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사지사
비페이위 지음, 문현선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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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이 중국에 반환되자 상황은 급변했다. 홍콩 사람들은 벌떼처럼 선전 쪽으로 몰려들었다. 홍콩에서 선전으로 가는 건 아주 쉬웠다. 사내와 계집이 서로 끌어안는 것만큼이나. 백 년 만에 집으로 돌아왔는데, 어찌 끌어안지 않겠는가?

결혼식은 아주 간단히 치를 계획이었다. 제아무리 예쁘게 꾸며봤자 자신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겉치레가 되어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 맹인의 결혼식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가 어떤 방면에 뛰어난 재능이 있는지 모른다. 그런 재능이 밖으로 드러날 때 그 자신은 단지 한 가지 사실만 알 뿐이다. 해보니까 쉽구나.

욕망이란 사방으로 뚫린 길이다. 멀리서 보기에는 한줄기인가 싶지만 그 뼈대에 가까이 다가가 보면 무한히 복잡하고 무한히 굴곡진 가지들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연인 사이의 언어는 말이 아니라 말투다. 말투는 말 속에 숨은 뜻을 보여준다.

샤오쿵의 남자친구에 대해, 샤오쿵의 부모님은 단 한 가지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바람이라기보다는 명령이었다. 다른 것은 아쉬운 대로 넘어갈 수 있지만 시력에 대해서는 분명한 요구 사항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아예 보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 안 된다. 멀리 선전으로 떠나기 전날 밤, 부모님은 샤오쿵에게 분명히 말했다. 네 연애와 결혼에 대해 우리는 전혀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삶이라는 것은 ‘살아가는‘것이지, ‘더듬어가는‘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거라. 네가 전혀 앞을 보지 못하니, 우리는 너를 더듬어 가며 살아가는 남자한테는 절대로 시집보낼 수 없다!

샤오쿵은 줄곧 자기 감정이 지나치지 않도록 억누르고 경계했다. 그러나 젊은 여자가 처음으로 사랑의 감정을 느낄 때 경계심이라는 것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사랑은 천리 둑이 개미굴 하나에 무너지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개미와 같다. 샤오쿵은 자신의 천리 둑에 아주아주 작은 구멍을 하나 냈을 뿐이었다. 나중에 가서 어떻게 막아보려는 마음이 들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샤오쿵은 울어버렸다. 실컷 울고 난 뒤에는 사랑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우울함은 이자와 같아 굴리면 굴릴수록 커진다.

사랑은 입고 먹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땔감이나 쌀, 소금, 기름, 식초, 차 그리고 약 따위로 골치를 썩지 않는다. 사랑은 사람을 매혹한다. 설령 그것이 다른 사람의 사랑일지라도. 보기만이라도 하자. 보기만 해도 좋은 것이다.

타이라이는 이제 막 한 차례의 연애를 끝낸 참이었다. 한 남자가 연애 경험이 있는지 없는지, 결혼을 한 적이 있는지 없는지, 애가 있는지 없는지...진옌은 이런 문제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그녀가 신경쓰는 문제는 그 남자의 여자에 대한 태도, 특히 예전 여자친구에 대한 태도였다. 타이라이는 목숨을 건 사랑에서 이제 겨우 바닥을 치고 살아난 참이었다. 목숨을 건지자마자 태도를 바꾸어 곧바로 진옌에게 그 말을 내뱉는다면, 진옌의 마음은 도리어 차갑게 식어버리고 말 것이다. 진옌은 서두를 생각이 없었다. 사랑 고백은 푹 고아낸 곰국 같아야 하는 법.

- 타이라이, 나 예뻐요. 꽤 미인이라고요. 알고 있어요?
- 알아
- 한 번 만져봐요. 예뻐요?
- 예뻐.
- 다시 한번 만져봐요.예뻐요?
- 예뻐.
- 어떻게 예쁜데요?
귀타이라이는 난처했다. 그는 선천적인 맹인이었다. 예쁜 게 무엇인지 알 리가 없었다. 쉬타이라이는 한참을 묵묵히 숨을 참고 있다가 마치 선서라도 하는 것처럼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 홍사오러우(돼지고기 간장볶음)보다 예뻐

화촉동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섹스다. 그러나 그냥 섹스가 아니다. 성적 요소는 부차적일 수밖에 없다. 가장 사람의 마음을 끄는 것은 특수한 종류의 친밀감이다. 신랑과 신부는 부부이면서, 오빠오 ㅏ동생 혹은 누나와 동생이기도 하다. 서구적인 사고로는 이 점을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신랑이 어떻게 신부의 오빠가 될 수 있고 신부가 어떻게 신랑의 누이동생이 될 수 있겠는가? 그들은 패륜이라고 하겠지만 중국인에게는 이야말론 천륜과 인륜에 부합하는 일이다. 전혀 혼란스러운 것이 아니다. 이 점은 중국인들에게만 있고 중국인들만 이해하고 중국인이어야만 비로소 느낄 수 있는 정서다. 이것이 동양의 성이요, 정이다. 진옌은 좋아 죽을 것만 같았다. 옛사람들이 말하기를, 인생에는 세 가지 좋은 일이 있다고 했다. 화촉동방으로 첫날밤을 보내는 일, 장원으로 과거에 급제하는 일, 타향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는 일. 화촉동방을 맨 앞에 둔 것은 다 그럴 만한 까닭이 있어서일 것이다.

어떤 일이든 길게 봐야 한다. 길게 보면 삶은 아룸다운 것이다. 조급하게 굴지 말자.

닥터 왕은 한 선배가 해줬던 말을 떠올렸다. 맹인이고 여자였던 그 선배는 이렇게 말했었다. 돈이란 건 어린 자식과 같아. 잠깐 한눈을 팔거나 제대로 붙잡고 있지 않으면 순식간에 품에서 빠져나가고 말지.

몸 파는 여자는 그냥 파는 것이다. 난징 사람들이 늘 하는 말을 빌리면 그것은 ‘돈 고생‘이었다. 난징 사람들은 돈을 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돈을 버는 것은 무척 고생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그들은 돈을 번다고 하지 않고 돈 고생을 한다 라고 말했다. 그러나 몸 파는 여자들은 대개 이런 식으로 말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보다 더 적나라하게, 더욱 생동감 넘치게, 자신들의 일을 돈 맞기 라고 불렀다.

강물은 변함없이 동쪽으로 흘러간다.
(남당 황제 이욱의 사에 실린 구절로 강이 동쪽으로 흐르듯 사랑하는 마음이 항상 연인에게 향한다는 뜻)

닥터 왕은 희미하게 웃었다. 연애하는 사람은 모두 바보라는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사푸밍은 연애를 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그저 짝사랑에 빠진 것뿐이었다. 짝사랑을 하는 사람은 바보가 아니다. 그보다 더한 구제불능 머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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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허벅지 다나베 세이코 에세이 선집 1
다나베 세이코 지음, 조찬희 옮김 / 바다출판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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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잘 변한다. 가정이라는 냉장고 안에 잘 넣어 둔다고 해도 잘 상하고 잘 변한다.

사실 가정과 육친이란 것 모두 성을 기반으로 성립된 관계인데, 막상 구성이 끝나기만 하면 그 성적인 부분이 완전히 배제돼버린다. 그 점이 참으로 이상하다.

옛날에는 침소사퇴식 같은 게 있지 않았습니까.
네, 알지요, 장군 혹은 영주의 부인은 서른을 넘기면 부군의 침소에 드는 것을 스스로 사퇴하고 세상을 등진 채 살아간다는 거잖아요.

자신이 사는 집과 자신이 먹은 음식에 대한 뒷마무리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있어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남자아이가 그런 것 하나하나 신경 쓰다 보면 나중에 큰일 못해요." 엄마 본인은 이런 불평을 늘어놓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큰일이라는 게 대체 무엇인지 묻고 싶다. 대학에 들어가 일류 회사에 근무하는 것, 그래서 임원이 되는 것? 가만 보면 남자들이 한다는 그 큰일이라는 건 고작 돈벌이 아니면 전쟁에 우르르 끌려가는 것이다. 대항해시대는 이미 끝났다. 큰일을 여자가 하지 말라는 법도 없고, 남자 혹은 여자라는 이유로 가정 수업에 대한 구별이 생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일상생활 속에서 갓난아기처럼 손이 많이 가는 남자가 있다. 나는 아무리 귀여워도 이렇게 바보같은 남자는 사절이다. 빨래 하나 못하고 요리 또한 못해서 아내가 없으면 수염이 덥수룩해지고 주린 배와 분노를 부여잡으며 꾹 참는 것밖에 못하는 남자. 이런 남자는 무능한 바보라고 본다.


이와 마찬가지로 남자 없으면 어떻게 먹고 사느냐고 말하는 여자도 똑같은 존재다. 남자 없으면 외로워서 못 산다고? 그건 이해가 간다. 하지만 남자가 벌어다 주는 돈이 아니면 못 산다고 하는 여자도 난감하기로는 마찬가지다. 자기 힘으로 먹고 사는 것 또한 인간이 해야 할 뒷마무리일지도 모른다.

못 마신다고 해서 슬퍼하는 건 대인배가 아니지요. 대인배는 세끼 밥만 먹어도 취할 수 있답니다.

보통 오사카에서 장사꾼이라고 하면 칭찬이다. 장사하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인품이 좋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뭔지 속속들이 파악하고 자신의 요구 또한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접점을 찾기 위해 밀고 당기기도 하고 한 발 물러나기도 한다. 여러 가지 방법을 시험해 본 다음, 합의를 하지 못하더라도 바로 포기하지 않는다. "그럼 차나 한잔하실까요." 그렇게 차라도 한잔하면서 호흡을 가다듬고 사전 조사를 다시 한다. 그러면서 상대방의 성격이나 습관까지 파악해 이렇게 제시하면 저렇게 말할 거라는 것을 예측한다. ...그만큼의 일이 진행되려면 실없는 이야기도 꽤 많이 해야 한다. 실없는 이야기를 하면서 고객의 관심을 잃지 않으려면 역량이 필요하다. 역량은 인생 경험에서만 나온다. 그래서 오사카 사람은 그런 역량을 갖춘 남자와 여자를 보고 말한다."저 사람 장사꾼이로구먼." 반면에 역량이 없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은 월급쟁이야"라며 깎아내린다.

뭐라고 하시든 위로가 사랑으로 변화하는 일은 없습니다. 사랑은 언젠가 반드시 위로로 바뀌지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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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수지 박람강기 프로젝트 8
모리 히로시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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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은 좌우지간 좋은 작품을 쉴 새 없이 발표하는 수밖에 없다. 지금 발표한 작품이 다음 작품에 대한 최고의 홍보가 된다. 이것 말고는 홍보할 길이 없다고 봐도 좋다. 따라서 첫 작업 때는 의뢰한 측이 기대한 것보다 더 나은 결과물을 건네줘야 한다. 가격에 걸맞지 않은 고품질의 작품을 만들어 수지가 맞지 않는다고 느껴지더라도 그것을 홍보비라고 생각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많은 작품을 생산할 것, 그리고 마감을 지킬 것. 1년에 한 작품을 쓰는 식으로 느긋하게 창작해서는 설사 그 한 작품이 히트하더라도 금세 잊히고 말 것이다.

나는 내 작품이 만화로 제작되든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든 드라마로 제작되든 전혀 참견하지 않는다. 내가 갖고 있던 이미지와 달라지더라도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미지가 다르기 때문에 재미있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정도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형편없는 작품으로 제작되었다고 해도 원작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원작은 더 재미있어라고 수군거리며 홍보해 줄지도 모른다.

데뷔작이 20년을 두고 꾸준히 팔리는 것은 이 작품이 특별히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모리 히로시가 꾸준히 신작을 내 왔기 때문이다. 신작을 꾸준히 세상에 내보내면 서점 매대에 항상 신작이 진열되고 매체나 광고에도 꾸준히 이름이 등장한다. 신작을 읽어 보았지만 신통치 않았다. 그렇다면 잘 알려진 작품으로 하나 더 읽어 볼까, 하고 생각하는 독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작품 하나를 출간하고 그것이 충분히 팔릴 때까지 기다리는 태도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역시 신작을 꾸준히 내는 것이 작가라는 직업의 기본이라고 해도 좋다.

출판이라는 영역의 문턱은 예전보다 훨씬 낮아지고 있지만, 많이 팔기는 그만큼 힘들어지고 있다. 책을 냈다는 사실만으로 기뻐하고 있을 수는 없는 시절이다. 판매 부수를 정확히 파악하고 늘려 가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를 작가 스스로 궁리하여 전략을 세워야 한다. 출판사는 거기까지 생각해 주지 않는다. 그 사람보다 더 잘 팔리는 작가를 찾아내는 쪽이 더 쉽기 때문이다.

모리 히로시의 작품이 영상화에 어울리지 않는 까닭은, 소설이라는 마이너 영역이기에 가능한 거라고 볼 수 있는 금기적 전개가 많기 때문이다. 가령 윤리에 반하는 일,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일, 나아가 영문을 모르겠다, 종잡을 수 없는 부조리 괴이 영역이라도 소설이라면 가능하다. 마이너이기 때문에 자유로운 것이다. 마이너이기에 그 새로움을 알아봐 줄 수 있고 일정한 팬이 따라 준다. 만화에서도 잡지에 따라서는 이것이 가능하다. 그러니 티브이나 영화는 더 많은 대중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그 튀는 요소를 없애지 않을 수 없다. 누구에게나 광범위하게 사랑받는 내용, 보다 많은 사람이 납득할 만한 내용, 나아가 어디서도 불만이 나오기 힘든 내용으로 만들지 않으면 상품으로서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성공한 작가들) 대개 그런 사치를 부리지 않는다.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대상에 돈을 쏘당부을 뿐, 일반적인 사치를 부릴 필요를 못 느끼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것이 없는 사람은 늘 남을 부러워한다. 그래서 목돈이 들어오면 나도 그런 호사를 누리고 싶다, 즉 남들에게 부러움을 사고 싶다는 소망을 갖게 된다. 그러나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아는 조건이 그를 성공으로 이끄는 예가 많다. 그런 논리로 보자면 남을 부러워하는 사람은 성공하기 힘들다.

소설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소설을 써서 자비로 출판하면 된다. 그러면 소설가가 될 수 있다. 기술적으로 어려운 것은 없다. 인터넷으로 잠깐만 알아보면 된다. 그래서는 프로 소설가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 하는 의견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프로 소설가란 무엇인가 라는 개념이 문제가 된다. 집필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느냐의 여부인가? 아니면 서점에서 책이 팔리고 있는 사람을 말할까?

이렇게 개념을 운운하는 것은 참으로 당찮은 짓이다. 소설가는 본인이 자처하면 소설가인 것이다. 명함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자기 직함 앞에 ‘프로‘라는 말을 덧붙이는 작가는 없다. 그것은 ‘일류‘라는 말을 덧붙이는 사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터무니없는 짓이기 때문이다.

소설가 지망생이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은 첫 작품을 발표한 뒤 그 반응을 기다리며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다. 일단 투고했으면 반응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등의 한가로운 짓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 인터넷에 공개한 경우라도 반응 같은 걸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보다는 즉시 다음 작품을 집필해야 한다. 그것이 발표작에 대한최선의 지원 사격이기도 하다.

발표 후 다소 반응은 있을 것이다. 그것에 일희일비해서는 안된다. 부정적 반응에 낙담하지 않는 것이야 당연하지만, 긍정적 반응에 기고만장하는 것이 가장 나쁘다. 몇몇에게 칭찬을 받은들 그게 무슨 대수인가. 기분은 좋아지겠지만 얼른 잊어야 한다. 이런 조절을 못하면 프로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게 좋다.

분명히 말하지만 글은 누구나 쓸 수 있다. 초등학교 고학년만 돼도 글을 맛나게 쓸 수 있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아마 조만간 초등학생 작가도 등장하리라. 다만 몇 개 작품을 연달아 쓸 수 있는 사람은 글 좀 쓴다는 사람 중에서도 열에 하나 정도다. 데뷔한 뒤 10년 동안 줄기차게 쓸 수 있는 사람은 더욱 적다. 20년쯤 지나면 데뷔한 사람가운데 9할 이상이 사라진다 살아남는 것도 나름 혹독한 것이다.

작가로 살다 보면 도무지 글을 쓸 수 없는 상황에 빠진다고 한다. 나는 그런 걱정을 해 본 적이 없고 슬럼프를 겪어 본 적도 없다. 왜냐하면 나는 소설 집필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밥벌이니까 마지못해 쓰고 있을 뿐이다. 소설 읽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이 일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을뿐더라 남들한테 자랑할 만한 직업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슬럼프에 빠지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라고 짐작한다. 좋아하니까 쓴다는 사람은 려정이 식었을 때 슬럼프에 빠진다. 자랑할 만한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비ㅏㄴ과 비난을 받으면 의욕으 ㄹ잃는다. 그러니까 그런 감정적 동기만으로 버티면 언젠가 감정 때문에 글을 못 쓰게 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일이니까 쓴다는 사람은 슬럼프를 모른다. 글을 쓰면 쓴 만큼 돈을 벌 수 있다. 마음은 배반하지만 돈은 배반하지 않는다고나 할까. 수전노 같은 말본새로 들리겠지만, 정직하게 하는 말이다. 일이라고 생각하면 누구나 수전노가 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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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ainted Veil (Paperback)
서머셋 모옴 지음 / Vintage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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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you know, my dear child, that one can not find peace in work or in pleasure, in the world or in a convent, but only in one‘s soul.

some of us look for the way in opium and some in God, some of us in whisky and some in love. It is all the same way and it leads nowhi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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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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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마모토와 만나지 않게 된 후에도 언제나 그녀를 그립게 떠올렸다. 사춘기라는 혼란으로 가득 찬 안타까운 기간 동안 나는 몇 번이나 그 따뜻한 기억으로 격려받았고 치유받곤 했다. 그리고 나는 오랜 동안 그녀에게 내 마음속의 특별한 부분을 열어두었던 것 같다. 마치 레스토랑의 구석진 조영한 자리에 예약석이라는 팻말을 살며시 세워놓듯이 나는 그녀를 위하여 그 부분만은 남겨두었다.

필요한 것은 작은 일들의 축적이다. 단순한 말이나 약속뿐만이 아니라 작고 구체적인 사실을 하나하나 정성껏 쌓아가는 것으로 우리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봐, 세월이라는 건 말이지, 사람을 다양한 모습으로 바꿔놓는다고. 그때 너랑 이즈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난 몰라. 하지만 설사 무슨 일이 있었다 해도, 그건 네 탓이 아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든 그런 경험은 하게 마련이지. 내게도 있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그건. 누군가의 인생이라는 건, 결국 그 누군가의 인생인 거야. 네가 그 누군가를 대신해서 책임을 질 수는 없는 거라고. 여기는 사막 같은 곳이고, 우리는 모두 거기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는 거야. 초등학교 때 월트 디즈니의 사막은 살아 있다라는 영화 본 적 있지? 그거랑 마찬가지야. 우리가 사는 세계는 그 영화와 마찬가지 인거야. 비가 내리면 꽃이 피고, 비가 내리지 않으면 꽃은 시들어버린다고. 벌레는 도마뱀에게 잡아먹히고, 도마뱀은 새에게 먹히지. 그러다 언젠가는 모두 죽지. 죽고 나서 텅 비게 되는 거라고. 한 세대가 죽으면 다음 세대가 그 자리를 대신하지. 그게 세상사의 이치야. 모두들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지. 죽는 방법도 제각기 다르고. 하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남는 건 사막뿐이지. 정말로 살아 있는 것은 사막뿐이라고.

나는 딱히 복장에 신경을 쓰는 편은 아니다. 필요 이상으로 옷에 돈을 들이는 것은 멍청한 짓이라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일상생활을 하기에는 청바지와 스웨터만 있으면 충분했다. 하지만 내게는 나름의 작은 철학이 있었다. 가게의 경영자라면 자기 가게에 오는 손님들이 되도록이면 이런 차림을 하고 와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차림을 본인 스스로도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함으로써 손님이나 종업원에게도 그 나름의 긴장감 같은 것이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

그녀는 남에게 무엇인가를 청할 때마다 언제나 방긋하고 활짝 웃었다. 그녀의 웃는 얼굴은 정말로 매력적이었다. 그 근처에 있는 모든 것을 쟁반에 얹어 가져다주고 싶어질 정도로 매력적인 웃음이었다.

가게에 돌아와 보니 시마모토가 앉았던 자리에 아직도 술잔과 재떨이가 남아 있었다. 재떨이 속에는 루주가 묻은 담배꽁초 몇 개비가 살며시 찌그러진 채 들어 있었다.

별 볼일 없는 여자를 상대하지는 말게. 별 볼일 없는 여자랑 놀다 보면 본인까지 별 볼일 없는 사람이 되고 마네. 멍청한 여자랑 놀다 보면 본인까지 멍청한 사람이 되고 말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무 좋은 여자와도 놀지 말게. 너무 좋은 여자와 얽히다 보면 제자리로 돌아갈 수 없게 돼.

나는 변명만큼은 하고 싶지 않아. 인간이라는 건 한번 변명을 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변명을 하게 마련이고, 난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그런 삶의 방식은 그 시절의 그녀에게 적지 않은 고통을 감내하게 했다. 그것은 주위 사람들에게 많은 불필요한 오해를 낳게 했고, 그런 오해는 시마모토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주었다. 그녀는 점점 자신 속으로 틀어박히게 되었다.

네가 예전에 말했듯이 어떤 종류의 일은 두 번 다시 제자리로는 돌아가지 않아. 그건 앞으로밖에 나아가지 않아. 시마모토, 어디든 좋으니 둘이서 갈 수 있는 데까지 가자. 그리고 둘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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