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의 종소리 스가 아쓰코 에세이
스가 아쓰코 지음, 송태욱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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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은 "열두 살 때 처음으로 타자기를 받았을 때"라고 이야기를 꺼내서 깜짝 놀랐다.

"열두 살 때라고요?"
"그래요."

자기 타자기를 갖다니, 당시 우리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사치였다. 그런데 더넘 수녀님은 아무렇지 않게 ‘열두 살 때 받았다‘고 말해버리는 것이다. 아무리 미국인이 부자라 해도 꽤 귀하게 자란 것이 틀림없었다. 놀란 우리를 완전히 무시하고 수녀님은 말을 이었다.

"처음으로 타자기를 받았을 때, 아버지가 그러셨어요. 앨리스, 잘 기억해둬라. 타자기와 만년필과 칫솔만은 절대 다른 사람한테 빌려줘선 안 된다." - P75

됴코에서 대학원을 다니던 무렵, 두 명의 여자 친구와 셋이서 매일같이 만나 이야기를 했다. 한 사람은 경제학을, 또 한 사람은 철학을 전공했는데 우리의 화제는 공부를 제외하면 거의 매일 똑같았다. 여자가 여자다움이나 인간의 존엄을 희생하지 않고 학문을 계속하려면, 혹은 결혼만을 목표로 두지 않고 사회에서 살아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 셋 다 가톨릭 신자였고, 가족의 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대학에 진학하고 또 대학원까지 간 탓에 대상이 분명하지 않은 부채의식을 느끼는 때가 잦았다. 꾸물거리지 말고 어서 시집이나 가. 싫으면 수도원에 들어가든가. 한 선배가 그런 말을 했을 때도 반발심이 들었다. 스스로 길을 만들어가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당시 읽었던 생텍쥐베리의 문장이 나를 동요시켰다. "스스로 대성당을 짓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완성된 대성당에서 편하게 자신의 자리를 얻으려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 P155

그리스도의 오심을 세상에 널리 알린 세례요한은 성인이 되자 홀로 황야로 떠나 고행하면서 그리스도를 애타게 기다렸는데, 그리스도처럼 화려하게 제자들을 거느리지도 못하고 이렇다 할 일화도 남기지 못한 채 헤롯 왕의 진노를 사 처형당하는 것으로 고독한 생애를 마쳤다. 어찌 생각하면 그는 삶의 열매가 아니라 과정에만 정열을 불태운 사람이었다. - P164

어머니는 아홉 남매 중 끝에서 두번째로, 오빠 넷, 언니 셋, 그리고 여동생 하나가 있었다. 추억담에 등장하는 어머니의 오빠들과는 거의 교류가 없던 나와 여동생은 만난 적 없는 외삼촌들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었다. 무사의 자손답게 읽기 어려운 한자로 된 개성적인 이름을 지닌 외삼촌들 주변에는 데이고쿠 대학의 은시계며 전국육상선수권 등, 늘 얹짢은 기색으로 우리 일상을 불깋하게 위협하던 아버지에게서는 들을 수 없던 반짝거리는 ‘공훈담‘이 몇 개씩 따라다녔고,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그들의 호쾌한 웃음소리가 공상을 자극했다. - P243

죽음을 앞두고도 아버지는 여전히 젊은 날의 여행을 생각하고 있었다. 파리에서 심플론 고개를 넘어 밀라노, 베네치아, 트리에스테까지, 분주한 시간 속을 달려 도시의 소란에서 소란으로 젊은 그를 데려다준 푸른 열차를 잊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비행기 안에서 내내 움켜쥐고 있던 와곤릿 사의 파란색 침대차 모형과 흰색 커피잔을, 병자가 놀라지 않도록 살며시 침대 옆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곁눈으로 그것을 보던 아버지의 의식이 점점 희미해져갔다. - P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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