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앨리스 먼로 지음, 서정은 옮김 / 뿔(웅진)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고대의 그리스인들은 죽으면 우리의 영혼이 여행을 떠난다고 믿었죠.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려면 삼천 년이 걸리는데 돌아왔을 때 자신의 몸이 알아볼 수 있는 형태로 남아 있어야 영혼이 몸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그래서 보존이 무엇보다 중요했어요. 하지만 요즘에는 그 정도로 보존에 신경을 쓰진 않아요."

나는 다시 아이들이 오기 전의 삶으로 돌아갔다. 아침을 하는 대신 나는 매일 아침 이탤리언델리에 가서 갓 구운 롤빵과 거피를 사마셨다. 집안일에서 이렇게 멀어졌다는 사실이 나를 황홀하게 했다. 하지만 전에는 미처 눈치 채지 못했던 것들이 내 눈에 들어왔다. 매일 아치 창가의 의자나 보도의 옥외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이런 곳에 와서 아침을 먹는다는 사실에 대한 경이와 기쁨 대신 지루하게 반복되는 외로운 삶의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익숙한 삶을 버리고 나오기가 쉽지 않았어. 아이들이 너무 보고 싶지만, 치러야 할 대가겠지. 남자와 나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법을 배우는 중이야. 섹스에 대해 편하게 생각하려고 노력하고 있어. 쉽지는 않지. 워낙 그렇게 살았던 게 아니니까. 젊지도 않은데 새로 뭔가를 배운다는 게 쉽지 않아.

우리가 다시 만났더라도 옛날과 다른 뭔가가 시작되진 않았을 것이다. 혹 만나지 않았더라도 마찬가지겠지만 자신의 자리를 알고 있는, 드러낼 수 없는 사랑만이 제자리에서(누군가는 바보 같은 결말로 이어지거나 쓸쓸하게 감정이 식고 말 것이 두려워 승부수를 두지 않는 이런 사랑을 두고, 진짜가 아니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달콤한 실개천이나 지하의 암반수처럼 계속 살아남는 것이다. 그 위를 덮은 이새로운 정적과 봉인의 무게를 안은 채 그 어떤 모험도 무릅쓰지 않고.

그녀는 제자리에서 온갖 가능성들을 다 생각해 보았다.

책 읽기는 이제 그만두자.
불우한 가정이나 가난한 나라에서 애들을 입양해다 아이들의 상처와 ㅕㄹ핍을 보듬으며 시간을 보내볼까.
교회에 가서 신앙을 키워볼까. ...

침대에 앉은 채 그녀는 이 모든 생뚱맞은 공상들을 머릿속에 떠올려보았다.
아마 지금처럼 사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온당하고 상식적인 거래일 터이다. 사실 그 거래는 이미 진행되고 있기도 했다. 이미 일어날 일들을 받아들이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 역시 선명하게 인식하자. 날이 가고 해가 갈테고, 비슷비슷한 감정들이 반복되겠지. 아이들이 자라나고, 아이들이 한두 명 더 태어나고, 그 아이들 역시 자라버리고 나서, 그녀와 브렌던은 해마다 나이 먹고 늙어갈 것이다.


전에는 한 번도 자신이 장차 일어날 일,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미래에 이렇게나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했다. 결혼이 큰 변화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최종적인, 마지막 변화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녀, 혹은 그 누구라도 상식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것 이외에 다른 무엇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 그게 자신의 행복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 그게 바로 자신이 한 거래의 대가라는 것을 그녀는 분명히 이해할 수 있었다. 비밀스러울 것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전혀 없는 그런 삶의 전망.

이 삶에 집중하자. 그녀는 생각했다. 갑자기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바로 이 삶이 내가 가진 전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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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덕화 2015-03-22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로 이 삶이 내가 가진 전부이다.
이 문장때문에 이 책을 읽어야 할 것 같군요.
아주 따뜻한 봄날입니다.

LAYLA 2015-03-23 01:58   좋아요 0 | URL
살아본 언니가 쓴 책의 내공이 있더군요 :)

다락방 2015-03-22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네번째 인용문 때문에 이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방금 검색해보니 중고 있길래 주문했어요 ㅋㅋㅋㅋㅋ

LAYLA 2015-03-23 01:58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이 좋아하실 거 같아요. 올리브 키터리지를 다 읽지 않았는데(망할 크레마) 올리브 키터리지랑 느낌 비슷했거든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