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수지 박람강기 프로젝트 8
모리 히로시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7년 1월
평점 :
절판


신인은 좌우지간 좋은 작품을 쉴 새 없이 발표하는 수밖에 없다. 지금 발표한 작품이 다음 작품에 대한 최고의 홍보가 된다. 이것 말고는 홍보할 길이 없다고 봐도 좋다. 따라서 첫 작업 때는 의뢰한 측이 기대한 것보다 더 나은 결과물을 건네줘야 한다. 가격에 걸맞지 않은 고품질의 작품을 만들어 수지가 맞지 않는다고 느껴지더라도 그것을 홍보비라고 생각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많은 작품을 생산할 것, 그리고 마감을 지킬 것. 1년에 한 작품을 쓰는 식으로 느긋하게 창작해서는 설사 그 한 작품이 히트하더라도 금세 잊히고 말 것이다.

나는 내 작품이 만화로 제작되든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든 드라마로 제작되든 전혀 참견하지 않는다. 내가 갖고 있던 이미지와 달라지더라도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미지가 다르기 때문에 재미있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정도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형편없는 작품으로 제작되었다고 해도 원작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원작은 더 재미있어라고 수군거리며 홍보해 줄지도 모른다.

데뷔작이 20년을 두고 꾸준히 팔리는 것은 이 작품이 특별히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모리 히로시가 꾸준히 신작을 내 왔기 때문이다. 신작을 꾸준히 세상에 내보내면 서점 매대에 항상 신작이 진열되고 매체나 광고에도 꾸준히 이름이 등장한다. 신작을 읽어 보았지만 신통치 않았다. 그렇다면 잘 알려진 작품으로 하나 더 읽어 볼까, 하고 생각하는 독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작품 하나를 출간하고 그것이 충분히 팔릴 때까지 기다리는 태도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역시 신작을 꾸준히 내는 것이 작가라는 직업의 기본이라고 해도 좋다.

출판이라는 영역의 문턱은 예전보다 훨씬 낮아지고 있지만, 많이 팔기는 그만큼 힘들어지고 있다. 책을 냈다는 사실만으로 기뻐하고 있을 수는 없는 시절이다. 판매 부수를 정확히 파악하고 늘려 가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를 작가 스스로 궁리하여 전략을 세워야 한다. 출판사는 거기까지 생각해 주지 않는다. 그 사람보다 더 잘 팔리는 작가를 찾아내는 쪽이 더 쉽기 때문이다.

모리 히로시의 작품이 영상화에 어울리지 않는 까닭은, 소설이라는 마이너 영역이기에 가능한 거라고 볼 수 있는 금기적 전개가 많기 때문이다. 가령 윤리에 반하는 일,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일, 나아가 영문을 모르겠다, 종잡을 수 없는 부조리 괴이 영역이라도 소설이라면 가능하다. 마이너이기 때문에 자유로운 것이다. 마이너이기에 그 새로움을 알아봐 줄 수 있고 일정한 팬이 따라 준다. 만화에서도 잡지에 따라서는 이것이 가능하다. 그러니 티브이나 영화는 더 많은 대중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그 튀는 요소를 없애지 않을 수 없다. 누구에게나 광범위하게 사랑받는 내용, 보다 많은 사람이 납득할 만한 내용, 나아가 어디서도 불만이 나오기 힘든 내용으로 만들지 않으면 상품으로서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성공한 작가들) 대개 그런 사치를 부리지 않는다.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대상에 돈을 쏘당부을 뿐, 일반적인 사치를 부릴 필요를 못 느끼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것이 없는 사람은 늘 남을 부러워한다. 그래서 목돈이 들어오면 나도 그런 호사를 누리고 싶다, 즉 남들에게 부러움을 사고 싶다는 소망을 갖게 된다. 그러나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아는 조건이 그를 성공으로 이끄는 예가 많다. 그런 논리로 보자면 남을 부러워하는 사람은 성공하기 힘들다.

소설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소설을 써서 자비로 출판하면 된다. 그러면 소설가가 될 수 있다. 기술적으로 어려운 것은 없다. 인터넷으로 잠깐만 알아보면 된다. 그래서는 프로 소설가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 하는 의견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프로 소설가란 무엇인가 라는 개념이 문제가 된다. 집필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느냐의 여부인가? 아니면 서점에서 책이 팔리고 있는 사람을 말할까?

이렇게 개념을 운운하는 것은 참으로 당찮은 짓이다. 소설가는 본인이 자처하면 소설가인 것이다. 명함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자기 직함 앞에 ‘프로‘라는 말을 덧붙이는 작가는 없다. 그것은 ‘일류‘라는 말을 덧붙이는 사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터무니없는 짓이기 때문이다.

소설가 지망생이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은 첫 작품을 발표한 뒤 그 반응을 기다리며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다. 일단 투고했으면 반응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등의 한가로운 짓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 인터넷에 공개한 경우라도 반응 같은 걸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보다는 즉시 다음 작품을 집필해야 한다. 그것이 발표작에 대한최선의 지원 사격이기도 하다.

발표 후 다소 반응은 있을 것이다. 그것에 일희일비해서는 안된다. 부정적 반응에 낙담하지 않는 것이야 당연하지만, 긍정적 반응에 기고만장하는 것이 가장 나쁘다. 몇몇에게 칭찬을 받은들 그게 무슨 대수인가. 기분은 좋아지겠지만 얼른 잊어야 한다. 이런 조절을 못하면 프로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게 좋다.

분명히 말하지만 글은 누구나 쓸 수 있다. 초등학교 고학년만 돼도 글을 맛나게 쓸 수 있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아마 조만간 초등학생 작가도 등장하리라. 다만 몇 개 작품을 연달아 쓸 수 있는 사람은 글 좀 쓴다는 사람 중에서도 열에 하나 정도다. 데뷔한 뒤 10년 동안 줄기차게 쓸 수 있는 사람은 더욱 적다. 20년쯤 지나면 데뷔한 사람가운데 9할 이상이 사라진다 살아남는 것도 나름 혹독한 것이다.

작가로 살다 보면 도무지 글을 쓸 수 없는 상황에 빠진다고 한다. 나는 그런 걱정을 해 본 적이 없고 슬럼프를 겪어 본 적도 없다. 왜냐하면 나는 소설 집필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밥벌이니까 마지못해 쓰고 있을 뿐이다. 소설 읽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이 일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을뿐더라 남들한테 자랑할 만한 직업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슬럼프에 빠지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라고 짐작한다. 좋아하니까 쓴다는 사람은 려정이 식었을 때 슬럼프에 빠진다. 자랑할 만한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비ㅏㄴ과 비난을 받으면 의욕으 ㄹ잃는다. 그러니까 그런 감정적 동기만으로 버티면 언젠가 감정 때문에 글을 못 쓰게 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일이니까 쓴다는 사람은 슬럼프를 모른다. 글을 쓰면 쓴 만큼 돈을 벌 수 있다. 마음은 배반하지만 돈은 배반하지 않는다고나 할까. 수전노 같은 말본새로 들리겠지만, 정직하게 하는 말이다. 일이라고 생각하면 누구나 수전노가 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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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ainted Veil (Paperback)
서머셋 모옴 지음 / Vintage / 2006년 11월
평점 :
품절


못생긴 남자를 사랑할 수 있을까. 남자로서 매력이 없는 남자를 사랑할 수 있을까. 요즘이야 여성에 대한 상품화.대상화의 반발로 남성의 외모도 일부러 꼬집는 '미러링'이 흔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여자가 남자의 외모를 따지는 건 경박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젊은 여자들 사이에선 '잘 생긴게 최고야' 란 말이 유행어처럼 떠돌지만 그런 소리 하다가 엄마에게 등짝 맞은 젊은 여자들 또한 얼마나 많은가. 


서머싯 몸의 인생의 베일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여주인공 키티의 인간적.내적 성장에 초첨을 맞춘 작품이다. 아름다운 외모를 타고난 키티는 잘 나가는 남자를 만나 부모의 기를 세워줄것이란 기대를 받으며 성장하지만 정작 결혼 적령기가 되자 적당한 신랑감이 나타나지 않는다. 사교 시즌은 철마다 해마다 속절없이 지나가고 결국 당시로선 빼도박도 못할 노처녀인 스물다섯이 된 키티는 자신보다 못 생겼단 이유로 부모의 사랑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둔한 여동생이 조건 좋은 남자를 만나 약혼하는 것을 지켜보게 되고, 굴욕감을 견디지 못해 아무 남자라도 만나 결혼해야겠다는 절박한 마음이 된다. 이때 월터가 그녀에게 청혼한다. 월터는 홍콩에서 근무하는 정부소속의 세균학자로 키티와 엇비슷한 키에 육체적인 매력으로 따진다면 그리 끌릴 부분이 없는 남자이다. 성격적인 면에서도 말이 없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으며, 항상 주변과 자기자신을 의식하는 약간은 불편한 남자이다. 하지만 키티는 그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런던에서 여동생의 호화로운 결혼식을 보느니 어서 홍콩으로 떠나는게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월터는 키티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그리고 키티는 그의 사랑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의 사랑을 받기만 한다는 것에 별 죄책감도 없다. 태어나서 한 번도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이 없기에 월터가 주는 사랑의 깊이를 헤아리지 못한다. 키티에 대한 월터의 사랑은 부인에게 다정한 말투로 말을 걸고 자기 전 따뜻한 눈길로 키스를 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번잡한 홍콩의 길거리에서 부인과 마주치면 자신의 실크햇을 벗어 정중히 인사를 할 정도로 부인을 사랑한다. 실크햇을 벗어 인사를 했다는 한 문장의 묘사는 월터의 성격과 월터의 사랑을 응축하여 보여준다. 세상 어느 남편이 그리 극진히, 정중히 아내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겠는가.


그리고 키티는 건장한 몸에 잘생긴 외모를 자랑하는 홍콩 총독부 차관 찰리와 불륜에 빠진다. 불꽃튀는 남녀간의 사랑은 처음 경험하는지라 키티에겐 새로운 인생인것만 같다. 그리고 불륜남 찰리에 대한 자신의 욕망이 커질수록, 자신의 남편인 월터에게 죄책감을 느끼기 보다는 오히려 약간이 경멸감을 느끼게 된다. 지금까지야 그저 자신을 극진히 대하는 약간 불편한 남편이었지만, 불륜에 빠져 사랑의 원리를 알고나니 -더 사랑하는 자가 약자라는- 자신을 더 사랑하는 월터는 언제든 자신의 뜻대로 휘두를 수 있다는 오만함에 빠진 것이다. 서사에 있어서 중요한 묘사는 아니지만 이런 묘사를 볼 때 서머싯 몸의 대단함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불륜중인 아내가 오히려 남편에게 의기양양해질 수 있는 이런 심리를 세상 누가 꿰뚫어 볼 수 있을까? 

 

키티의 불륜이 발각되었을 때 키티는 월터에게 이혼을 요구한다. 유부남인 찰리 또한 가정을 버리고 자신에게 와 줄 것이란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월터는 그런 순진한 생각을 하는 키티의 멍청함에 질려 버린다. 이 부분에서 명대사가 나온다. 번역서를 읽을 때 밑줄긋기를 해 두었는데 원서로 다시 읽어도 이 부분워 파워풀함은 정말 대단한다.


 "나는 당신에 대해 환상이 없어. 나는 당신이 어리석고 경박한 데다 머리가 텅 비었다는 걸 알고 있었어. 하지만 당신을 사랑했어. 당신의 목적과 이상이 쓸데없고 진부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당신을 사랑했어. 당신이 이류라는 것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당신을 사랑했어. 당신이 기뻐하지 않는 것에 나도 기뻐하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내가 무지하지 않다는 걸, 천박하지 않다는 걸, 남의 험담을 일삼지 않는다는 걸, 그리고 멍청하지 않다는 걸 당신에게 숨기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생각하면 한 편의 코미디야. 당신이 지성에 얼마나 겁을 먹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도 당신이 아는 다른 남자들처럼 당신에게 바보처럼 보이려고 별 짓을 다했어. 당신이 나와 결혼한 건 편해지기 위해서라는 걸 아니까. 그래도 나는 당신을 사랑했기 때문에 개의치 않았어. 내가 아는 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사랑에 보답받지 못하면 불만을 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어. 당신이 나를 사랑해 주길 기대하지도 않았고 당신이 그래야 할 어떤 이유도 찾지 않았어. 내 자신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으니까. 당신을 사랑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고 때때로 당신이 나로 인해 행복하거나 당신에게서 유쾌한 애정의 눈빛을 느꼈을 때 황홀했어. 나는 내 사랑으로 당신을 지루하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어. 나는 그걸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당신이 내 애정에 참을성을 잃기 시작하는 징조가 보이는지 언제나 조심했어. 대부분의 남편들이 권리로 여기는 걸 나는 호의로 받아들였어."  


물론 불륜남 찰리는 자신의 가정을 버리지 않는다. 키티는 깊은 절망을 느낀고 월터가 콜레라가 유행하고 있는 메이 탄 푸 라는 곳에 지원하자 딸려가는 신세가 된다. 키티는 월터가 불륜에 대한 앙갚음으로 자신을 죽이고자 메이 탄 푸로 데려가는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 소설은 메이 탄 푸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키티의 내적인 변화를 통해 클라이막스로 치닫는다. 


영화화된 인생의 베일에선 메이 탄 푸 에서의 생활을 꽤나 로맨틱하게 그려낸다.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서로를 적대시 하던 월터와 키티는 어느 시점에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게 되며, 서로의 장점을 깨닫고 다시금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하지만 원작 소설에는 그런 로맨틱한 암시가 전혀 없다. 월터는 꽂꽂한 자신의 성품 그대로 키티를 절대 용서하지 못하고 그녀를 무시한다. 키티는 그런 그에게 연민을 느끼지만 이는 남자로서 그를 사랑하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월터가 인간으로서 얼마나 좋은 자질들을 지녔는지, 자신에게 준 그의 사랑이 얼마나 진실한 것이었는지 키티는 깨닫고 인간적으로 성숙해가지만 그렇다 하여도 월터를 남자로서 다시 사랑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메이 탄 푸에서 수많은 고통을 겪고 다시 홍콩으로 돌아온 키티는 이번에는 다른 시각으로 불륜남 찰리를 보게 된다. 자신의 남편에 비해 이 남자는 얼마나 천박하고 품위 없는 인간인가. 다시 보니 나이가 들고 살이 찐 이 남자에게 내가 끌렸었다는게, 매달렸다는게 믿을 수가 없다. 키티는 메이탄푸에서의 경험이 자신을 변화시켰다고 믿는다. 자신이 찰리와 단 둘이 있게 되자 다시 그의 육체적 매력에 끌려 관계를 맺기 전까지는 말이다. 수많은 고통과 깨달음 뒤에도 그녀는 다시 잘생긴 남자에게 끌리고 만 것이다. 밀려오는 자기혐오 속에 키티는 다시 또 한 번 내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키티가 자신의 남편이 얼마나 진실한 사람이었는지 깨달은 이후에도 다시 불륜남과 동침한다는 설정은 무척 충격적이고 파격적인데 책을 번역판으로 처음 읽을 때는 그것이 '인간의 나약함'에 대한 묘사라 생각하였다. 자신의 과오를 알면서도 또 다시 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인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원서로 재독을 하니 음 이게 나약함인가? 싶었다. 이번에 개인적으로 더 다가온 것은 인간의 이상적 자질에 대한 존경은 성적인 매력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며 이는 인간의 이성으로 제어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란 것이다. 못생긴 남자가 아무리 인품이 고고하고 똑똑하고 성숙하다 하여도 내가 당장 자고 싶은 건 천박한 구리빛 피부의 몸 좋은 남자다. 키티가 내적인 경박함을 극복하였음에도 또 멍청한 짓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지적인 성장과 육체적 끌림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 서머싯 몸이 은근슬쩍 담고자 했던 그의 통찰이 아니었을지. 물론 우리는 인간이기에 도덕과 규범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키티가 자신을 자책하는 묘사도 분명 있지만, 그럼에도 키티가 한 걸음 더 독립적인 인간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서머싯 몸이 하고자 했던 말을 짐작해 볼 뿐이다.  


내가 요즘 진절머리 내는 예술 작품은 여자 인생 갈아서 만드는 예술작품이다. 여자 인생 망치는 내용으로 인생에 대한 교훈을 전달하려는 작품들을 보면 그 진부함과 폭력성에 넌더리가 날 지경인데 역시나 서머싯 몸은 레베루가 다르다. 그의 주인공은 세상의 시선으로 보면 꼬인 인생일지 모르나 오히려 인생이 꼬일수록 인간으로서의 성숙함이 더해가고, 여자라는 것 때문에 그녀가 얻는 인생의 교훈이 제한되지도 않는다. 키티가 저 징글징글한 사건들을 통해 얻은 교훈이 고작 '남자는 역시 외모보단 능력이군' 정도였으면 지금까지 고전으로 내려오지 않았을 터. "여자가 남자에게 끌리지 않는 건 매력이 없는 남자의 탓이죠." 이런 조의 대사도 있었는데 이것도 참 기억에 남는다. 보통의 사고방식, 시대의 한계에 갖힌 작가였다면 저런 대사를 써내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서머싯 몸의 작품은 몇몇 대표작만 번역이 되어 있는데 단편선 등 더 많은 작품이 번역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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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2-14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 읽고 나서 영화도 보고 싶었는데 아직도 못보고 있네요.
리뷰 잘 보고 갑니다.

LAYLA 2017-02-15 02:36   좋아요 0 | URL
저는 번역본->영화->원서 순으로 보았고 약 5년의 시간에 걸쳐서 보았는데 영화와 소설은 다른 작품같은 느낌이고...영화라는 장르의 특성상 아무래도 달달함을 추가할수밖에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영화에선 남주인공이 꽤나 잘생기고 키도 훤칠해서 ‘저런 남자를 왜 사랑하지 않는단 말이냐!‘ 이런 잡생각도 들고 그렇습니다. 찰리는 반면 너무 못생겼구요 흑흑 어쨌든 영화도 재미있으니 시간되실때 한 번 보셔요^^
 
The Painted Veil (Paperback)
서머셋 모옴 지음 / Vintage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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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you know, my dear child, that one can not find peace in work or in pleasure, in the world or in a convent, but only in one‘s soul.

some of us look for the way in opium and some in God, some of us in whisky and some in love. It is all the same way and it leads nowhi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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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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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릴 땐 어른이 되는 것은 무언가를 얻는 과정이라 생각했다. 돈, 직업, 배우자, 가정 같은 유무형의 것을 얻으며 홀로 떨어진 이 세상에서 자신의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이라고. 하지만 서른 언저리가 되어 보니 사람들은 하나를 얻는 만큼 다른 하나를 내어주는 것 같았다. 가령 예를 들어 안정적인 일자리와 매끈하게 사람을 대하는 '어른스러운' 태도를 얻는다면 삶에 대한 낭만적 전망이나 일상에서의 적극성은 조금 잃어버린다던지 하는 식으로. 그나마 인생과 그런 주고받는 거래라도 하면 다행일 것이다. 서른을 지나치자 거래라고 말하기도 안타까운, 더이상 돌이킬 수 없이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이라면 그런 경험을 통해서라도 무엇을 배울 수 있다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제자리란 애초에 없었고 우리의 인생은 앞의 인생이 유기적으로 이어져 흘러갈 뿐이다. 쓰러져 넘어가는 도미노 블럭들처럼. 돌이킬 수 없다. 


사실 인생의 상실 혹은 영혼의 훼손 같은 개념은 20세기 개인들이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경험하게 된 개념일수도 있다. 이전 시대에도 사람들은 상처를 받았을 테지만 애초에 그들은 인생에 대해 기대하는 바가 적었고 그들의 상실은 20세기 사람들의 상실과는 분명 다른 것이었을테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상실과 훼손의 대중화가 이루어진 건 20세기라고 봐야 할 텐데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 주제를 파고들어 상실이란 무엇인지 인간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그 이후 인간의 삶은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이야기한다. 인생에는 물때가 있고 한 번 지나간 물때는 돌아오지 않는답니다.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인생의 시기는 극히 짧고 한정되어 있습니다. 같은, 인생은 당신을 기다려 주지 않고 또 그렇다고 해서 지금 주어진 젊음과 청춘을 살아가는 것 또한 딱히 당신의 의지대로 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 잔혹한 이야기이다. 차가운 진실이다. 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온화한 태도가 그가 이야기하는 진실을 독자들이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만든다. 그가 자신이 소설을 쓰는 이유가 인간의 존엄에 빛을 비추기 위해서라 말한 적이 있는데 그런 그의 믿음이 글의 행간에서 느껴져서이리라. 우리는 많은 것을 잃어가며 살아가지만 그것이 아프고 괴롭다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다시 또 하루 하루를 차곡차곡 살아가야 합니다. 하는, 하루키의 인생론은 현대인들에게 성경보다 더 큰 위안이 된다. 

이 소설은 하루키가 40대 초반쯤에 쓴 소설 같은데 40대라면 30대의 방황과 상실을 자신의 글로 구체화시켜 소설이란 무형의 예술물로 빚어낼 수 있는 최적의 시기인것 같다. 조금 힘이 넘치긴 한다. 상실의 경험이 아직 너무도 강하게 남아있을테니까. 그래서 좋은 소설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직설적인 면이 많지만 또 그 나이대엔 그 나이대에만 쓸 수 있는 이야기가 있는 법이니까. 서사 자체는 그런 그의 에너지 넘치는 직설성이 조금 아쉬웠지만 문장은 지금껏 읽은 그의 소설 중 가장 아름다웠던 것 같다. 연약한 인간의 성장과 상실 방황 그리고 고뇌까지 그만의 깔끔한 문장들로 차분히 그려진다. 작가의 힘이다. 상실을 찌질하게 그리지 않아서 상업적인 성공으로 이어진 것일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해본다. 어쨌든 아름다운건 좋은 것이다. 차가운 진실도 은유로 이야기 하는 판에 꾸질꾸질한 찌질함까지 굳이 그려낼 이유가 무언가. 세련되고 아름답고 부드럽고 따뜻한. 그가 괜히 세기의 작가가 된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부디 철저한 건강관리로 오래오래 현대인들에게 위안을 건네주길 바랄뿐이다.


* 리뷰의 제목은 살며시 찌그러진 담배라는 표현이 소설에서 나와 마음에 들어 달아본 것이다. 현실의 우리 인생은 살며시 찌그러진 담배보다는 거칠게 구겨져 발에 차이는 알루미늄 캔에 가까운 것이겠지만 최소한 하루키의 소설 속 우리는 살며시 찌그러진 담배처럼 상처받는다. 그것이 좋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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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7-02-02 0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보니 갑자기 작가들이 딱 지금 저의 나이에 쓴 책을 몇 권 찾아서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지 궁금해졌습니다

LAYLA 2017-02-02 23:07   좋아요 1 | URL
오 재미있습니다^^ 그렇게 읽어보고..그 작가가 나이가 들어 어떻게 변했나 보는 것도 재미있을거 같아요. 하루키의 이 작품에 대한 평은 아무래도 그가 나이가 들수록 같은 메시지를 더 완성도 높게 풀어내었다는 점에서 후하게 줄 수밖에 없었거든요. 조금 서툰 시작이었지만 앞으로 갈 길에 대한 방향성을 설정했다는 점에서요^^

뷰리풀말미잘 2017-02-06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섯 번째 줄 까지 저의 또 다른 자아가 쓴 것 같았어요. ‘와, 이거 내 느낌인데’. 얼마 전 오래된 친구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제가 ‘소울’을 잃어버렸다며 한탄했습니다. 아마도 ‘안정적인 일자리와 매끈하게 어른스러운 태도’와 바꾼 것이겠죠. 사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런데 가끔 견딜 수 없이 답답해요.

LAYLA 2017-02-07 00:53   좋아요 0 | URL
어제 한 유명인이 페이스북에 ‘세상에 진부한 사람이 너무 많다. 진부하지 않은 사람을 찾을수가 없다.‘란 말을 써놨던데 너무 맞는 말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의 인생에 대해 진부하다는 표현을 다는 것이 잔인하고 예의없는 일이라 생각해 차마 그런 표현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무의식으론 진부한 세상과 진부한 사람들에게 저 역시 너무도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던 거 같아요. 물론 가장 큰 문제는 진부한 저 자신이구요 ㅋㅋㅋ 미잘님을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 미잘님의 소울이 글로도 느껴지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어서 저로서 영광이구요 ㅋㅋㅋ 미잘님은 어른스러운 태도도 퍽 잘 어울리실거 같아요. 소울이 있는 사람도 좋지만 멋진 어른 잘 나이든 사람도 멋지니까요.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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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는 시마모토와 만나지 않게 된 후에도 언제나 그녀를 그립게 떠올렸다. 사춘기라는 혼란으로 가득 찬 안타까운 기간 동안 나는 몇 번이나 그 따뜻한 기억으로 격려받았고 치유받곤 했다. 그리고 나는 오랜 동안 그녀에게 내 마음속의 특별한 부분을 열어두었던 것 같다. 마치 레스토랑의 구석진 조영한 자리에 예약석이라는 팻말을 살며시 세워놓듯이 나는 그녀를 위하여 그 부분만은 남겨두었다.

필요한 것은 작은 일들의 축적이다. 단순한 말이나 약속뿐만이 아니라 작고 구체적인 사실을 하나하나 정성껏 쌓아가는 것으로 우리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봐, 세월이라는 건 말이지, 사람을 다양한 모습으로 바꿔놓는다고. 그때 너랑 이즈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난 몰라. 하지만 설사 무슨 일이 있었다 해도, 그건 네 탓이 아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든 그런 경험은 하게 마련이지. 내게도 있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그건. 누군가의 인생이라는 건, 결국 그 누군가의 인생인 거야. 네가 그 누군가를 대신해서 책임을 질 수는 없는 거라고. 여기는 사막 같은 곳이고, 우리는 모두 거기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는 거야. 초등학교 때 월트 디즈니의 사막은 살아 있다라는 영화 본 적 있지? 그거랑 마찬가지야. 우리가 사는 세계는 그 영화와 마찬가지 인거야. 비가 내리면 꽃이 피고, 비가 내리지 않으면 꽃은 시들어버린다고. 벌레는 도마뱀에게 잡아먹히고, 도마뱀은 새에게 먹히지. 그러다 언젠가는 모두 죽지. 죽고 나서 텅 비게 되는 거라고. 한 세대가 죽으면 다음 세대가 그 자리를 대신하지. 그게 세상사의 이치야. 모두들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지. 죽는 방법도 제각기 다르고. 하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남는 건 사막뿐이지. 정말로 살아 있는 것은 사막뿐이라고.

나는 딱히 복장에 신경을 쓰는 편은 아니다. 필요 이상으로 옷에 돈을 들이는 것은 멍청한 짓이라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일상생활을 하기에는 청바지와 스웨터만 있으면 충분했다. 하지만 내게는 나름의 작은 철학이 있었다. 가게의 경영자라면 자기 가게에 오는 손님들이 되도록이면 이런 차림을 하고 와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차림을 본인 스스로도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함으로써 손님이나 종업원에게도 그 나름의 긴장감 같은 것이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

그녀는 남에게 무엇인가를 청할 때마다 언제나 방긋하고 활짝 웃었다. 그녀의 웃는 얼굴은 정말로 매력적이었다. 그 근처에 있는 모든 것을 쟁반에 얹어 가져다주고 싶어질 정도로 매력적인 웃음이었다.

가게에 돌아와 보니 시마모토가 앉았던 자리에 아직도 술잔과 재떨이가 남아 있었다. 재떨이 속에는 루주가 묻은 담배꽁초 몇 개비가 살며시 찌그러진 채 들어 있었다.

별 볼일 없는 여자를 상대하지는 말게. 별 볼일 없는 여자랑 놀다 보면 본인까지 별 볼일 없는 사람이 되고 마네. 멍청한 여자랑 놀다 보면 본인까지 멍청한 사람이 되고 말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무 좋은 여자와도 놀지 말게. 너무 좋은 여자와 얽히다 보면 제자리로 돌아갈 수 없게 돼.

나는 변명만큼은 하고 싶지 않아. 인간이라는 건 한번 변명을 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변명을 하게 마련이고, 난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그런 삶의 방식은 그 시절의 그녀에게 적지 않은 고통을 감내하게 했다. 그것은 주위 사람들에게 많은 불필요한 오해를 낳게 했고, 그런 오해는 시마모토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주었다. 그녀는 점점 자신 속으로 틀어박히게 되었다.

네가 예전에 말했듯이 어떤 종류의 일은 두 번 다시 제자리로는 돌아가지 않아. 그건 앞으로밖에 나아가지 않아. 시마모토, 어디든 좋으니 둘이서 갈 수 있는 데까지 가자. 그리고 둘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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