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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류은희.조현천 옮김 / 현암사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자신의 근원을 경멸하고 증오한 나머지 뿌리로부터 거세당하고자 하는 욕구로 그 모든 것을 소멸 시키려는 자가 있다. 그는 이제 막 부모님과 형의 죽음을 알리는 전보를 받았는데, 그에 대해 냉담하다. 과연 그가 그토록 가족을 경멸하는 이유가 무엇이며, 얼마만큼 증오가 깊으면 그 죽음에서조차도 초연할 수 있는 걸까. 소설은 바로 그렇게 시작된다.
'부모님과 요하네스 사고사-세실리아, 아말리아로 부터' 전보를 손에 쥐고 침착하게 맑은 정신으로 서재의 창가로 가서 텅 빈 미네르바 광장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11쪽)
주인공 무라우는 로마에 살고 있는 오스트리아 지주 가문 출신의 지성인이다. 가문의 영지인 볼프스엑에 살고있는 그의 아버지와 형은 상속받은 많은 유산을 지키는 것을 평생의 과업으로 삼고 있으며, 어머니는 물질과 비정신의 화신으로 가문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고, 여동생들은 가문에 기생하는 것으로 삶을 소비하고 있다. 무라우가 보기에 그들은 스스로를 개선하려는 필요를 느끼지 못한채 과거에 머물러 있으며, 육체적이고, 물질적이며, 비정신적인 것에 비중을 두며 살고 있다. 정신적인 것과 지성에 삶의 의미를 두는 무라우는 이들의 반지성을 혐오하며 떠나온지 20여 년이 지난 어느날 부모와 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그 자신이 떠나온 볼프스엑의 유일한 상속자가 된다. 장례식에 참석한 무라우는 가문의 수장으로서, 한때 카톨릭과 나치즘으로 점철되었던 과거의 볼프스엑을 개선하려는 의지를 갖지만, 근본적으로 볼프스엑을 정신적인 시대로 복원한다는 것이 불가하다는 것을 깨닫고 차라리 이를 소멸시키려 한다.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1931년에 태어난 오스트리아 작가로, 그 무렵의 작가들이 그렇듯 베른하르트 역시 두 차례 일어난 세계대전의 그늘 아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여타의 작가들과 다르게 나치의 침략과 보수적인 분위기로 들끓는 조국 오스트리아를 등지고 관조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대신, 그 안에서 기득권층과 끊임없는 갈등을 야기하는 작품 활동을 했다. 보수 세력으로 대표되는 카톨릭과 나치즘으로 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조국 오스트리아에 대한 증오가 얼마만큼 깊었으면, 베른하르트는 사후 저작권법의 유효기간 동안 자신의 작품을 오스트리아에서 출판하거나 공연하지 못하도록 유언을 남겼을까. 베른하르트의 마지막 소설로 알려진 <소멸>은 그러한 노력의 결정판으로, 주인공 무라우는 그 자신을 포함한 볼프스엑과 함께 조국 오스트리아의 치욕스러운 역사적 사실을 '소멸'하고 싶었던 작가 베른하르트의 '소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베른하르트는 소멸에 대한 자신의 소망을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기법으로 기술했는데, 쉽게 읽히는 스토리 중심의 사건의 흐름을 따르는 표현 방식은 아니다. 그러나 반 자서전 형식을 취하고 있는 무라우의 보고서는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일 뿐이고, 따라서 그 기술 방식 역시 매주 주관적인 표현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사람들은 각각 자신의 느낌을 통하여 본 대로 사고를 보고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언제나 동일한 한 사건이지만 언제나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이다.(316쪽)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중심이 되어 사건을 보고, 판단하며, 해석한다. 이것이 변하지 않는 진리라면 주인공 무라우의 증언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일 수 밖에 없고, 그렇다면 그것은 사건 중심으로 재현될 성질의 것이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베른하르트는 <소멸>을 자기 중심적인 의식의 흐름을 따르는 기법으로 표현하고자 했을 것이다. 전지적 시점으로 쓰여진 사건 중심의 전개 방식은 독자로 하여금 사건을 사실로 믿게할 전지적인 힘이 있지만, 기술자의 의식의 흐름을 쫒는 방식은 그의 증언을 사실로 믿게 하기 보다는 그의 관점에서 보여진 결과물이라는 것을 인식할 여지를 남기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라우의 증언을 허위나 과장의 표현이라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무라우가 누워서 침뱉기와도 같은 근원에 대한 고백을 경멸과 증오로 덧칠할 어떠한 이유도 없으며, 허위나 과장 속에도 일말의 진실은 있기 마련이다. 또한 증언자가 자신의 기억에 대한 보고를 진실로 믿고있다는 그 사실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라우의 기억이라 해도 좋고, 자격지심, 혹은 트라우마는 글쓰기를 통한 배설과 추한 기억의 집합소인 볼프스엑을 처분함으로써 소멸되며, 끝내는 무라우의 죽음을 통해 완성된다.
세계가 다시 정상이 되려면 우선 세계를 완전히 파괴해야 한다는 것이다. 완전히 파괴하지 않고서는 새로워질 수 없기 때문이다.(159쪽)
그러나 자칫 무라우의 가족에 대한 고발은 유독 그 자신은 아니라는 발뺌처럼 보일 소지가 있어 거북스러운 면이 없지 않지만, 근원에 대한 경멸은 자신의 태생에 대한 증오이고, 뿌리로 부터 자신을 거세하는 일은 죽음을 가르키는 것이며, 소멸은 그 자신이 죽음으로써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라우의 고발은 가족이나 가문에 대한 변절이 아닌 역사적인 죄상으로 부터 자유롭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고백인 것이다. 베른하르트는 소설을 시작하는 제사로 이를 암시한다. 나는 죽음이 언제나 내 목을 조르는 것을 느낀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하든 죽음은 나를 따라다닌다. -몽테뉴
무라우는 자신과 가족, 가문의 끝을 두려워하지 않고 스스로 소멸을 선택함으로써 새로운 오스트리아의 탄생을 꿈꾸었다. 세상은 죽음을 끝이라 이름 하지만, 무라우가 바라본 끝은 새로운 시작임을 믿었다. 인류는 온갖 아름다움과 가능성을 지닌 무한한 것이지, 멍청한 인간들만 자기가 끝나면 세상도 끝난다 생각하고 있단다.(29쪽)
나는 주인공 무라우의 과대망상적 자립, 혹은 방약무인의 자유(14쪽)가 부럽다. 어떤 이유에서든 자신의 뿌리를 증오하고, 그를 거부할 수 있는 것은 용기로 여기지기 때문이다. 어느 누군들 가족이나 조국을 선택할 수 있었겠는가. 이곳에 있기를 스스로 선택한 적이 없었음에도, 여기 있고 여기 있을 수 밖에 없음을 저주 하지 않았던 일이 단 한번도 없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이가 있을까. 무라우의 자립, 자유가 과대망적이고 방약무인한 것일지라도 소멸조차도 자신의 선택임을 믿었던 무라우의 정신적 삶을 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