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언덕>을 읽다보면 작가인 에밀리 브론테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저 황야의 목사관에서 자란 어린 소녀가 어떻게 스스로를 유폐하고 오직 글쓰기에 매달렸는지, 아무런 명성도 위로도 없는 삶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감내했는지, 소리 없이 퇴장하는 배우처럼 죽음을 맞이했는지에 대해 곱씹어보게 된다. 작가는 누구나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대해 쓴다. 아무리 음침하고 어두운 이야기라고 해도 그 안에는 작가가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아름다운 것이 들어 있기 마련이다. 


-정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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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2-01 13: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다음 읽을 책이 폭풍의 언덕인데 이 글 머리속에 잘 넣어두고 염두에 두면서 읽을래요. 에밀리 브론테가 쓰지 않고는 견딜수 없었던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었을지 찾고 싶어서요.

LAYLA 2022-12-03 00:21   좋아요 0 | URL
저도요!^^ 지금까지 읽는 게 괴로워서 저런 생각은 못해봤는데...그 고통스러울 정도의 격정 속에어떤 아름다움이 있는지 잘 봐야겠어요.
 
사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59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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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은 아시다시피 마음의 병을 앓는 중환자여서 이곳에 머물 때는 근처의 여관을 겸한 요릿집으로 날마다 소주를 마시러 출근하고, 사흘에 한 번은 우리 옷을 내다 판 돈을 들고 도쿄 쪽으로 출장을 갑니다. 하지만 괴로운 건 이런 일 때문이 아닙니다. 저는 다만 제 생명이 이런 일상생활 속에서 마치 파초 잎사귀가 떨어지지 않고 썩어 가듯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절로 썩어 가는 모습이 생생하게 예감되는 것이 두렵습니다. - P79

6년 전 어느 날 제 가슴에 아스라이 무지개가 걸렸고 그건 연애도 사랑도 아니었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그 무지개 빛깔은 점점 또렷해져 저는 지금껏 한 번도 그걸 놓친 적이 없습니다. 소나기가 지나간 맑은 하늘에 걸리는 무지개는 이윽고 덧없이 사라져 버리지만, 사람의 가슴에 걸린 무지개는 사라지지 않는 모양입니다. - P80

기다림. 아아, 인간의 생활에는 기뻐하고 화내고 슬퍼하고 미워하는 여러 가지 감정이 있지만, 그래도 그런 건 인간 생활에서 겨우 1퍼센트를 차지할 뿐인 감정이고 나머지 99퍼센트는 그저 기다리며 살아가는 게 아닐까요. 행복의 발소리가 복도에 들리기를 이제나저제나 가슴 저미는 그리움으로 기다리다, 텅 빈 공허감. 아아, 인간의 생활이란 얼마나 비참한지!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좋았겠다고 모두가 생각하는 이 현실. 그리고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헛되이 뭔가를 기다려요. 너무 비참해요. 태어나길 잘했다고, 아아, 목숨을, 인간을, 세상을 기꺼워 해보고 싶습니다. - P95

나 역시 이렇게 로자 룩셈부르크의 책을 읽는 자신을 아니꼽게 여기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나름대로 깊은 흥미를 느낀다. 이 책의 내용은 경제학에 관한 것이지만, 경제학으로만 읽는다면 참으로 시시하다. 너무나 단순하고 뻔한 사실뿐이다. 아니, 어쩌면 나는 경제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내겐 너무 따분하다. 인간이란 원래 쩨쩨하며 영원히 쩨쩨하다는 전제가 없으면 도무지 성립되지 않는 학문으로, 쩨쩨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분배의 문제건 뭐건 아예 흥미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이 책을 읽고 다른 면에서 묘한 흥분을 느낀다. 그것은 이 책의 저자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낡은 사상을 모조리 파괴해 나가는 저돌적인 용기이다. 아무리 도덕을 거스를지라도, 사랑하는 사람 곁으로 거침없이 내달리는 유부녀의 모습마저 떠올리게 된다. - P107

파괴 사상. 파괴는 슬프고 애처롭고 아름답다. 파괴하고 다시 짓고 완성하려는 꿈. 일단 파괴하면 완성할 그 날이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그렇다 해도 사랑하기 때문에 파괴해야만 한다. 혁명을 일으켜야만 한다. 로자는 마르크시즘에 일편단심 슬픈 사랑을 했다. - P107

행복감이란 비애의 강바닥에 가라앉아 희미하게 반짝이는 사금 같은 것이 아닐까? 슬픔의 극한을 지나 아스라이 신기한 불빛을 보는 기분.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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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문학의 이해 고려대학교출판부 인문사회과학총서 31
오탁번, 이남호 지음 / 고려대학교출판부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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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세상을 표현하는 매우 고급한 수단이지만, 세상의 모든 것을 언어로 다 옮길 수는 없다. 언어는 유한하고 세상은 무한하다. - P36

우리가 서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이러한 생략된 부분 또는 비지정영역의 많은 부분을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짐작과정을 서사적 추론이라고 말한다. 서사의 이해에서 서사적 추론, 즉 서사적 틈새를 채워 맞추는 일은 필수적이다. 이런 점에서 서사를 이해하는 일은 그림조각 맞추기 놀이에 비유될 수 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것은 개수가 모자라는 그림조각을 가지고 전체 그림을 맞추어 그리는 일인데, 그럼조각이 없어 빈 곳은 스스로의 상상력으로 채워넣어야 하는 것과 흡사하다. - P41

일반적으로 민담이나 전설이나 전래동화와 같은 옛날 이야기들은 그림조각 맞추기가 수월하다. 그것들은 비지정영역을 많이 갖고 있긴 하지만 그 영역은 대개 서사적 연속성에 별로 요구되지 않는 영역이거나 아니면 소박한 상상력으로 채워질 수 있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현대소설은 오히려 비지정영역을 적게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을 채워넣으려면 상당히 구체적인 체험과 정보 그리고 고급한 상상력이 요구된다. 이것은 현대소설을 옛날 이야기들보다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하나의 요소이기도 하다. - P41

지혜나 교훈이라는 것은 이미 육질이 분해된 후의 영양소와 같은 것이어서 독서의 즐거움과는 직접 관련이 없거나 적다. - P45

거의 모든 서사는 사건의 중간에서 시작된다. 서사가 끝나는 곳도 사건의 중간이다. 사건은 그 뒤로도 계속되지만, 서사는 그 뒤의 이야기를 하지 않음으로써 결말을 짓는다. 옛날이야기들은 대개 주인공의 결혼이나 죽음으로 끝이 난다. 서사가 끝이 나더라도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뿐이지 그것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서사의 끝은 사건의 완전한 종결이 아니라 어떤 ‘기대감의 충족‘이라고 할 수 있다. - P85

문학 역시 삶의 고통과 슬픔을 간접 체험시켜 주는 것이다. 사람들은 문학을 통해서 슬픔과 고통을 간접 체험하게 되고, 그것에 대한 내성을 키우게 된다. - P210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소설병에 걸리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이 이야기에 빠지는 것은 특정한 현실적 목적 때문이 아니다. 그냥 이야기의 재미를 기대하고 또 그것에 빠지는 것이다. 서사문학 속에는 단순한 오락적 재미에서부터 심오한 진리를 맛보는 재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폭넓은 즐거움과 이로움이 있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소설병 혹은 이야기병에 걸리는 것을 두려워하기는 커녕 오히려 자진해서 걸리기를 희망해 왔던 것이다. -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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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쇼핑을 좋아해 쏜살 문고
무라카미 류 지음, 권남희 옮김 / 민음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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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남자의 거짓말은 인생을 즐겁게 해 준다. 죄가 없다. - P32

살라미와 보리된장은 서민적이어야 맛있다는게 내 지론이다. 누군가 서유럽 살라미를 기념 선물로 사 가고 싶어하면 나는 반드시 드라이브인의 살라미를 추천한다. - P55

쇼핑을 안 하면 차츰 쇼핑이 즐겁다는 뇌이 회로가 끊어져 쇼핑 때위 상관없어진다. 이를테면 멋진 넥타이를 발견해도 별 생각이 없다. 참고로 섹스도 비슷하다. 줄곧 섹스를 하지 않으면 성적 욕구 자체의 회로가 끊긴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 그런 건 주의해야 한다. 그러니 경제적으로 파탄 나는 경우를 제외하고, 갖고 싶은 상품이 있으면 사는 편이 좋다. 특히 외국에서는 또 다음에 올 때 사야지, 망설이지 말고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바로 사야 한다. - P67

쇼핑이 기분을 좋게 해 주는 이유는 갖고 싶은 것을 손에 넣어서만은 아니다. 갖고 싶은 것을 고르고 사는 행위는 자본주의적인 자유의 상징이다. - P130

명품은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소속된 조직에서 개인으로 이행하는 과도기 사회에서, 자신의 경제력과 감각을 어필할 수 있는 유효한 아이템이 됐다.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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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의 종소리 스가 아쓰코 에세이
스가 아쓰코 지음, 송태욱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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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은 "열두 살 때 처음으로 타자기를 받았을 때"라고 이야기를 꺼내서 깜짝 놀랐다.

"열두 살 때라고요?"
"그래요."

자기 타자기를 갖다니, 당시 우리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사치였다. 그런데 더넘 수녀님은 아무렇지 않게 ‘열두 살 때 받았다‘고 말해버리는 것이다. 아무리 미국인이 부자라 해도 꽤 귀하게 자란 것이 틀림없었다. 놀란 우리를 완전히 무시하고 수녀님은 말을 이었다.

"처음으로 타자기를 받았을 때, 아버지가 그러셨어요. 앨리스, 잘 기억해둬라. 타자기와 만년필과 칫솔만은 절대 다른 사람한테 빌려줘선 안 된다." - P75

됴코에서 대학원을 다니던 무렵, 두 명의 여자 친구와 셋이서 매일같이 만나 이야기를 했다. 한 사람은 경제학을, 또 한 사람은 철학을 전공했는데 우리의 화제는 공부를 제외하면 거의 매일 똑같았다. 여자가 여자다움이나 인간의 존엄을 희생하지 않고 학문을 계속하려면, 혹은 결혼만을 목표로 두지 않고 사회에서 살아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 셋 다 가톨릭 신자였고, 가족의 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대학에 진학하고 또 대학원까지 간 탓에 대상이 분명하지 않은 부채의식을 느끼는 때가 잦았다. 꾸물거리지 말고 어서 시집이나 가. 싫으면 수도원에 들어가든가. 한 선배가 그런 말을 했을 때도 반발심이 들었다. 스스로 길을 만들어가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당시 읽었던 생텍쥐베리의 문장이 나를 동요시켰다. "스스로 대성당을 짓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완성된 대성당에서 편하게 자신의 자리를 얻으려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 P155

그리스도의 오심을 세상에 널리 알린 세례요한은 성인이 되자 홀로 황야로 떠나 고행하면서 그리스도를 애타게 기다렸는데, 그리스도처럼 화려하게 제자들을 거느리지도 못하고 이렇다 할 일화도 남기지 못한 채 헤롯 왕의 진노를 사 처형당하는 것으로 고독한 생애를 마쳤다. 어찌 생각하면 그는 삶의 열매가 아니라 과정에만 정열을 불태운 사람이었다. - P164

어머니는 아홉 남매 중 끝에서 두번째로, 오빠 넷, 언니 셋, 그리고 여동생 하나가 있었다. 추억담에 등장하는 어머니의 오빠들과는 거의 교류가 없던 나와 여동생은 만난 적 없는 외삼촌들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었다. 무사의 자손답게 읽기 어려운 한자로 된 개성적인 이름을 지닌 외삼촌들 주변에는 데이고쿠 대학의 은시계며 전국육상선수권 등, 늘 얹짢은 기색으로 우리 일상을 불깋하게 위협하던 아버지에게서는 들을 수 없던 반짝거리는 ‘공훈담‘이 몇 개씩 따라다녔고,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그들의 호쾌한 웃음소리가 공상을 자극했다. - P243

죽음을 앞두고도 아버지는 여전히 젊은 날의 여행을 생각하고 있었다. 파리에서 심플론 고개를 넘어 밀라노, 베네치아, 트리에스테까지, 분주한 시간 속을 달려 도시의 소란에서 소란으로 젊은 그를 데려다준 푸른 열차를 잊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비행기 안에서 내내 움켜쥐고 있던 와곤릿 사의 파란색 침대차 모형과 흰색 커피잔을, 병자가 놀라지 않도록 살며시 침대 옆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곁눈으로 그것을 보던 아버지의 의식이 점점 희미해져갔다. - P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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