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조건 - 하버드대학교. 인간성장보고서, 그들은 어떻게 오래도록 행복했을까?
조지 E. 베일런트 지음, 이덕남 옮김, 이시형 감수 / 프런티어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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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하버드 출신 집단, 천재 여성 집단, 하층계급 출신 집단을 대조군으로 선정하여 각 집단에 속하는 이들의 유년기부터 사망까지의 삶을 관찰.연구한 결과를 담고 있다. 처음에 책을 고를 때는 단순히 '하버드를 나온 사람들의 행복의 기준은 일반인의 행복의 기준과 다를까?'란 호기심에서 시작했지만 서문에서 소개되는 이 광대하고 방대하며 엄숙하기까지 한 연구의 구조와 스케일에 대한 개략적 설명을 접하자 그런 얄팍한 기대따윈 던져버리고 수십년의 연구결과인  이 책을  그 자체로서 소중히 여기고 아끼며 읽어야겠단 마음이 들었다. 좋은 시작이다.  

서술은 주로 케이스를 끌어다 쓰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예를 들어, 행복의 열쇠 중 하나가 '건강'이라면 하버드를 졸업하고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다가도 알콜중독에 빠져 비참하게 죽음을 맞은 경우와 어릴 적 부모의 폭력에 노출되어 열악한 환경에서 성장했으나 근면한 태도로 자수성가하고 건강을 챙겨 행복한 노년에 다다른 하층계급출신의 경우를 대조하는 식이다. 이런 식으로 행복의 조건이라고 하는 것들이 하나씩 소개되긴 하는데 사실 이런 내용이 책의 대부분을 이루기는 하나 행복이라는게 어떤 절대적 공식에 의해 도출되는 것도 아니고 결국은 주관적 안녕'감'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기에 여기서 연구의 결과로 제시되는 행복의 조건이란 것들은 '확률'적으로 행복을 가져다 줄 가능성이 높은 조건일뿐이란 소리이다. 당연한 소리이고, 그래서 개인적으로 그냥 흥미롭게 읽어갔을 뿐 행복하려면 이래야 하는거야 저래야 하는거야 얽매이는 마음은 없었다. 그렇게 독자를 압박하는 류의 글도 아니다. 이건 자기계발서가 아니라 '연구결과'니까. 

수십년의 연구결과를 정리해 학문적으로 여러 케이스를 대조하며 행복을 결정짓는 요인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과정은 비전공자에겐 약간 지루할 수도 있겠다. 예를 들어,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더 행복하단 결과가 나온다면 이는 종교가 행복을 가져다 준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야 하는걸까? 아니면 행복한 사람들이 종교적 활동을 선호한다고 해석해야 하는걸까? 어마어마한 연구이니만큼(한 학자의 인생을 건 연구이니까) 이런 분석에도 모든 가능성을 고려하며 이 사례 저 사례 다 끌어다 어떻게든 모든 결론을 담아낼 수 있는 포괄적이고 유연한 결론을 이끌어내려 노력하는데 나같이 비학문적인 독자는 그런 학문적 엄밀성엔 별 관심이 없었고 그런것 보단 노화를 성장의 과정으로서 접근하는 연구자의 태도와 그 증거로서 제시되는 실제로 존재했던 나이가 들수록 더 아름다워졌던 수많은 인생의 궤적들에 폭 빠져버렸다.  

이 책은 사람의 인생을 나무에 비유한다. 죽는 날까지 성장한다는 의미이다. 보통 스무살 정도를 성장의 마침표를 찍는 시기라 보고 그 이후의 인간은 죽음까지 노화해간다고 보는 경우가 많고- 나 역시 거기에 동의했었는데(그렇게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사람이 변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스무살 이후의 성장에 대해 회의적이었음) 연구를 통해 인간의 생애를 관찰해보니 사람은 변하더란 말이다. 두터운 책을 읽으며 나에게 다가온 하나의 메세지는 학력, 가족, 흡연유무 등 행복의 조건이 아니라 사람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거, 그래서 끊임없이 성장의 여지가 있다는 점 그 하나였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경험을 통해 사교적으로 변해가고 타인을 따뜻하게 대하는 방향으로 '성장'한다고 한다. 얼마나 멋진 연구결과인지!  

내 나이가 이 책을 감동적으로 읽는 데 영향을 준 한 요인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올해 한국 나이 스물 다섯인데, 촌스럽게도 아직까지 '이제 너 꺾이는구나'소리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그런 소리에 위축되는 사람은 아닌데 스물다섯이면 이제는 보다 성숙한 나이먹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나이는 되었다고 생각했다.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나는 정말 열심히 살았고 스물다섯쯤 되면 인생의 방향이 대략 눈앞에 펼쳐질 줄 알았는데 왜 아직도 이렇게 모든게 불분명한 걸까? 젊음이 가지는 아름다움과 에너지에 대해 과도하게 세뇌되어 있던 사고방식이 '이건 아닌거 같다'고 아우성을 쳤다. 정말 젊음이 그렇게 완벽한 것이라면 그 완벽함의 십년 뒤로 노화만을 위한 수십년의 세월은 왜 필요한 거지? 이 책은 우리가 이십대에 육체적으로 가장 근사한 시기를 맞이하고 그 뒤론 노화를 경험하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 노화란 특정 영역에 한정된 것일 뿐, 특정 영역에선 여전히 발달과 성장이 일어나며 때문에 노인이란 쓸모없는 '잉여'가 아니라 보석같은 삶의 지혜를 간직한, 젊은이들과 똑같이 존중받아 마땅한 나름의 아름다움을 지닌 존재라며 내 물음에 답했다.

개인적으로 노화에 대해 접근하는 그런 새로운 시각이 참 좋았다. 학부생으로서 접하는 사람이 늘 젊은 사람들이다 보니 노화나 노인에 대해서는 어떤 시각을 가져야 할지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었는데 이 책을 읽으며 상당부분 정리가 된 기분이다. 이전에는 추상적으로 '나이'란 아무것도 아니란 정도의 생각을 했었다. 어리지만 누구못지 않은 밝음과 성실함을 가진 스물 둘 어린친구들을 보며 또 나이 거꾸로 먹고 나이 들수록 얼굴만 두꺼워지는 사람들을 보며 나이가 중요한게 아니고 중요한건 인간의 본질이자 삶의 태도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생각에는 아직도 변함은 없지만 이런 생각은 든다. 성공은 젊을 적에 할 수 있지만 진정한 행복을 찾는 것은 세월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성공한 젊은이들의 마음을 어지럽히던 많은 고민과 삶의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 사랑에 대한 갈구, 존재로서 필연적으로 직면해야만 하는 외로움 등등은 세월이 전제된 성숙에 의해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진정한 행복의 조건은 책에서 이야기하는 고학력, 비흡연 등등 보다도 가장 먼저 세월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세월이 흘러야 그만큼 성숙할 여지도 생기는 거니까. 나도 나이 먹는다고 징징대지 말고 좀 생산적으로 나이들수록 향기로워지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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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조건 - 하버드대학교. 인간성장보고서, 그들은 어떻게 오래도록 행복했을까?
조지 E. 베일런트 지음, 이덕남 옮김, 이시형 감수 / 프런티어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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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노인 중에서도 나이가 아주 많은 노인들에게 그 길을 일러달라고 청할 필요가 있다. 이제까지는 50대와 60대의 말을 인용해 왔다. 브라우닝, 셰익스피어, 앞에 언급했던 소설가와 시인은 모두 중년의 나이에 그처럼 위엄있는 어조로 노년에 대해 기록했다. 그들이 무엇을 알았겠는가? 앤서니 피렐리도 겨우 70세였다. ..랄프 왈도 에머슨은 57세에 노년이라는 에세이를 썼으며 알렉스 콤포트는 56세에 만족스러운 나이를 시몬느 드 보부아르는 60세에 노년을 썼다. 그리고 가장 많이 인용되는 작품으로 키케로가 62세에 쓴 노년에 관하여가 있다. 카울리는 그의 역작 여든에 바라본 세상에서 스스로 노년에 대해 전문가라고 불렀던 이들은 삶이 아니라 문학을 알았을 뿐이라고 지적했다.-52쪽

프랑켈-브룬스위크는 비록 노화를 비관적으로 바라보았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관점과 상충되는 기록을 남겨놓았다. 그녀는 "중년을 넘기면서 배우는 연출자가 되고 운동선수는 감독이 되었다. 일반적인 사교활동은 줄어들지만, 이 시기에 봉사활동을 시작하는 이들이 많아진다"라고 기록했다. 개인의 '의무와 소망'에 대한 그녀의 연구 논문에는 "25세에는 소망하는 내용의 92퍼센트가 자기 개인과 관련된 것이지만, 60세의 소망은 자기 개인과 관련해서 29퍼센트, 가족들과 관련해서 32퍼센트, 인류 전체와 관련해서 21퍼센트가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86쪽

건강한 70대 노인들은 20대 젊은이들보다 성숙한 기제들을 자주 이용한다. 프로이트는 "젊어서 창녀가 늙어서 수녀가 된다."라고 말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성적 욕망이 넘치는 젊은 이탈리아 귀족은 나이가 들면서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처럼 이타적으로 바뀐다. 그러므로 짓궂은 장난으로 다른 아이들을 괴롭히던 어린아이들의 수동 공격성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저차 다른 사람을 웃음 짓게 만드는 성숙한 유머로 발전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철없는 행동을 일삼는 사춘기 아이들도 모범적이고 성숙한 성인으로 자라날 수 있다. 그러나 성숙을 위해서는 정서의 발달과 수년에 걸친 경험,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필요하다. 또한 뇌가 생물학적으로 끊임없이 발전해야 한다. 뇌의 연결경로, 특히 욕망과 이성을 통합하는 연결경로는 40세 이후로도 계속해서 성숙한다.-110쪽

노년에 이르렀을 때 푸근한 유년의 기억이 우리의 친구가 된다- 콘래드-136쪽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개성이 점점 더 뚜렷해진다. 그 현상에 대해 저마다의 기질이 명확해져 가는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보기도 하지만, 또 한편에서는 점점 더 융통성이 없어지는 것이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노년으로 갈수록 완고해지는 것은, 창의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친 다양한 경험을 통해 스스로 자기에게 맞는 선택을 발전시켜 온 결과다. 소설가 메이 사튼은 70세에 "요즘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나다워졌다"고 했다. -208쪽

하버드 집단의 경우 자유주의자들은 새로운 사고를 훨씬 더 개방적으로 받아들였고, 젊은이들의 주장이나 취향도 수긍하는 편이었다. 그들은 창조성을 표현하거나, 방어기제로 승화를 이용하거나, 어머니의 교육 수준이 높거나, 본인이 대학원 과정까지 마쳤을 가능성이 높았다. 반면 보수주의자들은 재산을 많이 모았거나 운동경기를 더 많이 하는 편이었으며, 실제 생활에서는 물론 필답검사에서도 새로운 것에 대해 훨씬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차이들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230쪽

젊음은 아름답지만, 노년은 찬란하다. 젊은이는 불을 보지만, 나이 든 사람은 그 불길 속에서 빛을 본다. -빅토르 위고-255쪽

인생에 세월을 보태지 말고, 세월에 인생을 보태라. -1955년 미국 노년학회 모토-259쪽

물론 나이에 따라 창조적 능력이 조금씩 변해 가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반응속도나 기억력, 숫자감각, 정확성 등은 20세에서 30세 사이에 절정을 이루며, 70세 이후로 급속하게 떨어진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일컬어 '유동성 지능'이라고 하며, 이는 특히 수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편 '결정성 지능'은 비교 구분하고 논리적으로 추론하는 능력과 어휘력 등을 말한다. 이 능력은 회상이나 기억보다는 사색과 인식 능력에 따라 좌우되며, 60세까지 꾸준히 발전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80세에 이른 사람이 30세와 똑같은 능력을 지닐 수 있다. -328쪽

75세에 이른 하버드 출신자들에게 노년과 지혜는 어떤 연관성이 있느냐고 묻자, 몇몇 사람은 젊은 시절보다 지금이 훨씬 더 지혜로워졌다고 대답하면서 지혜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
모순과 아이러니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과 참을성
감정과 이성의 조화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난 자기인식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일 줄 아는 능력
균형있는 시각, 삶에 대한 폭넓은 이해, 사물의 양면성에 대한 인식, 인내, 삶의 아이러니에 대한 깊은 이해
주변 사물과 사람에 대한 호기심
세상과의 연관성 인식-342쪽

종교적 신념들은 대부분 도그마를 수반하지만 영적인 확신은 메타포를 내포한다. 그렇다면 도그마와 메타포의 차이는 무엇인가? 메타포는 자유로이 열려 있고 즐거우나 도그마는 융통서잉 없고 진지하다. 메타포는 비유와 직유로 의미를 전달하지만 도그마는 성경속에 적혀있는 내용 그대로를 전달한다. 메타포는 이론이나 시를 더 풍부하게 하지만 도그마는 토미즘이나 탈무드에 중압감만 더한다. 메타포는 개념화하지만 도그마는 있는 그대로 모셔둘 뿐이다. 메타포는 과학을 진보시키지만 도그마는 과학을 퇴보시킨다. ...다행히도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다양한 종교적 전통을 따르는 다른 사람들과 의사소통하는 방법을 배운다. 잘 늙어가는 데 필요한 것은 독백이 아니라 대화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76세에 이른 하버드 출신 목사에게 '외설, 노출, 혼전 성관계, 동성애, 포르노에 대한 금기들이 이미 사라졌거나 또는 사라지는 중인데, 이 현상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는 이 질문에 "어느 쪽도 아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행동에 제약을 가해야 하기도 하고, 또 진정한 자아를 깨닫기 위해 무한한 자유가 필요하기도 하다. -354쪽

우리에게는 제약과 자유 사이의 균형이 필요하다. 나는 이러한 제약과 자유, 그리고 그 사이의 균형이 문화를 변화시킨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그는 자기만의 개인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기품있게 늙어가기 위해서는 모든 비본질적인 것들을 버릴 수 있어야 하며, 대부분의 종교적 차이들은 바로 그 비본질적인 것들에서 생겨난다. -356쪽

건강한 노년을 부르는 일곱가지 요소
1. 비흡연 또는 젊은 시절에 담배를 끊음
2. 적응적 방어기제(성숙한 방어기제): 소소하게 불쾌한 상황에 부딪히더라도 심각한 상황으로 몰아가는 일 없이 긍정적으로 전환할 수 있는 능력
3. 알코올 중독 경험 없음
4. 알맞은 체중
5. 안정적인 결혼생활
6. 운동
7. 교육년수

-289쪽

일곱가지 방어요소들도 4가지 개인적인 자질이 뒷받침되지 않았더라면 아무 소용이 없었을것이다. 첫 번째 자질은 미래 지향성, 즉 미래를 예견하고 계획하고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이다. 두 번째 자질은 감사와 관용, 즉 컵에 물이 반만 남았다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반이나 차 있다고 여길 줄 아는 능력이다. 세 번째 자질은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세상을 바라볼 줄 아는 능력, 즉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느긋한 태도로 다른 사람을 이해할 줄 아는 능력이다. 네 번째 자질은 세 번째와도 연관성이 깊은 것으로, 사람들에게 무엇을 해준다거나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무엇인가 해주기만 바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어우러져 함께 일을 해나가려고 노력하는 자세다. -4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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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망 너무 사양해 - 행복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꼬마 파리지앵의 마법 같은 한마디
이화열이 쓰고 현비와 함께 그리다 / 궁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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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비: 아빠, 우리 반 사무엘이 그러는데 지구 종말이 오면 자기네 유대인만 살아남는데
아빠: 그래서 뭐라고 했어?
현비: 유대인이 살아남는다면 어째서 그게 지구 종말이냐고 했지. 걔 정말이지 심각해-50쪽

바닷가에는 수많은 조개들이 있고(조개를 여러 개 그렸다)
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있고(별을 아홉 개 그려놓았다)
하지만 세상에 엄마는 하나뿐(엄마와 여러개의 하트를 그렸다)-103쪽

단비가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중학생이 되어서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는 게 안쓰럽다.
"엄마가 뭘 해줄까? 뭘 해주면 단비 기분이 좋아질까?"
일주일째 신발 사 주는 걸 미룬 게 미안했다. 단비는 피곤한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응, 엄마. 그럼 오늘은 꼭 김치 담가"
새끼손가락을 단비 손가락에 걸면서 말했다.
"약속할게"
외국생활 15년이 되었건만 김치에 대한 의존도는 점점 더 강해진다. 다음 날 마르쉐에서 배추를 잔뜩 사다 놓고 남편에게 말했다.
"난 말이지, 김치 없이는 살 수 없을 것 같아"
남편은 내 말을 듣더니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도 김치 없이는 살 수 없어"
적어도 우리 집안에서는 그렇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포기김치를 담기가 귀찮아서, 그냥 썰어서 나박김치를 담가버릴까 해"
남편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맛은?"
"맛이야 뭐, 다 똑같은 김치 맛이지"
남편이 형사 같은 말투로 말했다.
"포기김치와 나박김치 맛이 다 똑같다면 누가 힘들게 포기김치를 담그겠어?"-128쪽

인간의 불행은 사람들이 집에서 혼자 편안히 있는 방법을 모르는 데서 비롯된다. - 파스칼-2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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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0 1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10 2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10 23: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10 2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굴라쉬 브런치 - 번역하는 여자 윤미나의 동유럽 독서여행기
윤미나 지음 / 북노마드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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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여행기는 웬만해서는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잘 보지 않는다. 감각적으로 쓰려다 허세의 길로 접어드는 경우가 대다수이고 담백하게 쓰려다가는 여행감상문이 아닌 여행기록문이 되기 십상이다. 오직 먼 북소리만이 나의 책장을 차지하고 있어왔다. 그런데-서재에서 만난 이 칭찬일색의 밑줄긋기들은 모다?? 뭔가 허세스러운것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싸이월드 500만 페이지를 뒤져도 찾을 수 없는 참신함과, 뭔가 있어보이는 척 하는것 같으면서도 자신을 내려놓은 자만 쓸수있는 소탈함을 가진 이 글들은 모다?  

이 책은 동유럽이라는 생소한 소재를 유려한 글솜씨로 그려내고 있다. 저자의 글은 밑줄긋기가 많으니 별로 언급할 것도 없겠다. 다만 나는 이 여행기의 매력이 그녀의 글빨 뿐 아니라 그녀라는 사람 그 자체에 있다는 감상을 남기고 싶다. 나는 개인적으로 윤미나라는 사람을 전혀 모르지만 이 책을 읽으며 그녀를 '30대에 자기 능력껏 돈벌며 열심히 살아가는 똑똑한 건어물녀 언니' 정도로 상상해 볼 수 있었다.  

언니는 건어물녀이다. 



맥주를 앞에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진은 태권도, 서울, 불고기에 대해 이야기했고 우리는 U2, 블러디 선데이, 조이스에 대해 이야기했다. 서로 국가대표급 선수들을 언급하고 나니 화제가 툭 끊겨버렸다. ...진은 사업 때문에 세계 곳곳을 두루 돌아다니는 사람이었다. 두브로브니크에는 형네 가족이 살고 있어서 겸사겸사 들렀고, 독신에 일밖에 모르고 유일한 취미라고는 포커뿐인데 즐기지만 중독자 수준은 아니라고 했다. 머리카락 색깔은 옅은 다갈색, 눈동자가 선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하긴 처음 보는 여자들 앞에서 눈을 살벌하게 치뜨며 나 이혼 두 번 했고 한다하는 타짜요, 이런 식으로 말할 남자는 없겠지.  

-153p





언니가 쉬운 여자이길 바라진 않지만 이렇게 철벽녀일 필요는 없잖아. 여행길의 낭만조차 허용치 않는 게 삼십대의 언니라면 내가 이십대에 여행을 한 것이 다행이라 여겨진다. 언니는 내가 술마시며 돌아다녔던 남자들과 우리의 시시덕거림에 대해 가차없이 '그런 싸구려 flirting따위'라고 말할거 같다. 거침없었던 히치하이킹에 대해선 어쩜 그렇게 조심성이 없냐고 눈썹을 치켜올리겠지. 아우아우 언니 너무 열심히 일만 하는거 아니야?란 아우성이 터져나올랑 말랑 한다. 이쁘고 똑똑하고 젊은 언니는 좀 더 인생을 즐겨도 되잖아. 
 
근데, 책을 읽다보니 언니의 건어물근성에 대해서 만큼은 단순히 나이탓이라고 몰아붙일 수 없단 결론이 도출되었다.(물론 나는 언니의 세월과 언니의 성숙을 존중한다.) 
 
꽃돌이 앞에선 끈없는 푸대마냥 늘어지는 언니의 모습을 보라.   





우리의 레이더망에 어느 상점 벽에 등을 기대고 서서 책을 읽고 있는 잘생긴 청년 하나가 포착되었다. 잡티 하나 없는 하얀 피부, 굵고 낮은 목소리와 지적인 말투, 유창하다 못해 우아하기까지 한 영어, 완벽하게 테스코를 찾을 수 있는 정확한 정보 제시 능력! 역시 책을 읽는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설사 그가 읽고 있던 책이 체코판 무협지였다고 해도 내 눈에 그는 영락없는 '프라하의 손석희 오빠'였다.    -58p 

척 봐도 어마어마하게 귀여워 보이는 남자애가 저만치 아래에서 자전거를 끌며 우리 쪽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 옆에는 키가 크고 늘씬한 여자애가 인절미의 콩가루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슬로베니아 현지 꽃소년이 분명했다. 가까이서 보니 우윳빛 피부에 나팔꽃러첨 울긋불긋 핀 여드름이 까무러치게 사랑스러웠다. ...소년의 이름은 마테우스. 하하하, 마테우스래, 누굴 닮아 이름까지 귀엽니? ...마테우스랑 걷는 동안 나는 좀 이상해져버렸다. 웬일인지 입이 다물어지질 않고 몸은 전화선처럼 풀어도 풀어도 자꾸만 꼬이는 중이다. 앞으로 나무 베는 사람이 되고 싶단다. 내가 들어본 그 어떤 장래 희망보다도 근사하다. ...작별인사를 빌미로 악수를 청하고 염통이 살짝 오그라드는 듯한 달콤한 고통을 느끼며 마테우스를 떠나보냈다. 마테, 너는 너한테 베이는 나무들조차 아프게 할 거야. 함부로 웃지 마.     -212p 







그렇타. 언니는 단지 미에 대한 섬세한 기준을 가진 녀성이었던 것이다. 언니에게서 나의 미래를 본다. 서른이 되면 다 그렇게 말라비틀어진 건어물 마음을 가지는거냐고 몰아붙였던거 정말 진짜 완전 미안해진다. 생각해보니 나도 이렇게 5년만 더 살면 언니같은 서른이 될 것을. 지금도 조금씩 건조되어가고 있지 않은가 흙흙흑 

 

 

여행기임은 분명한데 단순히 여행기라고 말해버리면 레몬같이 노랗고 별사탕같이 톡톡 튀는 언니에게 미안해진다. 언니의 여행기는 '언니'의 여행기임을 분명하게 드러나는 글이니까. 그러니까, 이 책을 선택할 땐 '동유럽''여행기' 보단 동유럽여행기를 통해 '윤미나'란 사람을 만난다고 생각하면 실망이 없을 것이다. 내가 단지 동유럽에 대해 알고 싶었다거나 여행을 통해 내지에 묶인 삶을 해방시키고자 전전긍긍했다면 이렇게까지 만족스럽진 못했을 것이다. 체코나 슬로베니아와는 전연 상관없는 그녀의 까탈과 편견까지 사랑스러운 건 내가 그녀를 '언니'로 읽어냈기 때문이다.  많은 독자들이 그녀를 어떻게 읽어냈을지 궁금하고 또 한편 그녀의 다음 글은 무엇이 될지 궁금해진다. 강원도에서 번역가로 사는 삶에 대해 읊어줄 생각은 없으신지?  좋은 글 감사하고 언니 화이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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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05 13: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LAYLA 2010-04-06 00:5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Forgettable. 2010-04-05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꽃돌이 이야기는 언제나 듀근듀근

LAYLA 2010-04-06 00:58   좋아요 0 | URL
캐나다에서 꽃돌이 소식 꼬옥 전해주셔야해요 흙흙흑

다락방 2010-04-05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꽃돌이 이야기는 언제나 듀근듀근 2

LAYLA 2010-04-06 00:58   좋아요 0 | URL
이 꽃돌이 이야기는 언제나 듀근듀근3

아포지 2010-04-05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참... ㅎㅎ 정말.. 즐겁네요. 알라딘에서 글을 읽으 면서 이렇게 즐거워 본 건 정말 오랜 만이 아닐까 합니다. 고마워요. 이래서 서재질을 끊을 수 없는지도.. 혼자 오래 웃습니다. ㅎㅎㅎ

LAYLA 2010-04-06 00:59   좋아요 0 | URL
apouge님 일상에 작은 웃음 드릴 수 있었다니 저도 참 기분이 좋습니다 :)

프레이야 2010-04-05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쾌하고 사랑스러운 리뷰에요.^^
건어물녀가 무슨 뜻인지 이제사 알았다는..ㅎㅎ

LAYLA 2010-04-06 00:59   좋아요 0 | URL
가슴에 팍팍 와닿는 말이죠. 철벽녀, 건어물녀. 히히히

pjy 2010-04-05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어물녀로 그냥 살면 안되는건가요 ^^; 주변의 압박이 심하네요 ㅋ

LAYLA 2010-04-06 01:00   좋아요 0 | URL
요즘은 건어물녀가 트렌드에요. 주변분들이 건어물녀의 매력을 모르나 보네요...ㅎㅎㅎ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다니엘 글라타우어 지음, 김라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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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미, 우리가 이메일을 사흘이나 쉬었군요. 슬슬 다시 시작할 때가 된 것 같은데요.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는 하루가 되기 바랍니다. 당신 생각을 많이 해요. 아침에도, 낮에도, 저녁에도, 밤에도, 그리고 그 사이의 시간과 그 바로 앞, 바로 뒤 시간에도. 다정한 인사를 보냅니다. 레오.-145쪽

에미, 나에 대해 예기할 때 다시는 '당신네 남자들'이라는 말 쓰지 말아요. 나는 지극히 독자적인 사람입니다. 그렇게 도매금으로 싸잡아 악의적으로 갖다붙이는 남자 복수형에 나를 내맡길 수는 없어요. 다른 남자들을 보는 잣대로 나를 판단하지 말아요. 당신이 그러면 속상해요. 정말로!-1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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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4-05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계시는군요! ㅎㅎ

당신 생각을 많이 해요. 아침에도, 낮에도, 저녁에도, 밤에도, 그리고 그 사이의 시간과 그 바로 앞, 바로 뒤 시간에도.

LAYLA 2010-04-06 14:49   좋아요 0 | URL
다 읽었어요. 결말 죽이네요^^

LAYLA 2010-04-06 14:49   좋아요 0 | URL
저 이런거 좋아해요 ㅎㅎㅎ

다락방 2010-04-06 15:08   좋아요 0 | URL
결말 완벽하죠,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