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의 초상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7
헨리 제임스 지음, 최경도 옮김 / 민음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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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여행은 끝났고, 영원한 휴식이 오기 전 마지막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말끔히 면도한 갸름한 얼굴은 이목구비가 균형 잡혔으며, 평온하지만 예리한 표정을 담고 있었다. ...그 얼굴은 그가 성공한 삶을 살았지만 남들의 시샘을 받을 만큼 성공만 한 것이 아니라, 해롭지 않은 실패도 상당히 경험했음을 말해 주는 듯했다. 그는 분명 남자로서 대단한 경험을 했던 것이다.

많은 일들이 발생한 집을 좋아한다면 피렌체로 가야지. 특히 죽음이라면 더 그래. 난 세 사람이 살해되었던 오래된 대저택에 살고 있거든. 알려진 것만 세 명이고, 그 밖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더 있는지는 몰라.

글쎄, 난 원서를 좋아하지 않아. 번역본이 좋지. 이사벨은 외국어로 씌었어. 그래서 이해하지 못하겠소. 아마 그녀는 아르메니아 사람이나 포르투갈 사람하고나 결혼해야 될걸.

지금의 방식대로 산다는 건 형편없이 번역된 양서를 읽는 것과 같았다.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게 될까 아니면 미워하게 될까?
-어느 쪽이든 그 친구는 전혀 상관 없을 거야. 남자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든 조금도 개의치 않으니까.
-그렇다면 남자로서 난 그 여자를 싫어해야 할 것 같은데. 괴몰 같은 여자겠지? 꽤나 못생기고.
- 아니, 무척 예뻐.
- 여성 기자라. 스커트를 입은 신문 기자란 말이지? 빨리 만나 보고 싶은걸.
- 그 친구를 비웃는 건 쉬워도 그녀만큼 용감해지는 건 쉽지 않아.

나 자신을 속박하지 않겠다는 소원에는 어떤 잘못도 없다고 생각해. 난 결혼을 통해 인생을 시작하고 싶지 않아. 여자가 할 수 있는 다른 일들도 많으니까. ...난 다른 젊은이들이 하듯이 인생을 찾고 싶은 게 아니야. 그냥 나 자신에 대해 살펴보고 싶을 뿐이야

- 너 좋을 대로 하자꾸나. 그런데 그게 좋은 일인지 의문이구나. 넌 그 아이의 돛에 바람을 불어넣고 싶다고 하는데, 너무 많이 불어넣는 것 아니냐?
- 순풍에 돛을 달고 항해하는 걸 보고 싶은걸요!
- 단지 네 즐거움을 위해서로구나
- 즐거움이죠. 커다란 즐거움이 될 거예요.
- 글쎄, 난 모르겠다. 요즘 젊은이들은 내가 젊었을 때와 사뭇 달라. 나는 젊었을 때 좋아하는 여자가 생기면 그저 보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거든. 그런데 넌 내게 없었던 망설임이 있고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걸 생각하는구나. 그러니까 이사벨은 자유인이 되고 싶어 하고, 그 아이가 부자가 되면 돈 때문에 결혼하지는 않을 거라는 뜻이지. 그렇게 할 아이라고 생각하니?
- 그럼요. 하지만 이사벨은 과거 어느 때보다 돈이 없어요. 그녀의 아버지가 돈을 낭비하는 습성 때문에 모두 써 버렸대요. 지금 그녀가 먹을 거라고는 성찬에서 남은 빵 부스러기뿐이고, 남은 재산이 얼마나 변변찮은지도 모른대요.

- 집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요.
- 그건 좀 모자라는 말이군요. 나 정도의 나이가 되면 모든 인간에겐 껍질이 있다는 것을 참작해야 한다는 걸 알게 돼요. 껍질이란 인간을 둘러싼 모든 것을 말하는 거예요. 이것으로부터 고립된 인간이란 있을 수 없답니다. ‘자아‘라는 건 뭐라고 해야할까요? 그건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서 끝나는 걸까요? 자아는 우리에게 붙어 있는 모든 것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가 다시 흘러나와요. 나는 나 자신의 대부분이 내가 골라 입는 옷에 있다는 걸 알아요. 그래서 물건을 아주 소중히 여긴답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지만 개인의 자아는 자신을 스스로 표현한 것이거든요. 집이며 가구, 옷, 우리가 읽는 책, 사귀는 친구, 이 모든 것이 모두 자아를 표현하지요.

-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이모부님이 내게 그토록 많은 돈을 남기시려고 했던 것을 알고 있었어?
- 이사벨, 내가 알았든 몰랐든 무슨 문제겠어? 아버지는 고집이 센 분이셨는데.
- 왜 그런 일을 하셨을까?
- 칭찬하는 차원쯤 되겠지.
- 무엇에 대한 칭찬?
- 네가 너무나 아름답게 살아 준 것에 대한 칭찬.

이사벨은 얼마 동안 이모 곁에 있기로 했다. 이상한 충동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일반적으로 품위 있게 여겨지기를 무척 바랐고, 친척이 없는 젊은 숙녀란 잎이 떨어진 꽃 같은 인상을 지울 수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이것이 너에게 좋은 건지 아니면 저것이 좋은 건지 지나치게 생각하지 마. 양심을 너무 혹사하면 안 돼. 그러면 손끝으로 친 피아노처럼 엉망이 돼 버릴 거야. 보다 소중한 기회를 위해 양심을 보존해야 돼. 네 성격을 다듬으려고 너무 애쓰지도 말고. 그건 마치 팽팽하고 부드럽고 어린 장미꽃 봉오리를 잡아당겨 억지로 꽃을 피우게 하는 것과 같아. 너 좋은 대로 살다 보면 성격은 저절로 형성되는 거야.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오"
오스먼드는 감정이 거의 배제된 신중한 어조로 사랑 고백을 되풀이했다. 별 기대는 하지 않지만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야 안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남자의 말이었다.

그녀는 영리하고 너그러웠으며, 고상하고 자유로운 성격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어떻게 할 셈인가? 이런 질문은 잘못되었다. 여성 대부분이 이런 질문을 할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대부분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우아한 모습으로, 다소간 수동적인 자세로, 남자가 들어와 어떤 운명을 제시해주길 기다리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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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중위의 여자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32
존 파울즈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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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의 태도는 가뜩이나 경제적으로 착취당하고 있는 계급을 모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와 샘의 관계는 일종의 애정이나 인간적인 유대감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것은 새로운 풍요로움 속에 잠겨 있던 당시의 신흥 부자들 대다수가 자신과 하인들 사이에 차가운 장벽을 세워 놓은 것에 비하면 훨씬 좋은 것이었다.

찰스는 대대로 하인을 거느린 집안 출신이었다. 반면에 당시의 신흥 부자들은 하인을 부려 본 경험이 업슨 집안 출신이었다. 아니, 실제로는 그들 자신이 하인의 자식인 경우가 허다하였다. 찰스는 하인이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흥 부자들은 달랐다. 그래서 그들은 상대적으로 높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훨씬 혹독하게 하인을 다루었다. 그들은 하인을 기계로 만들려고 애썼다. 반면에 찰스는 하인이 어떤 면에서는 친구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요컨대 그가 샘을 데리고 있는 까닭은 더 좋은 기계를 찾을 수 없어서가 아니라, 샘을 통해 즐거움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에게서 높은 지성과 부드러운 감성, 그리고 유쾌한 냉담함을 보았다.

촌사람들은 도시의 노예들보다 진정으로 갗 있는 것과 훨씬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있다.

아내보다 못난 여자들도 있다는 생각에 위안을 얻는 남자가 있는가 하면, 아내보다 잘난 여자들도 있다는 생각에 짓눌려 괴로워하는 남자도 있다. 찰스는 이제 자기가 어느 쪽에 속한 남자인지를 유감스럽게도 너무나 잘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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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 되는 법
모신 하미드 지음, 안종설 옮김 / 문학수첩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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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가 되는 도약대다. 이것은 비밀도 무엇도 아니다. 하지만 좋은 것들이 늘 그렇듯이, 널리 알려진 사실이라 해서 쉽게 이루어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부를 향한 길에는 가끔 갈림길이 나오는데, 그 향배를 좌우하는 건 선택이나 욕망, 노력 등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순전한 우연이다.

독자들은 저자들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위해 일할 뿐이다. 조금 식상한 표현이라는 건 알지만, 바로 여기에 독서의 풍부함이 있다.

당신이 보기에 그녀는 변한 게 없는 것 같다. 처음 만난 지 반평생이 넘었으니 정말로 변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당신의 마음에 새겨진 그녀의 이미지가 겉모습에 의해 좌우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전세 계약은 인생이라는 다람쥐 쳇바퀴의 휴게소와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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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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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금주제도란 효과를 발휘한 전례가 없다.

불편함은 여행을 귀찮게 만들지만, 동시에 일종의 기쁨-번거로움이 가져다주는 기쁨-도 품고 있다.

생각해보면 나는 늘 비수기에만 이곳을 찾았다. 마치 화장을 지운 시간만 골라서 여자를 만나러 가는 것처럼...(스페체스 섬)

당연한 얘기지만, 섬은 어디 다른 곳에 가는 길에 훌쩍 들르듯 방문할 수 없다. 작정하고 그 섬을 찾아가든지, 아니면 영영 찾지 않든지. 둘 중 하나다. 중간은 없다.

세상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넓은데, 동시에 또한 내 발로 걸어서 돌아볼 수 있을 만큼 아담한 장소이기도 한 것이다.

한때 주민의 한 사람으로 일상생활을 보내던 곳을 세월이 한참 흐른 후 여행자로 다시 방문하는 기분은 제법 나쁘지 않다. 그곳에는 당신의 몇 년 치 인생이 고스란히 잘려나와 보존되어 있다. 썰물이 진 모래사장에 찍힌 한 줄기 발자국처럼, 선명하게.

그곳에서 일어났던 일, 보고 들은 것, 그때 유행했던 음악, 들이마신 공기, 만났던 사람들, 주고받은 대화. 물론 개중에는 즐겁지 않은 일과 슬픈 일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좋았던 일도, 그다지 좋다고 할 수는 없는 일도 모두 시간이라는 소프트한 포장지에 싸여, 당신 의식의 서랍 속에 향주머니와 함께 고이 담겨 있다.

보스턴에서는 내리쬐는 햇볕의 느낌도 다른 곳과 묘하게 다르고, 시간도 특별한 방식으로 흐른다. 빛은 약간 비스듬하게 쏟아지고, 시간은 약간 변칙적으로 흐르는....것처럼 보인다.

참, 던킨 도너츠도 보스턴 쪽에서 유독 편애받는 것 중 하나다. 당연히 이 도시에도 수많은 스타벅스가 존재한다. 그러나 완고한 보스턴 시민들은 길을 가다 문득 커피를 마시고 싶어지면 스타벅스보다 던킨 도너츠에 들어가는 쪽을 선호하는 것 같다. 비록 남녀 종업원들의 태도가 친절과는 거리가 멀고, 커피 맛이 그다지 인상적이라고도 할 수 없고, 의자와 탁자, 조명기구는 미니멀리즘의 극치를 달리고, 인터넷 환경 같은 개념에서 이렇다 할 배려를 찾아볼 수 없을 지라도.

나는 이 보트를 타고 난생처음 살아 있는 고래의 실물을 봤는데, 아무리 바라봐도 싫증나지 않았다. 저렇게 거대한 생물이 위장을 꽉 채우려면 엄청나게 많은 물고기를 먹어야겠구나 실감이 든다. 고래를 하루를 거의 고스란히 포식 작업에 소비한다. 살기위해 쉼 없이 먹는다고 할까, 쉼 없이 먹기 위해 산다. 말러의 심포니도 듣지 않는다. 예약녹화도 하지 않는다. 연하장도 쓰지 않는다. 트위터와 소개팅도(아마) 하지 않는다. 정기검진도 안 받는다. 물론 소설도 쓰지 않는다. 고래들에게는 그렇게 한가롭게 굴 여유가 없으니까.

그래서 나는 배 갑판에서 고래들을 구경하며 적잖이 철학적 성찰에 빠져든다. 우주적 견지에서 보면 그들의 생활방식과 우리 생활방식에 본질적으로 얼마나 큰 차이가 있을까? 보스턴 앞바다에서 무심히 정어리 떼를 쫓는 것과 말러 교향곡 9번을 집중해서 듣는 것의 의미가 얼마나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은 하나의 빅뱅과 또다른 빅뱅 사이의, 덧없는 일취지몽에 불과하지 않을까.

토스카나가 우수한 와인 생산지인 이유는 숲과 포도밭이 혼재한다는 점이에요. 숲은 포도밭의 풍부한 자양분이 되죠. 아주 중요한 사실이에요. 포도밭만 있으면 알게 모르게 토양이 척박해지거든요.

여행중에는 좀처럼 체중 관리가 안 된다. 그냥 포기하는 게 낫다.

다른 글도 아니고 여행기는, 여행 직후에 마음먹고 쓰지 않으면 좀처럼 그 생생함을 살릴 수 없습니다.

여행은 좋은 것입니다. 때로 지치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하지만, 그곳에는 반드시 무언가가 있습니다. 자, 당신도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로든 떠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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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산책자 - 강상중의 도시 인문 에세이
강상중 지음, 송태욱 옮김 / 사계절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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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아이텐티티란 무엇이었을까요? 간단히 말하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문제인데, 사실 아이텐티티는 한국어로 정체성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몇 개의 가면, 즉 페르소나를 쓰고 있는데 그 가면을 벗으면 그 사람의 정체가 보인다는 것이지요. 한편 일본에서는 (자기)동일성으로 이해됩니다. 원래의 어의를 보면 이것에 좀 더 가까운지도 모르겠습니다. 즉 나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은 어떤 것과 일치함으로써 명확해진다는 생각입니다. 예컨대 여성이라면 이렇다, 일본인이라면 이렇다 라는 어떤 것이 있고, 그 어떤 것에 가까운가, 먼가, 벗어났는가에 따라 자신의 아이덴티티가 결정됩니다.

사람은 모르는 타자와 교류함으로써 자신의 새로운 정체를 깨닫게 되는 법입니다. 그때 자신 안에서 자신이 몹시 싫어하는 타자를 발견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타자는 무척 가까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도시란 바로 그런 타자를 만나는 장소입니다. "도시는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이러저러한 배경이나 과거를 짊어진 사람을 받아들이면서 도시가 구축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일본에는 원래 신도와 불교를 절충하고 조화시키는 신불습합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꼭 신을 가볍게 여기는 행위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기에는 신이나 종교로는 좀처럼 얻을 수 없는 좀 더 일상적이고 절실한 위로나 구제가 있는 게 아닐까요.

여행은 흔히 인생의 전기가 되기도 하고, 뭔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것은 여행이 사람을 순수하게 `보는 사람`으로 만들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의 일상은 늘 뭔가를 위해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것으로 채워져 있는데, 여행을 떠나면 그것이 텅 비게 됩니다. `뭔가에 도움이 되니까`라는 생각과도, 공리적인 목적과도 전혀 상관없이 그저 `보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다양한 것들이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는 다들 어딘가 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무리를 하지 않는다면 공동체의 질서는 유지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고민이라는 것은 순수하게 사적이고 개별적인 것이며 그 사람의 내면적 문제이므로 자신과는 관계없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 알려지게 됩니다. 자살이나 우울증의 원인도 개인의 문제로 봉인되고, 그것에 부스럼 딱지를 만들듯이 자기 책임 이라고 말해졌습니다. 하지만 현대인은 사실 어떤 공통된 원인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를 사는 한 고민하는 것은 당연하고, 오히려 저는 좀 더 고민해도 좋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철저하게 고민하고 다시 한 번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이 살아가는 힘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 마음의 문제로 환원하는 내향적인 현상은 현대인의 미의식에서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나르시시즘이겠지요.

어학 습득은 분명히 이문화 이해에 필수적입니다만, 그 반대로 작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말을 할 수 있게 되면서 위화감이 깊어지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예컨데 외국인이 일본어를 조금이라도 하면 다들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 합니다. 그런데 말의 미묘한 느낌까지 알게 되어 인사이더로 들어오면 이번에는 위화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근데 넌 왜 여기 있는 거야?" 하며 배타적이 되곤 합니다. ...그래서 외국어를 상당한 수준으로 공부한 사람이 갑자기 높은 벽을 느끼는 일이 있습니다. 자신을 받아 주지 않는다는 실망감 때문에 반대로 국수주의적인 사람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느 문화에나 최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얇은 피막이 있고, 외부인이 그것을 뚫고 들어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일찍이 우리는 세계가 글로벌화하면 여러 가지 제약을 넘어설 수 있게 되어 모두가 행복해질 거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 반대였습니다. 문명이 고도화 하면 할수록 온갖 것들이 복잡하고 기괴해져 사회가 허약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1960년대와 같은 자유를 갈망하는 기풍은 사라지고, 오히려 사람들은 스스로 투명한 수조 속에 들어가 관리되기를 바라게 됩니다.

인생은 한 통의 성냥갑과 닮았다. 중대하게 취급하면 바보 같다. 중대하게 취급하지 않으면 위험하다. - 난쟁이 어릿광대의 말, 아쿠타가와

확실히 인생을 소홀히 취급하면 사람을 휩쓸리게 하는 재앙을 초래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생을 너무 소중한 것으로 생각해 겁쟁이가 되는 것은 그만두자고, 그 말을 만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상처받을 것을 두려와하지 말고 자신을 가둔 껍데기에서 나가자고 말입니다. 이 말로 저는 구원받았습니다.

현대와 같이 꽉 막힌 듯한 시대에는 그러한 자기 내부의 대화가 필요합니다. 앞에서 소개한 토마스 만의 마의 산에는 무엇을 위해?라는 의문에 "시대가 공허한 침묵으로 일관한다면, 좀 더 솔직한 인간성을 지닌 사람의 경우 그러한 사태로 인한 모종의 마비 작용은 거의 피할 수 없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가 자명하지 않은 시대는 젊은이를 우울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젊었을 때는 목적이 확실했습니다. 가난했으므로 하여튼 열심히 일해서 풍요로운 삶을 손에 넣자는 목표가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하며 멈춰 서서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이미 물질적으로 충족되어 있고 문화적으로도 나올 게 다 나와 버렸으니 그것을 고쳐 만들거나 반복할 뿐입니다. 저는 이를 아류의 시대라고 부릅니다만, 모든 것이 정점에 달하고 만 지금,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무엇을 위해 공부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명확한 답을 찾아내기란 어렵습니다. 끔찍한 이야기입니다만, 어떤 의미에서 명확한 답을 주는 것은 전쟁인지도 모릅니다. 전쟁을 하게 되면 그런 고민은 싹 날아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는 절망의 선택입니다. 따라서 그런 게 아니라, 오히려 이런 시대이므로 더욱더 문학과 마주하고 고민하며 스스로 답을 이끌어 냈으면 합니다. 어떤 책을 만났느냐에 따라 사람과의 만남은 달라지고, 어떤 사람과 만나느냐에 따라 책과의 만남도 달라집니다. 어떤 책과 만났느냐가 당신의 사람됨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대상과 일체화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닳고 닳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바로 그렇기에 라쿠고는 도회인의 문화인 것입니다. 이질적인 것이 뒤섞여 있는 도회에서는 곧바로 뭔가를 믿는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마을 공동체 사회에서처럼 예정조화적인 불문율로 움직이기는 어려우며 상대를 대상화하여 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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