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분 지나고까지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0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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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 파도가 부서지면서 밀려가는 식으로 이렇게 깔끔하지 못하게 늘어지기만 하는 것은 결코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사실 나는 자연파 작가도 아니고 상징파 작가도 아니다. 요즘 자주 들리는 신낭만파 작가는 더더욱 아니다. 나는 이들 주의를 드높이 표방하며 남의 주의를 끌 만큼 내 작품이 고정된 색을 지나고 있다고 자신할 수 없다. 또 그런 자신은 불필요한 것이다. 나는 그저 나라는 신념을 갖고 있을 뿐이다.

다가와, 자네 정말 못 마시나? 이상하군. 술도 못 마시는 주제에 모험을 사랑하다니. 모든 모험은 술로 시작하는 거네. 그리고 여자로 끝나지.

글쎄, 나중에 생각해보면 모든 게 재미있기도 하고 또 모든 게 시시하기도 해서 나야 잘 분간이 안 되지.

이보게, 교육은 일종의 권리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뭐 완전히 속박이네. 아무리 학교를 졸업해도 먹고사는 게 힘들다면 그게 무슨 권리라고 할 수 있겠나? 그렇다고 지위는 아무래도 좋으니까 멋대로 무슨 짓을 해도 상관 없느냐 하면 또 그런 것도 아니니 말일세. 지독하게 사람을 속박하네. 교육이 말이야.

나는 어떤 의미에서도 가문을 떨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다만 더럽히지 않을 만큼의 식견을 머리에 넣어둘 뿐이다.

지요코의 말이나 행동이 때로 맹렬하게 보이는 것은 그녀가 여자답지 않고 거칠고 막된 점을 안에 숨기고 있어서가 아니라 너무나도 여자답고 상냥한 감정을 전후 사정을 생각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이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지요코가 갖고 있는 선악과 시비의 분별은 학문이나 경험으로부터 거의 독립해 있다. 그저 상대를 향해 직감적으로 타오를 뿐이다. 그러므로 상대는 경우에 따라 벼락을 맞은 듯한 느낌을 받는다. 지요코의 반응이 강하고 격렬한 것은 가슴속에서 순수한 덩어리가 한꺼번에 다량으로 튀어나온다는 의미지, 가시나 독이나 부식제 같은 것을 내뿜거나 끼얹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설사 아무리 격하게 화를 낼 때도 나는 지요코가 내 마음을 깨끗이 씻어준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경우가 지금까지 여러 차례 있었다는 것이 그 증거다. 드물게는 고상한 사람을 만났다는 느낌마저 들었을 정도다. 나는 세상 앞에 홀로 서서 지요코야말로 모든 여자 중에서 가장 여성스러운 여자라고 변호해주고 싶을 정도다.

나는 또 감정이라는 자신의 무게로 넘어질 것 같은 지요코를, 운명의 아이러니를 이해하지 못하는 시인이라며 깊이 동정한다. 아니, 때에 따라서는 지요코 때문에 전율한다.

나도 남자인지라 앞으로 어떤 여자와 격렬한 사랑에 빠지지 말란 법도 없다. 하지만 나는 단언한다. 만약 그 사랑과 같은 정도의 격렬한 경쟁을 해야 원하는 사람을 얻을 수 있다면 나는 어떤 고통과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손을 품속에 넣은 채 초연히 연인을 버릴 생각이다. 남자답지 못하다고, 용기가 부족하다고, 의지가 박약하다고 남들이 평한다면 그런 평은 얼마든지 감내할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고달픈 경쟁을 하지 않으면 내 사람이 되기 힘들 만큼 어디로 가도 좋은 여자라면 그렇게 고달픈 경쟁을 할 가치가 없는 여자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 여자를 억지로 안는 기쁨보다는 상대의 사랑을 자유의 들판에 놓아주었을 때의 남자다운 기분으로 내 실연의 상처를 쓸쓸하게 지켜보는 것이 양심에 비추어 훨씬 더 만족스럽다고 생각한다.

지요코는 때로 천하에 단 한 사람인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나는 나아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미래에 대해서는 눈을 딱 감고 과감하게 나아가볼까 하는 생각을 하는 중에 그녀는 순식간에 내 손에서 벗어나 생판 남이나 다름없는 표정을 짓곤 했다. 내가 가마쿠라에서 보낸 이틀 동안 이미 이런 밀물이나 썰물이 두세 차례 있었다. 어떤 때는 자신의 의지로 이 변화를 지배하면서 일부러 다가오기도 하고 또 일부러 물러나기도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희미한 의혹마저 내 가슴에 일게 했다. 그뿐이 아니다. 나는 지요코의 엄행을 한 가지 의미로 해석하고 또 그 직후에 똑같은 것을 완전히 반대되는 의미로 해석하고는 사실 어느 쪽이 옳은지 몰라 공연히 화가 치밀었던 일도 적지 않았다.

나는 강한 자극으로 가득 찬 소설을 읽을 수도 없을 만큼 약한 남자다. 강한 자극으로 가득 찬 소설을 실행하는 일은 더더욱 할 수 없는 남자다. 나는 자신의 기분이 소설이 되려는 순간 놀라서 도쿄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므로 기차 안에서 나는 반은 승자였고 반은 패자였다. 비교적 승객이 적은 이등칸 안에서 나는 스스로 쓰기 시작해서 스스로 찢어버린 듯한 이 소설의 뒷부분을 이리저리 상상했다. 거기에는 바다가 있고 달이 있고 물가가 있었다. 젊은 남자의 그림자와 젊은 여자의 그림자가 있었다. 처음에는 남자가 격해져서 여자가 울었다. 나중에는 여자가 격해져서 남자가 달랬다. 결국에는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조용한 모래 위를 걸었다. 또는 액자가 있고 다다미가 있고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그곳에서 젊은 남자 둘이 의미 없는 언쟁을 벌였다. 점차 뜨거운 피가 올라와 볼이 붉어졌고 결국 두 사람다 자신의 인격을 손상시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마지막에는 일어나 서로 주먹을 휘둘렀다 .

고백하자면 나는 고등교육을 받은 증거로 오늘날까지 내 머리가 남보다 복잡하게 작동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새 그 작동에 지쳤다. 무슨 업보로 이렇게까지 일을 잘게 쪼개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걸까 생각하니 한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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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의 핀볼 - 무라카미 하루키 자전적 소설, 개정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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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때 뭘 했어요?
-여자에게 빠져 있었지.

1969년, 우리의 해였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
-헤어졌어
-행복했나요?
-멀리서 보면 대개는 아름답게 보이는 법이거든.

쥐는 눈 앞에 늘어서 있는 여섯 개의 빈 맥주병을 바라보았다. 병 사이로 제이의 뒷모스이 보였다. 지금이 은퇴할 적당한 시기일지도 모른다고 쥐는 생각했다. 이 술집에서 처음으로 맥주를 마신 것은 열여덟 살 때였다. 수천 병의 맥주, 수천 개의 감자튀김, 주크박스에 있는 수천 장의 레코드. 모든 것이 마치 작은 배에 밀려드는 파도처럼 왔다가는 사라져갔다. 나는 이제 맥주를 마실 만큼 충분히 마신 게 아닐까? 물론 서른이 되든 마흔이 되든 맥주는 얼마든지 마실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마시는 맥주만은 다르다고 그는 생각한다. 스물다섯 살, 은퇴하기에는 나쁘지 않은 나이다. 감각이 있는 인간이라면 대학을 나와서 은행의 대부계에서라도 일하고 있을 나이다.

테네시 윌리엄스는 이렇게 썼다. 과거와 현재에 대해서는 있는 그대로. 미래에 대해서는 `아마도`이다, 라고. 그러나 우리가 걸어온 암흑을 되돌아볼 때, 거기에 있는 것 역시 불확실한 `아마도` 뿐인 것 같았다. 우리가 확실하게 지각할 수 있는 건 현재라는 한순간에 지나지 않지만, 그것조차도 우리의 몸을 그냥 스쳐 지나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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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나의 느긋한 작가생활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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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하는 일이 있어도 되는 것 아닌가?"

사람에게는
못하는 일과
하고 싶지 않은 일
하려고 했다가 실패한 일
그것도 역시,
그 사람을 만드는 거죠.
잘하는 일만이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니에요.


열정.
그리고 센스.

중학교 때 선생님이 이런 얘길 한 적 있습니다.

"누구라도 책 한권쯤은 쓸 수 있다. 자기 인생을 쓰면 되니까. 별 것 아냐. 두 권째를 쓰는 사람이 프로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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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엽 감는 새 2 - 예언하는 새 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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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가 어찌되었던 누군가를 전적으로 믿을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올바른 자질 중의 하나죠

인생이라는 것은 그 와중에 있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한정되어 있소. 인생이라는 행위 속으로 빛이 들어오는 것은 한정된 아주 짧은 기간이오. 어쩌면 수십 초일지도 모르오. 그것이 지나가 버리면, 또 거기에 나타난 계시를 잡는 데 실패해 버리면, 두 번째 기회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소.

나와 구미코 사이에는 처음부터 뭔가 서로 마음이 통하는 것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만나자마자 짜릿하게 느껴지는 충동적이고 강렬한 것이 아니라 훨씬 더 온화하고 부드러운 종류의 것이었다. 이를테면 두 개의 작은 불빛이 막막한 어두운 공간을 나란히 전진하는 중에 어느 쪽에서라도 할 것도 없이 점점 가까이 다가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여기에 있는 나는 `새로운 나`고 두 번 다시 원래의 장소로 되돌아가는 일은 없다.

미워한다는 것은 길게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와 같은 것이에요. 그것이 어디에서부터 드리워졌는지, 많은 사람들의 경우 본인도 잘 모르죠.

시간을 들이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돼. 충분히 무언가에 시간을 들이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제일 세련된 형태의 복수란다.

오카다 씨도 아시는 바와 같이 여기는 피비린내 나는 폭력적인 세계입니다. 강해지지 않고서는 살아 남을 수가 없어요. 그러나 그것과 동시에 어떤 작은 소리도 흘려 보내지 않도록 조용히 귀를 기울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아시겠어요? 좋은 뉴스는 대부분의 경우 작은 목소리로 말해집니다. 부디 그것을 기억해 주세요.

누군가 떠난 후, 그곳에 혼자 남아 살아간다는 것은 분명히 힘든 일이오. 그것은 잘 알고 있소. 그러나 이 세상에 구해야 할 것을 아무것도 갖지 못하는 적막함만큼 가혹한 것은 달리 없다오.

어쩌면 나는 패배할지도 모른다. 나는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어디에도 이르지 못할지도 모른다. 있는 힘을 다했지만 이미 모든 것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잃어버린 후일지도 모른다. 나는 단지 페허의 재를 허무하게 손에 쥐고 있고,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나 혼자뿐인지도 모른다. 내 편에 내기를 걸 사람은 이 주위에 아무도 없을지도 모른다. `상관없어` 하고 나는 작지만 단호한 소리로 거기에 있는 누군가를 향해 말했다. `이것만은 분명해. 적어도 나에게는 기다려야 할 것이 있고, 찾아내야 할 것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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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
마루야마 겐지 지음, 고재운 옮김 / 바다출판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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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노골적인 꿍꿍이는 간파할 수 있습니다만 약간 조심스럽게 유도하는 함정에는 손쉽게 빠지고 맙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당신이 자신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일을 하면서 현실을 경험했지만, 그 세월을 장난으로 보내 버린 어린애에 지나지 않습니다. 당신은 끝없이 도망칠 수 있는 시대에 살았습니다. 이리저리 도망쳐 온 당신에게는 어느 직장이니 직급이니 하는 것이 세상의 전부였습니다. 그런 뜨뜻미지근한 물에 있다가 밖으로 내던져지자 바로 감기에 걸리고 만 것입니다.

품격이란 어떠한 달콤함에도 어떠한 회초리에도 결코 굴하지 않고, 자신이 비록 틀렸더라도 권위나 권력에 아양을 떨지 않는 의연함 그 자체입니다. 내 생각으로 판단하고, 혼자일지라도 행동할 때에는 행동한다는 독립된 한 인간에게만 적합한 말입니다.

점점 다가오는 죽음의 시기는 당신이 최후의 최후까지 진정한 당신으로 있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하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정년퇴직하기 직전까지 당신은 일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먹고살 수 없다, 가족을 부양할 수 없다는 강박관념에 내몰려 독립된 인간이라면 갖고 있어야 할 갖가지 조건을 남김없이 잘라서 팔아 왔습니다. 긍지, 자존심, 자유, 존경 등과 같은 인간으로서 갖고 있어야 할 보물을 몽땅 다른 사람과 조직에 싼값에 팔아 온 것입니다. ...당신이 갈피를 못 잡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당신은 늘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어린아이의 정신 그대로 살아왔습니다. 자신을 단련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느닷없이 노후의 세계로 끌려 들어온 것입니다. ...당신은 강한 사람이 아닐지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이 생각하는 정도로 약한 사람도 아닙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떠넘기며 살아온 오랜 세월의 계산서를 깔끔히 정산만 하면 거기에서 본래의 진정한 당신이 분명 떠오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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