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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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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이 책이 5월의 광주 이야기라는 것을 알지 못한채로 먼저 서너페이지를 읽었다. 보통 처음 읽는 책은 표지와 뒷표지, 날개까지 꼼꼼히 살펴보고 본문을 읽는데비해, <소년이 온다>만은 그냥 덥썩 쥐어들고 곧바로 내용을 펼쳐들었다. 제목만으로 어렴풋이 성장소설쯤 되려나 보다라고 가볍게 생각했기때문이었는데, 나는 바로 이 문장에서 멈춰섰다.
 
그 과정에서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놓은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17쪽
애국가를 부르고 태극기로 사체를 휘감는 일은 꼭 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폭도들이 아니였으니까. 그들이 목이 터져라 외쳐댔던 자유대한민국은 몸을 갈갈이 찢으면서라도 지켜야할 자신들의 조국였으니까. 따라서 그들을 죽인 자들은 나라가 아니라 오히려 폭도들이였을테니까 말이다.
가족들이 있는 따뜻한 방에서 없는 것처럼 숨을 죽일 수도 있었을 그들을 거리로 그날 그 자리로 모이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정말 조국을 사랑하는 애국심 밖에 없었던 것일까. 나라가 당장 망하는 것도 아닌데 자신의 목숨을 걸고 그들이 지켜야 할 무엇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들을 그 자리로 모았던 그힘은은 무엇이었을까.
 
이제 시내에는 관이 동났다고, -19쪽
시내에 있는 관이 모두 사용되어 베니어판으로 관을 짜거나 할 정도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데 그걸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되었을까. 지금도 그걸 알고있는 사람은 얼마나 되며, 그일을 내 일처럼 분노할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거기 없었다면 마치 애초부터 없었던 일인 것처럼, 마치 그런일은 일어나지도 않았던 것처럼 나 역시 낯설고 믿을 수가 없다. 그당시는 어려서 아무것도 몰랐을 수 있지만, 그후로도 오랫동안 모르고, 혹은 모르는척 지냈다. 고향이 광주라는 사람을 만나면 80년 그때에 그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소문으로만 들었던 그일을 그도 겪었는지 속으로만 궁금해 하면서.
그러니 5월 광주에 대한 소설이라면 이미 나올 만큼 나오지 않았느냐는 말은 옳지 않다. 누군가에게는 들을만큼 들은 이야기일 수 있지만, 아직도 더 많은 누군가들에겐 30년 전 일이 아니라 마치 80년 전의 일인 것처럼 책에서만, 입에서 입에서만 전해들은 옛이야기 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낯설더라도 더 많은, 질리도록 더 많은 광주의 이야기가, 부민항쟁 이야기가, 베트남전 이야기가 쏟아져 나와야 하지 않겠는가.

 
용서하지 않을 거다. 이승에서 가장 끔찍한 것을 본 사람처럼 꿈적거리는 노인의 두 눈을 너는 마주 본다.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을 거다. 나 자신까지도. -45쪽
그날 그 자리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자신이 살았다는 것에 오래도록 죄책감을 갖는다. 목이 터져라 애국가를 부르고 눈물을 흘리며 자신이 지킨 그것이 정의였다는 믿음을 뒤로하고. 차라리 그자리에서 즉사했더라면 당하지 않았을 온갖 치욕 속에서 자신은 그저 고통과 배고픔에 밑바닥을 보인 살덩어리 그 자체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에 죄책감을 갖는다. 그 죄책감으로 인해 평생 자기 스스로를 죽이며 살다가 끝내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죄책감으로 괴로워 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자신들이 잘못한 것은 그 굴욕을 모두 견디며 단지 살아냈다는 것 뿐인데, 아니 그것이 어떻게 잘못일 수 있을까. 배가 고파 음식 앞에서 허기를 느끼는 것에 어떻게 죄책감을 느낄 수 있을까. 그들이 느껴야 할 것은 죄책감이 아닌 증오여야 할텐데. 그들은 그 증오를 안으로 안으로만 내 뿜어 독을 만들며 스스로를 죽인다.
 
반면 시민들을 짓밟고 비인간적인 고문을 서슴치 않던 자들은 또 어떻게 죄책감없이 살 수 있을까. 그들은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나는 가끔 궁금하다. 80년 그때, 시민들을 향해 총을 쏘고 곤봉을 날리고 대검을 휘두르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부마항쟁에서 공수부대로 투입되어 특별히 잔인하게 행동한 대가로 몇십만원씩 포상을 받았다는 그들은 가위눌림에 밤잠을 설치거나 하진 않을까. 베트남전 당시 시골 마을회관에 여자들과 아이들, 노인들을 모아놓고 불을 질렀다는 그들의 삶은 괜찮은걸까? 특별히 잔인한 군인들이 있었던 것처럼 특별히 소극적인 군인들도 있었다는데, 그들은 또 어떻게 살아갈까? 그들 또한 그후로의 삶이 고통스럽다면서 그 고통을 나서서 증언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 것일까?
그 날의 그 잔인함과 포악성은 다만 명령을 생명처럼 소중히하는 군인이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그때는 그들이 진정 나라를 망칠 폭도들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 생각했을뿐이라고, 그러나 그일로 인해 자신의 삶도 온전치 못했다고, 살아있다는 것이 온통 고통이라고, 그러니 망가진 내 삶을 돌려달라고 왜 국가를 상대로 소송하지 않는걸까.

내가 아직 몸을 가지고 있었던 그 밤의 모든 것 -55
그들은 평범했다. 총을 들고 시청을 지키던 시민들도 물론 평범했지만, 쏟아져 나온 시민을 향해 총을 쏘고, 대검과 곤봉을 휘두르며 사람을 내려치고, 들어보지도 못한 온갖 잔인함으로 고문을 자행하던 그들도 평범했다. 평범한 얼굴, 평범한 눈, 평범한 입, 하물며 차마 할 수 없는 일을 행하던 손의 모양까지도 너무도 평범했다. 

사내의 얼굴은 평범했다. 전체적으로 요철이 없는 얼굴에 입술이 얇았다. 칼라가 넓은 미색 와이셔츠에 통이 넓은 회색 양복바지를 입었고, 유난히 버클이 반짝거리는 혁대를 하고 있었다. 만일 우연히 거리에서 만났다면 평범한 회사의 주임이나 과장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 평범하고 얇은 입술을 열어 사내가 말했다. 개 같은 년.너 같은 년은 여기서 어떻게 돼도 아무도 몰라, 쥐새끼 같은 년. -67
계엄군이 시청을 덮치던 그밤 집으로 돌아가라는 권유를 서로에게 하면서 자신은 차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쏘지도 못할 총을 받아들었던 그들에게는 죽어도 좋다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이라는 그것을 양심이라불러도 좋은게 있었지만, 그 반대편에서 온갖 무장을 하고, 사람을 개나 소 다루듯 하면서 폭력을 휘들렀던 이들에게는 무엇이 있었을까. 그것을 정의감이라해야 할까, 충성심이라 해야 할까, 그도 아니라면 그저 자기들끼리의 의리? 딴에는 폭도로 부터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협심? 제대로 무장하지도 못한 어설픈 무리를 응징하겠다는 정의감?
나는 그것이 궁금하다. 그들은 지금 모두 어디에 있는가. 제발 그들의 삶도 평탄하지는 않았다고, 그일로 밤이면 잠을 잘 수 없어 평생의 삶을 스스로 갈아먹어왔다고 한사람만이로 단 한사람만이라도 스스로 나서주길. 특별히 소극적이었던, 특별히 공감능력이 뛰어났던, 특별히 양심적이었던 그런 단 한사람만이라도 나서서 그때의 포악함에 대해, 그때의 잔인함에 대해 증언해주길. 다음번에 출판될 5월의 광주 이야기는 그렇게 씌였으면 좋겠다.


군중의 도덕성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군중을 이루는 개개인의 도덕적 수준과 별개로 특정한 윤리적 파동이 현장에서 발생되는 것이다. 어떤 군중은 상점의 약탈과 살인, 강간을 서슴지 않으며, 어떤 군중은 개인이었다면 다다르기 어려웠을 이타성과 용기를 획득한다. 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숭고했다기보다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숭고함이 군중의 힘을 빌려 발현된 것이며, 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야만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야만이 군중의 힘을 빌려 극대화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95쪽, 군중을 주제로 한 인문서의 서문에서 따왔다는 글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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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각사
미시마 유키오 지음, 허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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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무엇보다 충격적이 었던 것은 작가 미시마 유키오의 자살이였다. 유독 일본 작가들 중 자살한 작가들이 많다고 생각하지만, 미시마 유키오의 경우에는 그 방법이며 이유가 보다 더 극적이고 일본적인 것이 아닌가 보여진다. 미시마 유키오는 비교적 최근인 1970년 45세의 나이로 자위대의 각성을 요구하며 할복 자살했다. 이와 관련하여 몇몇 사이트를 검색해 보았는데, 일설에 의하면 그는 할복 자살시 고통을 호소하며 괴로워했고, 끝내는 그를 옆에서 지키던 누군가가 목을 베어 주었다고 하는데... 이를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특히나 '미'를 소재로 한 <금각사>와 같은 글을 쓴 작가의 죽음치고는 다소 희극적으로 보이기까지 해서, 나는 좀 당황스러웠다. 역시나 미시마 유키오는 <금각사>의 '나'처럼 인식보다는 행동에 의한 변화, 혹은 혁명을 꿈꿨던 것일까.
 
한국전쟁이 발발한 해인 1950년 7월 2일 새벽, 교토의 녹원사 내에 위치한 금각사 방화 사건을 다루고 있는 이 소설은 실제의 방화범인 하야시가 말더듬이인 점과 범행 동기 중에 '미에 대한 질투'라고 진술한 부분에 촛점을 맞추고 씌였다. 소설의 '나'인 미조구치 역시 타고난 말더듬이이며, 미조구치는 어려서부터 한 절의 주지인 아버지로 부터 세상에 금각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아버지의 미에 대한 인식은 그대로 소년에게로 이어졌다. 미조구치에게도 세상에 금각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었던 것이다.
주인공은 말더듬이라는 육체적 결핍에 대한 절망을 절망이 아닌척 가장하고자,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라던가,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게 유일한 긍지라는 과장을 하지만, 이런 그의 바램은 무엇보다 '평범함'이 아니였을까. 말을 더듬는다는 것은 어쨌든 눈에 띄지않고 주변에 의해 은근슬쩍 묻어나기에는 불가능한 특색이니 말이다. 이와 같이 주인공 '나'의 절망이 미시마 유키오에 의해 치밀하게 설명되는 앞부분에서 부터 몹시 흥미를 끌었다. 이렇게 세밀한 감성을 가진 그가 어떻게 그토록 처참한 방법으로 자신을 죽여버릴 수 있었을까.

 

키치. 미학적 이상. 말더듬이를 결핍으로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완전해지고 싶었던 '나'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금각사에 불을 지를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공습이거나 혹은 담배 불씨이거나에 쉽게 사그러질 아름다움이 금각사임을 알았기에, 그를 영원한 아름다움으로 남기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처럼 미시마 유키오 또한 자신이 가진 이상의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 그토록 거친 방법으로 죽어버린 것이 아니었을까.
 
몇년전 교토를 여행하면서 '금각사'를 보았다. 그때는 금각사가 그저 외벽의 금칠때문에 유명한 줄 알았지, 금각사라는 소설로 유명해진 절인지도, 원래는 별장으로 지어진 건물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를 읽고나자, 화려한 겉모습만 대충 보고 말았던 금각사에 다시한번 가보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청림출판에서 1999년 출간된 <금각사>와 웅진지식하우스에서 출간되었으며 2010년 재판된 <금각사>를 비교해 가며 읽었다.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쉬운 것은 웅진지식하우스 출간된 허호 번역의 책이였으나, 나는 어쩐지 청림출판에서 출판된 서기원 번역의 책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서기원의 번역이 다소 난해한 문맥은 허호의 번역으로 다시 읽으면 이해하기 쉬울만큼 웅진지식하우스 편이 읽기에는 더 수월했다.

또 웅진지식하우스 출판 본은 작품해설이 실려있어, 미시마 유키오와 금각사에 대해 더 자세히 알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다. 그래도 나는 이미 절판된 청림출판의 책이 사랑스러워 줄곧 끼고 읽었다. 또한 '금각사'와 함께 '마로니에북스'라고 이름붙여져 출판된 세계문학들도 모두 이미 절판되었으나, 출판사에 전화하는 수고 뒤에, 몇권의 책을 구할 수 있었다. 누렇게 변색이 된 책들이긴 하지만, 오래된 보물들을 얻은 것처럼 몹시 기쁘다. 두고두고 일용할 양식처럼 야금야금 읽어볼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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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러기
모리 오가이 지음, 김영식 옮김 / 리토피아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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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다카세부네>를 읽으려고 오래전에 사두고 잊었다가 이제서야 읽었다. 동생을 죽게한 죄로, 죄인을 실어나르는 배 다카세부네를 탄 기스케의 이야기인 이 단편은 아주 짧지만, 인간이라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한다. 인간은 병이 나면 병만 나았으면 좋겠다 하고, 가난으로 굶주리게 되면 굶주리지만 않으면 좋겠다 하고, 재산이 없을때에는 재산만 조금 모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인간이란 절대 만족을 모르는 존재로, 어쩌면 그러한 욕망이 인간을 살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욕망은 <기러기>에서 등장하는 고리대금업자의 첩인 오다마에게도 있었다. 처음에 첩이 되고자 했던 것은 단지 늙은 아버지를 편하게 모시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오다마는 점차로 몸이 편해지자, 자신의 신분을 잊고 다른 사랑을 꿈꾸기 시작한다. 몰래 연정을 품었던 오카다가 지나가는 모습만이라도 볼 수 있기를 바라던 심정은 말 한번 걸낼 수 있는 장면을 꿈꾸게 되었고, 오카다를 향한 욕망은 점차로 커져만 가는 것이다. 모리 오가이는 이 장면을 이렇게 표현한다.
 
여자에는 갖고 싶지만 실제로 얻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물건이 있다. 그런 시계나 반지가 쇼윈도 안에 장식되어 있는 가게를 지날 때마다 들여다 본다. 일부러 그 가게 앞에 가려고 하지는 않는다. 뭔가 다른 일로 그곳 앞에 지나게 되면 반드시 쳐다보게 된다. 갖고 싶다는 욕망과 그것을 사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하다는 체념이 하나가 되어, 가슴 아플 정도는 아니지만 희미하고 달콤한 어떤 애상적 정서가 생긴다. 여자는 그것을 맛보는 것을 즐긴다. 그것과는 달리, 여자가 실제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물건은 그 여자에게 강렬한 고통을 준다. 여자는 안절부절 못할 만큼 그 물건 때문에 괴로워 한다.(144쪽)
인간이 종종 이런 감상에 빠진다는 것을 불행의 시작으로만 보아야 할까, 끝내 손에 쥐지는 못하지만 살면서 겪게되는 애절한 경험 한번으로 위안을 삼아야 할까.
 
기스케를 호송하는 포졸 쇼베에는 살인범 기스케를 보면서 자신의 생활을 들여다 보는 한편으로 자살하려다 실패한 동생의 고통을 자신의 손으로 끝낸 기스케가 과연 죄인인지에 대해 고민하지만, 결국 그는 이렇게 결론내린다. 자기보다 윗사람의 판단을 따를 수 밖에 없다고. 권위의 판단을 내 뜻으로 여기자고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뒷맛은 개운치 않다. 인간이란 그런 것이다. 복잡하고 힘든 일에 내 판단을 유보하고 권위를 믿기로 하는 것, 그렇지만 또 그것이 그렇게 유쾌하지만 않은 그런 존재인 것이다.
 
<다카세부네>를 읽고 싶어 산 책이였지만, <기러기> 역시 만만찮게 재미있다. 생활을 위해 고리대금업자의 첩이된 한 여자가 뒤늦게 사랑을 알게되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이야기로 쉽게 요약될 수 있는 <기러기>는, 표면적으로는 고리대금업자의 첩이라는 신분때문에 경멸을 당하지만, 속으로는 좋은팔자라고 시샘을 받는 '첩'이, 첩이라는 신분을 잊고 비로소 자각하게 되는 불행한 사랑이야기인 것이다.  '금병매'의 스토리를 살짝 덧씌워 마치 이 첩의 사랑이 이루어질 듯 하지만, 결국 그녀의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녀는 장난삼아 던진 돌에 맞아 죽은 '기러기'와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모리 오가이는 나쓰메 소세키와 더불어 일본 근대문학의 쌍벽을 이루지만, 흔히 모리 오가이의 소설은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에 비해 지루하다는 평을 듣는다는데, 나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 소이다>를 읽다 지루해서 포기한 기억이 있기 때문인지 모리 오가이의 소설이 더 읽기 좋았다.
더군다나 역자인 김영식은 소설의 배경을 찾아 찍은 사진들을 이야기 중간중간에 함께 실었는데, 그것이 꽤 색다르고 괜찮았다. 보통 외국문학은 외국문화 만큼이나 낯선 물건, 낯선 장면이 많아 아무리 잘된 묘사라도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기 일수인데, 사진과 자상한 설명으로 이야기가 더욱 가깝게 이해되었다. 또한 책의 말미에  첩 오다마의 서글픈 사랑의 배경인 무엔자카의 '기행문'을 함께 실어, 보통 작품해설이라고 실린 글보다도 더 재미있고 친숙했다. 이런 방식의 번역도 꽤 훌륭하다 생각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책은 절판되었다.
절판 된 책을 갖고 있다는것은, 마치 한정판 특별본을 갖고 있는 것처럼 기분이 좋기는 하지만, 이런 참신한 시도의 책들이 대형출판사에 밀려 사라지는 것이 몹시 안타깝다.  <기러기> 역시 한 대형출판사에서 다시 재출간 된 것으로 알고있다. 물론 김영식의 번역으로.
이런 생각을 하면 하루빨리 도서정가제가 실시되어 작은 출판사들의 다양한 시도가 가능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소비자의 입장에서 한 권이라도 더 사고 싶은 욕심은 어쩔수 없다. 아 나는 또 고민스럽다. 책사는 일을 '소비'행위로 일축해도 괜찮은 것인지. 나부터도 정가로 책을 구입해야 하는데,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 고민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도 역시 길게 생각한다면 '도서 정가제'의 정착이 반드시 필요한 일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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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4-07-07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곰곰이 생각해 보면
4대강사업이나
핵발전소나
군부대나
이런저런 것들...에 드는 돈을 돌리면
우리가 아주 값싸게 아주 아름다운 책을 누릴 만한데,
우리 사회는 아름다운 길로는 안 가지 싶어요.

학습지와 자기계발과 종교 같은 책을 뺀
모든 '책'을 정부에서 지원해서 책으로 펴내 준다는
정치 지도자가 나올 수는 없을까 궁금하기도 해요.
4대강사업 따위를 한다는 헛짓 말고요...

비의딸 2014-07-08 15:13   좋아요 0 | URL
그런 지도자가 나온다면 저부터도 기꺼운 마음으로 지지하겠지만 함께살기 님 말씀처럼 그런 아름다운 길로 가기엔 우리 사회는 이미 너무 많이 아름답지 못하죠. 음, 지하철을 타면 참 무서워요. 꼬마부터 노인까지 모두가 조그만 화면에서 헤어나질 못하니 말이죠. '가만히 있으라'는 말은 꼭 학교가 아니어도 사회의 통념이 된 듯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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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여자는 그저 친구에 대한 질투로 몸져눕고, 어떤 아버지는 외동딸을 불의의 사고로 잃고 고통에 몸부림친다. 어떤 남편은 사랑하는 이를 따로 두고 구질구질한 가정에 묶여 지루해하며, 어떤 엄마는 하나뿐인 아들을 위해 밤낮으로 고생하지만 그 아들은 못된 친구들과 어울려 평생 모은 엄마의 비상금을 훔쳐낸다(출판사 책소개 중)

작은 다툼으로 어느날 밤 찾게된 경찰서. 그곳에서 형사가 말했다. '세상엔 별 사람들 다 있어요.' 정말 그렇다. 별의 별 사람들이 다 있다. 때로는 이해가 안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해가 안되는 그 조차도 이해하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 또한 세상이다.

이웃의 아이를 죽이고 싶었던 여자, 이해 못할 것도 없다. 나 역시 누군가에겐 이해 못할  사람이기도 할테니까.

 

 

 

 

 

'조용히 살고 싶지만, 또 잊혀지긴 싫죠.' 어느 인기 가수가 자신의 홈피에 썼다는 그 말. 나는 유명인은 아니지만 그녀의 인간적 모순에 절대 공감한다. 나역시 조용히 눈에 띄지 않게 살고싶지만 그렇다고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다.

그러나 성석제가 <투명인간>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조용한 삶에 관한 것이 아닌 '소외'에 관한 것이다. 눈물없이는 들을 수 없는 눈물겹게 아름다운 한 인간의 이야기다.

 

 

 

 

 

 

 

 

 

목걸이와 비곗덩어리 등 모파상의 단편은 <여자의 일생>과 함께 학창시절 필독서였다. 물론 그때는 숙제라는 강박 외에는 아무런 감동도 없었지만.

비교적 최근에 '비곗덩어리'를 다시 읽고서는 무릎을 칠만큼 새로웠는데, 그후 장편 <벨아미>역시 재미있게 읽었다. 아, 학창시절 필독서가 없었다면 모파상을 비롯한 세계문학을 더 많이 좋아했을텐데.

모파상 단편선이야 이미 차고넘치도록 출판되어있지만, 반양장에 806쪽이나 되는 이 책 너무 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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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4-07-03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파상은 반고흐도 참 좋아했죠 ㅎ
전 사실 이 사람의 책은 못 읽어봤어요 다만 이 사람 스승이 꽤나 유명한 소설가인데 그 사람이 가리킨 건 나가서 사물들을 묘사하는 글을 써 오라고 시켰다고 하더라구요 덕분에 힘들었지만 유명 소설가가 됐죠
하지만 모파상의 말년에 정신이 온전치 않게 죽었다고 알고 있어요 ㅠ
비가 계속 계속 옵니다
덕분에 전 창문에 떨어지는 비를 보며비의 딸 비의딸 그러고 있지요 ㅎ
전 정상이에요 ㅡ..ㅡ

비의딸 2014-07-04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 소나기가 아니여서인지 저는 루쉰 님 생각은 못했네요. 언젠가 비오는 계절에 갔던 우포늪을 생각했어요. 다시 한번 꼭 가야겠다고, 반드시 비가 올 때 뚜껑열리는 차를 타고, 그러나 뚜껑은 반드시 닫아야 해요 ㅋ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에서 죽어버린 작가들이 의외로 많아요. 생각해보면 정신이 온전하게 살기도 참 힘들어요. 그것이 세상 탓일까요? 너무 많이 알아버린 인간 개인의 탓일까요..
나는 온전한 정신으로 죽을 수 있기를 바래요. 그건 그냥 주워진 삶에 감사만 하며 멍청한 채로 죽고 싶다는 다른 소망이기도 해요.

루쉰P 2014-07-04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나기가 올 때마다 생각하시면 이번 장마 괴로우실거에요 푸하 ㅋ
그쵸 의외로 정신나가 죽은 작가가 많아요 모파상, 아쿠타카와 류노스케, 헤밍웨이, 다자이 오사무 등등 말이죠
그 사람들 왜 죽었을까? 고민한 적이 있었는데요 프리모 레비도 그렇구요
진짜 답을 못 찾겠더라구요 근데 루신 선생을 참 좋아하는 데 이 분은 정말 죽음의 위협도 받고 하셨는 데 사람이란 살아야 하는 것이다란 단순한 논리로 ㅋ
게다가 이 세상을 멋대로 움직이는 것들에게 자신의 글로 얼굴 찡그리게 만들어 주겠다며 끝까지 살아가셨죠 ㅎ
전 그걸 보면서 정신 잃고 죽은 사람과 그러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곤란에 대처하는 자세에서 차이가 있던 건 아니었을까 생각을 해요
루쉰 선생의 경우 파도가 치면 그걸 정면으로 맞서서 도망갈 때는 도망가고 하면서 인내하고 이겨내며 싸워거든요 ㅎ
음 그니까 고난이 오고 고생이 오고 괴로울 때 인내하고 이겨가는 그 자세와 마음가짐에 그 차이가 있지 않나 생각 들었어요
전 태어나서 인생 3대 거짓말 중에 사는 데 걱정 고민 없는 건 뻥이라고 봐요 인생 자체가 고난과 싸움이고 내 옆엔 나쁜 일이 항상 있는 걸요
하지만 그들이 하는데로 잡아먹히지 않는거에요 정신 바싹차리고 말이죠 ㅋ
흠 쓰다보니 왠 자기계발서 같은 이야기를 쓰고 있네요 허허허
음 비의 딸님은 정상이고 앞으로도 정상이실겁니다 ㅎ

비의딸 2014-07-04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5년 평생을 허약했다라고 루쉰님이 그러셨는데, 이제보니 아주 강한 분이시네요. 저로말하자면 제 자신이 허약한 줄을 모르고 잘난척 하며 살다 아주 최근에 연이은 불운으로 쉽게 무릎이 꺾이는 경험을 하며 내가 참 허약하구나, 그래봤자 온실 속 화초였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거든요..
나는 비교적 무댓보 낙천주의자에요. 무엇에도 누구에도 배울점은 반드시 있다라고 믿고, 그런 마음이라면 오늘보다 내일은 더 나을것이라고 무작정 생각해 버리죠. 그런데 그것이 대책없는 낙관주의가 아니라 그저 게으름의 다름 아니라는 생각이 많이 드는 요즘이에요. 오뉴월의 엿가락처럼 자꾸만 축축 쳐져요.
죽음의 위협도 불사하는 루신선생처럼 강하고 싶기보다는 차라리 권총을 들어 세상을 끝내버린 프레모 레비나, 로맹 가리, 슈테판 츠바이크 같은 부류가 더 편하게 생각되요. 그렇다고 이들을 감상주의자에 지나지 않았다라고 평가할 수는 없잖아요...
아이고, 왠 청승 ㅋㅋ 세상에나 오늘은 하늘이 너무너무 맑군요. 이런날은 바다를 보아야 하는데.. ㅋㅋ 맑은 날임에도 불구하고 루쉰님을 생각해 보네요.

루쉰P 2014-07-10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죽는 것도 엄청난 용기에요;; 이런 말씀 드리긴 뭐하지만 레비나, 츠바이크, 그리고 저 위에 올린 유키오나 스스로 죽을 각오를 했다는 건 엄청난 거죠. 그 사람들 안에는 어찌보면 루쉰 선생보다 더 강한 자아가 있다고도 볼 수 있어요. 너무 강하니 부러진 건 아닌 지 생각이 들더라구요. 타협할 수 없으니까, 굴복할 수 없으니까 나도 거기에 대항하여 굴복하지 않는다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이냐 내 죽음이다라고 그들은 생각하지 않았을까 생각 들어요.

루쉰 선생은 강하긴 하시지만 유연성이 있다고 할까 얍삽 하셨다고 할 까? ㅋ 손해 보는 일은 하지 않으셨거든요. 정 죽어야 한다면 죽지만 그렇지 않고 살 길이 있다면 최대한 살아남아 적들에게 모욕감을 주는 방식으로 사셨죠 ㅋ
전 그런 방식이 좋아요. 내 분노에 휩싸여 파멸하는 것이 아니라. 내 분노가 있기에 그들에게 최대한 조금이라도 던져 줄 수 있는 깐죽거리는 정신 ㅋ 그게 제가 추구하는 사상이에요 ㅎ

분노는 선, 악에 통한다고 보거들랑요 후후후

전 허약한 게 확실하고, 의지가 약하고 정신 머리 없다는 게 사실이에요. ㅋㅋㅋ
비의 딸님에게 어떤 불운이 연이어 오셨는 지 모르겠지만 그 불운 자체 만으로도 사람은 무척 힘들잖아요. -..- 그 불운들이 빨리 해결 되셨음 좋겠어요.

정말 중요한 게 불운이 올 때가 중요한 데 그 때 절대로 피폐해 지시면 안 되여! 저도 항상 불운 24시의 인생을 살고 있으나, 머리가 복잡할 때는 담배를 피거나, 만화책을 보거나 아니면 몇 시간 걷거나 그러면서 어찌됐든 이 불운에 내가 휩쓸리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을 찾으려고 마인드 컨트롤을 마니해요. ㅎㅎㅎ

불운이 빨리 지나가셨음 해요. 다행히 오늘은 불운도 태워버릴 무더위입니다!!!!

비의딸 2014-07-12 09:59   좋아요 0 | URL
흔히 죽을 용기로 살으란 말을 하지만, 난 그것이 의심스러워요. 스스로 죽어버리는 건 용기이기보단 '절망'일 것이라고 막연히 짐작하거든요.
불운은 말 그대로 운이 나빴다는 의미이고요, 그렇기 때문에 아직은 절망의 단계에 까진 이르지 않았고요..
'내 분노에 휩싸여 파멸하는 것이 아니라... ' 그 말 참 좋으네요.
여름을 싫어하는 것은 아닌데, 요즘 공기는 좀 갑갑하네요. 습도가 높기 때문이겠죠.
어쨌든 빨리 휴가를 떠나고 싶어요. 바다만 있는 곳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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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배우는 사람 창비세계문학 30
토머스 핀천 지음, 박인찬 옮김 / 창비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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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토머스 핀천에 대해 아는 것 없고, 이전에 읽은 작품 또한 없음에도 <느리게 배우는 사람>이 읽고 싶었던 이유는 순전히 제목 때문이었다. 지식이든 문학이든 운동이든 하다못해 눈치까지 느리게 배운는 사람 중의 하나가 다름 아닌 나 자신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느리게라도 배우지 않는 사람들이(이경우는 물론 지식이 아니며 또한 나 자신 까지를 포함해서) 태반인 사회에 살고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 실린 다섯편의 단편 중 그 어느 것도 '느리게 배우는 사람'이라는 제목을 달고있지 않다. 그러나 다섯편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전체적인 줄기가 그렇고, 또 여기에 묶인 네편의 글이 토머스 핀천이 대학시절 습작한 작품이라는 점도 '느리게 배우는 사람'의 의미를 가르키고 있다. 작가 자신이 대작가가 되어 미숙한 시절의 작품을 회고하며 생각할 때 느리게 배우는 사람이란 작가 자신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는 것이다.

느리게라도 배울 수 있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걸 생각할때 조금씩이라도 나아진다는 것은 대단한 발전이지 않을까, 나름 생각해 본다.

 

각각의 작품들에 대해서라면 그다지 할 말은 없다. 죽음, 고갈, 권태, 획일화, 무질서, 파국, 단절의 느낌, 막다른 길에 다다른 현대인의 갈등 등은 내가 좋아하는, 혹은 관심있어하는 주제이건만 작가의 서문과 옮긴이의 작품해설을 읽지않았다면 솔직히 나로서는 작가가 각각의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문학은 답을 말하는 것이 아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이라고 하지만, 포스트비트 세대 운운이 게으른 나로서는 다소 귀찮은 느낌이다. 또한 각각의 작품들은 대체로 우울하고, 무기력하며 무엇보다 모호했는데, 바로 그 모호함을 무엇보다 참을 수 없었다. 거기에 단편에는 미처 담을 수 없는 방대함으로 산만하기까지 하다. 때문에 나로서는 좀처럼 집중하기 힘든 작품들이었는데, 대학시절의 습작이라서라기 보다는 핀천의 글을 쓰는 스타일이 그간 내가 좋아해온 소설들과는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쁘게 말하면 좀 산만·방대 하고, 좋게말하면 박학다식해서 내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그런 스타일이다. 해서 개인적으로 나는 <느리게 배우는 사람>을 그다지 즐기지 못했다는 것을 고백한다. 때문에 각각의 이야기들에 대한 요약은 생략하련다.

 

엉뚱하게도 나는 작품들보다는 책의 첫시작을 연 작가의 서문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특히 과학의 도움으로 미숙한 시절의 자신을 만나고 싶다는 대목에서 나 또한 크게 공감할 수 있었다.

 

나는 중년다운 평정심을 내세워, 그 당시 어린 작가였던 나를 이제 있는 그대로 봐줄 나이가 된 것처럼 행세하기로 했다. 이 어린 친구를 내 인생에서 내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 개발되지 않은 어떤 테크놀로지의 도움으로 오늘 우연히 그를 만나게 된다면, 그에게 돈을 빌려주거나, 혹은 그것을 핑계 삼아 길을 걷다가 맥주 한잔하며 옛 시절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 얼마나 기분 좋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10쪽, 작가 서문 중

은둔작가의 서문 치고는 좀 지나치게 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평소 자신을 내보이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작품에 대해 할 말이 많은 것이라고 이해한다), 대작가가 되어 대학시절의 습작을 생각하는 서문은 충분히 읽을만한 가치가 있었다. 모호한 시절을 회고하는 의미가 있었다고 할까.

그는 습작을 할 그 무렵에 그는 일상에서 쓰는 사투리나 발음에 귀가 어두웠다는 것(11쪽)이나, 표현이 갑자기 공상적으로 바뀌어서 읽기가 힘들게 되는 것(13쪽)이나, 이 책에 실린 단편들에서 범한 과도한 글쓰기(26쪽) 등에 대한 회고 내지 반성은 그가 느리게 배운 자신을 과감하게 포용함과 동시에 그로부터 발전해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데이터를 반드시 확인하라(27쪽)는 등의 권고는 후배들에 대한 조언이겠지만, 이는 또한 시행착오를 통해 성장하는 작가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이기도 해 좋게 생각되었다. 역시 사람은 실수를 통해 배우고, 그로인해 점차로 나아지는 존재(안타까운 것은 그렇지 못한 사람도 많다는 것이지만)인 것이다.

 

이글에서 나 역시 대학시절 그즈음의 내 자신을 뒤돌아 볼 수 있었다. 그간의 나는 과거의 나를 어리고 서툴러서 미숙하기만 해 부끄럽다라는 식으로는 기억했어도, 서툴어서 힘이 들던 그시절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은 좀처럼 하지 않았다. 토머스 핀천의 회고의 글은  미숙한 시절의 나를 만나 돈을 빌려주거나 맥주 한잔을 나누지 않더라도, 지금의 내가 그시절의 내 어깨를 한번 쓸어주고, 눈 한번 마주쳐 줄 수 있었다면 어린 나는 충분히 위로 받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과학의 도움을 받든 점성술의 도움을 받든 정말로 그럴수 있었다면 좋았겠다.

 

과거의 나는 현재의 나를 만나진 못했지만 대신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나를 위로하는 상상을 해 본다. 단지 제목이 좋아 고른 책을 통해 만난 미래의 나는 지금의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어떻든 너는 느리게라도 배우고 있다고, 느리지만 점차로 나아지고 있다'고.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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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4-06-27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어떻게라도 난 느리게 배우고 있다 참 마음에 와닿아요 ㅎ 잘 지내시죠? 소나기 올 때 비의딸님이 생각나더군요 ㅎ 비 좀 왔으면 합니다 ㅋ 저 왔습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