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처럼 세지 않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에겐 확실히 셌다. 결정적인 한 방이 가해지는 순간에 예외없이 고개를 돌렸던 것 같다. 예전엔 미이케 다카시의 피가 난무하고 내장이 쏟아지는 영화를 낄낄거리며 봤는데 갈수록 이런 장면을 마주하는게 힘들어진다. 극장에서 나와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집에 돌아와 가족들의 웃는 얼굴을 보며 마음을 간신히 추스려야했다. 그런데 이게, 그러니까 이 불편한 감정이 단순히 영화에서 보여주는 액션의 강도의 세기 때문인지 의심스럽다.

먼저, 이해할 수 없는 죽은 주연의 동생의 첫 등장의 방식. 수현의 약혼녀 주연이 시체로 (정확히 말하자면 머리만) 발견된 후. 벤치. 주연의 아버지 장반장이 담배를 태우고 있다. 수현이 그에게 다가와 옆에 앉는다. 잠시간 둘의 대화 후 장반장은 수현의 손을 잡고 계속해서 미안하다고 한다. 자신의 딸에게 미안하고, 수현에게도 미안하다고 한다. 가까이에서 이 둘을 보여주던 카메라는 여기서 문득 멀리 빠져나가 이들을 바라보는 어느 여자의 등 뒤에서 둘을 바라본다. 갑자기 등장한 어느 여자의 등. POV. 일반적으로라면 여기서 다음 숏은 이 여자의 얼굴을 보여주어야 하는게 맞다. 하지만, 카메라는 여자의 얼굴을 건너뛰어 곧바로 화장터 안으로 들어가 타들어가는 주연을 보며 오열하는 가족과 수현을 보여준다. 즉각 떠오르는 질문. 도대체 이 여자는 누구지? 그리고 다시 납골당에서의 수현. 그런 수현을 ‘형부’라고 부르며 다가와 위로하려는 여자. 그제서야 우리는 먼저 보았던 뒷모습의 주인이 (아마도) 이 처제일 것이라 짐작한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짐작’할 뿐이다. 이 주연의 화장터 시퀀스에서 주연의 여동생, 그러니까 수현의 처제(가 될 여자. 주연과 수현은 아직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다)가 등장하는 두 장면은 아무리 생각해도 왜 굳이 그곳에 있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마도 처음 그녀의 뒷모습이 등장했을 때 만약 다음 숏에서 그녀의 얼굴로 이어진다면 이 ‘처제’의 존재가 느닷없이 영화에서 중요하게 부상하는 효과를 일으킬 수 있으므로 그냥 건너뛰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 그런 이유라면 애초에 그녀의 뒷모습을 건 그 숏은 없었어야한다. 혹시 우리가 바라 본 시점은 처제의 그것도, 우리의 그것도 아닌, 죽은 주연의 자리에서 우리가 둘을, 혹은 셋을 바라봄이 아닐런지.

이후에도 처제는 몇 번 더 등장하여 수현으로 하여금 그녀의 눈치를 보게 한다. 난 여기서 이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왜 수현은, 그리고 주연의 아버지 장반장은 처제의 , 딸의 눈치를 그토록 보는 것이고 어찌보면 그녀의 반응에 저리 쩔쩔매는 것일까. 마치 나쁜 짓을 하다 선생님께 들킨 아이들처럼 말이다. 화장터 이후 그녀가 처음 등장하는 씬은 장반장이 수현에게 유력한 용의자 정보를 주고 있을 때이다. 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처제가 들어오고 수현과 장반장은 급히 탁자 위의 자료들을 숨긴다. 그리고 처제에게 말을 돌리는 수현의 모습은 다소 말을 더듬기까지 하는 느낌. 그의 직업이 국정원 경호요원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지나치게 당황하는 모습이다. 다른 가족에게 안좋은 일을 보여주지 않기 위함이라고 이해한다고 해도 여전히 좀 지나친 면이 있다. 국정원 요원들은 비밀을 만들고 그것을 지키는게 일상인 사람들이다. 두번째 등장. 차를 타고 가는 수현에게 장반장이 전화를 걸어 이제 그만하자고, 그러는게 좋겠다고 한다. 여기서 그의 표정과 말투는 마치 누군가에게 협박을 받은 듯한 느낌이기까지 하다. 그럴 수 없다는 수현의 대응에 수화기 너머에서 장반장의 수화기를 가로채는 것은 옆에 함께 있는 처제이다. 처제는 이제 의미 없는 복수는 그만두라 한다. 처제의 목소리를 들은 수현은 또 당황하고 애써 침착해하며 이것은 의미없는 복수가 아니라고 한다. 선생님께 결정적으로 들켜 꼼짝없이 혼나는 아이들. 한 아이는 교무실에 벌서고 있지만, 다른 아이는 선생님은 이해 못한다며 투정을 부리고 있다. 복수를 꿈꾸는 둘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며 한편으론 그 둘을 그만두게 하려는 처제의 몸짓. 혹은 죽은 주연이 내려와 그만두라고 말하는.

영화의 마지막. 장경철이 장반장을 죽이기 위해 그의 집으로 찾아와 그를 죽이기 직전 처제가 집에 온다. 뒤늦게 도착한 수현. 다행히 장반장은 죽지 않았다. 뭐? 죽지 않았다고? 일단 다음으로 넘어가자. 분노에 가득차 경철을 쫓는 수현과 경철의 사이로 죽은 처제의 숏이 들어온다. 이불 같은 것에 꽁꽁 싸여서 어딘가에 죽은 채 버려진 모습. 그녀는 장경철의 다른 희생자들과는 달리 신체가 훼손되지 않은 상태이다. 이 숏은 아주 짧게 스치듯이 지나간다. 마치 눈길을 돌려 그녀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듯이. 

그러니까, 나는 여기서 처제와 죽은 주연이 자꾸만 겹친다. “하나면 되요?” 칼을 들고 그녀의 옆에 앉은 장경철에게 주연은 자기 팔 하나면 되느냐며 그정도라면 기꺼이 내어줄테니 새 생명을 안고 있는 그녀를 살려줄 것을 부탁한다. 자기가 살고자 부탁하는게 아니라 아이를 살리기 위해 부탁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녀라면 죽어서도 수현이 자신의 복수를 위해 또 다른 악마가 되어가는 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화장터에서 차마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여동생의 자리에 내려와 수현의 주변을 맴돌며 그녀는 계속해서 사인을 보내는게 아닐까? 이제 그만두라고. 이것은 ‘의미 없는 복수’일 뿐이라고. 처제의 주검은 훼손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된다. 이야기상 장경철이 수현과 맞닥뜨리기 전에 자수를 하기 위해 급히 일을 처리하느라 그럴 시간이 없었다는게 보이는 설명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건 좀 이상하다. 장경철은 이미 그녀를 한 번 사지절단 하였기에 또 다시 그럴 필요가 없던 것은 아닐까. 주연은 자기를 다시 한 번 죽여서 아버지를 구한게 아닐까. 죽은 자가 다시 돌아와 산 자의 입을 빌어 산 자에게 계속 말을 건넨다. 하지만, 산 자는 죽은 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자신의 자리를 자꾸만 죽은 자의 자리로 끌어내리려고 한다. 그리고 결국엔 성공한다. 수현이 영화에서 죽지는 않지만 과연 그가 영화가 끝난 후에도 여전히 살아있다고 말할 수가 있을까. 장반장은 이 일의 후에도 살아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장경철의 절단된 목을 부둥켜 안아야 했던 그의 부모는 그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장경철의 아들은 그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결국, 모두가 죽은 자의 자리로 들어가는 것을 우리는 영화에서 목격해야 한다. 나는 그래서 이 영화가 내내 불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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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18 2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허스키 2011-11-23 16:26   좋아요 0 | URL
이 영화를 다시 볼 용기는 나질 않아 확인은 못했지만, 인간아께서 지적해 주신 부분이 맞다면 이 글은 상당히 수정이 필요한, 혹은 폐기 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 듯 합니다.
 

엘리베이터. 모자를 깊이 눌러 쓴 남자가 먼저 올라타 있다. 하루코는 타지로 출장을 가는 남편을 아이와 함께 배웅하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올라탄다. 잔뜩 주눅 든 사람처럼, 혹은 뭔가 숨기려는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자. 아이가 장난을 치다 남자와 부딪히고 하루코와 남편은 그에게 사과한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그들은 각자의 길을 간다. 아이는 잠시 사라졌다 이내 나타나고, 하루코와 아이는 남편을 떠나보낸다.

여기까지가 <골든 슬럼버>의 첫 시퀀스이다. 다음 숏은 건널목에 서있는 아오야기. 아오야기는 대학 친구 모리타를 오랫만에 만나고 그에게서 이상한 말을 들은 후 총리의 암살범으로 몰려 쫓기기 시작한다. 여기서 의문점. 첫 시퀀스의 하루코는 영화가 한참 진행된 후에야 다시 나타난다. 왜 굳이 그녀가 아이와 함께 남편을 배웅하는 씬, 그러니까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엘리베이터에서 이상한 남자와 마주치는 그 씬은 왜 굳이 맨 처음 나타나는 것인가. 이야기의 순서 상 아오야기와 모리타의 재회가 먼저 나와야 하는게 아닐까? 심지어, 엘리베이터 씬과 그에 이어지는 하루코의 남편 배웅씬은 필요없는 잉여의 씬, 이야기와 전혀 상관없는 씬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잠시 이 엘리베이터 씬에서 또 하나 이상한 점. 여기에서 카메라는 처음엔 마치 CCTV의 그 앵글로 이 세 사람을 바라본다. 마치, 어떤 범죄 현장의 증거 화면처럼. (그리고, 엘리베이터에서 나와서 우리가 하루코의 남편으로부터 듣는 바에 의하면 아마도 이 즈음 연쇄 살인이 자행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 숏. 낮은 곳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앵글. 우리는 한 번도 이 공간에서 그들을 정상적인 각도로 바라보지 못한다. 좁은 공간에서 촬영해야 한다는 기술적 문제? 우리는 이 엘리베이터 씬과 이어지는 하루코가 남편을 배웅하는 씬, 그러니까 이 첫 시퀀스가 이야기의 순서상 가장 마지막이라는 것을 마지막에 가서야 알게 된다. 다시 한 번 질문. 왜 이야기 순서상 가장 마지막에 와야 할 시퀀스를 이야기의 맨 처음에 가져다 놓은 것일까. 물론, 이러한 방식은 영화의 끝에 ‘사실은 이러했다’라는 식으로 관객들이 무릎을 탁 치게 만들기 위해 종종 보이는 방식이긴 하다. 하지만, <골든 스럼버>에서의 이 방식은 왠지 이상하다. 총리 암살범으로 몰린 아야나기가 도주를 계속하는 모습을 보여주다가 영화는 하루코와 아이가 총리가 암살되는 순간 집에서 TV를 보는 씬으로 넘어간다. 하루코는 (타지로 출장을 가 있는)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조금 더 빨리 돌아올 수 없느냐고 묻는다. 아직 영화의 끝을 보지 못한 우리는, 그러니까 영화의 첫 시퀀스가 지금 여기서 하루코와 남편의 전화상의 대화보다 이야기상 더 나중에 위치한다는 것을 모르는 우리는 이 씬을 당연히 첫 시퀀스에서 출장을 가는 남편의 모습과 이어서 생각하게 된다. 의도적인 속임수. 단순히 마지막에 놀라움을 배가시키기 위한 장치라고 설명이 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왜 굳이 그렇게 해야 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왜 굳이 남편이 출장가는 모습을 처음 보여주고, 남편이 출장 간 사이 하루코가 총리 암살을 목격하여 (다른 시간에)출장을 가있는 남편과 전화 통화를 하게 했는지. 또 다른 가능한 설명. 하루코로 하여금 조금 더 자유스럽게 사건에 개입할 수 있도록 남편을 부재 상태로 만들기 위해. 그러나, 이것도 역시 뭔가 부족하게 느껴진다.

그러니까, 결국 <골든 슬럼버>는 마치 하나의 거대한 플래시 백과 같다. 첫 시퀀스 이후, 그러니까 하루코가 남편을 배웅하고 나서부터 우리가 보는 모든 것들은 첫 시퀀스의 플래시 백이다. 과거를 되돌아 보는 플래시 백. 과거를 회상하는 아오야기, 모리타, 카즈, 그리고 하루코. 과거로 돌아가려는 고위층. 골든 슬럼버. Once there’s a way to get back home. 어쩌면 거대한 하나의 불꽃놀이. 그 아래에 모여 앉아 어깨동무를 하고 옛날을 생각하는 친구들. 하지만, 마치 성형수술을 하고 다른 얼굴이 된 아오야기처럼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아오야기의 손목에 찍히는 ‘참 잘했어요’ 도장은 돌아갈 수 없는 과거에게 고하는 작별 인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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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학 중 영화이론에 관한 공부를 하였으나 여기에서 영화학에 관한 지지를 선언하고 일상적인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대화를 비하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가 발전하기 위해선 둘 모두가 필요하며, 그 둘이 상호 작용을 통해 발전할 때 그들이 중간에 놓고 애정을 가지고 다루는 '영화'가 함께 발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굳이 영어로 된 원문을 시간을 들여 어설프게나마 우리말로 바꾸어 놓아 보는 이유는 이제는 조용해진 <디 워>로 불거졌던 영화비평의 효용성에 관한 논쟁에 있어서 영화에 관해 깊이 사유하는 것이 필요없는 것은 아니다고 말하고 싶어서입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어쩌면 진짜 이유는 내 자신을 위함, 즉 원문을 읽어내려가며 해석하는 과정을 통해 내 스스로의 영화에 관한 애정을 유지하기 위함일지도 모릅니다.

데이빗 보드웰은 영화에 관한 책 중 베스트셀러이며 몇 몇 학과에선 교과서(혹은 그와 거의 비슷하게)로 사용하는 <Film Art>의 저자입니다. 저 역시 10여년전 이 책을 읽었고, 아직도 제 책장에 이젠 제법 낡은 모습으로 꽂혀 있습니다.

원문은 데이빗 보드웰과 그의 아내의 블로그에서 찾으실 수 있습니다. 

  

   
 

Studying Cinema
David Bordwell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본 영화에 대해 이야기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영화에 대해 신문이나 잡지에 글을 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반적인 방식에서의 영화에 관해 이야기하고 사고하는 것이 학문으로서의 영화학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 것일까? 이 두가지의 영화에 관해 생각하는 방식은 완전히 다른 것이기도 하지만, 몇몇 차이점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첫번째, 일반적인 영화에 관한 담론은 평가를 내리는데에 그 중점이 있다. "그 무비 정말 죽이더라!" "정말? 난 별로던데." 다시 말해, 이처럼 영화 리뷰어들은 티켓을 주고 볼 만한 값어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말하며 영화를 평가하는데 중점을 둔다. 영화학 역시 이러한 평가 행위를 수반할 수는 있지만, 대부분의 영화학자들에게 특정 영화를 평가하는 것은 주요 목표가 아니다.

두번째로, 일반적인 대화에서는 역사적인 부분이 등한시되는데, 이러한 이유로 결국 작품은 전통이나 긴 맥락의 트렌드 위에서 논의되지 못한다. 대부분의 리뷰어들은 작품을 영화 역사의 맥락 안에서 사유하는 방식을 갖고 있지 못하다. 영화 역사의 맥락 안에서 작품이 이야기 되어질 때에도 그것은 대개 현재에 국한되며, 리뷰어들은 작품이 현재 사회 이슈를 반영한다고 말한다.

세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점. 영화에 관한 일반적인 대화는 그리 분석적이지 못하다. 영화의 부분들은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관해 이야기 되어지지 못하고, 플롯을 만들어가는 방식이나 스타일은 분석되어지지 못하고, 작품이 생산하고자 할지도 모를 사상적 공작은 연구되지 못한다. 리뷰어들이 설사 이러한 부분들에 관해서 "거슬리는 몽타지"라던지 "일관적이지 못한 모티브" 등이라는 표현으로 이야기를 할 때에도, 이것은 아주 미미할 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영화학은 영화와 영화가 만들어지고 소비되는 과정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영화학자들은 왜 영화가 이러한 모습이며, 왜 영화가 이러한 방식으로 만들어졌으며, 왜 영화가 이러한 방식으로 소비되었는지와 같은 물음에 집중한다. 대부분의 영화에 관한 일상적인 대화와 대부분의 영화 저널리즘은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설명하는데에는 어느 정도 그것을 분석하는 과정이 수반된다. 분석은 전체를 연관되는 부분들끼리 나누고 그들이 어떻게 함께 작용하는지 고민하는 것이다. 따라서, 1930년에 특정 스튜디오가 어떻게 일을 했는지에 흥미를 가진 영화학자라면 그 스튜디오의 운영체계를 분리할 것이며, 학구적인 영화 평론가라면 작품을 씬이나 시퀀스 등으로 쪼개어 전체적으로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연구할 것이다. 또한, 1930년에 스튜디오가 어떻게 운영되었는지 설명하고자 하는 영화역사학자는 스튜디오의 매일매일의 일과를 묘사할 것이며,  학구적인 영화 평론가는 어찌하여 그 씬이 특정한 의미를 지니며 특정한 효과를 야기하는지를 심도 깊게 묘사할 것이다. 분석과 묘사는 일반 대화와 영화 리뷰에서 매우 드문 일인데, 이는 비단 시간과 공간의 부족 뿐만이 아니라, 영화학자는 다른 집단에겐 그리 필요가 없는 '설명'에 흥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설명엔 여러 다른 종류가 있다. 역사학자들은 x와 y라는 현상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z라는 모습을 만들어내는 방식에 관한 일반적인 설명을 찾는다. 영화 분석학자와 이론가들은 x와 y가 주어진 시간에 어떻게 함께 작동하여 z라는 전체를 만들어내는지에 관한 기능적인 설명을 구한다. 이러한 기능적 설명은 다시 말하지만 일반적인 대화나 영화 리뷰에서는 그리 다루어지지 않는 부분이다.

영화학자들이 영화에 관해 이야기 할 때, 그들은 또한 해석, 즉 우리들이 영화 속에서 찾을 수 있는 확실치 않은 의미에 관한 주장들도 제공한다. 해석은 특정한 종류의 기능적 설명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해석은 영화의 스타일, 구성, 대화, 플롯과 같은 요소들이 영화 전체의 중요도에 기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영화학에 관한 가장 충실한 정의를 내리자면 그것은 질문을 제안하고 그것에 대답하려 노력하는 과정일 것이다. 영화에 관한 가장 일반적인 대화는 이와는 달리 정보 공유, 다른 이들과의 사회적 유대, 그리고 다른 이들의 취향에 관해 알아가는 것 등과 같은 목적을 지닌다. 물론 영화학도 이러한 목적을 지니지만, 다른 학문들과 마찬가지로 토론과 비평을 통해 질문에 대답하려 노력한는 점에서 다르다. 결국, 영화학은 대답을 위해서 설명이 필요한 특정 종류의 질문들에 그 중점을 둔다. 

그러나, 영화학과 매우 닮은 모습을 지닌 영화에 관한 일상적인 대화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팬들이 내놓은 이야기들이다. 팬문화는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씬에 관해 종종 매우 자세하게 묘사하기를 좋아하며, 때론 분석까지 이르기도 한다. 팬들의 대화 역시 다른 대화들과 마찬가지로 평가적인 부분들이 있으나, 그들의 전문화된 담론은 학계에서 진행되는 담론과 같기도 하다. 본 웹사이트의 다른 곳에 제안된 논쟁들은 이론, 역사적 논쟁, 그리고 영화분석이 결국 특정 질문에 관한 대답, 즉 설득력 있는 설명을 제안하기 위한 노력이라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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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오즈 야스지로 한나래 시네마 17
하스미 시게히코 지음, 윤용순 옮김 / 한나래 / 2001년 1월
절판


친근한 사람들이 나란히 같은 방향으로 시선을 던져 같은 대상을 시계에 담고 있을 때 오즈의 작품에는 꼭 헤어짐이, 출발이, 죽음이 도입된다.
[...]이 숏이 가져오는 신선하며 강한 충격은 딸을 생각하는 부모의 감개에 보는 자가 공감하기 이전에 화면에 나타나 있지 않는 툇마루를 사이에 두고 외부와 내부가 서로 통한다는 점에서 오는 것이다. 시선과 그 대상이 연속되는 숏으로서 나타나 그 인과 관계가 너무나 명백할 때 오즈에게 있어서는 꼭 내러티브에 사건이 도입된다. 그것은 헤어짐이기도 하며, 죽음이기도 하고, 가족의 붕괴이기도 하다. 그 순간에 추상적인 밀폐 공간은 갑자기 터무니없이 열린 세계로 변모한다.-127쪽

[...] 따라서 모든 작품은 영화가 조건으로서 짊어진 절대적인 부자유로부터 눈을 돌리게끔 하기 위한 일시적인 위안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 관객이 따분해 하지 않는 작품은 존재하지 않는 문법에 따르듯이 찍힌 부자유한 영화이다. 또한 가장 자유스러운 영화는 전략적으로 그 부자유를 철저히 함으로써 영화 자체의 한계를 두드러지게 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오즈 야스지로는 더없이 자유로운 작가 가운데 하나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131쪽

[...] 영화인들로부터 시선의 어지러움이라 하여 경멸되는 아주 초보적인 기술적 실수를 그가 평생 고집한 것은 왜일까? [...] 그것이 류 치슈와 같이 적의가 없는 것이든, 하라 세츠코와 같이 우수를 자아내는 것이든, 상대의 눈동자를 정면에서 언제까지나 지켜 보는 일은 우선 없다. 우리들이 어떤 종류의 눈동자에 끌린다면 그것은 여기를 직시할 때가 아니라 무언가에 시선을 빼앗기는 순간이나, 그렇지 않다면 문득 시선을 비켜 눈을 내리뜨거나 하는 때임이 틀림없다. [...] 다음으로 거론되어야 하는 것은 영화 자체가 그 한계 때문에 날조하지 않으면 안되는 허구이다. 그것은 응시하는 두 사람의 눈동자를 같은 하나의 고정 화면에 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영화의 한계로부터 도출된다. 응시하는 두 사람을 나타내는데는 지금 말한 바와 같이 시선의 중심에 놓인 카메라를 180도 팬하든가, 역구도의 숏에 의해 두 개의 화면을 연속시키는 것밖에 없다. 그러나 어떤 것이든 교착交錯하는 시선의 공간적인 동시성은 시간적인 계기성에 대체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응시하는 두 개의 눈동자에 대하여 영화는 언제나 패배할 수 밖에 없다.-137쪽

오즈의 서정은 서로 마주 보는 것에서도 아니고, 시선의 대상이 된 것이 가질 수 있는 심리적 상징성에 의해서도 아닌, 그저 같은 하나의 것을 두 사람의 존재가 동시에 눈에 담는다는 몸짓 그 자체에 의해 형성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이미지에 종속되지 않는 동적인 서정이라고 불러야 한다.-141쪽

오즈는 친한 사람들이 결코 정면에서 마주 보는 일 없이 무언가에 기대어 시선을 평행하게 던지는 것을 비스듬히 뒤에서 찍는다. 그들은 등과 허리와 그리고 때로는 발로 공감을 표현한다. 오즈에게 있어서의 서정은 따라서 움직이려고도 하지 않는 등이 이 한없는 웅변함 보여줄 때 최고조에 달한다. 남자들의 우정에 있어서 바의 카운터가 특권적인 무대 장치가 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143쪽

[...] 이런 자세가 다다를 곳은 결국 만년의 오즈를 하나의 완성태로 상정하여 초기나 중기의 작품을 완벽함에 접근하기 위한 것, 필수이기는 하지만 대체로 무시하는 것이 가능한 과도기적인 단계로서 거기에 이의적인 가치밖에 인정하려 하지 않는 오만함이다. 그러나 그것이 '필름 체험'을 매개로 하여 산 것이든 '문장 체험'을 매개로 하여 산 것이든 간에 하나의 작가적인 생애를 불순과 순수, 미완성과 완성이라는 대립에 의해 계측할 수 있을까? 산다는 것은 마침내 완성되는 순간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갱신되는 현재, 즉 결코 균형에는 도달할 수 없는 존재의 적극적인 모순 그 자체가 아닐까?-20쪽

오즈 '작품'에서 사람을 당황하게 하고 겁을 주는 것은 더할 수 없이 희막하고 오히려 애매하다고 할 수 있는 세부가 돌연 농밀한 연결 상태에 의해 친밀한 유희를 연출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조롭고 기복이 부족한, 오히려 일상 세계의 범용하고 희박한 반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진정한 오즈적 필름 체험이 생생하게 파동하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84쪽

여자들의 성역으로서 내러티브적 기능을 완수하는 2층 방은 최종적으로는 특권적인 주인을 배제하고 공허한 장소밖에 되지 않도록 후기 오즈 '작품' 속에 위치 지어진다. 그리고 1층의 주인들은 그것이 선의에서 그랬든 조금의 악의를 담고 그랬든, 2층이 동굴 같은 공간이 되는 순간의 도래를 몽상하면서 생활하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93쪽

따라서 종종 문제되는 오즈적 '무無라는 것은, 종교적이며 형이상학적인 개념이 아니라 필름의 표층에 각인된 건축학적-형이상학적인 이미지인 것이다. 후기의 오즈가 촬영한 영화의 전부는 이 현재적인 '무'의 실현을 목표로 진행하는 생생한 현재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으며, 타계他界나 피안彼岸과는 전혀 무연의,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의 체험이다. 모든 것은 표층에 드러나 숨겨진 것은 하나도 있을 리 없다. 그것을 우선 리얼리즘이라고 부른다면, 영화가 오즈 이외의 장소에서 이런 리얼리즘을 만난 적은 이전에도 없었으며 또한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93쪽

그리고 '무'의 생산을 부정하기 어려운 현실로 보여 주는 것은 무인의 계단을 정면에서 찍은 거의 클로즈업에 가까운 화면이다. 그것은 집의 다른 부분에서 잔혹하게 격리된 고독한 계단이다. 이미 성역으로 불러들이는 것도, 거기로의 침입을 거부하는 것도 아닌, 기능을 상실한 계단. 불가시의 벽임을 거부하고, 단순한 건축한적인 세부로 환원된 계단. 일관되게 시계로부터 멀어져 가던 계단이 그 부재의 특권을 박탈당하고 계단으로서 필름의 표층으로 부상하는 순간, 그것은 광폭하기까지 한 현존의 형상에 의해 후기의 오즈 '작품'의 기반을 그대로 완전히 부정해 버린다. 그것은 '작품'이 그 한계점에 가 닿으려 하는 가혹한 순간이다.-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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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하는 사람
텐도 아라타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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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달 그믐날, 화창한 겨울의 파란 하늘에 구름이 흩어져 있다. 그 모습이 적당히 디자인한 무늬처럼 보인다.
준코는 다카히코에게 근처 산사에 가자고 했다. 다카히코는 내일 다 같이 가는 게 어떻겠냐고 대꾸했다.
"내일은 붐빌 테고......가끔은 단둘이 데이트하는 것도 좋잖아요."
(그리고 예감이 들어요. 내일이면 내가 밖에 나갈 수 없을 것 같다는......)
산사에는 이미 새해맞이 단장이 다 끝나 있었지만, 사람은 없었다.
다카히코에게 휠체어를 밀어달라고 해서 돌계다 옆 오르막길을 올라가 새전함 앞으로 갔다. 준코는 다카히코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종을 치고 새전을 던졌다. 그리고 가족의 행복과 태어날 아기의 건강과 시즈토의 무사함을 기원했다. 휠체어로 돌아오자, 이번에는 다카히코가 기도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편에게서 흰머리가 부쩍 많아진 것을 보며, 이참에 이 말만은 해두어야겠다고, 얼마 전부터 눈치채고 있던 일을 말했다.
"다카히코......당신......내 뒤를 따를 생각이죠?"-508쪽

(이어서)
다카히코의 등이 떨렸다. 준코가 병원에서 위 검사를 받고 로비로 나왔을 때 "그렇게 하면 되는 거야"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던 것은 준코가 잘못되면 자기도 바로 뒤따를 거라고 결심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그후로 다카히코는 준코의 상태에 일희일비 하는 일 없이 침착하게 간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절대 안돼."
"......어째서?" 다카히코가 어깨 너머로 물었다.
"어째서라니요. 미시오가 있고, 손자가 태어나요!"
"......레지한테 맡기면 돼. 미노리도 있고."
"부모를 한꺼번에 잃으면 미시오가 얼마나 힘들겠어요? 아기한테도 분명 안 좋을 거라고요."
"나는 못하겠어......당신 없이 사는 거......"
가슴속이 요동쳤다. 마주 보고 있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준코는 간신히 마음을 다잡고 말을 이었다. [......]
다카히코가 새전함에 손을 짚고 몸을 가누었다.-508쪽

(이어서)
"다카히코......올 한 해 참 좋았죠. 손자도 생기고, 미시오를 부탁할 상대도 생기고, 시즈토를 만나진 못했지만, 건강하다는 소식은 들었잖아요. 그렇죠? 좋은 한 해였어오."
준코는 다카히코의 허리를 부여잡았다. 준코의 손길을 느낀 다카히코가 앞을 향한 채 아내의 손을 꼭 잡았다.
"나요, 부모님 만나면 자랑할 거에요."
준코는 남은 힘을 쥐어짜듯 다카히코의 손을 맞잡았다.
"어때요? 저 남자 보는 눈은 있었죠, 하고 말이에요."
그 자리에 주저앉는 남편의 모습에 가슴이 쓰려와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508쪽

"넌 다섯 살 무렵에는 좋아졌지만, 태어나자마자 우유 알레르기가 있다는 걸 알고부터 한 번도 분유를 주지 않았어. 시즈토는 분유도 곧잘 먹어서 일찍 모유를 끊었지만...... 너는 만 두 살이 될 때까지 젖을 먹였지. 그렇게 낳은 것이 엄마인 나니까 너한테 미안해서 항상 신경 썼는데...... 만 두 살이 된 직후에 네가 습진이 생긴 데를 마구 긁어서 약을 받아왔었어. 근데 그 약이 맞지 않아 설사를 했고...... 우유 성분이 섞여 있는 걸 모르고 정장제를 받아서 먹였더니 온몸이 새빨개진 거야. 아나필락시스 (주: 항원 병체 반응이 원인이 되어 일어나는 급성 알레르기성 반응) 직전 상태라며 의사는 최악의 경우도 각오하라고 했어. 미안해, 엄마가 제대로 못해서 미안해, 하고...... 병원에서 손을 꼭 잡고 있는데 네가 방긋 웃어주더구나. 그 웃음이 정말로 부드러워서...... 천사가 정말 있네, 그런 생각이 들더라. 다행히 회복되어서 집에 돌아왔을 때, 널 꼭 껴안고는 신에게 부탁했단다. 만약 다시 태어나는 일이 있다면 한 번 더 이 아이, 우리 미시오의 엄마가 되게 해주세요 하고......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없어."-6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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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11-16 0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이책을 읽어 봐야하겠군요. 이것도 애도라. 얼마전 로쟈님의 책 <우울과 애도>를 좀 읽다가 엎어놓았는데, 엎어놓았다고 했더니 엎드려뻗쳐놓았느냐 하시더라구요. ㅎ 그책의 맥락과 같은 애도인가요? 잘 보았습니다. ^^

허스키 2011-11-16 12:20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우울과 애도>를 읽지 않아서 같은 맥락의 '애도'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 참 좋다고 자신있게 추천할 수 있습니다. 요즘 쉽게 보이지 않는 가슴 따뜻하게 만드는 소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