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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세부터 헬로라이프 스토리콜렉터 29
무라카미 류 지음, 윤성원 옮김 / 북로드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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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래전 20대에 막 들어선 그때,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를 읽었다. 단지 제목이 너무 좋아 고른 책이였는데, 그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기지촌이며, 마약 중독, 혼음파티와 폭력, 그리고 상상하기 힘든 변태적 성관계까지. 그 모든 것들을 이해하기에 나는 너무 어렸고, 그저 일본이란 나라가 그런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그저 변태적인 19금 소설이라고 덮고 말기에는 아까운 무엇이 있었다는 것을 어렸던 날에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금기에 대해 끝없이 갈망하는 두려움없는 청춘이랄까 뭐 그런것을.

그후로 무라카미 류의 소설을 제법 찾아 읽었다. 단순히 호기심에서도 그랬지만, 안되는 것이 없다는 자유로운 생각에도 불구하고 정말 되는 것은 너무도 없다라는 답답함에서 였다. 현실에서 성취하지 못한 것들을 무라카미 류의 소설을 읽으며 소소하게 혹은 침침하게 터뜨리고 싶었던 것은 아니였나 생각된다. <고흐가 왜 귀를 잘랐나>, <오디션>, <그래, 연애가 마지막 희망이다>, <sixty nine>, <너를 비틀어 나를 채운다>, <자살보다 SEX>로 이어진 무라카미 류에 대한 호기심은 딱 거기까지. 더는 그를 이해할 수 없다고, 궤도이탈을 꿈꾸는 나에게 무라카미 류가 주는 위안은 변태적인 호기심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이십년이 훌쩍 지난 지금 다시 만난 무라카미 류. 그도 나이를 먹은 것인지, 예전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위태위태하던 그의 이야기가 평이해졌다고 할까, 이제야말로 땅 위에 발을 딛고 쓴 소설같다고 할까, 제목이 이미 모든 걸 말하고 있지만 그의 이번 소설에서는 불가능을 꿈꾸는 다른 종류의 젊음 같은 것은 더이상 없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쳐, 그 모든 것을 경험하고 난 후에 찾아든 노년과 같은 소설이라고 해야 할까.

 

나카고메 시즈코는 쉰네 살에 이혼했다. 그후 그녀는 백화점이나 마트에서 판매 직원으로 일하며 결혼상담소를 전전한다. 인도 시게오도 역시 쉰네 살에 오랫동안 근무해오던 작은 출판사에서 정리해고를 당하고, 일용직 노동자를 전전하며 노숙자가 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토미히로 타로는 중견 가구 업체에서 조기 퇴직했다. 그는 조기퇴직우대제도에 따른 특별가산금으로 캠핑카를 마련해 아내와 일본 전역을 여행다닐 계획을 세우지만, 자기만의 시간을 주장하는 아내의 반대에 부딪히게 되자 크게 당황한다. 다카마키 요시코의 남편은 38년동안 일한 중견 광고 대리점에서 정년퇴직하고 블로그 등으로 소일하며 거의 집안에서 지내지만, 어쩌다 방문하는 이웃에서는 평소의 그와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여 다카마키 요시코를 불쾌하게 한다. 그러한 이유로 그녀는 남편과 말 한마디 하려하질 않고, 애견 보브에게만 사랑을 쏟는다.

시모후사 겐이치가 대형 트럭 운전사로 잘나가던 때는 연봉이 5백만 엔을 넘었지만, 예순살이 되자 회사에서 해고됐다. 젊은 시절 이혼하고 버는 돈은 족족 유흥에 썼던 탓에 예순이 넘은 그에게 남은 것은 작은 아파트와 나날이 줄어가는 통장과 끝없이 부푸는 고독감이다.

 

일본의 경제적 호황기에 젊음을 받쳐 공헌한 그들은 일찍이 유례가 없는 장기침체로 인해 조기퇴직을 하거나 현역에서 물러났다. 체력적으로도 그렇지만, 정신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불가능에 자신을 내던질 수 있는 그런 나이가 아닌 것이다. 더군다나 때는 바야흐로 선례가 없는 경제적 불황기. 모두가 가난하고 돈이나 물건이 귀하던 시절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다 맞은 뜻하지 않은 무기력한 시절인 것이다. 문제는 말이야 선례가 없다는거야.(179쪽)

까닥 잘못 발을 내딛는 순간 끝을 모를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는 때에 필요한 것은 현실 감각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당장의 먹을것 만을 생각하며 살아가기에는 너무 낭만적인 존재인가 보다. 나카고메 시즈코는 결혼상담소의 만남 주선에 빨간 속옷을 꺼내입고, 인도 시게오는 발등에 떨어진 불에도 불구하고 친구를 돕기 위해  그에게는 생명수와 같은 물을 양보하며, 시모후사 겐이치는 꽃뱀일지 모르는 여자에게 돈을 건네려 한다. 문제는 생활비보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이 고독감이다. 따스함 같은 게 그립다.(314쪽)

 

더이상 어리지 않고, 그렇다고 다 자란 것도 아닌 그 시절,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사나워지는 시기인 사춘기를 질풍노도의 시기라 명명한다. 그렇다면 더 이상 젊지도 않고, 그렇다고 늙었다고 볼 수도 없는 이들의 시간은 무어라 불러야 할까. 해 질 녘 모든 사물이 붉게 물들어 언덕 너머로 보이는 실루엣이 개인지 늑대인지 분간할 수 없는 시간이라는 낮도 밤도 아닌 시간,  '개늑시'가 바로 이때 아닐까. 젊지 않으니 더이상 불분명한 모험에 자신을 걸지 않지만, 딱히 늙은 것도 아니니 안주할 수도 없는 시간, 개도 늑대도 아닌 그러므로 아직은 긴장감을 늦출 때가 아니라고 무라카미 류는 말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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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아이들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9
나지브 마흐푸즈 지음, 배혜경 옮김 / 민음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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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아이들은 알레고리 소설이다. 작품해설에는 이 소설이 성서뿐만 아니라 코란에서도 이야기를 차용하고 있다라고 밝힌다. 코란까지는 모르겠지만, 1권의 아드함과 자발, 리파아의 이야기가 하느님과 아담, 에덴동산, 카인과 아벨, 모세, 그리고 예수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음이 너무도 분명하게 눈에 보인다. 그렇다면 나지브 마흐푸즈는 소설과 성서, 그리고 코란을 잇는 이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사막 한 복판에 아름다운 정원이 딸린 대저택을 소유한 자발라위에게는 네 아들이 있다. 그중 흑인 노예에게서 얻은 막내 아들 아드함에게 자발라위가 재산관리를 맡기면서 대저택의 불화가 시작된다. 맏아들인 이드리스는 자신을 젖혀놓고 막내아들에게 재산 관리를 위임한 아버지 자발라위의 처사에 반항하다가 대저택에서 쫓겨난다. 그후 아드함을 꼬여 자발라위를 배신하게 하는 이드리스는 명백히 아담을 꼬여낸 사탄을 상징한다.

맏형 이드리스의 꼬임과 아내 우마이마의 부추김으로 아버지 자발라위를 배신하고 낙원으로 상징되는 대저택에서 역시 쫓겨난 아담인 아드함은 생계를 위한 노동을 하며, 평생 아름다운 정원에서의 생활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아드함은 생전에 낙원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다. 아드함의 아들 까드리와 후맘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동생 아벨을 시기해 살해한 형 카인의 이야기다.

 

이후 아드함과 이드리스의 자손들은 번성해 자발라위의 동네를 이루고, 동네를 지배하는 권력자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자발라위의 재산을 관리하는 관재인과 관재인을 도와 폭력을 행사하며 주민들을 착취하는 수장들이 바로 그들이다. 아드함의 이야기 후에 이어지는 자발 편과 리파아 편, 까심, 아라파 편은 관재인과 수장들에게 픽밥당하는 이들 속에서 나타나는 선지자들의 이야기이다. 선지자들은 핍박받는 대중들을 일깨우고, 힘을 모아 관재인과 수장들을 물리치고 새로운 세상을 열지만 그들의 시도는 매번 당대를 넘기지 못한다.

사람들은 안락한 생활을 더없이 기뻐하며 즐거운 삶을 누렸다. 그들은 자신감에 차 확실하게 '오늘이 어제보다 낫고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왜 망각은 전염병처럼 우리 동네를 휩쓸고 지나가는 걸까?(1권, 440쪽)

 

<우리동네 아이들>의 동네 사람들은 언제나 권력자들로부터 착취당하고, 그러면서도 그에 대해 정당한 책임을 묻지 못한다. 전통 혹은 관습처럼 내려오는 불공평한 대우에 대해 따져 묻는 일없이 오히려 권력자들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힘을 숭배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 속에서도 선지자들은 태어나고, 선지자들은 묻는다. '우리 동네 사람들 모두가 시조 자발라위의 재산에서 나오는 수익을 가져갈 권리가 있는데, 왜 모두들 힘에 굴복하기만 하는가'고. 이러한 물음은 선지자들을 혁명가로 둔갑시키고, 동네 사람들을 무장 시켰다.  그리고 그들의 물음은 새로운 세상의 단초가 되지만 시간이 지나면 권력은 부패하고, 대중은 부패한 권력에 굴복하고 힘을 숭배하기를 되풀이 한다.

 

나지브 마흐푸즈가 이 알레고리 소설을 통해 묻고자한 선지자들의 물음은 <우리 동네 아이들>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작가가 이 소설을 쓴 것은 1952년 이집트의 나세르 혁명 이후라고 했다. 그는 혁명의 와중에 만연한 탄압과 고문, 투옥의 역사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고 한 일간지의 인터뷰를 통해 밝혔다.

<우리동네 아이들>은 힘에 굴복하는 대중은 사막 한가운데 만 있는 것이 아니며, 그 옛날 이야기 속에서만 등장하는 것만이 아니다. 소수의 지배층에 의한 착취가 어째서 지금도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는지에 대한 작가의 물음 인 것이다. '왜 우리 동네 사람들은 자신의 권위를 스스로 세우고자 하지 않지?'

 

이상한 것은 선지자들에게 나타나 동네 사람들의 권위를 찾으라고 종용하며, 자신은 그들의 편이라고 말하는 자발라위는 절대 스스로를 사람들 앞에 나타내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대중을 착취하는 지배층에게도 그 모습을 드러내거나 그들의 죄악을 벌하지 않는데, 현실에서도 역시 신은 권능자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  2015년 1월 필리핀을 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12살 소녀는 물었다. "많은 어린이들이 마약과 매춘에 내몰리고 있어요. 신은 왜 이런 일이 벌어지도록 내버려두는 거죠?

신은 역시 우리 일은 우리 스스로 해결하기를 원하시는 걸까? 그의 피조물인 인간을 너무도 사랑하시기에 사후가 아니라면 인간을 심판하고 싶지 않으신 걸까?

나지브 마흐푸즈는 이 소설을 통해 세상의 변화를 가져올 희망의 끈을 이야기 했지만, 신의 권능에 대한 의심스런 눈길은 가리지 못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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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받을 용기 (반양장) -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한 아들러의 가르침 미움받을 용기 1
기시미 이치로 외 지음, 전경아 옮김, 김정운 감수 / 인플루엔셜(주)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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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단순하며 인간은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다라고 주장하는 철학자가 있다. 세계가 혼돈과 모순으로 가득한 이유는 세계가 복잡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세계를 복잡하게 보고 있기 때문이라는 그는, '남의 이목에 신경 쓰느라 자신만의 진정한 행복을 놓치지 말라'고 말한다. 어느날 한 청년이 이 철학자를 찾아온다. 가정환경이나, 외모, 학력에 대한 열등감으로 다른 사람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경향이 있는 청년은 생각하기에 따라 삶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철학자의 주장에 대해 따져 묻기 시작한다. 성취지향적인 현대사회에서 열등감에 사로잡혀있는 이 청년이 볼 때 철학자의 주장은 낙천적인 괴짜의 궤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남의 행복을 진심으로 축복하지 못해 늘 자기혐오에 빠지는 청년에게 철학자는 인간의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로부터 비롯된다고 말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타인의 존재를 전제로 존재하기 때문에 열등감을 비롯한 고민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모든 불행한 고민으로부터 벗어나려면 열등감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자기만의 주관적 해석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타인을 경쟁상대로 생각하지 않아야 하며,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고자 하는 인정욕구를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언제나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하는 그런 태도는 삶을 자유롭고 주체적으로 살아가는데 방해가 되고, 지금 이 순간 행복한 삶을 살기위해 필요한 것은 타인의 인정에 대한 갈망이 아니라, 오히려 '미움 받을 용기'라는 것이다.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는 삶이 아니라 주관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나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하며,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에 집중해야 한다. 또 지금 현재를 충실하고 진지하게 살기 위해서는 과거의 트라우마가 아닌 현재의 내 선택을 중요하게 여겨야 하며, 과거의 불운했던 기억에 대한 보복을 위한 행동이 아닌 행복하기를 선택하라고 말한다. 철학자는 이러한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은둔형 외톨이를 예로 들며, 그가 방에서 나오지않는 것은 학대받은 어린시절에 대한 결과로 외톨이가 된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학대한 부모를 상대로 보복하기 위한 목적으로 방에서 나오지 않기를 선택한 것이다 라고 주장한다.

 

철학자 이러한 주장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의 개인 심리학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프로이트, 융과 함께 심리학의 3대 거장으로 꼽히는 아들러는 빈 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뒤늦게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 입문했다. 그런 그가 열등감에 집중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선택이다. 그후 아들러는 프로이트 학파로부터 따로 떨어져 나와 개인 심리학을 제창했다. 과거의 트라우마에 주목한 프로이트와 달리 아들러는 인간은 과거의 원인에 영향을 받아 결과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정한 목적을 향해 움직인다는 목적론을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는 프로이트를 비롯한 기존의 심리사회적 이론을 전면 부정하는 것으로, 과거는 현재의 나를 불행하게 할 만한 힘이 없다는 희망적인 메시지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주어졌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문제라는 아들러의 개인 심리학은 그러나 한 개인의 불행을 전적으로 그만의 탓으로 책임지우는 면이 있다. 아들러의 이론으로는 차마 설명되지 않는 현실적인 문제들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청년의 말처럼 자동차에 기름을 넣듯 용기를 넣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선택에 대해 타인의 평가에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다는 철학자의 설득은 꽤 매력적이다.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남의 이목에 신경을 쓰며, 상대적 박탈감과 열등감을 겪는 현대인에게 <미움받을 용기>는 제목부터 대단히 설득력이 있게 들린다. 유난히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비교하며 성취지향적 사회인 일본에서 50만 부 이상이 팔리고, 한국사회에서 연속 9주간 베스트셀러 1위로 기록되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하다.

 

일찍이 아들러는 심리학은 타인을 조종하기 위한 기술이 아닌 나를 움직이기 위한 학문이라고 했다. 자유로워질 용기, 평범해질 용기, 행복해질 용기, 그리고 그 이전에 선행되어야 할 미움받을 용기를 주장하는 이 책은 생각을 바꾸는 것으로 삶을 바꾸자는 자기계발서다. 지은이가 말하는 미움받을 용기는 미움을 받으면서 계속 살라는 인간에 대한 냉소가 아니라, 미움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격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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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드디어, 가즈오 이시구로!

<나를 보내지마>, <창백한 언덕 풍경>, <남아있는 나날>, 그리고 소설집 <녹턴>까지, 이시구로의 작품은 무엇하나 빼놓을 수 없게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다. 때문에 나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다음 작품이 출판되기를 몹시 기다렸다.

주인공의 고백투로 이어지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기법은 <우리가 고아였을 때>에서도 다르지 않지만, 막바지의 반전은 가히 충격적이라고..

몹시 기대된다.

 

 

 

 

 

꽤 로맹 가리의 작품을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별을 먹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로맹 가리의 장편은 처음 본다. 독재와 저항, 종교와 위선, 제국주의와 공산주의로 혼란한 제3국을 들여다보는 이방인 목사라니, 어른들 세계의 위선과 기만을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보던 <자기 앞의 생>의 모모가 생각난다. 에밀 아자르란 필명으로 인간은 사랑없이 살 수 없다고 얘기한 로맹 가리.

<별을 먹는 사람들>에 등장 인물 중 소외 계층을 연민하느라 스스로를 돌보지 못하는 독재자 알마요의 여자친구는 자신의 두번째 아내인 배우 진 세버그를 모델로 했다고.

로맹 가리는 1979년 진 세버그가 의문사한 이듬해에 권총 자살했다.

 

 

 

 

 

 

 

 

주인공 조코 코기토가 그의 유년 시절에 강에서 아버지가 탄 배가 뒤집히는 것을 보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기억을 더듬은 소설.

오에 겐자브로의 작품을 읽은 적은 없지만, 언젠가는 꼭 읽고 싶었다. 그 시작을 <익사>로 하려 한다.

 

 

 

 

 

 

3월에는 제법 신간 소설이 풍성하다. 그만큼 읽고 싶은 책도 많지만, 언제나 그렇듯 시간이 없다. 엄살이 아니고 정말로... 그렇더라도 이 세권은 꼭 읽고 넘기고 싶은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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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류은희.조현천 옮김 / 현암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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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자신의 근원을 경멸하고 증오한 나머지 뿌리로부터 거세당하고자 하는 욕구로 그 모든 것을 소멸 시키려는 자가 있다. 그는 이제 막 부모님과 형의 죽음을 알리는 전보를 받았는데, 그에 대해 냉담하다. 과연 그가 그토록 가족을 경멸하는 이유가 무엇이며, 얼마만큼 증오가 깊으면 그 죽음에서조차도 초연할 수 있는 걸까. 소설은 바로 그렇게 시작된다.

'부모님과 요하네스 사고사-세실리아, 아말리아로 부터' 전보를 손에 쥐고 침착하게 맑은 정신으로 서재의 창가로 가서 텅 빈 미네르바 광장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11쪽)

 

주인공 무라우는 로마에 살고 있는 오스트리아 지주 가문 출신의 지성인이다. 가문의 영지인 볼프스엑에 살고있는 그의 아버지와 형은 상속받은 많은 유산을 지키는 것을 평생의 과업으로 삼고 있으며, 어머니는 물질과 비정신의 화신으로 가문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고, 여동생들은 가문에 기생하는 것으로 삶을 소비하고 있다. 무라우가 보기에 그들은 스스로를 개선하려는 필요를 느끼지 못한채 과거에 머물러 있으며, 육체적이고, 물질적이며, 비정신적인 것에 비중을 두며 살고 있다. 정신적인 것과 지성에 삶의 의미를 두는 무라우는 이들의 반지성을 혐오하며  떠나온지 20여 년이 지난 어느날 부모와 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그 자신이 떠나온 볼프스엑의 유일한 상속자가 된다. 장례식에 참석한 무라우는 가문의 수장으로서, 한때 카톨릭과 나치즘으로 점철되었던 과거의 볼프스엑을 개선하려는 의지를 갖지만, 근본적으로 볼프스엑을 정신적인 시대로 복원한다는 것이 불가하다는 것을 깨닫고 차라리 이를 소멸시키려 한다.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1931년에 태어난 오스트리아 작가로, 그 무렵의 작가들이 그렇듯 베른하르트 역시 두 차례 일어난 세계대전의 그늘 아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여타의 작가들과 다르게 나치의 침략과 보수적인 분위기로 들끓는 조국 오스트리아를 등지고 관조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대신, 그 안에서 기득권층과 끊임없는 갈등을 야기하는 작품 활동을 했다. 보수 세력으로 대표되는 카톨릭과 나치즘으로 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조국 오스트리아에 대한 증오가 얼마만큼 깊었으면, 베른하르트는 사후 저작권법의 유효기간 동안 자신의 작품을 오스트리아에서 출판하거나 공연하지 못하도록 유언을 남겼을까. 베른하르트의 마지막 소설로 알려진 <소멸>은 그러한 노력의 결정판으로, 주인공 무라우는 그 자신을 포함한 볼프스엑과 함께 조국 오스트리아의 치욕스러운 역사적 사실을 '소멸'하고 싶었던 작가 베른하르트의 '소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베른하르트는 소멸에 대한 자신의 소망을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기법으로 기술했는데, 쉽게 읽히는 스토리 중심의 사건의 흐름을 따르는 표현 방식은 아니다. 그러나 반 자서전 형식을 취하고 있는 무라우의 보고서는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일 뿐이고, 따라서 그 기술 방식 역시 매주 주관적인 표현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사람들은 각각 자신의 느낌을 통하여 본 대로 사고를 보고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언제나 동일한 한 사건이지만 언제나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이다.(316쪽)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중심이 되어 사건을 보고, 판단하며, 해석한다. 이것이 변하지 않는 진리라면 주인공 무라우의 증언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일 수 밖에 없고, 그렇다면 그것은 사건 중심으로 재현될 성질의 것이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베른하르트는 <소멸>을 자기 중심적인 의식의 흐름을 따르는 기법으로 표현하고자 했을 것이다.  전지적 시점으로 쓰여진 사건 중심의 전개 방식은 독자로 하여금 사건을 사실로 믿게할 전지적인 힘이 있지만, 기술자의 의식의 흐름을 쫒는 방식은 그의 증언을 사실로 믿게 하기 보다는 그의 관점에서 보여진 결과물이라는 것을 인식할 여지를 남기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라우의 증언을 허위나 과장의 표현이라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무라우가 누워서 침뱉기와도 같은 근원에 대한 고백을 경멸과 증오로 덧칠할 어떠한 이유도 없으며, 허위나 과장 속에도 일말의 진실은 있기 마련이다. 또한 증언자가 자신의 기억에 대한 보고를 진실로 믿고있다는 그 사실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라우의 기억이라 해도 좋고, 자격지심, 혹은 트라우마는 글쓰기를 통한 배설과 추한 기억의 집합소인 볼프스엑을 처분함으로써 소멸되며, 끝내는 무라우의 죽음을 통해 완성된다.

세계가 다시 정상이 되려면 우선 세계를 완전히 파괴해야 한다는 것이다. 완전히 파괴하지 않고서는 새로워질 수 없기 때문이다.(159쪽)

 

그러나 자칫 무라우의 가족에 대한 고발은 유독 그 자신은 아니라는 발뺌처럼 보일 소지가 있어 거북스러운 면이 없지 않지만, 근원에 대한 경멸은 자신의 태생에 대한 증오이고, 뿌리로 부터 자신을 거세하는 일은 죽음을 가르키는 것이며, 소멸은 그 자신이 죽음으로써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라우의 고발은 가족이나 가문에 대한 변절이 아닌 역사적인 죄상으로 부터 자유롭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고백인 것이다. 베른하르트는 소설을 시작하는 제사로 이를 암시한다. 나는 죽음이 언제나 내 목을 조르는 것을 느낀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하든 죽음은 나를 따라다닌다. -몽테뉴

무라우는 자신과 가족, 가문의 끝을 두려워하지 않고 스스로 소멸을 선택함으로써 새로운 오스트리아의 탄생을 꿈꾸었다. 세상은 죽음을 끝이라 이름 하지만, 무라우가 바라본 끝은 새로운 시작임을 믿었다. 인류는 온갖 아름다움과 가능성을 지닌 무한한 것이지, 멍청한 인간들만 자기가 끝나면 세상도 끝난다 생각하고 있단다.(29쪽)

 

나는 주인공 무라우의 과대망상적 자립, 혹은 방약무인의 자유(14쪽)가 부럽다. 어떤 이유에서든 자신의 뿌리를 증오하고, 그를 거부할 수 있는 것은 용기로 여기지기 때문이다. 어느 누군들 가족이나 조국을 선택할 수 있었겠는가. 이곳에 있기를 스스로 선택한 적이 없었음에도, 여기 있고 여기 있을 수 밖에 없음을 저주 하지 않았던 일이 단 한번도 없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이가 있을까. 무라우의 자립, 자유가 과대망적이고 방약무인한 것일지라도 소멸조차도 자신의 선택임을 믿었던 무라우의 정신적 삶을 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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