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득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4
제인 오스틴 지음, 원영선.전신화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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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의 연주 솜씨는 머스그로브 가의 두 자매보다 훨씬 나았다. 그러나 그냥 인사치레로나 자매가 잠시 쉬는 동안이 아니면, 자신의 연주에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쯤은 앤도 잘 알고 있었다. 노래나 하프에 특별히 솜씨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옆에 앉아 연주를 들으면서 흐뭇해하는 다정한 부모님이 계신것도 아닌 처지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앤은 자신의 연주를 듣고 기뻐하는 것이 그녀 자신뿐임을 알고 있었다. 그런 느낌이 새로울 건 없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사정이 달랐던 적도 있긴 했다. 하지만 그때를 제외하고는 열네 살에 사랑하는 어머니를 여윈 이후로 누군가 그녀의 연주를 들어준다거나 정당한 평가와 진정한 감식안으로 격려해주는 호사를 누려본 적이 없었다. 음악 속에서 앤은 항상 자신이 이 세상에 혼자임을 느끼곤 했다. -65쪽

...그러나 곧 앤은 정신을 차려 감정을 다스리려 애썼다. 팔 년이었다. 모든 것을 단념한 지 어언 팔 년의 세월이 흘렀다. 세월에 묻혀 희미해져버린 줄 알았던 가슴떨림을 다시금 느끼다니,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가! 팔 년 세월에 무슨 일인들 생기지 않았을까? 온갖 사건과 변화, 단절, 망각, 팔 년이면 이 모든 일이 일어나고도 남을 세월이 아닌가! 과거를 잊는 건 너무도 당연하고, 또 너무도 확실한 일이었다! 그 세월이 그녀가 살아온 생애 중 삼 분의 일이나 되는 시간일지라도 말이다.-82쪽

레이디 럴셀은 차분히 얘기를 듣고는 그들의 행복을 기원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스물셋의 나이에 앤 엘리엇과 같은 여자의 가치를 조금이나마 알아본 듯했던 남자가 팔 년 뒤 루이자 머스그로브 같은 여자에게 매력을 느끼다니. 레이디 러셀의 마음속에선 한편 화가 나면서도 기쁘고, 또 한편 기쁘면서도 경멸스러운 복잡미묘한 감정이 차올랐다. -165쪽

벤윅 대령의 상태는 전에도 어렴풋이 짐작되던 바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다고 해서 앤은 메리와 같은 결론을 내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의 마음에 자신을 향한 애틋한 감정이 싹트고 있었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하지만 자신의 허영심을 채우려고 메리가 전해 준 얘기 이상으로 옥측을 할 마음은 없었다. 누구든지 웬만큼 호감 가는 젊은 여자가 그의 말에 귀 기울이고 공감하는 듯 보였다면, 그녀와 똑같은 찬사를 받았을 것이다. 벤윅 대령은 다정다감해서 누군가를 사랑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2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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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여행법 하루키의 여행법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마스무라 에이조 사진,김진욱 옮김 / 문학사상사 / 1999년 2월
구판절판


...또 한 가지 이 여관에서 볼 만한 것은 가구와 집기들이다. "이 장사를 시작하기 위해 돈을 주고 산 건 거의 없어요. 우리가 그때까지 수집해 두었던 것들과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물려 주신 것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지요. 그랬더니 보다시피 제법 근사한 분위기가 만들어지더군요."
나는 이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미국이라는 사회가 지니고 있는 속깊은 건전함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19쪽

열흘 동안 원인 모를 식중독과 끊임없이 울려퍼지는 멕시코 노래, 자동 소총을 든 용감한 젊은이들과 냉방 장치가 고장난 버스, 아무리 걷어차도 꼼짝달싹도 않는 코끼리처럼 뻔뻔스런 새치기 장사꾼 아줌마를 견뎌 내면서 혼자 멕시코를 여행해보고 새삼스레 절실히 느낀 것은, 여행이란 근본적으로 피곤한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이것은 내가 자주 여행을 해보고 나서 체득한 절대적인 진리다. 여행은 피곤한 것이며, 피곤하지 않은 여행은 여행이 아니다. 비참함이 끝없이 이어지고, 예상했던 일이 빗나간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67쪽

이상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물건을 한 가지씩 잃어버릴 때마다, 한 번 설사를 할 때마다, 시간에 늦어 한 번 버스를 놓칠 때마다, 그리고 아주머니들이 새치기를 할 때마다, 내 마음속엔 멕시코란 나라가 한층 더 가까이 다가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농담이 아니다. 독일에는 독일 나름대로의 피곤이 있고, 인도에는 인도, 뉴저지에는 뉴저지 나름대로의 피곤이 있다. 하지만 멕시코의 피곤은 멕시코에서밖에 얻을 수 없는 종류의 피곤인 것이다.

한 가지 피곤으로 다른 피곤을 상대화하는 일, 한 가지 피곤으로 다른 피곤을 변증법적으로 극복해 내는 일. 그것이 워크맨으로 릭넬슨의 노래를 들으면서 내가 막연하게나마 생각하고 있던 생각이었다.-69쪽

인디언 청년은 고향 마을에 살고 있던 때는 한 번도 굶은 적이 없었다. 가난한 마을이기는 했지만 굶주림이란 걸 그는 모르고 지냈다. 왜냐하면 그 마을에서 혹시 그가 끼니를 굶어야 할 일이 생긴다면, 누군가에게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만 하면 되었다. 그렇게 하면 상대방은 그 목소리를 듣고 아이고 넌 배가 고픈 것 같구나 우리집에 와서 밥을 먹으렴 하고 말하면서 밥을 먹여 주는 것이었다. 그 안녕하세요?하는 말소리만 듣고도 상대방이 밥을 먹었는지 굶었는지, 건강 상태가 좋은지 나쁜지까지 금세 다 알아차리고 마는 것이다. 그런 이심전심의 분위기에서 그는 자라났던 것이다. 그래서 도시에 나온 지 아직 며칠 지나지 않았을 때는 그 인디오 청년은 배가 고프면 이 사람 저 사람을 향해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며 돌아다녔다. 하지만 어느 누구 하나 밥을 먹여 주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그래, 잘 있었지? 하고 인사를 받아 줄 뿐이었다. 그는 배가 고파 소리가 나오지 않을때까지 안녕하세요?하고 돌아다녔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우리집에 와서 밥을 먹어라고 말해 주지 않았다. 그제야 그는 겨우 여기서는 아무도 말의 울림이란 걸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102쪽

알아차렸다.-102쪽

태평양 전쟁에서는 실로 2백만이 넘는 병사들이 전사했다. ..대부분의 병사들이 거의 의미 없는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일본이라는 밀페된 조직 속에서 이름도 없는 소모품으로서 아주 운 나쁘게 비합리적으로 죽어 갔던 것이다. 그리고 이 '비합리적인 죽음','운 나쁜' 혹은 '비합리성'을 우리는 '아시아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전쟁이 끝난 뒤 일본인은 전쟁을 증오하고 평화를 사랑하게 되었다.(좀 더 정확히 말하면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우리는 일본이라는 국가를 파국으로 이끈 그 비합리성을 전근대적인 형태로 타파하려고 노력해왔다. 자신의 내부에 있는 비효율성의 책임을 추궁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강요당한 것으로 생각하고, 외과수술이라도 하는 것처럼 단순히 그것을 물리적으로 배제했다. 그 결과 우리는 분명히 근대 시민 사화의 이념에 따른 합리적인 세계에 살 수 있게 되었으며, 그 합리성은 사회에 압도적인 번영을 가져다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역시 지금까지도 많은 사회적 국면에서 우리들이 이름도 없는 소모품으로서 조용히 평화적으로 말살되어 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막연한-129쪽

의혹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가 없다.
우리는 일본이라는 평화로운 민주국가에서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받으며 살고 있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표면을 한 껍질 벗겨 내면, 그곳에는 역시 이전과 비슷한 밀페된 국가 조직이나 이념 같은 것이 면면히 숨쉬고 있지는 않을까?-129쪽

지도라는 것은 아주 매혹적인 것이다. 지도에는 아직 자기가 가 본 적이 없는 지역이 펼쳐져 있다. 조용히, 말없이, 그러나 도전적으로. 들어 본 적도 없는 지명이 허다하다. 건너 본 적이 없는 커다란 강이 흐르고, 본 적 없는 높은 산맥이 줄을 잇고 있다. 호수나 하구는 하나같이 매력적으로 보인다. 변변치 않은 사막조차도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을 보낸다. 지도를 펴놓고 자기가 아직 가 본적 없는 곳을 물끄러미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마녀의 노래를 듣고 있을 때처럼 마음이 자꾸만 끌려 들어간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는 것이 느껴진다. 아드레날린이 굶주린 들개처럼 혈관 속을 뛰어다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피부가 새로운 바람의 산들거림을 간절히 원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문득 떠나고 싶다는 강한 유혹을 느낀다. 일단 그곳에 가면, 인생을 마구 뒤흔들어 놓을 것 같은 중대한 일과 마주칠 것 같은 느낌이 든다.(실제로는 그런 일은 매우 상징적인 영역에서만 일어나지만).-180쪽

이 세상에는 고향으로 끊임없이 회귀하려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고향에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우기는 사람도 있다. 양쪽을 구분짓는 기준은 대부분의 경우 일종의 운명의 힘인데, 그곳은 고향에 대한 상념의 비중과는 약간 다른 것이다. -204쪽

30여 년이나 지난 이야기- 그렇다. 나는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인간은 나이가 들면 그만큼 자꾸만 고독해져 간다. 모두가 그렇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잘못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인생은 고독에 익숙해지기 위한 하나의 연속된 과정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태여 불만을 토로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불만을 털어놓더라도 도대체 누구를 향해 털어놓을 수 있단 말인가.-2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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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보수 일기 - 영국.아일랜드.일본 만취 기행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11년 4월
절판


실제로 평소에도 인간을 사고하게 하는 것은 공포의 힘이다. 입시에 떨어질지도 모른다, 일자리를 잃을지도 모른다, 재산이 줄어들지 모른다, 병이 날지 모른다. 그런 공포에 등을 떠밀려 사람은 공부를 하고, 자격증을 취득하고, 검사 수치를 알아보는 것이다. 어디서 읽었는데 사람의 화제는 거의 대부분 공포가 테마라고 한다. 날씨가 나빠질지도, 추워질지도, 월급이 깎일지도, 애인에게 차일지도, 기미가 생길지도, 애가 유괴될지도, . ..종류와 대소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모두 공포라는 것이다. -58쪽

기념품이란 물건은 어디나 지조가 없다. 스톤헨지 초콜릿, 스톤헨지 머그, 스톤헨지 티셔츠, 스톤헨지 스노볼... -109쪽

세로선이 천장 꼭대긱에서 교차하며 죽 늘어선 것을 보고 있노라니 누군가가 머리통을 위로 끌어당기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기독교 문화권의 하늘에 대한 집착과 동경은 동양인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하늘이 지켜보고 계신다.'가 아니라 '주님 곁으로'인것이다.
성당 안에서 보는 스테인드글라스가 또 무섭다. 빛을 통과시켜 본다는 데 종교적 의미가 있겠지만, 나도 모르게 참회하고 싶어지는 박력이 있다.
안마당을 둘러싼 회랑. 오랜 세월에 걸쳐 더해진 기념물. 그 모든 것이 고딕이라 돌아보다 보면 위압감에 피로가 왈칵 몰려든다. -118쪽

여행을 가면 그 사람의 실무 능력과 인생관이 여실히 드러난다. -164쪽

타라의 언덕은 아일랜드 사람의 마음의 고향이라 불리는 곳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아일랜드계인 스칼렛 오하라의 아버지가 자기 농장에 타라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그 때문이다. 스칼렛도 마지막에는 '타라로 돌아가자'고 결심하고.-165쪽

기호품이라는 존재는 문화 그 자체다. 살아가는 데는 결코 필요하지 않지만 필요하지 않기에 필요하다는 점에 인간이라는 동물의 특질과 부조리함이 드러나는 데다가, 동물인 인간을 불투명한 막으로 덮어 '인간'이라는 다른 존재로 바꿔준다. 그 부분을 야만이라느니 낭비라느니 몸에 나쁘다느니 하는 말로 물리적으로 깎아내면 속살이 날로 드러나 껄끄러워진다. 너무 과하게 씻으면 좋지 않다. 때를 너무 많이 벗겨내면 면역력이 떨어져 감기에 걸리지 않던가. 인간은 몸에 나쁜 것을 좋아하는 동물이고, 그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 -177쪽

다양한 미술관과 박물관을 보면서 든 생각인데, 전시는 '되는'전시와 '글러먹은'전시로 나뉜다. 영국의 전시는 매우 '되는'전시인데, 더블린은 '글러먹은'쪽이다. 즉, 관객의 관람 템포와 감각을 생각하지 않는다.
'되는'전시는 관객의 시선과 심리 상황을 읽는다. 내용에 완급이 있고, 본 것이 관객의 마음속에서 한 편의 드라마로 연속되도록 구성된다. 그렇게 때문에 별 대단한 물건을 전시하지 않아도, 어떻게 보여주느냐에 따라 감동이 있고 어떻게 진열하느냐에 따라 전시품 하나하나가 돋보인다. 그런 전시를 관람한 뒤에는 카타르시스가 있고 좋은 전시회를 봤다는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
영국은 그런 의미에서도 매우 노회하고 위엄을 부여하는 재주가 있는데, 더블린은 권위주의와는 거리가 먼, '그냥 있는 대로 죄 갖다 늘어놨다'싶은 꾸밈없는 서글서글함이 있다.-1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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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느끼는 낙타
싼마오 지음, 조은 옮김 / 막내집게 / 2009년 2월
품절


그런데 내가 지나갈 때는 군인묘지 철문이 열려 있고, 첫 번째 줄의 묘가 다 파헤쳐진 채 수많은 병사들이 죽은 형제들을 하나씩 새 나무관 속으로 옮기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니까 분명해졌다. 스페인 정부는 공식적으로는 오랫동안 아무 말도 없었지만, 사막 군대는 살아서도 사막에 있고 죽어서도 사막에 묻히는 법인데 지금 망자를 모두 파내어 함께 이 사막을 떠나려 하고 있다. 결국 스페인은 이 땅을 포기한 것이다! 끔찍하게도,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모래 속에서 한 구씩 한 구씩 나온 시체들은 백골이 아니었다. 마치 미라처럼 바싹 말라 쪼글쪼글해진 모습이었다.-88쪽

호세가 잠수복으로 갈아입자 남녀노수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주민들이 뛰어나와 구경했다. 20년 전에 잠수하는 사람을 보고 처음이라는 거였다. 당시 관광객 몇 명이 배를 타고 와서 산소통을 매고 물속으로 들어갔는데, 반시간 후에 올라와 보니 배 위에서 어부들이 울면서 기다리고 있더란다. 관광객들이 다 물에 빠져 죽은 줄 알았다는 것이다.-1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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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 일기 - 아프리카의 북서쪽 끝, 카나리아에서 펼쳐지는 달콤한 신혼 생활
싼마오 지음, 이지영 옮김 / 좋은생각 / 2011년 4월
절판


추억이란 정말이지 엄청나게 놀라운 것이다. 슬펐던 것은 점차 희미해지는 반면, 행복했던 시간은 기억을 거듭할수록 더 선명해지니 말이다.-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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