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오즈 야스지로 한나래 시네마 17
하스미 시게히코 지음, 윤용순 옮김 / 한나래 / 2001년 1월
절판


친근한 사람들이 나란히 같은 방향으로 시선을 던져 같은 대상을 시계에 담고 있을 때 오즈의 작품에는 꼭 헤어짐이, 출발이, 죽음이 도입된다.
[...]이 숏이 가져오는 신선하며 강한 충격은 딸을 생각하는 부모의 감개에 보는 자가 공감하기 이전에 화면에 나타나 있지 않는 툇마루를 사이에 두고 외부와 내부가 서로 통한다는 점에서 오는 것이다. 시선과 그 대상이 연속되는 숏으로서 나타나 그 인과 관계가 너무나 명백할 때 오즈에게 있어서는 꼭 내러티브에 사건이 도입된다. 그것은 헤어짐이기도 하며, 죽음이기도 하고, 가족의 붕괴이기도 하다. 그 순간에 추상적인 밀폐 공간은 갑자기 터무니없이 열린 세계로 변모한다.-127쪽

[...] 따라서 모든 작품은 영화가 조건으로서 짊어진 절대적인 부자유로부터 눈을 돌리게끔 하기 위한 일시적인 위안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 관객이 따분해 하지 않는 작품은 존재하지 않는 문법에 따르듯이 찍힌 부자유한 영화이다. 또한 가장 자유스러운 영화는 전략적으로 그 부자유를 철저히 함으로써 영화 자체의 한계를 두드러지게 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오즈 야스지로는 더없이 자유로운 작가 가운데 하나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131쪽

[...] 영화인들로부터 시선의 어지러움이라 하여 경멸되는 아주 초보적인 기술적 실수를 그가 평생 고집한 것은 왜일까? [...] 그것이 류 치슈와 같이 적의가 없는 것이든, 하라 세츠코와 같이 우수를 자아내는 것이든, 상대의 눈동자를 정면에서 언제까지나 지켜 보는 일은 우선 없다. 우리들이 어떤 종류의 눈동자에 끌린다면 그것은 여기를 직시할 때가 아니라 무언가에 시선을 빼앗기는 순간이나, 그렇지 않다면 문득 시선을 비켜 눈을 내리뜨거나 하는 때임이 틀림없다. [...] 다음으로 거론되어야 하는 것은 영화 자체가 그 한계 때문에 날조하지 않으면 안되는 허구이다. 그것은 응시하는 두 사람의 눈동자를 같은 하나의 고정 화면에 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영화의 한계로부터 도출된다. 응시하는 두 사람을 나타내는데는 지금 말한 바와 같이 시선의 중심에 놓인 카메라를 180도 팬하든가, 역구도의 숏에 의해 두 개의 화면을 연속시키는 것밖에 없다. 그러나 어떤 것이든 교착交錯하는 시선의 공간적인 동시성은 시간적인 계기성에 대체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응시하는 두 개의 눈동자에 대하여 영화는 언제나 패배할 수 밖에 없다.-137쪽

오즈의 서정은 서로 마주 보는 것에서도 아니고, 시선의 대상이 된 것이 가질 수 있는 심리적 상징성에 의해서도 아닌, 그저 같은 하나의 것을 두 사람의 존재가 동시에 눈에 담는다는 몸짓 그 자체에 의해 형성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이미지에 종속되지 않는 동적인 서정이라고 불러야 한다.-141쪽

오즈는 친한 사람들이 결코 정면에서 마주 보는 일 없이 무언가에 기대어 시선을 평행하게 던지는 것을 비스듬히 뒤에서 찍는다. 그들은 등과 허리와 그리고 때로는 발로 공감을 표현한다. 오즈에게 있어서의 서정은 따라서 움직이려고도 하지 않는 등이 이 한없는 웅변함 보여줄 때 최고조에 달한다. 남자들의 우정에 있어서 바의 카운터가 특권적인 무대 장치가 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143쪽

[...] 이런 자세가 다다를 곳은 결국 만년의 오즈를 하나의 완성태로 상정하여 초기나 중기의 작품을 완벽함에 접근하기 위한 것, 필수이기는 하지만 대체로 무시하는 것이 가능한 과도기적인 단계로서 거기에 이의적인 가치밖에 인정하려 하지 않는 오만함이다. 그러나 그것이 '필름 체험'을 매개로 하여 산 것이든 '문장 체험'을 매개로 하여 산 것이든 간에 하나의 작가적인 생애를 불순과 순수, 미완성과 완성이라는 대립에 의해 계측할 수 있을까? 산다는 것은 마침내 완성되는 순간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갱신되는 현재, 즉 결코 균형에는 도달할 수 없는 존재의 적극적인 모순 그 자체가 아닐까?-20쪽

오즈 '작품'에서 사람을 당황하게 하고 겁을 주는 것은 더할 수 없이 희막하고 오히려 애매하다고 할 수 있는 세부가 돌연 농밀한 연결 상태에 의해 친밀한 유희를 연출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조롭고 기복이 부족한, 오히려 일상 세계의 범용하고 희박한 반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진정한 오즈적 필름 체험이 생생하게 파동하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84쪽

여자들의 성역으로서 내러티브적 기능을 완수하는 2층 방은 최종적으로는 특권적인 주인을 배제하고 공허한 장소밖에 되지 않도록 후기 오즈 '작품' 속에 위치 지어진다. 그리고 1층의 주인들은 그것이 선의에서 그랬든 조금의 악의를 담고 그랬든, 2층이 동굴 같은 공간이 되는 순간의 도래를 몽상하면서 생활하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93쪽

따라서 종종 문제되는 오즈적 '무無라는 것은, 종교적이며 형이상학적인 개념이 아니라 필름의 표층에 각인된 건축학적-형이상학적인 이미지인 것이다. 후기의 오즈가 촬영한 영화의 전부는 이 현재적인 '무'의 실현을 목표로 진행하는 생생한 현재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으며, 타계他界나 피안彼岸과는 전혀 무연의,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의 체험이다. 모든 것은 표층에 드러나 숨겨진 것은 하나도 있을 리 없다. 그것을 우선 리얼리즘이라고 부른다면, 영화가 오즈 이외의 장소에서 이런 리얼리즘을 만난 적은 이전에도 없었으며 또한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93쪽

그리고 '무'의 생산을 부정하기 어려운 현실로 보여 주는 것은 무인의 계단을 정면에서 찍은 거의 클로즈업에 가까운 화면이다. 그것은 집의 다른 부분에서 잔혹하게 격리된 고독한 계단이다. 이미 성역으로 불러들이는 것도, 거기로의 침입을 거부하는 것도 아닌, 기능을 상실한 계단. 불가시의 벽임을 거부하고, 단순한 건축한적인 세부로 환원된 계단. 일관되게 시계로부터 멀어져 가던 계단이 그 부재의 특권을 박탈당하고 계단으로서 필름의 표층으로 부상하는 순간, 그것은 광폭하기까지 한 현존의 형상에 의해 후기의 오즈 '작품'의 기반을 그대로 완전히 부정해 버린다. 그것은 '작품'이 그 한계점에 가 닿으려 하는 가혹한 순간이다.-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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