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장인들의 아틀리에
이지은 지음, 이동섭 사진 / 한길아트 / 200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저자의 전작인 '귀족들의 은밀한 사생활'을 무척이나 재미있게 읽었기에, 혹 다른 책도 있나 싶어 검색했더니 짠 하고 나온 책이다. 리뷰가 하나도 없기에 어떤 책일까 ^^ 기대하는 마음으로 두근거리며 읽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저자가 유럽의 장인들을 만나 며칠간 인터뷰한 내용을 엮은 책인데 인터뷰 내용과 함께 장인들이 만드는 물건들의 역사와 제작방법 등이 나오기 때문에 단순한 인터뷰집 정도로 보기엔 너무 아까운 책이다. 앤티크를 전공한 사람답게 전문적인 내용을 쉽게 술술 풀어내는 능력이 있다.

유럽장인들이기에 내가 이때껏 알고있던 장인들과는 다른 느낌의 장인들이 등장한다. 문화권이 다르기에 나로선 알지도 못했던 분야의 장인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도자기장인, 나전칠기 장인에 익숙하던 나에게 종 만드는 장인, 열쇠 장인, 안경 장인의 등장은 무척이나 신기하게 보였다 ^^

장인들이 어떻게 이 길에 들어섰고, 어떤 과정을 거쳐서 지금의 위치에 올랐는지 또 현대사회에서 장인은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 등을 이야기해주는데 유럽에서 손 꼽히는 장인들이기에 그들의 삶 하나하나가 모두 영화고 드라마이다. 그런 마치 소설같은 부분과 풍속사적인 요소들이 더해져서 나에겐 더 좋았던 책이다. (내가 좋아하는 2가지를 한 권에 책에서 즐길수 있다니^^)

이 책에서 무척 재미있었던건 열쇠장인인 분. 생떽쥐베리의 후손이라 성에서 살며 작업을 하는데 ^^(귀족이니까) 자기가 만든 헬리콥터에 어린왕자 삽화를 프린트 해놓았다. 이거 정말 볼 만하다 ㅋㅋㅋㅋ

또 인쇄분야의 장인도 있는데 그 부분을 읽으며 책이 활자만으로도 말 할 수 있단 걸 알게 되었다. 활자를 배치하는 간격, 잉크의 농도, 활자판을 누르는 압력의 미묘한 차이가 만들어 내는 아름다움.

모든 장인들이 자기만의 프로정신을 보여주었지만...가장 가슴찡하게 봤던 건 상아조각을 만드는 장인의 손. 평생 동한 작업을 한 그의 손은 닳고 닳아 한 두 마디씩 짧고 뭉툭하다. 평생을 매진한다는 것, 인생을 바친다는 것, 무엇인가에 열정을 쏟고 손가락이 닳을 정도로 몰두한다는 것이 무척이나 경이롭고 아름답고 존경스러웠다.

지금은 아니지만 대학 새내기 때 의류학과에 속한 신분이었을 때. 경주였던가? 으리으리한 한옥의 고기집에서 식사를 하고 산책을 하는데 그 음식점의 사장이란 사람이랑 대화를 할 기회가 생겼다. 그 시절 난 고3때부터 진로를 바꾸라는(?) 주변의 압박에 무지하게 시달렸기에. 아..이런 사업 할 정도로 돈 많은 사람이면 역시나 나보고 돈버는 길로 가라고 그러겠군..하며 별 생각 없이 부모님 옆에 서있었는데 ...내 전공을 물은 그 사장의 반응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캬..의류학과..디자인...세상에 그것만큼 멋진 직업이 어디있니. 창조하는 일. 이건 아무리 시대가 발전하고 기술이 발전해도 기계가 할 수 없는 일이거든.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얼마나 좋니."

기대와 엇갈렸기에 더 충격(?)이 컸겠지만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당시엔 나에게 저렇게 창조의 경이로움을 말해준 이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그 사장 아저씨 앞에서 막 가슴이 두근거렸었더랬다. 이젠 그 창조의 길에서 한 발 물러났지만 아직도 맘 속엔 창조에 대한 선망이 자리잡고 있다. 그 사장 아저씨 맘과 똑같다. 세상에 창조보다 더 멋진 일이 어디 있을까! 그래서 이 책이 나에겐 무척이나 특별하다...

책 상태 좋고 편집도 이쁘고 내용 알차고 다 좋은데 딱 한가지 걸린다. 바로 사진. 분위기 살리려 그러는지 어린왕자 사진 빼고는 다 흑백인데 답답했다...보기 힘든 장인들의 작품을 흑백으로 봐야하는 답답함이란..ㅠ,ㅠ

그것 빼곤 다 좋았던 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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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다감 18 - 완결
박은아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7년 8월
절판


사람들과 사람들이 만나서 겪게 되는 변화들 중, 가장 긍정적인 혜택을 본 사람은 한결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결이, 넌 정말 많이 변했어. 네가 저녁거리 사는 걸 도와달라는 나링 올 줄 누가 알았겠어?"
"그러게 말야. 예전엔 상상도 못했어. 그런데 갈수록 생각 이상으로 내가 너한테 많이 기대고 있다는 걸 알게 돼. 새엄마가 쓰러지셨을 때는 너무나 확실하게 알았어. 다시 어릴 때로 거슬러 올라가서 생각해 봐도 역시 너하고 알게 된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 지금도 이렇게 옆에 있는게 마음이 놓이고...그리고 앞으로도 네가 어떤 형태든 자연스럽게 내 일상 속에 스며들어있었으면 좋겠어"

정말 한결이는 사람을 어쩌지도 못하게 묶어두는데 선수다. 그럼에도 미워할 수가 없다. 아마도 내 주변에 가장 가까이, 오래 머물러 있을 사람은 신새륜도 아니고 학교 선배도 아니고 앞으로 직장에서 만날 다른 누구도 아닌 한결일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한결이도 누군가를 만나 가정을 꾸리겠지. 나는 한결이의 주변 어딘가에서 이 녀석이 해달라는 건 다 들어주고 있을 거다. 안 봐도 그림이 된다. 그렇게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고 다들 변해갈텐데-129쪽

나만 변하지 못한 채-
'그 시간'에 머물러 있을까봐- 그런게 너무나 무섭다.-130쪽

"여자애가 아무데서나 자냐? 머리가 다시 짧아졌네"
-네가 머리 긴 걸 싫어했으니까
"사실 긴 머리가 더 좋았어.
-괜찮아 또 기르면 돼
"넌 고등학교 때하고 똑같구나. 이래서 여기에 오는게 싫어 . 내가 변하지 못하는 건 너 때문이야. 내 말 잘들어. 이번에 널 보러 온 건 아냐. 넌 너무 그대로라서 실망스러울 지경이야. 그러니까 내 탓하지 말고 실컷 변해버려. 그렇지 않으면 다음에 보게 될 때는 못 본 척 하고 지나가 버릴 거니까..."-172쪽

"사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기분이 너무 이상했어. 뭘 입어도 나한테 어울리지 않는 것 같고 초라하게만 느껴지는 거야. 사실 내가 입고 싶었던 건 민이 같은 웨딩드레스 였는지도 몰라. 이젠 나도 뭔가..달라져야 할 때가 정말로 와버린 것 같아."
",,,예전에도 얼핏 얘기했었지만-네가 괜찮다면 내가 입게 해줄게."
"푸핫"
"이상하다구?"
"응- 너무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이상해."-190쪽

"기대에 못 미쳐서 미안한데 난 이렇게 살래. 억지로 뭔가 바꾸는 건 너무 힘들어"-200쪽

실컷 변해버려. 지금하고만 다르면 돼.지금의 이런 네가 지나치게 좋으니까--2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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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04 14: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정다감 18 - 완결
박은아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7년 8월
평점 :
절판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길 때마다 파라다이스 키스가 떠올라 초조한 심정이 되었다. 새드엔딩이라도 그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겠지만 이 만화만큼은 초기의 그 발랄함을 잊지 말고 (그냥) 해피엔딩이 되어주길 바랬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 감수성이 10대와 맞닿아 있는 시절에 보는 마지막 순정만화일지도 모르니까요. 제발. 근데, 해피엔딩인거 같은데 새드엔딩일때보다 더 아픈 내 마음은 뭘까요.

십대의 성장기와 연애담을 버무린 순정만화야 차고 넘친다. 이때까지 그런 류의 만화는 아주 많이 보아왔다. 그 중에 뛰어난 작품도 많았다. 근데 유독 다정다감만큼 슬프게 느껴지는 작품은 없었었다. 어리버리하고 외모도 평범한 여주인공이 잘생기고 돈 많은 남자 주인공 둘의 사랑을 받는다는, 이 진부하고도 비현실적인 스토리의 결말이 왜 그렇게도 내 이야기 같던지, 왜 슬프다 못해 서럽기까지 하던지.

십대에서 이십대로, 시간은 흐르고 모든 것은 변한다. 모든 것이 변하는 그 순간을 작가가 참 잘 그려내었다. 모든게 변해가는데 나는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고, 알지 못하는 사이에 시간은 지나가고 언제나 함께 하던 누군가와는 멀어질수 밖에 없고 앞만 보고 달리던 날만 계속될 줄 알았는데 어느새 과거를 그리워하고 있다.

"넌, 미래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 있어? 직업 같은 건 둘째치고 앞날에 대한 풍경을 머릿속에 떠올려 본 적이 있냐구. 니 옆에 누가 있을지, 누구랑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예를 들어 5년 후의 생일날에. 일찍 결혼했을지도 모르지. 누군가와 맛있는 걸 먹고 수다를 떨고. 그렇게 보내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네가 생각하는 그 애들은 그 자리에 없는 거야. 모두 네가 앞으로 알아가야 할 사람들이라고 상상해본 적 있냐구. 그런 풍경을 구체적으로 생각하면 씁쓸해지지만-. 미래에도 어떻게든 연이란 걸 이어가겠지- 하는 생각은 들어."

성장만화에서 주인공들이 모두 각자의 꿈을 찾아 환하게 웃으며 희망을 얘기하는 바로 그 '공식'과 대조적으로 다정다감은 성장의 결과로 찾아오는 쓸쓸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젠 더 이상 하루종일 붙어었을 수 없는거야. 각자의 길을 향해 발걸음을 내 딛는다는 건 다른 한편으론 이별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과거에 아파하고, 과거의 사람을 잊지 못해 하루하루를 보내는 주인공. 변할 수 없어. 변할 수 없는 게 바로 내 모습이니까.

아이러니하게도 - 변할 수 없는 주인공이기에 변화에 슬퍼하느라 발랄하고 헤헤거리며 웃던 모습을 잃고 만다. 두 남자주인공 사이에서 조마조마해하고 눈물흘리고 애간장 태우던 그 여자아이가 이젠 어느정도 담담하고 차분한 사람이 되는구나.

하지만 해피엔딩이니까, 그 긴 방황의 끝에 행복을 만나는 주인공.

판타지일테다. 판타지래서 좋다.

 

 

이 책은 너무도 적나라하게 '우리의 십대가 얼마나 반짝거리고 아름다웠는지. 그리워서 미치겠습니다. 눈물이 나도록 그립습니다.'라고 말한다.

압니다. 알아요. 그런데 자꾸 후벼파주신다. 젠장. 친절하게 반짝이는 10대와 쓸쓸한 20대의 모습을 어쩜 그리 자연스럽게 연결해주시는지. 너무 아프잖아요.

99년부터 07년도까지 작가도 많이 변했겠지. 어색하던 펜선은 이제 간 곳이 없다.

이런 구질구질한 리뷰는 다 그냥 내 감정의 찌끄러기일 뿐이고. 혹 만약 바그너님이 이 리뷰를 보신다면 - 당신의 재능에 감사합니다. 당신의 바람대로 제 추억을 이야기 할 때 다정다감을 빼 놓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 되었지요. 지금처럼 열심히 좋은 작품 많이 해 주세요. 고마워요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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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리풀말미잘 2007-09-24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완결이 나왔군요. ^^ 9권까지는 열심히 읽어주셨던것 같은데 말이죠. 완결도 나왔으니 재도전한번 해 봐야겠어요. 라일라님 평점도 좋고.

LAYLA 2007-09-26 21:44   좋아요 0 | URL
저도 한꺼번에 쭈욱 보고 싶네요. 그럼 또 느낌이 다를거 같아요. 이런식으로 끝낼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은근 바그너님은 새드엔딩, 이런 쪽을 좋아하는거 같아요 ^^

marryAlice 2009-08-19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점에서 주인공이 마지막에 행복을 찾았다고 여기시는지 궁금하네요.... ㅠㅠ 전 결말을 보고 완전 가슴 아파서요..... 물론 완전 새드앤딩인건 아니지만 결코 행복을 찾았다고;; 말하진 못하겠어요 ㅠㅠ 물론 훌훌 털어버리고 열심히 살아갈거라 믿지만요 ㅠㅠㅠ 아 ㅠㅠㅠ 신새륜의 결혼을 진짜 이해할 수가 -_-; 없어요;;; 진짜 말도 안된다는 생각만 드네요..... 아무리 할아버지 때문이라지만 그게 말이 되는지;;; 그렇게 둘이 절절매면서 이혼은 왜 안하는지;;; 부인에게도 실례인데....!!! ㅠㅠ
 
여자들의 유쾌한 질주
사단법인 한국여성민우회 지음 / 민연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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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참 이쁘다. 표지도 이쁘고, 편집도 이쁘고 거기다가 읽기 편하고, 종이도 가볍고 사이즈도 딱 좋다 ^^

처음 읽어나갈 땐 '언니네 방' 시리즈와 비슷하려니 했는데 다 읽고 나선 언니네 시리즈와 확실히 구별되는 이 책만의 무게와 분위기를 느낄수 있었다.

언니네 시리즈과 음 마치 작은 언니의 이야기 였다면,  이 책은 결혼하고 직장에서 육아와 커리어의 경계에서 고군분투하는 큰 언니의 이야기 같다고 해야할까?

더 알차고 묵직하고 관대하며, 다양한 소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냥 겉으로 보기엔 '한국여성민우회'에서 엮은 이 책이 웹상의 글을 모아 엮은 언니네 방 보다 더 정치적이고 과격할 것 같지만 두 가지 다 읽어본 소감은 오히려 그 반대라는 것.

그냥 느낌이 그랬다. 언니네 방이 예민한 감수성의 소녀, 어린 여자가 상처를 받고 치유하는 과정에서 여성주의를 만나 성장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면

여자들의 유쾌한 질주는 젊음의 불안함과 혼란의 시기를 견뎌낸 든든한 큰 언니가 생활속에서 어떻게 여성주의를 실천하며 살고 있는지, 부딪힘의 고통을 통해 터득한 관대함과 여유로움이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그래서, 육아, 직장 내 성차별, 가족 등 일상적인 소재의 이야기가 책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으며..책의 원래 컨셉과 관련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성적 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다.

실제 여성이 직장에서 부닥치는 차별에 대해 사례별로 ^^; 구체적으로 알 수 있어서 좋았고 육아와 관련해서도 마냥 남의 일만은 아니기에 '과연 나라면' 이라는 맘으로 읽을 수 있었다.

직장 내 차별의 경우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차별 받고 있는지, 여성이 겪는 갈등이 어떠한 것인지 개인의 경험을 통해 생생하게 그려지므로 여성주의가 왜 필요한지 의구심을 갖는 사람들이나, 실생활에서 여성이 무슨 차별을 받는다는 건지 전 모르겠어요. 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경우 이 책을 읽음으로써 가볍게 타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볼 기회를 얻을 수 있을 듯 하다. 페미니즘에 관심은 있는데 페미니즘 이론서 읽는건 죽어도 못하겠다면 이것으로 시작해도 좋을거 같아요.

이미 여성주의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좋아할듯하고. 음..나는 나의 10년 후, 20년 후는 어떤 모습일까, 이 책을 통해 희미하게나마 그려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지금보다 훨씬 열악한 상황에서 지금을 만들어낸 큰언니. 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 나 역시 지금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더 나은 미래를 만들수 있으리라는 작은 희망을 보았다는 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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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20 1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9-23 03: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04 11: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미래사 한국대표시인 100인선 33
윤동주 지음 / 미래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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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살구나무 그늘로 얼골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어,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어오는 이, 나비 한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어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었든 자리에 누어본다.


-1쪽

바람이 불어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꼬 부는데

내발이 반석우에 섰다.



강물이 자꼬 흐르는데

내발이 언덕우에 섰다.
-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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