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산책자 - 강상중의 도시 인문 에세이
강상중 지음, 송태욱 옮김 / 사계절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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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아이텐티티란 무엇이었을까요? 간단히 말하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문제인데, 사실 아이텐티티는 한국어로 정체성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몇 개의 가면, 즉 페르소나를 쓰고 있는데 그 가면을 벗으면 그 사람의 정체가 보인다는 것이지요. 한편 일본에서는 (자기)동일성으로 이해됩니다. 원래의 어의를 보면 이것에 좀 더 가까운지도 모르겠습니다. 즉 나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은 어떤 것과 일치함으로써 명확해진다는 생각입니다. 예컨대 여성이라면 이렇다, 일본인이라면 이렇다 라는 어떤 것이 있고, 그 어떤 것에 가까운가, 먼가, 벗어났는가에 따라 자신의 아이덴티티가 결정됩니다.

사람은 모르는 타자와 교류함으로써 자신의 새로운 정체를 깨닫게 되는 법입니다. 그때 자신 안에서 자신이 몹시 싫어하는 타자를 발견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타자는 무척 가까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도시란 바로 그런 타자를 만나는 장소입니다. "도시는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이러저러한 배경이나 과거를 짊어진 사람을 받아들이면서 도시가 구축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일본에는 원래 신도와 불교를 절충하고 조화시키는 신불습합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꼭 신을 가볍게 여기는 행위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기에는 신이나 종교로는 좀처럼 얻을 수 없는 좀 더 일상적이고 절실한 위로나 구제가 있는 게 아닐까요.

여행은 흔히 인생의 전기가 되기도 하고, 뭔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것은 여행이 사람을 순수하게 `보는 사람`으로 만들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의 일상은 늘 뭔가를 위해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것으로 채워져 있는데, 여행을 떠나면 그것이 텅 비게 됩니다. `뭔가에 도움이 되니까`라는 생각과도, 공리적인 목적과도 전혀 상관없이 그저 `보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다양한 것들이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는 다들 어딘가 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무리를 하지 않는다면 공동체의 질서는 유지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고민이라는 것은 순수하게 사적이고 개별적인 것이며 그 사람의 내면적 문제이므로 자신과는 관계없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 알려지게 됩니다. 자살이나 우울증의 원인도 개인의 문제로 봉인되고, 그것에 부스럼 딱지를 만들듯이 자기 책임 이라고 말해졌습니다. 하지만 현대인은 사실 어떤 공통된 원인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를 사는 한 고민하는 것은 당연하고, 오히려 저는 좀 더 고민해도 좋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철저하게 고민하고 다시 한 번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이 살아가는 힘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 마음의 문제로 환원하는 내향적인 현상은 현대인의 미의식에서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나르시시즘이겠지요.

어학 습득은 분명히 이문화 이해에 필수적입니다만, 그 반대로 작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말을 할 수 있게 되면서 위화감이 깊어지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예컨데 외국인이 일본어를 조금이라도 하면 다들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 합니다. 그런데 말의 미묘한 느낌까지 알게 되어 인사이더로 들어오면 이번에는 위화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근데 넌 왜 여기 있는 거야?" 하며 배타적이 되곤 합니다. ...그래서 외국어를 상당한 수준으로 공부한 사람이 갑자기 높은 벽을 느끼는 일이 있습니다. 자신을 받아 주지 않는다는 실망감 때문에 반대로 국수주의적인 사람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느 문화에나 최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얇은 피막이 있고, 외부인이 그것을 뚫고 들어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일찍이 우리는 세계가 글로벌화하면 여러 가지 제약을 넘어설 수 있게 되어 모두가 행복해질 거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 반대였습니다. 문명이 고도화 하면 할수록 온갖 것들이 복잡하고 기괴해져 사회가 허약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1960년대와 같은 자유를 갈망하는 기풍은 사라지고, 오히려 사람들은 스스로 투명한 수조 속에 들어가 관리되기를 바라게 됩니다.

인생은 한 통의 성냥갑과 닮았다. 중대하게 취급하면 바보 같다. 중대하게 취급하지 않으면 위험하다. - 난쟁이 어릿광대의 말, 아쿠타가와

확실히 인생을 소홀히 취급하면 사람을 휩쓸리게 하는 재앙을 초래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생을 너무 소중한 것으로 생각해 겁쟁이가 되는 것은 그만두자고, 그 말을 만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상처받을 것을 두려와하지 말고 자신을 가둔 껍데기에서 나가자고 말입니다. 이 말로 저는 구원받았습니다.

현대와 같이 꽉 막힌 듯한 시대에는 그러한 자기 내부의 대화가 필요합니다. 앞에서 소개한 토마스 만의 마의 산에는 무엇을 위해?라는 의문에 "시대가 공허한 침묵으로 일관한다면, 좀 더 솔직한 인간성을 지닌 사람의 경우 그러한 사태로 인한 모종의 마비 작용은 거의 피할 수 없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가 자명하지 않은 시대는 젊은이를 우울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젊었을 때는 목적이 확실했습니다. 가난했으므로 하여튼 열심히 일해서 풍요로운 삶을 손에 넣자는 목표가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하며 멈춰 서서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이미 물질적으로 충족되어 있고 문화적으로도 나올 게 다 나와 버렸으니 그것을 고쳐 만들거나 반복할 뿐입니다. 저는 이를 아류의 시대라고 부릅니다만, 모든 것이 정점에 달하고 만 지금,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무엇을 위해 공부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명확한 답을 찾아내기란 어렵습니다. 끔찍한 이야기입니다만, 어떤 의미에서 명확한 답을 주는 것은 전쟁인지도 모릅니다. 전쟁을 하게 되면 그런 고민은 싹 날아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는 절망의 선택입니다. 따라서 그런 게 아니라, 오히려 이런 시대이므로 더욱더 문학과 마주하고 고민하며 스스로 답을 이끌어 냈으면 합니다. 어떤 책을 만났느냐에 따라 사람과의 만남은 달라지고, 어떤 사람과 만나느냐에 따라 책과의 만남도 달라집니다. 어떤 책과 만났느냐가 당신의 사람됨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대상과 일체화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닳고 닳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바로 그렇기에 라쿠고는 도회인의 문화인 것입니다. 이질적인 것이 뒤섞여 있는 도회에서는 곧바로 뭔가를 믿는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마을 공동체 사회에서처럼 예정조화적인 불문율로 움직이기는 어려우며 상대를 대상화하여 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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