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부다비에서 경유하는 20시간에 가까운 비행이었다. 인천에서 아부다비까지가 10시간 정도였는데 생각보다 너무 힘들어서 당황스러웠다. 생각해보니 마지막으로 여행한 건 2년 전 정도라도 10시간을 비행한 건 또 그 보다 훨씬 전의 이야기이다. 만석의 비행기에 중국인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새로운 풍경. 아부다비에서 2시간의 지연을 겪고 어찌어찌하여 목적지에 도착했다. 거의 15년만의 유럽이었다.
유럽은 그대로였다. 그러니, 유럽이 예전보다 초라해보인다면 그건 유럽의 탓이 아니라 한국과 서울이 지난 15년 동안 미친듯 발전하고 좋아졌기 때문이다. 인천공항은 코로나로 손님이 없는 동안 오히려 잘 되었다는 듯이 인테리어를 더 세련되게 고쳐서 흠잡을 것이라곤 전혀 없는 수준이었는데 취리히 공항의 모습은 예전 그대로였고-15년 전엔 예뻐보였고 이제 보면 좀 유행이 지나간듯한-화장실은 더럽게 더러웠다. 공항에서 도시로 나가는 기차는 에어컨이 작동하지 않았다. 와이파이도 (당연히) 제공되지 않았다. 기차를 타고 지나치는 풍경은 그림같이 아름다웠는데 서울이 그동안 너무나도 멋져진 탓에 이젠 이곳의 풍경에 감명받기보단 심드렁하기만 했다. 여기선 대도시라지만 한국의 지방 소도시 외곽쯤에 가까운 인구밀도가 짐작되는 낮은 층수의 맨션들을 보며 이 곳의 삶을 이리 저리 상상해보았다. 어느 각도로 보아도 노잼일 것이 분명해서 오징어 게임이 왜 그리 격한 사랑을 받았나 잘 이해가 되었다. 그런 거라도 보지 않으면 이 완벽한 햇살과 녹음과 정적 속에 지겨워 죽을거 같지 않을까.
강가의 호스텔에 체크인을 하고 시내로 나갔다. 횡단보도 앞에 서서 차가 뜸해지길 기다렸더니 자전거를 달리던 금발의 아가씨가 일부러 자전거를 멈추어 차를 막고서는 건너라고 눈짓해주었다. 지도를 들고 서 있었더니 동네 아저씨가 다가와 말했다. "내가 잘 모르지만 아는 건 가르쳐 줄게" 도심의 작은 분수들은 여름 동안은 사람이 들어가서 작은 수영장처럼 사용할 수 있게 개방한다고 안내가 붙어 있었는데, 동네 주민들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뛰어 들어 놀고 있었다. 한국으로 치면 중고등학생쯤 되는 아이들도 물놀이를 즐기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여자 아이들은 비키니 탑을 벗고 가슴을 드러낸 채 또래의 남자아이들과 물을 튀기다 신이 나서 춤을 췄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아트바젤은 입구까지 갔다가 그들만의 분위기에 약간 마음이 뒤틀려 '피카소와 엘 그레코가 있는데 왜 신진작가의 그림을 굳이 봐야 하지?'싶어서 파인아트뮤지엄으로 발길을 돌렸다. 미술관의 몇 개층과 몇 개 건물을 쏘아다니며 한참 그림을 보다 창 밖을 우연히 보았는데 미술관 맞은 편의 오래된 저택 하얀 담벼락에 누군가가 라커로 이런 문구를 써놓은게 보였다.
WE DON'T NEED MORE SUCCESSFUL PEOPLE
WE NEED MORE STORYTELLERS, URBAN GARDNERS, AND LOVERS ALL KIND.
나는 그 순간 생각했다. 이런 사람들에게 과연 오징어 게임을 보여줘도 되는 걸까.
저녁으로는 맥주 한 잔만을 마셨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창가 밖으로 세찬 강물소리가 들렸지만 전혀 소음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7시간쯤 깊이 내리 잤는데 최근 몇 주간 가장 길고 깊게 잔 잠이었다. 잠을 제대로 자기 위해서 지구를 반바퀴나 돌아야 할 일인가?
아침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눈 옆자리의 여성은 독일에서 독일문학을 가르치는데 한국 드라마를 많이 보다 보니 한국어가 듣기에 좋고 이제는 한국 외의 국가에서 만든 영상물은 연기가 어색해서 보기 싫다고 했다. 헐리우드식 연기는 과장이 많고 인위적이라 느낀다는데, 한국 콘텐츠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많이 보았지만 이런식으로 콘텐츠의 기준이 한국이 되었다는 말은 처음 들어서 너무 신기했다. 어쨌든 나는 나의 궁금증을 물었다. 독일 문학 중 무엇을 추천해주고 싶으세요?
율리 체의 작품들. 그리고 도리스 되리는 롸이팅에 대한 에세이를 출판했다고 하는데 아직 한국어로 번역이 되지는 않았음을 확인했다.
오기 전에는 한국에서의 일들이 너무 머리가 아파서 이 곳에 와서도 마음이 괴롭지 않을까 걱정했었다. 그렇지만 이 곳에 오니 마음이 풀어지고 잠이 온다. 친절한 사람들에게 나도 어색하게 웃어주고 그러다 보면 내가 해야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고 싶은 이야기가 흘러 나온다. 한국에서는 왜 옆자리의 누군가와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하고 어느 전시가 좋은지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일까? 물론 진짜 궁금한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의 삶은 한국에서의 삶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며 한국에서는 그런 일상의 로맨스는 기대할 수 없지만 마켓컬리가 있다. 알라딘은 주문하면 바로 다음 날 내가 보고 싶은 책을 배달해준다. 혼자 있는 것이 견딜 수 없으면 강남역으로 가 아무런 의미도 목적도 없이 미친 듯이 시끄러운 어느 카페, 정 아니면 맥도날드라도 들어가서 소음 속에 누구도 아닌 존재로 그 어떤 주목도 받지 않으며 있는 듯 없는 듯 앉아 있을 수 있다. 그렇다. 나는 15년 전과 달라진 유럽이 알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15년 동안 달라진 내가 알고 싶었고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느낄지가 궁금했다. 돌아가는 비행기는 아직 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