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아름다움 - 스물아홉 번의 탱고로 쓴 허구의 에세이
앤 카슨 지음, 민승남 옮김 / 한겨레출판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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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상처는 스스로 빛을 낸다고
외과의사들은 말한다.
집에 불이 다 꺼져 있어도
상처에서 나오는 빛으로
붕대를 감을 수 있다.

그 무엇에도 충실하지 못했던
내 남편. 그럼 나는 왜 소녀 시절부터 우편으로 이혼 판결을
받은 늦은 중년의 나이까지
그를 사랑했느냐고?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그건 비밀이랄 것도 없다.
나는 아름다움 때문에 그를 사랑했다고 말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다.
그가 가까이 온다면
다시 그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아름다움은 확신을 준다. 알다시피 아름다움은 섹스를 가능하게 한다.
아름다움은 섹스를 섹스이게 한다.

우리 사이엔 깊은 슬픔이 잇고 그 슬픔은 너무도 습관적이라 나는
그걸 사랑과 구분할 수 없어.

그의 편지가 대단히 시적이었다는 데는 동의한다. 그 편지들은 꽃가루처럼
내 삶 속으로 떨어져 얼룩을 남겼다.

삶에는 몇 가지 위험들이 있다. 사랑은 그중 하나다. 끔찍한 위험들.
레이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운명은 나의 미끼이고 미끼는 나의 운명이라고.
6월의 어느 날 저녁에.
이것이 내가 하고 싶은 충고다.
붙잡아라.

아름다움을 붙잡아라.

...당신 남편과 어떤 까무잡잡한 여자가
이른 오후에 술집에서 즐겨 만난다고 가정해보자.
사랑은 무조건적이다.
삶은 매우 조건적이다.
아내는 길 건녀편의 폐쇄형 베란다에 자리 잡는다.
까무잡잡한 여자가 손을 뻗어
무언가를 스며들게 하듯 남편의 관자놀이를 만지는 모습을 지켜본다.
남편이 여자를 향해
살짝 몸을 기울였다가 도로 펴는 모습을 지켜본다. 둘 다 진지하다.
그들의 진지함이 아내를 고문한다.
둘이 함께 진지해질 수 있다면, 관계가 깊어지는 것이다.
두 사람 사이의 탁자에는 광천수 한 병과
유리잔 두 개가 놓여 있다.
알코올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언제부터 이 청교도적인 새로운 취향을
갖게 된 걸까?
차가운 배 한 척이


아내의 마음속 어딘가의 항고에서 나와
평평한 잿빛 수평선을 향해 미끄러지고,

새 한 마리 숨결 하나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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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여행
다나베 세이코 지음, 신유희 옮김 / 북스토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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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다나베 세이코 할머니의 팬이 되면서 (예전부터도 은근한 팬이었지만 30대가 되어 진정 본격 팬이 되었다는 의미) 국내에 번역된 책이라도 다 구해서 읽어보자 싶어서 읽게 되었는데 개인적으로 다나베 세이코의 작품중 가장 별로였다.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한 세이코의 초기작이라 도대체 어떤 영문으로 아쿠타가와 상을? 이란 호기심을 잘 해결해주는 그런 글이었다. 그러니까, 다나베 세이코의 글은 엄숙함 진지함 격식 다 개나 줘 버려!라는 기개가 있으며, 한자를 수십 개 갖다붙여도 전하지 못할 인생의 진수 같은 걸 쉬운 히라가나로 줄줄 써버린다는 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글들인데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은 내가 좋아하는 다나베 세이코라고는 믿을수도 없게 한자단어를 많이 쓴 딱딱한 문체이며 소설도 뭔가 좀 '있어보이는'풍의 음울하고 인위적인 느낌이 있다. 이런 점 때문에 아쿠타가와를 수상했구나 하는 것이 팍 느껴진다. 그러니, 다나베 세이코의 쾌할 발랄 신랄한 작품들이 좋아서 계속 읽어나가고 있는 독자들이라면 굳이 이 책에 목 매달 필요는 없겠다. 정 볼 게 없을 때를 위해 잠시 뒤로 미뤄놔도 좋을 듯. 다나베 세이코 본인 역시 아쿠타가와 상 수상에 대해, 시간 지나고 나니 아쿠타가와 상 수상자라고 불러주지도 않고 알게 모르게 소외되었다는 말을 하는데 뭐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그 이유 너무나 잘 알겠구요? 그런 고상한 무리들이 우리 다나베 세이코님을 부르지 않아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다나베 세이코가 수월하게 작품 활동을 시작하는 디딤돌이 되어준 점에는 아쿠타가와 상에게 쌩큐지만 그 이상은 더 필요없다. 그런 엄숙함 따위 필요없어.어쩌면 이 책은 다나베 세이코 팬들에겐 일종의 리트머스가 될 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고 다나베 세이코를 더 사랑하게 된다면 진짜 팬이다. 별로인 글까지 품는 대단한 팬심이란 의미가 아니고, 이런 글로 시작을 하고 대단한 상을 수상하기까지 했음에도, 문학계의 시선이나 조롱에 개의치 않고 새가 새장을 벗어나 날아가듯 옛것은 버리고 자신만의 글을 자유롭게 써나간 그녀의 모습에 감동받게 된다는 점에서. 별로인 책을 읽고도 이렇게 감동받은 건 처음인거 같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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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2 1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2-31 0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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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후쿠가 보기에, 세상에는 크게 두 종류의 술꾼이 있다. 하나는 자신에게 뭔가를 보태기 위해 술을 마셔야 하는 사람들이고, 또하나는 자신에게서 뭔가를 지우기 위해 술을 마셔야 하는 사람들이다.

"상처받았지. 조금은?" 아내는 그에게 물었다.
"나도 인간이니까 상처받을 일에는 상처받아." 기노는 대답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적어도 반은 거짓말이다. 나는 상처받아야 할 때 충분히 상처받지 않았다. 고 기노는 인정했다. 진짜 아픔을 느껴야 할 때 나는 결정적인 감각을 억눌러버렸다. 통절함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진실과 정면으로 맞서기를 회피하고, 그 결과 이렇게 알맹이 없이 텅 빈 마음을 떠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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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여행
다나베 세이코 지음, 신유희 옮김 / 북스토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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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이란 돈과 같은 거야.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되면 마구 쓰고 싶어지는 법이지."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는 직장보다 출퇴근길에 마주치는 사람들의 무감동한 얼굴, 까닭 없는 악의에 찬 표정들에서 피로를 느꼈다.

루리 세대의 여자들은 20대 초반만 해도 기모노를 입고 다녔다. 전쟁이 끝난 행복을 곱씹기 위해...

즐거운 모임일수록 길게 가져가면 안된다. 잔치는 끝이 나기 때문에 잔치인 것이다.

"내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인간의 행복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점을 규명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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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의 목적
다나베 세이코 지음, 조찬희 옮김 / 단숨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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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옛날 느낌이 돌아오기 시작한다. 냄새가 밴 손수건을 서랍장 깊숙이 넣어두면 냄새가 안 나지만, 꺼내서 흔들거나 문지르거나 털거나 하면 냄새가 다시 나기 시작하는 것과 비슷하다.

가게에서 서너 건물 더 가면 나오는 `따끈따끈 도시락`집에서 메뉴판을 보면서 메뉴를 고르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야마무라, 집에 그런 거 가져가서 먹을 거면 내가 밥 사줄게. 갈래?"
라고 말했더니 또 입술이 오자 모양으로 벌어지며
"정말요...?"
라고 말하며 눈이 휘둥그레진다. 내가 알고 지내는 올드미스들은 젊은 남자를 꼬일 때는 무조건 먹는 거야, 라고 말햇다. 젊은 스님을 애인으로 둔 애는 기쓰네 우동 여섯 그릇이면 됐다고 말했고, 자위대 대원을 애인으로 둔 애는 처음에 "햄버거 드실래요?"로 낚았다고 했다. 그들에 비하면 나는 계절 요리니까 나름 고상한 편이다.

어차피 나는 그 정도로 말발이 좋지도 않았고, 게다가 솔직히 말해서 지식도 부족했다. 경험이 많은 것도 아니고 횟수가 많지도 않았다. 나는 남자가 먼저 "옳지, 옳지. 살결 참 곱다. 몸매도 유연하고...그럼 이렇게 한 번 해볼까" 라며 리드해주는게 좋지, 내가 먼저 "너 몸이 아주 탄탄하네. 그래, 그래. 잘한다. 옳지"라고 말하긴 싫다. 그럴 수 있을 정도로 경험이 많지 않아서라기 보다는, 나에겐 아직 그 정도의 `기량이 없다`라고 보는 편이 맞을 거다. `기량`이란 단어는 고승의 담력이나 깨달음, 정권 장악을 목표로 한 정치가에게만 쓰는 것이 아니다. 침대 위에서 상대를 리드할 때에도 그에 못지 않은 기량이 필요하다.

"자네들, 미모랑 건강도 마찬가지야."
전무는 우리에게 말한다.
"없는 미모에, 없는 건강이겠지만..."
"없는미모라니요. 너무해요."
우리가 항의하면 전무는 당황해서
"아, 그게 아니라 미모도 한도가 있다고 할까. 이건 어쩔 수 없이 신에게 받은 것으로만 승부를 봐야 해. 그걸 차례차례 잘 변통해서 쓰는 수밖에 없어. 적은 자본으로 큰걸 얻는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거든. 건강도 마찬가지. 1년 건강했다면 그 다음 1년도 버틸 수 있어. 그 건강함으로 어떻게든 1년 더 버틸 수 있고, 이런 식으로 어찌어찌 살아가는 거라고."

우메모토는 참 칭찬도 잘한다. 정말 감동했다는 듯 말한다. 나도 서른한 살이다. 나이를 겉으로만 먹은 게 아니라고. 남자가 진심으로 감동한 건지 그냥 하는 말인지 후각으로 구별해낼 수 있는 연륜 있는 여자란 말이야.

나는 우메모토가 바지런하게 요리하는 모습을 보고 `어머, 쓸모있는 남자네`라며 이런 남자가 내 남편이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시자키 규타처럼 물건 만드는 취미가 있는 사람을 보니 `참 쓸모 있는 존재야`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요즘에는 남자도 돈을 잘 번다는 것, 한 가지만으로는 세일즈 포인트가 될 수 없다. 보금자리를 꾸릴 능력 외에도 뭔가 한 두 가지 장점이 더 있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신랑감으로서 메리트가 없을 것이다. 신부 수업이란 것이 있듯이, 신랑 수업이란 것도 있으면 좋지 않을까? 남자도 요리, 수공예, 뜨개질, 육아 등 각자 특기를 가진다면 더 빨리 결혼할 수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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