자연질서 안에 우리의 뿌리가 있다는 발상과 더불어 어머니 대지(및 아버지 하늘)라는, 성별이 주어지는 전통적 우주론을 페기하는 그 과정이다. 

그리하여 공산주의 이념에 대한 충실성은 아르뛰르 랭보의 말을 빌리면, "절대적으로 현대적이어야 한다" -- 우리는 언제나 절대적으로 현대적이어야 하며, 자본주의 비판을 '도구적 이성'이라든가 '근대 기술문명' 비판으로 왜곡하는 말만 번지르르한 일반화를 배격해야 한다. 우리가 네번재 적대 -- 배제된 자와 포함된 자를 가라는 간극 -- 와 다른 세가지 적대 사이의 질적 차이를 강조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오직 배제된 자와 관련해서만 공산주의라는 용어의 사용이 정당화되는 것이다. [...] 

그러므로 네가지 적대의 계열에서 포함된 자와 배제된 자 사이의 적대가 핵심적이다. 그것 없이는 다른 모든 적대도 전복적 효력을 상실한다 [...] 우리는 포함된 자와 배제된 자 사이의 적대와 전혀 마주하지 않고서도[...] 이러한 방식으로 진정한 보편성은 주어지지 않고 오로지 칸트적 의미에서 '사적인' 관심사만 주어진다. '홀 푸즈'(Whole Foods)나 '스타벅스' 같은 기업은 반노조활동에 관여하고 있어도 자유주의자들 사이에서는 계속 인기를 누리는데, 비결은 그들이 자기네 상품을 판매하면서 거기에 진보적 색채를 덧입히는 데 있다. [...] 

앞의 세가지 적대와 네번째 적대 사이에는 또다른 주요한 차이가 있다. 앞의 세가지는 사실상 인류의 (경제적, 인류학적, 심지어 물리적) 생존의 문제에 관여하는 반면 네번째는 궁극적으로 정의의 문제에 해당한다. (197쪽)

 
   

  

   
 

[...]더 전통적인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면, 푸꼬의 접근법이 포착하지 못하는 것은 양면을 지닌 징후적 요소의 관념으로서, 그 한 면은 한 상황의 주변적 우발사건이며 다른 면은 바로 그 이 상황의 진리(를 표상하는 것)이다. 동일한 방식으로, '배제된 자'는 물론 가시적인데, 역설적이지만 그들의 배제 자체가 그들의 포함 양식이라는 엄밀한 의미에서 그러하다. 사회조직체 안의 그들의 '고유한 자리'는 (공적 영역으로부터의) 배제의 자리인 것이다. 

라깡이 맑스는 이미 징후의 (프로이트적) 관념을 발명했다고 주장했던 것은 그 때문이다. 맑스와 프로이트 양자에 있어 (사회나 심리) 체계의 진리에 이르는 길은 이 체계의 '병적인' 주변적, 우발적 왜곡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 가령 말실수, 꿈, 징후, 경제위기 등을 통과해 지나간다. (2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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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오즈 야스지로 한나래 시네마 17
하스미 시게히코 지음, 윤용순 옮김 / 한나래 / 2001년 1월
절판


친근한 사람들이 나란히 같은 방향으로 시선을 던져 같은 대상을 시계에 담고 있을 때 오즈의 작품에는 꼭 헤어짐이, 출발이, 죽음이 도입된다.
[...]이 숏이 가져오는 신선하며 강한 충격은 딸을 생각하는 부모의 감개에 보는 자가 공감하기 이전에 화면에 나타나 있지 않는 툇마루를 사이에 두고 외부와 내부가 서로 통한다는 점에서 오는 것이다. 시선과 그 대상이 연속되는 숏으로서 나타나 그 인과 관계가 너무나 명백할 때 오즈에게 있어서는 꼭 내러티브에 사건이 도입된다. 그것은 헤어짐이기도 하며, 죽음이기도 하고, 가족의 붕괴이기도 하다. 그 순간에 추상적인 밀폐 공간은 갑자기 터무니없이 열린 세계로 변모한다.-127쪽

[...] 따라서 모든 작품은 영화가 조건으로서 짊어진 절대적인 부자유로부터 눈을 돌리게끔 하기 위한 일시적인 위안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 관객이 따분해 하지 않는 작품은 존재하지 않는 문법에 따르듯이 찍힌 부자유한 영화이다. 또한 가장 자유스러운 영화는 전략적으로 그 부자유를 철저히 함으로써 영화 자체의 한계를 두드러지게 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오즈 야스지로는 더없이 자유로운 작가 가운데 하나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131쪽

[...] 영화인들로부터 시선의 어지러움이라 하여 경멸되는 아주 초보적인 기술적 실수를 그가 평생 고집한 것은 왜일까? [...] 그것이 류 치슈와 같이 적의가 없는 것이든, 하라 세츠코와 같이 우수를 자아내는 것이든, 상대의 눈동자를 정면에서 언제까지나 지켜 보는 일은 우선 없다. 우리들이 어떤 종류의 눈동자에 끌린다면 그것은 여기를 직시할 때가 아니라 무언가에 시선을 빼앗기는 순간이나, 그렇지 않다면 문득 시선을 비켜 눈을 내리뜨거나 하는 때임이 틀림없다. [...] 다음으로 거론되어야 하는 것은 영화 자체가 그 한계 때문에 날조하지 않으면 안되는 허구이다. 그것은 응시하는 두 사람의 눈동자를 같은 하나의 고정 화면에 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영화의 한계로부터 도출된다. 응시하는 두 사람을 나타내는데는 지금 말한 바와 같이 시선의 중심에 놓인 카메라를 180도 팬하든가, 역구도의 숏에 의해 두 개의 화면을 연속시키는 것밖에 없다. 그러나 어떤 것이든 교착交錯하는 시선의 공간적인 동시성은 시간적인 계기성에 대체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응시하는 두 개의 눈동자에 대하여 영화는 언제나 패배할 수 밖에 없다.-137쪽

오즈의 서정은 서로 마주 보는 것에서도 아니고, 시선의 대상이 된 것이 가질 수 있는 심리적 상징성에 의해서도 아닌, 그저 같은 하나의 것을 두 사람의 존재가 동시에 눈에 담는다는 몸짓 그 자체에 의해 형성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이미지에 종속되지 않는 동적인 서정이라고 불러야 한다.-141쪽

오즈는 친한 사람들이 결코 정면에서 마주 보는 일 없이 무언가에 기대어 시선을 평행하게 던지는 것을 비스듬히 뒤에서 찍는다. 그들은 등과 허리와 그리고 때로는 발로 공감을 표현한다. 오즈에게 있어서의 서정은 따라서 움직이려고도 하지 않는 등이 이 한없는 웅변함 보여줄 때 최고조에 달한다. 남자들의 우정에 있어서 바의 카운터가 특권적인 무대 장치가 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143쪽

[...] 이런 자세가 다다를 곳은 결국 만년의 오즈를 하나의 완성태로 상정하여 초기나 중기의 작품을 완벽함에 접근하기 위한 것, 필수이기는 하지만 대체로 무시하는 것이 가능한 과도기적인 단계로서 거기에 이의적인 가치밖에 인정하려 하지 않는 오만함이다. 그러나 그것이 '필름 체험'을 매개로 하여 산 것이든 '문장 체험'을 매개로 하여 산 것이든 간에 하나의 작가적인 생애를 불순과 순수, 미완성과 완성이라는 대립에 의해 계측할 수 있을까? 산다는 것은 마침내 완성되는 순간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갱신되는 현재, 즉 결코 균형에는 도달할 수 없는 존재의 적극적인 모순 그 자체가 아닐까?-20쪽

오즈 '작품'에서 사람을 당황하게 하고 겁을 주는 것은 더할 수 없이 희막하고 오히려 애매하다고 할 수 있는 세부가 돌연 농밀한 연결 상태에 의해 친밀한 유희를 연출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조롭고 기복이 부족한, 오히려 일상 세계의 범용하고 희박한 반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진정한 오즈적 필름 체험이 생생하게 파동하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84쪽

여자들의 성역으로서 내러티브적 기능을 완수하는 2층 방은 최종적으로는 특권적인 주인을 배제하고 공허한 장소밖에 되지 않도록 후기 오즈 '작품' 속에 위치 지어진다. 그리고 1층의 주인들은 그것이 선의에서 그랬든 조금의 악의를 담고 그랬든, 2층이 동굴 같은 공간이 되는 순간의 도래를 몽상하면서 생활하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93쪽

따라서 종종 문제되는 오즈적 '무無라는 것은, 종교적이며 형이상학적인 개념이 아니라 필름의 표층에 각인된 건축학적-형이상학적인 이미지인 것이다. 후기의 오즈가 촬영한 영화의 전부는 이 현재적인 '무'의 실현을 목표로 진행하는 생생한 현재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으며, 타계他界나 피안彼岸과는 전혀 무연의,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의 체험이다. 모든 것은 표층에 드러나 숨겨진 것은 하나도 있을 리 없다. 그것을 우선 리얼리즘이라고 부른다면, 영화가 오즈 이외의 장소에서 이런 리얼리즘을 만난 적은 이전에도 없었으며 또한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93쪽

그리고 '무'의 생산을 부정하기 어려운 현실로 보여 주는 것은 무인의 계단을 정면에서 찍은 거의 클로즈업에 가까운 화면이다. 그것은 집의 다른 부분에서 잔혹하게 격리된 고독한 계단이다. 이미 성역으로 불러들이는 것도, 거기로의 침입을 거부하는 것도 아닌, 기능을 상실한 계단. 불가시의 벽임을 거부하고, 단순한 건축한적인 세부로 환원된 계단. 일관되게 시계로부터 멀어져 가던 계단이 그 부재의 특권을 박탈당하고 계단으로서 필름의 표층으로 부상하는 순간, 그것은 광폭하기까지 한 현존의 형상에 의해 후기의 오즈 '작품'의 기반을 그대로 완전히 부정해 버린다. 그것은 '작품'이 그 한계점에 가 닿으려 하는 가혹한 순간이다.-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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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하는 사람
텐도 아라타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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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달 그믐날, 화창한 겨울의 파란 하늘에 구름이 흩어져 있다. 그 모습이 적당히 디자인한 무늬처럼 보인다.
준코는 다카히코에게 근처 산사에 가자고 했다. 다카히코는 내일 다 같이 가는 게 어떻겠냐고 대꾸했다.
"내일은 붐빌 테고......가끔은 단둘이 데이트하는 것도 좋잖아요."
(그리고 예감이 들어요. 내일이면 내가 밖에 나갈 수 없을 것 같다는......)
산사에는 이미 새해맞이 단장이 다 끝나 있었지만, 사람은 없었다.
다카히코에게 휠체어를 밀어달라고 해서 돌계다 옆 오르막길을 올라가 새전함 앞으로 갔다. 준코는 다카히코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종을 치고 새전을 던졌다. 그리고 가족의 행복과 태어날 아기의 건강과 시즈토의 무사함을 기원했다. 휠체어로 돌아오자, 이번에는 다카히코가 기도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편에게서 흰머리가 부쩍 많아진 것을 보며, 이참에 이 말만은 해두어야겠다고, 얼마 전부터 눈치채고 있던 일을 말했다.
"다카히코......당신......내 뒤를 따를 생각이죠?"-508쪽

(이어서)
다카히코의 등이 떨렸다. 준코가 병원에서 위 검사를 받고 로비로 나왔을 때 "그렇게 하면 되는 거야"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던 것은 준코가 잘못되면 자기도 바로 뒤따를 거라고 결심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그후로 다카히코는 준코의 상태에 일희일비 하는 일 없이 침착하게 간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절대 안돼."
"......어째서?" 다카히코가 어깨 너머로 물었다.
"어째서라니요. 미시오가 있고, 손자가 태어나요!"
"......레지한테 맡기면 돼. 미노리도 있고."
"부모를 한꺼번에 잃으면 미시오가 얼마나 힘들겠어요? 아기한테도 분명 안 좋을 거라고요."
"나는 못하겠어......당신 없이 사는 거......"
가슴속이 요동쳤다. 마주 보고 있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준코는 간신히 마음을 다잡고 말을 이었다. [......]
다카히코가 새전함에 손을 짚고 몸을 가누었다.-508쪽

(이어서)
"다카히코......올 한 해 참 좋았죠. 손자도 생기고, 미시오를 부탁할 상대도 생기고, 시즈토를 만나진 못했지만, 건강하다는 소식은 들었잖아요. 그렇죠? 좋은 한 해였어오."
준코는 다카히코의 허리를 부여잡았다. 준코의 손길을 느낀 다카히코가 앞을 향한 채 아내의 손을 꼭 잡았다.
"나요, 부모님 만나면 자랑할 거에요."
준코는 남은 힘을 쥐어짜듯 다카히코의 손을 맞잡았다.
"어때요? 저 남자 보는 눈은 있었죠, 하고 말이에요."
그 자리에 주저앉는 남편의 모습에 가슴이 쓰려와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508쪽

"넌 다섯 살 무렵에는 좋아졌지만, 태어나자마자 우유 알레르기가 있다는 걸 알고부터 한 번도 분유를 주지 않았어. 시즈토는 분유도 곧잘 먹어서 일찍 모유를 끊었지만...... 너는 만 두 살이 될 때까지 젖을 먹였지. 그렇게 낳은 것이 엄마인 나니까 너한테 미안해서 항상 신경 썼는데...... 만 두 살이 된 직후에 네가 습진이 생긴 데를 마구 긁어서 약을 받아왔었어. 근데 그 약이 맞지 않아 설사를 했고...... 우유 성분이 섞여 있는 걸 모르고 정장제를 받아서 먹였더니 온몸이 새빨개진 거야. 아나필락시스 (주: 항원 병체 반응이 원인이 되어 일어나는 급성 알레르기성 반응) 직전 상태라며 의사는 최악의 경우도 각오하라고 했어. 미안해, 엄마가 제대로 못해서 미안해, 하고...... 병원에서 손을 꼭 잡고 있는데 네가 방긋 웃어주더구나. 그 웃음이 정말로 부드러워서...... 천사가 정말 있네, 그런 생각이 들더라. 다행히 회복되어서 집에 돌아왔을 때, 널 꼭 껴안고는 신에게 부탁했단다. 만약 다시 태어나는 일이 있다면 한 번 더 이 아이, 우리 미시오의 엄마가 되게 해주세요 하고......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없어."-6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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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11-16 0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이책을 읽어 봐야하겠군요. 이것도 애도라. 얼마전 로쟈님의 책 <우울과 애도>를 좀 읽다가 엎어놓았는데, 엎어놓았다고 했더니 엎드려뻗쳐놓았느냐 하시더라구요. ㅎ 그책의 맥락과 같은 애도인가요? 잘 보았습니다. ^^

허스키 2011-11-16 12:20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우울과 애도>를 읽지 않아서 같은 맥락의 '애도'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 참 좋다고 자신있게 추천할 수 있습니다. 요즘 쉽게 보이지 않는 가슴 따뜻하게 만드는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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