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 리더를 만나다 - 한비자, 처칠부터 이나모리 가즈오까지, 역사적인 리더 11인의 리더십 카운슬링
유필화 지음 / 흐름출판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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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자 진언의 요령

상대방이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극구 칭찬한다. 부끄러워하는 것은 잊어버리도록 한다. 이 정도의 요령을 아는 것은 필수이다. 이기적이지 않나 하고 행동을 망설이는 상대방에게는 대의명분을 주어 자신감을 갖게 한다. 하찮은 것임을 알면서도 끊지 못하고 있는 상대방에게는 나쁜 것은 아니니까 끊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 안심시킨다. 높은 이상을 큰 부담으로 느끼는 상대방에게는 그 이상의 틀린점을 지적해주어 실행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조언한다. 위험한 사업을 그만두도록 간하는 경우에는 본인의 이름에 관계된다고 말해 중지시킨 다음, 윗사람 개인에게도 이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함이 좋다. -38쪽

마키아벨리의 통찰과 잭 웰치의 경험을 종합하여

변화를 일으키는 작업은 가능하면 빨리 추진해야 한다. 그러한 작업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시간이 더 많이 걸린다. 빨리 시행할수록 변화에 반대하는 세력이 이길 확률은 줄어든다.

변화를 가져오려면 어느 정도 인심을 잃을 각오를 해야 한다. 심각하게 변화를 추진하는 사람은 중상모략과 비방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러려면 용기와 내적인 독립심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이 얘기 저 얘기에 흔들리는 귀가 얇은 사람을 존경하지 않는다. 오히려 강인함과 추진력을 높이 평가한다.

변화를 일으키는 데 있어서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끊임없이 그리고 되풀이해서 변화의 메세지를 전해야 한다. 경영자가 아무리 같은 말을 많이 해도 듣는 사람은 어쩌다 한 번 듣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경영자는 일관성 있는 행동으로 변화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직원들에게 확신을 주어야 한다. -64쪽

...1866년 4월 8일에는 이탈리아와 3개월 시한부 비밀협정을 맺는다. 형제전쟁Bruderkrieg이 일어나면 이탈리아가 프로이센을 지원하고 그 대가로 베네치아를 얻는다는 내용이었다. -68쪽

독일의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1871년 인구의 5분의1을 차지하던 노동자의 수는 1880년대 초 4분의1에 이를 정도로 급증한다. 노동계급의 성장과 함께 경제적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주의 세력도 자연히 커지게 되었다. 이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회주의 계열의 정당은 하나로 뭉칠 필요성을 느꼈고, 그 결과 연합정당인 사회민주당, SPD이 1875년 5월에 탄생한다.
비스마르크는 이러한 사회주의 운동을 신행 독일제국의 기반을 흔드는 위협으로 간주하고, 탄압할 기회를 엿본다. 그러던 중 1878년 5월과 6월에 황제 암살 미수사건이 두 번이나 일어난다. 이것을 기회로 비스마르크는 의회를 해산하고, 새로 구성된 제국의회에서 1878년 10월 사회주의법을 통괗시킨다. 이 법은 사회주의적 성향이 있는 단체의 집회와 출판 등의 활동을 금지하였으며,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인물을 거주지에서 추방할 수 있는 권한을 정부에게 주었다. 이 법은 1890년까지 갱신.유지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민주당은 1881년 선거에서 상당히 선전한다.
-78쪽

이런 현실을 본 비스마르크는 강압만이 사회주의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 아님을 깨닫고, 노동자들의 복지를 위한 입법을 고려하게 된다. 국가가 노동자를 위한 사회정책을 펼치고 노동자의 생종권을 보장하면, 노동자들의 마음이 혁명적 사회주의자들로부터 멀어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1881년 봄 사회보험 입법계획을 밝히고, 1883년에 질병보험법, 1884년에는 노동재해보험법, 1889년에는 노년.장애보험법을 잇달아 통과시킨다. 비스마르크의 앞서가는 생각 덕분에 독일은 강제적 노동보험제도를 도입한 최초의 근대국가가 되었다. 비스마르크는 사회주의와 대결할 때도 반대파의 주장 중에서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과감히 수용하는 유연성을 보였다. 그 경우 그는 사회주의자가 아닌 노동자들과 타협함으로써 사회주의자들을 몰아내려는 전법을 쓴 것이다. -79쪽

독일을 대표하는 역사학자 프리드리히 마이네케Friedrich Meineche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취지의 발언을 한 바 있다.

비스마르크의 업적에는 밝은 면도 있고 어두운 면도 있다. 정신보다는 힘을 강조한 독일제국의 문화는 독일국민들의 가치관을 타락시켰으며, 정치적인 성장을 가로막았다. 그리하여 독일국민은 빌헬름 2세의 무책임한 행동과 나치즘의 범죄마저 용인하는 지경까지 되었다. -85쪽

카이사르의 행적을 읽다보면 가장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부분이 바로 그의 관대함이다.
...반대파를 처단하기 위한 '살생부'작성을 거부하고, 망명한 사람도 원하면 귀국을 허락하고, 그의 의중을 헤아리지 못하고 폼페이우스파 사람들의 재산을 몰수한 안토니우스에게네는 그 재산을 반환하도록 시켰다. 포로 로마노의 연단에 폼페이우스파 사람들의 목이 효수되는 일도 없었다. 귀국과 복직을 원한 사람 가운데 카이사르의 허락을 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원로원 최종 권고'를 발동하여 카이사르를 반역자로 규정한 전직 집정권 마르켈루스의 귀국도 허락했다. 카이사르가 원한 것은 적도 동지도 없이 일치단결하여 국가 로마의 재생을 위해 애쓰는 것이었다.
카이사르는 또한 원로원의 정원을 600명에서 900명으로 늘리고, 속주 출신의 로마 시민 및 갈리아의 부족장들한테도 원로원 의석을 제공했다. 이런 조치는 패배자를 동화시키는 오랜 전통을 갖고 있는 로마인조차 놀라게 했다.
-133쪽

...또한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파와의 내전 기간 중에 보여준 너그러운 태도는 참으로 인상적이다. 그는 우선 점령지에서 잡힌 폼페이우스파 요인들과 그 가족들을 그대로 풀어준다. 이런 사실은 많은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준다. 그래서 심지어는 카이사르의 정적인 키케로조차 카이사르에게 편지를 보내 그 관대한 조치를 칭찬한다. 카이사르는 행군 중인데도 키케로에게 답장을 보냈는데, 그 내용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내가 석방한 사람들이 다시 나한테 칼을 들이댄다 해도, 그런 일로 마음을 어지럽히고 싶지는 않소. 내가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내 생각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오. 따라서 남들도 자기 생각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오"-134쪽

공자의 겸양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자신의 능력이 부족함을 걱정해야 한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걱정해야 한다.

군자는 자신의 무능을 병으로 여기고,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것을 병으로 여기지 않는다. -176쪽

1940년 6월 22일 독일과 프랑스가 휴전협정을 맺자 처칠은 프랑스 선단이 독일군의 손에 들어갈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그는 프랑스에게 선단을 독일군의 힘이 미치지 않는 지역으로 옮길것을 요청한다. 또한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알제리의 오랑에 있는 프랑스 선단을 공격하겠다고 위협한다. 2주 후인 7월 3일 프랑스는 처칠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처칠은 공격을 명령한다. 5분 동안 지속된 공격으로 프랑스의 군함 대부분이 가라앉거나 파괴되었다. 또 프랑스 수병 천 명 이상이 사망했다. 비록 몇 주 전만 해도 동맹국이었지만 적국 독일을 이기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과감히 공격한 것이다. -194쪽

히든 챔피언의 최고경영자들은 대체로 수준 높은 교육을 받지도 않았고, 외국어 구사 능력도 약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세계시장을 정복한 것을 보면 참으로 인상적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많은 것을 한 판에 거는 무모한 도박꾼은 결코 아니다 그들이 보통 사람들과 다른 점은 걸림돌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두려움이 없으므로 위험과 맞서는 힘이 남보다 강하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잠재력을 매우 효과적으로 발휘한다. -243쪽

프랑스의 작가 생텍쥐페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일 당신이 배를 만들고 싶으면, 사람들을 불러모아 목재를 가져오게 하고 일을 지시하고 일감을 나눠주는 일을 하지 말아라. 대신 그들에게 저 넓고 끝없는 바다에 대한 동경심을 키워줘라."-251쪽

뷔르트는 현장경영과 고객만족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영자이다. 이에 대해 그는 "내 경험에 따르면 하룻동안 외근하는 것이 일주일 내내 똑똑한 사람들이 발표해대는 회의에 참석하는 것보다 100배는 더 값어치가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260쪽

오늘날 기업인으로 대성한 이나모리이지만 젊은 시절에는 많은 시련을 겪었다. 형제 7명의 가난한 집에서 자라난 그는 어릴 때 중학교 입시에서 낙방했고, 대학도 가고시마대학이라는 규슈 최남단의 지방대학 공학부를 졸업했다. 취업난이 심하던 그 시절 번번이 입사시험에서 떨어졌다. 은사의 추천으로 1955년 4월 교토에 있는 어느 작은 회사에 간신히 취직한다. 그때까지 대도시에 살아본 적도 없고 규슈 사투리가 심했다 이나모리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시골뜨기였다. 그래서 그는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받아주었으면 하고 기도하는 마음이었다고 한다. 가고시마 지방 말투가 알려지는 것이 싫었고, 남과 비교했을 때 자신이 불리한 위치에 있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267쪽

그러던 어느 날 이나모리는 열등감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신의 약점을 솔직하게 인정한 다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결심하다. 그렇게 하면 좌절감을 맛보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에게 "나는 촌놈이다. 시골학교 출신이고 세상일은 아무것도 모르고 상식도 없다. 그러니까 기본적인 것부터 공부하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자신의 약점을 부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무리수를 둘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것이 자신을 발전시킨 첫 계기가 되었다고 이나모리 회장은 회고한다. -268쪽

리더는 조직원 개개인이 스스로 도달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높은 수준의 역량을 발휘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리더십의 목적이다. 이 간단한 조건을 만족시킬 수 없으면 리더십과 리더는 필요없다.-3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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