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넘어 함박눈
다나베 세이코 지음, 서혜영 옮김 / 포레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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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을 읽으며 나의 일본 작가 베스트 3인은 나쓰메 소세키/무라카미 하루키/다나베 세이코라고 정리하였다. 나쓰메 소세키의 글은 아름답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은 신비롭다. 다나베 세이코의 글은 멋지다. 


다나베 세이코가 일반적인 일본의 사소설 여류작가 쯤으로 치부될 수 없다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여성의 30대를 테마로 묶은 이 단편집을 보니 그녀의 저력이 더욱더 명료하고 깨끗하게 드러난다. 다나베 세이코가 주인공으로 삼는 여자들은 딱히 진취적이거나 멋진 여자들은 아니다. 오히려 통속적인 기준을 좇는, 약간은 속물적이고 약간은 이기적이고 약간은 멍청한 여자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런 여자 캐릭터들을 가지고 다나베 세이코가 그려내는 이야기는 전혀 통속적이지 않으며(오히려 모던하다고 할 만 하다) 적당한 유머를 담고 있되 절대 코미디로 흐르지는 않고(코미디로 흘러간 작가로 오쿠다 히데오가 있다) 한 편의 단편이 마무리 지어지는 순간엔 정말 뭐랄까 모든 음식을 다 하고 마지막 참기름 한 방울 딱 떨어뜨려 넣는 그런 명료함이 있달까. 삶의 진실이 더도말고 덜도말고 딱 한 방울 들어가 있어서 독자들이 가볍게 공감하고 위안받을 수 있는 그런 면이 있다. 그리고 여성의 30대라는 그 진부한 토픽을 가지고서도 가지각색으로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별별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건 가히 감동적인 수준이다. 똑똑한 여자부터 멍청한 여자까지 모두 살아있는 듯 그릴 수 있는 건 작가의 에고가 너무 강하지 않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부드러운 에고를 가지고서도 분명히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또 그것을 전달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대단하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이 세상이 30대 여성을 대상으로 삼아 만들어 낸 별 시덥잖은 컨텐츠가 얼마나 많은가. 남자주인공을 미남으로 캐스팅하여 진부한 캐릭터와 스토리를 얼버무리기라도 하면 다행일텐데 그렇지도 못한 망작이 난무하는 이 현실에 분노하며, 1970년대에 이런 작품을 써낸 다나베 세이코 할머니에게 깊은 감사를 드릴 뿐이다. 사랑합니다 다나베 세이코 여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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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꼬 2016-05-02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읽어볼래요. 모르고 있던 작가인데! (LAYLA님 소개가 더 멋진 걸 수도 있지만 그건 책을 읽고 확인하겠어요.)

LAYLA 2016-05-02 22:11   좋아요 0 | URL
네꼬님 제가 밑줄긋기 해 놨으니 먼저 보셔요. 네꼬님의 시간은 소중하니까요...!
 
서른 넘어 함박눈
다나베 세이코 지음, 서혜영 옮김 / 포레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미카코는 미혼의 아가씨들이 대체로 그러듯이 남자를 연인이나 약혼자 같은 대상으로밖에 보지 않았다. 이런 남자가 애인이라면 혹은 남편이라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는 것이 미카코 같은 아가씨들이 남자를 판단하는 기준이었다. 그러므로 거기에서 벗어나는 유부남이나 나이가 많은 사람이나 동성 등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벌레나 마찬가지로 생각되는 것이다. 우연히 그냥 인간일 뿐인 것이다.

남자 동료인 다카하타 씨와 나는 비교적 자주 대화를 나누는데 그는 젊어 보인다든가 미인이라든가 하는 건 관계 없다고 말한다.

"즉 둘 다 척하면 통하는, 머리가 재빨리 돌아가는 데가 있잖아요? 그런 건 남자로서는 감당이 안 되는 거거든."
"흐음"
"그런 걸 남자들은 할망구라고 불러요. 지나치게 똑똑한 여자는 모두 할망구. 그렇기 때문에 젊고 미인인 할망구도 있는 거예요."
"알 거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네요."
"똑똑한 건 젊은 축에 들지 않는다고 남자들은 생각하죠. 즉 남자들은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 여자를 젊다고 생각 안 해요. `아가씨`니 `할망구`니 하는 건 물리적 나이하고는 상관없다는 거예요."

나는 데쓰카 선배가 어린 남자를 데리고 이리저리 홍차 티백을 뒤흔들듯이 즐긴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다가 향이나 색이 더이상 우러나오지 않게 되면 가차 없이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는 것도 알고 있다. ...내 의견을 묻는다면, 열여덟이나 아홉, 스물도 채 안 된 어린 남자를 만나는 것은 데쓰카 선배가 로맨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도움이 되지 않는 것에 열을 올리는 건 몽상가나 하는 일이다. 내가 보기에 그 나이의 아이는 붕붕 떠 있는 것이 솜사탕 같아 보인다.

데쓰카 선배는 핸드백을 열고 종잇조각을 꺼냈다. 데쓰카 선배의 핸드백은 맞물림쇠가 고장 났다. 그런데도 새것을 사지 않고 벌써 몇 년째 들고 다닌다. 나는 데쓰카 선배 이상으로 그 핸드백에 익숙해서 데쓰카 선배 이상으로 그 핸드백에 친근감을 갖고 있다. 노처녀란, 그녀가 갖고 있는 물건이나 몸짓, 말투에 오래 익숙해지다보면 그런 것들로도 그녀의 독신생활이 얼마나 됐는지를 헤아리게 되는, 그런 데가 있다.

하나얏코는 기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마음이었다. 일의 재미라고 하는, 금단의 나무에서 딴 열매 맛을 이 아이는 알아버렸다. 결국 알아버렸다. 그건 여자의 행복에 반하는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결국 모르고 지나치는 것보다는 알고 사는 것이 더 행복한 거라고 하나얏코는 생각을 정리한다.

나는 로맨티스트라서 결혼이라는 건 `그래, 가는 거야!`하고 점프하는 것 같은 맛이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남녀 사이란 어느 쪽이 됐든 한 쪽이 억지로라도 끈을 꽉 묶어놓고 있지 않으면 자연히 풀려버리는 허망한 면이 있다.

"자네들은 세상물정을 너무 모르니 난처하군. 사람은, 남자와 여자는, 나이가 중요한 게 아니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이라는 게 있어. 그런 좋은 사이가 되면 나이도 주름도 어디론가 날아가버린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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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올리버 색스 지음, 조석현 옮김 / 알마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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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올리버 색스의 자서전을 먼저 읽고서 그의 커리어에 호기심이 생겨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순서로 따지자면 거꾸로 된 셈인데 사실 나에겐 그의 자서전이 훨씬 더 재미있고 흥미로웠던거 같다. 많은 독자들이 이 책에 표하는 찬사에 일정부분 동의하지만-환자를 바라보는 색스의 시선은 온화하고 따뜻하며 그것이 글로도 잘 느껴진다- 마치 신경증 환자의 사례집 같은 이 책은, 그 동안 조명되지 않았던 신경증 환자들을 세상의 양지로 끌어내어 세상에 알렸다는 의미를 빼고 나면 읽는 재미 자체는 그리 크지 않다. 내가 본디 의학이란 것에 큰 흥미가 없는 인간이기도 하고, 환자의 사례라는 게 기승전결 서사가 있는 것도 아니다 보니. 알게 모르게 세상엔 내가 모르던 세상이 있다는 걸 아는 재미는 있었지만 -이런 병도 있다니!- 역시나, 그 사례를 장장 400페이지 넘게 수십개 읽어나간다는 건 좀 지루한 일이었다. 넘 기대가 컸던 탓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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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들을 위한 외국어 사전
샤오루 궈 지음, 변용란 옮김 / 민음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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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A CONCISE CHINESE-ENGLISH DICTIONARY FOR LOVERS


한국말로 번역하기 까다로운 제목임은 분명하지만 번역자에게 미안하게도 이 책의 느낌은  원래의 제목이 아니고선 담아내기 힘들 것 같다. '연인들을 위한 외국어 사전'이란 번역본의 제목은 너무 감상적이고 로맨틱하게 보이며, 출판사에서 이런 오해를 은근히 기대하기라도 한 듯 표지 디자인마저 저리 로맨틱하게 만들어 놨다. 그래서 출판사의 의도대로 약간의 문학적 당분 보충을 기대하며 이 책을 펴 든 나는 초반부가 지나기도 전에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스물 둘의 중국인 아가씨가 영어를 배우기 위해 런던으로 가고, 영어가 능숙치 못해 모든 것이 답답하고, 그러던 차에 극장에서 만난 천사같은 남자와 데이트를 하게 되는데 첫 섹스 후 그 남자에게 나이를 묻자 "44" 라고 답하는 부분에서 말이다. 부드럽고 자상하고 다정하고 천사같이 묘사되던 그 남자의 모습은 갓 이국에 떨어져 극심하게 외로운, 연애경험이 없는 마치 '우리에서 도망쳐나온 판다 같은' 동양여자의 착각이자 환상이라는 것을 그 숫자로 독자들을 알게 되고 이 책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재빠르게 수정해서 인지하게 된다. 영화로 치자면 흔한 로맨틱 코미디일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하드코어 홍상수 영화였다는. 


외국인 연인을 사귄다는 것이 영화 속에서처럼 달콤한 일만은 아님을 이 책은 보여준다. 둘은 왜 더치페이를 하지 않느냐고 싸우고 화가 난 여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려 마오쩌둥 어록집을 꺼내어 읽는다. 찌질하고 구차하고 슬프고 그렇지만 진실한 연애가 바로 이 책에 담겨 있다. 마치 남의 구멍난 양말이나 때에 찌든 와이셔츠 깃을 볼 때처럼 못본척 눈 감고 싶은 그런 불편함이 있긴 했지만 마지막까지 솔직한 화자(작가)의 태도 때문에 읽어 나갈 수 있었다. 사실 실제의 연애란 이런 것일 테니까. 


극찬을 받을 대작은 아니지만 충분히 개성있는 작품인데 절판이라니 의외다. 개정판으로 다시 나올 예정인가? 작가의 근황을 찾아보니 꾸준히 책을 내고 있고 여러 언어로 번역되고 있으며 일 년치 스케줄이 국제적으로 짜여져 있다. 런던에서 리딩을 하고 로마에서 영화제에 참석을 하고 뭐 그런...작가의 솔직함에 아직 흥미가 남아 있기 때문에 아직 번역되지 않은 다른 작품들도 찾아봐야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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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2 1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올리버 색스 지음, 조석현 옮김 / 알마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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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우리는 다리나 눈을 잃으면 다리가 없고 눈이 없다는 사실을 의식한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면 그 사실 자체를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을 깨달을 자신이라는 존재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언어상실증 환자를 접하는 사람들이 자주 느끼는 일이지만, 그들에게는 거짓말을 해도 금방 들통 나고 만다. 언어상실증 환자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말을 듣고 속는 일이 없다. 그러나 이해 할 수 있는 것은 확실하게 파악한다. 그들은 언어가 갖는 표정을 간파한다. 종합적인 표정, 언어에 당연히 수반되는 표정을 느끼는 것이다.

중국인 신경과 의사인 디주에 왕에 따르면, 쇼스타코비치의 비밀이란 그의 왼쪽 뇌실 관자뿔 부분에 금속 파편인 탄환 부스러기가 있다는 것이다. 쇼스타코비치는 그것을 제거하는 것을 몹시 꺼렸던 것 같다.

파편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이면 반드시 음악이 들려온다고 그는 말했다. 그때마다 새로운 선율이 머릿속에 가득 차 그것을 작곡에 이용한 듯하다.

뢴트겐 검사 결과 쇼스타코비치의 머리가 움직이면 파편이 움직여서 관자엽의 음악 영역을 압박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따라서 몸을 기울이면 선율이 무한한게 흘렀고, 천재 쇼스타코비치는 그것을 작곡에 이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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