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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글쓰기 - 우리 말로 끌어안는 영어
최종규 지음 / 호미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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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사름벼리와 산들보라 아버지 최종규가 글쓰기와 관련해 묶은 세번째 책이다. 그러나 나는 이전의 두 책은 보지 못했고, 몇년 전 <헌책방에서 보낸 1년>을 무척이나 소중히 읽었다. 왠만한 세권 분량 정도 되는 부피의 책이였는데, 책을 들고 불광동이며 신촌을 헤매다녔고, 그도 모자라 인천 배다리로, 부산 보수동으로 원정을 다녔다. 딱히 어떤 오래된 책을 구입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헌책방이 주는 감흥을 찾았던 것이다. 천장까지 쌓인 책더미에서 오래된 빵 같은 헌책 냄새를 맡았고, 갱지로 도배된 듯한 누추함 속에서 오히려 아늑함을 느꼈다. 그것은 오래전 돌아가신 할머니의 품과 비슷한 느낌이였다.

<헌책방에서 보낸 1년>을 읽을 무렵 의아하게 생각했던 것은 지은이가 헌책방을 취미삼아 돌기에는 너무 젊었다는 것이였데, 그런 느낌은 <뿌리깊은 글쓰기>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더구나 그는 몇년 새에 아이의 똥기저귀를 손수 빠는 아빠가 되어 있었다.

 

'저마다 제 삶을 올바르게 다스린다면, 알맞춤하게 꾸린다면, 제대로 북돋운다면 어찌 될까 생각해 봅니다. 아마, 삶터와 마을과 나라가 한껏 거듭날 테지요. 달라질 테지요. 온갖 검은 셈속이 사라지고 갖가지 더러운 짓이 쫓겨나며 돈벌레 짓거리는 자리잡을 수 없을 테고요. 거짓말 일삼는 정치꾼은 뿌리내릴 수 없고, 뒷돈 챙기는 쇠밥그릇 공무원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말다운 말을 쓰는 일은 생각다운 생각을 하며 삶다운 삶을 꾸리는 일하고 차근차근 이어지기에, 나라를 주무르는 이들로서는 여느 사람들이 말다운 말을 쓰기를 바라지 않을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제 얼과 넋을 내어주기를 바라고, 스스로 나라밖 물질문명에 넋이 나가기를 바라며, 스스로 제 삶터를 사랑하지 않고 돌아보지 못하기를 바랍니다.'(151쪽)

 

글쓴이 최종규가 <뿌리깊은 글쓰기>에서 하려는 말은 위의 글로 요약된다고 본다. 늘 사용하는 익숙한 용어라서 무엇이 문제인지도 깨닫지 못하는 우리말과 영어의 혼용사례는 일일이 다 꼽기에도 불가능할 정도이다. 말 한마디, 글 한줄에도 영어는 빠지지 않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정상적인 일로 여겨진다. 사용되는 영어에도 유행이 있어 나이브니, 리라이팅이니, 커밍아웃, 피드백 등은 요즘 특히 많이 사용되고 있다.

우리 나라는 0세부터 아니, 태교부터 영어로 시작하는 광적으로 영어를 사랑하는 나라이다. 늘 보고 익숙해져서 영어가 저절로 튀어나올 지경이 되라고 꿈조차도 영어로 권하는 나라이고 보니, 영어의 혼용 사용은 무척이나 지당하다. 지난 주말 대중목욕탕에서 본 텔레비전에서는 네살된 '영어 영재'가 출연해 외국인과 스스럼없이 대화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그 장면을 본 많은 엄마들은 자신의 아이가 그렇지 못한 것을 마치 자신이 못나서라는 양 좌절했고, 아이의 영어교육에 더욱더 매진할 것을 다짐하기도 했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인 아이에게 영어교육을 시키고 있지 못하다. 특별히 우리말 사랑이 애틋하거나, 나만의 교육관이 투철해서라기 보다는 영어교육은 학교에서 받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과 함께, 영어를 학원까지 보내면서 가르치려면 특별한 목적이 있어야 할텐데 그 목적을 나는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말마다 아이의 친구들은 어딘가로 영어시험을 치르러 간다고 하는데, 나는 그 시험 속에서 아이가 좌절하는 것도, 혹은 자만 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영어교육이 필요없다는 주의도 아니다. 영어를 한다면 다만 원서를 스스로 읽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지만, 그조차도 본인이 원하지 않는다면 어쩔수 없는 일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생각은 시도때도 없이 불쑥불쑥 불안으로 바뀌곤 한다. 무엇보다 아이또래의 자녀를 둔 엄마들에게 듣게되는, 중학생이 되고나면 영어학원을 보내지 않은걸 후회하게 될꺼라는 충고에선 특히나 그렇다. 나의 잘못된 판단으로 아이가 심하게 뒤쳐지지나 않을까하는 불안 때문에 영어교육을 시키지 않는 것이 자랑이 아니며, 자신있게 안시키는 것이 아닌 망설이며 못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텔레비전에서 본 영어영재가 전혀, 조금도, 손톱만큼도 부럽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이런 나도 사실, 영어와 혼용해서 쓴 일기를 자랑하는 아이의 궁둥이를 칭찬삼아 두들겨 주곤 한다. 역시 나는 어떤 확고한 철학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시류를 쫓는 의미없는 일에서 제외되고 싶은 삐딱이 이상은 아닌 것이다.

 

다시 책으로 돌아와 이야기하자면, 글쓴이가 반드시 우리말만을 써야한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쓸 말은 쓰고, 거를 말은 거르며 최소한 우리의 정체성은 잊지말자는 이야기인데, 때문에 글쓴이는 영어 사용뿐만 아니라, 한자사용에도 예민하다. 결국 우리는 삼중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꼴이고, 말이고 겉이고 꾸미느라 내실을 잃고 있다는 이야기다.

골목길을 걷다 보니 간판이 모두 영어 아니면 한자어라는 생각을 저절로 하게 된다. 흔히 보는 '두피 클리닉'을 생각해 보면 頭皮 clinic으로 여기에는 한자와 영어뿐, 우리말은 사용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말로 두피클리닉을 뭐라 표현해야 할까. 국어사전에 설명된 것처럼 '두피'를 '머리덮개'로 클리닉을 '시술','치료'로 옮겨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시술이나 치료 역시 한자어가 아닌가. 최종규는 책에서 몇번이나 한자어 가족家族이 아닌 식구로 손질하는 것이 좋다했는데, 식구食口 역시 한자어임에는 다르지 않다.

좋은 의도가 반복으로 인해 책을 읽을수록 조금씩 식상해졌으며, 그럼 어쩌라고 하는 불편한 심기가 들기도 했다. 글투 또한 편하지 않았다.(내 머릿속의 최종규는 젊기 때문에 글투가 계속 어색했다) 글쓴이가 사용하고 있는 이러한 글투는 동화작가이면서, 우리말바로쓰기를 강조하신 이오덕 선생님을 떠오르게 한다. <헌책방에서 보낸 1년>에서도 느꼈지만, 최종규는 이오덕 선생님께 인상깊은 가르침을 받은것이 분명하다고 여겨진다. (그나저나 나도 이오덕 선생님의 '글은 읽기 쉽게 써야 하는 것'이란 말씀은 무척이나 좋아한다)

또 하나 거슬렸던 것은 글쓴이가 겨레, 얼, 넋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는 자칫  인종근본주의, 민족근본주의로 흐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학교다닐때만 해도 우리민족은 단일민족이며, 백의민족이라고 배웠다. 그러나 우리민족은 절대 단일민족이 아니며, 다른민족에 비해 특별히 별난 것도 없다라고 생각한다. 겨레와 넋, 얼, 민족의 지나친 강조가 다문화시대인 오늘날 외국인 노동자들을 경시하는 밑바탕이 되고, 우리들의 자녀이기도 한 그들의 자녀들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편치 않았다.

 

살아가는 모양새 그대로 말이 되고 글이된다는 최종규의 주장은 겉치레에 치중하느라 헛돈들이며 내 삶을 남의 손에 맡길것이 아니라,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쫓든 우리의 정신과 사상은 그 중심을 잃지말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것의 기본인 글쓰기, 말쓰기부터 세세하게 챙기자는 의미로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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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은 미래보다 새롭다 - 유하 산문집, 개정증보판
유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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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숲, 휘파람새 둥지를 바라본다/저 바람 속 모든 새집은/새라는 육체의, 타고난 휘발성을 닮아 있다./머물음과 떠남의 욕망이, 한 순간/망설임의 몸짓으로 겹쳐지는 곳에서/휘파람 소리처럼 둥지는 태어난다/새는 날아가고/집착은 휘파람의 여운처럼/둥지를 지그시 누른다

매혹의 고통은 종종/새의 가벼운 육체를 꿈꾸게 한다/하여 나의 질투는 공기보다 가볍다/난 사랑하고 있으므로, 사라지고 싶은 것이다(유하, 휘파람새 둥지를 바라보며 中)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 말죽거리 잔혹사, 비열한 거리, 쌍화점, 하울링. 그는 이미 중견 영화감독이다. 그러나 내가 아는 '유하'는 시인 이었다. 20대를 보내며 외우고, 또 외웠던 그의 시어들. 시인의 이름조차도 싯구처럼 아름답던 유하.

시인은 자신이 바라보며 느끼는 주관적인 감상을 솔직히 적기 때문에, 읽는 이에게는 난해 할 수 있다. 알듯말듯 모르겠는 그 난해함이 시를 읽게 하는 힘이라고 나름 생각한다. 나는 시인과 같은 시선으로, 같은 감각으로 무엇인가를 보기 위해 시를 읽는 것이 아니라, 시인과는 다른 감성을 느끼기 위해 시를 읽는다.

그런데 그가 영화 감독이었니. 시인이 영화 감독일 수도 있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낯설다. 마치, 소설가인 줄 알았는데 어느날 보니 야구 해설가이기도 하더라는 것처럼 내게는 뜬금없다. 정말 유하를 좋아하기는 했던거냐.

문학과 예술에도, 학문처럼 '통섭'의 힘이 무섭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유하, 스스로도 고백하고 있다. '모든 예술이 한 우물이라 생각한다. 제대로 영화를 만들기 위해 시를 쓸 것이며, 시를 쓰기 위해 영화를 만들 것이다.(개정판 서문에서)'

시의성이 떨어지는 얼마간의 글들을 솎아내고 몇 편의 글들을 새로이 꾸려넣었다고는 하지만, 무려 17년 전 쓴 에세이를 묶은 책이다. 왜..? 이제와 새삼,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이미 책의 제목이 말하고 있다. 돌이키고 싶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이미지를 회상함 이라고. 혹은, 하늘아래 새로운 것은 없나니, 다가오는 미래조차도 이미 과거의 반복이지 않겠냐는 작위적 표현일 수도 있겠다 생각한다.

책은 시인의 추억담을 담고 있다. 고향과 음악, 첫사랑, 그가 쓴 시, 혹은 그가 추억하는 또다른 시인들, 그리고 영화 이야기. 나처럼 시인 유하의 아름다운 잡념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꼭 한번은 읽어볼 필요가 있는 책이다. 그가 사물을 보는 방식과 그가 엮어낸 시어들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는 유하를 영화감독으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매력적인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시를 쓰고, 시를 쓰기 위해 영화를 만듦으로.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영화 이전에 시가 있었다. 그는 아마도 이 시 한편으로 혜성같은 시인이 되었던 것이라고 기억한다. 그의 시를 통해 압구정동은 실제의 이미지에 비해 몇 배는 부풀려져 재생되었고, 따라서 나같은 쑥맥조차도 왕성하게 숨막히고, 갈수록 섹시한 압구정을 바람이 불던 불지않던 수시로 탐하게 하고, 못내 뒤섞이기를 갈망하게 하였다. 시인은 압구정을 체제가 만들어낸 욕망의 구덩이라고 표현했지만, 체제의 작위적인 문화는 유하 자신에 의해 재현되고, 확대되었으며, 확장되었음을 거부하진 못하리라. 결국 이 시대는 시대를 위해 누구나 소모품이 될 것을 강요하고 있다.

어쩌면 시인의 가슴 속에는 아직 채 넘치치 못한 열정이 있으리라, 시인으로. 영화 감독으로. 에세이스트로. 재즈 컬럼니스트로. 차마 구분되지 못한 영역을 넘나들며 시인이었던 유하는 지나간 이미지를 재현하고, 시대를 재현하고, 미래를 재현하겠지.... 그가 다시 시를 쓸 수 있을까.

유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도 입안에 휘파람 소리가 가득해지는 아름답던 시인 유하는, 게으르고 한가한 눈으로 관찰하기를 즐겨하던, 뭔가를 쓰지 않으면 몸이 아프다던 유하는, 우리에게 관음증 환자가 될 것을 명하는 영화감독이 되었다. 나는 그 사실이 못내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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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경쟁 - 패자 부활의 나라 스위스 특파원 보고서
맹찬형 지음 / 서해문집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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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떤 체제에서 살아가든 경쟁을 피할 도리는 없다. 경쟁은 인간의 본성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고, 사회는 경쟁을 통해 성장한다. 다만 어떤 경쟁을 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완전히 달라진다. 한국식 무한 경쟁이 '나쁜 경쟁'인 이유는 단지 비인간적이라서만은 아니다. 더 이상 효율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탈락한 다수를 재기 불능의 잉여 세력으로 방치해두고, 승리한 소수 역시 사회 발전의 창조적 동력이 되지 못하는 경쟁 체제를 더는 지속해서는 안 된다.' (230쪽, 나가는 글 中)

 

이 책을 통해서 알게된 두가지 중 첫번째는, 경쟁은 인간의 본성일 수 있다는 것이다. 무한경쟁 시대를 살면서 만족감보다 박탈감을 느끼는 날이 더 많아 질 수록, 기약없는 내일을 위해 오늘의 희생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수록, 나는 오히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나마 눈치채게 되었다. 타인과 나의 삶을 끝없이 비교하며, 남들보다 뒤쳐질까봐 늘 불안한 그런 삶은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나는 그것이 모두 '경쟁' 탓이라고 생각했다.

이웃을 거부하고, 연대를 부정해 개인을 각개 단위로 고립시키며, 내가 살기 위해 누군가를 짓밟고 올라서도록 하는 주범은 '경쟁'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경쟁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며, 경쟁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여기게 된 것은, 무한경쟁을 주도하는 자들에 의해 학습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경쟁이 만들어내는 아귀다툼을 도저히 인간의 본성이라고는 여길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경쟁은 인간의 본성일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을 했다. 다만 내가 알고있는 '경쟁'은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하는 생존경쟁이며, 이 책에서 말하는 인간의 본성인 경쟁은, 패자에게도 재도전의 기회가 주워지는 좀 더 효율적인 경쟁이라는 것이다. 말그대로 경쟁이 따뜻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 알게된 두번째는, 경쟁은 공존의 반대말이 아니라는 것. 경쟁을 목숨을 건 투쟁으로 잘못 알아듣고 있던 나로서는, 공존의 반댓말은 당연히 경쟁일 수 밖에 없었다. 결승선을 향해 일직선으로 질주하는 경쟁에서는 공존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승자는 단 한사람이므로.

그러나 여러번의 패자부활전이 가능하고, 다양한 기회를 통해 모두가 승자가 될 수 있는 사회라면, 그 사회가 바로 공존하는 사회일 것이다. 경쟁을 하되 소수의 승자를 판별해 내는 경쟁이 아닌, 서로가 승자가 될 수 있는 다양한 채널을 열어놓은 사회라면 말이다. 탈락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사회, 어느 한 부문에서의 실패를 인생 전체의 패배로 여기지 않을 수 있는 사회라면 그 사회가 바로 공존하는 사회가 아니겠는가.

 

스위스 제네바에서 유엔 주재 특파원으로 있는 저자는, 스위스를 따뜻한 경쟁이 가능한 공존의 사회라고 보았다. 남한보다 작은 영토에 다양한 민족들이 어울려 살며, 사용하는 언어가 네가지나 되는 스위스는 통합보다는 분열에 어울리는 요소가 많은 나라임에도 사회통합성이 매우 높고,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부자 나라이다. 저자 맹찬형은 그 비밀이 경쟁의 경로를 분산해 공존할 수 있는 정교한 장치를 마련한 것에 있다고 보았다. 즉, 대학에 진학하지 않아도 강한 경쟁력을 지닐 수 있는 시스템이 스위스를 공존 사회로 만든 것이다. 따뜻한 경쟁은 공존하는 사회를 위한 필요충분조건 이다.

반대로 일단 대학을 나와야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그러면서도 졸업한 후에는 취업을 고민해야 하는 우리 사회는 기약도 없는 말 그대로 무한경쟁의 사회이다. 끝도 없이 경쟁하지만, 결국 누구도 최후의 승자는 되지 못한다. 이에 대한 해법으로 저자는 공교육의 강화를 제안한다. 또한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진출할 수 있는 영역을 넓히고, 대졸자와의 임금 격차를 없애 과도한 경쟁으로 불평등이 구조화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보편적 복지제도를 마련해 일자리를 창출하고 내수를 진작하여, 복지 지출은 소비와 고용 및 생산성 증가로 이어지고, 생산량을 증가해 복지를 위한 세원을 마련하며, 이는 다시 복지 지출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의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복지가 재분배의 수단이라고만 무작정 알고 있던 나로서는 이또한 새로운 앎 이었다.

복지는 저자의 말처럼 소비가 아닌 생산이며, 보편적 복지제도를 마련해야 하는 이유는 무작정 따뜻한 사회를 만들기 위함이 아닌, 성장과 함께 공존하는 합리적 사회를 만들기 위함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우리 사회 복지제도의 기조인 사후 대응 방식의 복지정책이 아닌, 예방적 조치로서의 복지정책이 반드시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복지가 빈곤층만을 위한 제도로 여겨지는 사회에서는, 빈부격차와 함께 사회적 위화감이 높아질 수 밖에 없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복지 정책은 빈곤층만이 아닌 부유층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디아스포라의 눈>을 쓴 재일 조선인 서경식 교수는 <디아스포라의 눈>에서 국민국가 시대의 다수자인 국민들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것을 디아스포라인 자신이 볼 수 있는 것은, 다양성과 포용을 견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스위스라는 나라에서 외국인이며, 외부 기자인 맹찬형이 보는 스위스의 모습은 전체적 조망과 함께 세부적인 분석이 가능할 것이다. 뿐만아니라, 내국인이면서도 외부인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조국의 모습 또한 적당한 거리감으로 견지될 것이 였다. 때문에 <따뜻한 경쟁>은 무한경쟁이라는 한 배에 타고 있으면서도, 그 위험성에 대해 무감각해진 절대 다수의 내부자인 우리들이 꼭 한번 생각해 봐야 할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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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에서 본 세계는 지금 어디쯤 왔을까?
클라우스 베르너 로보 지음, 송소민 옮김 / 알마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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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전 나의 이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나는 왼쪽인가, 왼쪽이라면 어째서 왼쪽이라고 여기는가. 일명, '가진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왼쪽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의 성장기로 말하자면, 가진자 쪽이였을 것이다. 아빠는 고소득의 전문 직업인이었고, 엄마가 돈 문제로 고민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나에게는 나만의 방과, 나만의 침대와 나만의 피아노가 있었고, 나는 하고 싶은 것보다는 하기 싫은 것이 더 많은 그런 아이였다. 철철이 여행을 다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가족행사였고, 외식은 분수가 쏟아지는 무슨무슨 가든이나 호텔 뷔페식당 등이 애용되곤 했다. 그러나 보여지는 모습에 비해 가정에서의 생활은 그다지 행복한 쪽은 아니었다. 아빠는 늘 바빴고, 외식이나 여행 때가 아니면 주말에도 집에 있는 법이 없었다. 엄마는 돈 걱정을 하지 않는 대신, 늘 히스테리컬한 모습이였다.

하고 싶은 공부가 없었던 나는 대학생활도 의무적이 였다. 최루탄이 쏟아지던 그 시절, 땀내가 진동하는 전경들 앞을 지날 때에도 꼿꼿이 걸으려고 용을 쓰던 미니스커트에 하이힐을 신은 내 모습은 이념이라고 할 것 조차도 없는 방관자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런 모습은 결혼 후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은 나 스스로를 왼쪽이라 여기고 있는가. 그 이유는 책과 함께, 엄마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책을 읽으며 되새김질 하는 세상의 부당함에, 권력의 파렴치함에, 자본의 광포함 앞에 내 몰리는 내 아이를 상상하는 순간 나는 '왼쪽'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더불어 '가진자'였다라고 기억되는 나의 성장기가 한낱 꿈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자식들에게는 히스테리를 부리다가도 돈을 가져다 주는 아빠 앞에서는 고분고분했던 엄마의 얼굴을 기억하기 때문이며, 드리는 공에 비해 성취하는 것이 적었던 나는 늘 엄마에게 골치덩어리였고, 자랑스럽지 못한 딸이였다는 것이 내 골수에 깊이 박혀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뒤쳐지지 않기 위해, 남들보다 더 잘 살기 위해 해야하는 것들, 가져야 하는 것들은 나를 지치게 한다. 그 속에서 이미 행복하지 않았던 경험이 있던 나는 내 아이에게는 똑같은 경험을 되물려 주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 '왼쪽'이다. 세상은 원모습 그대로 충분히 풍요로우며, 경제성장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 환경은 보호되어야 하고, 세상의 모든 사람은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다. 올라서기 위해 딛는 옆사람의 어깨는 내 이웃의 어깨이며, 밟히는 그 어깨는 바로 내 어깨다.

 

 

이 책에 나와있는 내용은 이미 무수히 우리가 보아온 사례이며, 알면서도 나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내용이다. 커피 열매와 카카오 열매를 따기 위한 노동에 12세도 되지 않은 어린이가 동원되고, 핸드폰에 꼭 필요한 탄탈이라는 광물 등 아프리카의 풍부한 자원은 끊이지 않는 아프리카 내전의 이유이며, 애플과 나이키 등 대기업은 자사 공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중국이나 베트남 등의 하청공장에서 비인간적인 대우와 급여를 받는 노동자들이 생산해 내는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는 것, 맥도널드의 햄버거와 맥너겟에 사용되는 소와 닭의 사료인 콩을 경작하느라 지역농산물을 생산하지 못해 기아에 허덕이는 토착민들 등 그 밖에도 이미 무수한 사례를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난 시절 우리나라에서도 똑같은 착취가 빈번하게 일어나기도 했다. 그것이 꼭 과거의 일만도 아니것만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갖은 나라의 사람들인양 행세하고 있다.

보통의 중산층으로 살기 위해, 혹은 보이기 위해 희생해야 하는 것들에는 눈을 감고, 대기업과 메이커에 열광하며 오늘도 사람들은 아케이드로 몰려들고 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사망하고 지난 1월, 중국에 아이폰4s가 출시된 첫날 몰려든 인파 때문에 아이폰 측에서는 판매를 중단하기도 했다. 애플의 중국 공장에서 '다공메이'라고 불리는 처녀공들이 하루 15시간 노동에 법정 최저임금보다 낮은 액수를 받으며 생산해 낸 바로 그 아이폰은 생산과 소비에서 모두 중국인들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그 중국인들이 바로 우리다.

 

 

그렇다면 생산자와 소비자로 동시에 이용되고 있는 우리에게 다른 대안이 있는가. 물론 대안은 있다. 책에서는 챕터마다 문제 제기와, 사례를 들고 말미에 대안으로 우리가 행할 수 있는 행동들을 요점 정리하듯 정리했다. 정당한 방법으로 제품을 생산하지 않고 광고에만 열을 올리는 메이커 제품과 다국적 기업 물건에 불매 운동을 벌이고, 자사에 항의하고,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은 사지 않으며, 지역생산물과 공정무역을 이용할 것, 세계민들과 연대하고 서로 정보를 공유하며, 시민으로서 용기를 갖을 것 등이다.

한편으로는 위와 같은 대안은 너무나 모호하고, 경제적 글로벌 화에만 열을 올리고 있는 세계질서에 크게 변화를 줄 수있는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답답한 심정이 된다. 예를 들면, 불법증여와 권력유착, 후진적 무노조 경영 등으로 문제를 일삼고 있는 삼성의 갤럭시s를 사지 않으려고 애플의 아이폰을 선택했더니, 애플 역시 노동자들의 부당한 노동력 착취로 돈을 벌어드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황당함과 이어지는 자포자기 같은 심정 말이다. 새로운 제품은 날마다 쏟아지고, 사방에서 울리는 제품광고는 '물건'을 갖지않으면 나는 곧 낙오하고 말 것이라고 떠들어댄다. 낙오하지 않으려는 선택은 결국 우리를 물건의 노예, 자본의 노예로 규정되게 하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갖고 싶은 핸드폰은 무수히 새로 개발되는데, 나 혼자서 꿋꿋하게 하는 불매운동 등은 무척이나 촌스럽게 여겨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갖고 싶은 그 욕망조차도 본성이 아닌, 자본에 의한 세뇌이며 훈련이라는 것을 자각해야 이길 수 있는, 이것은 그야말로 자본과의 전쟁이다. 우리의 적은 이웃이 아니며, 우리의 적은 다른나라가 아니다. 우리의 적은 '자본'이다. 낙숫물은 언제가는 바위를 뚫는다는 믿음으로 모든 생산자와 소비자가 연대해야 이길 수 있는 전쟁이다.

알고있지만 나의 일이 아니므로, 라는 생각으로 무심결에 이책을 지나쳐서는 안된다. 무심결에 행하는 '방관'은 결국 나와 내 아이를 삼킬 것이다. 자본과의 전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나의 몫은 무심결에 마시는 커피 한 잔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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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더 이상 당신의 가족이 아니다 - 사랑하지만 벗어나고 싶은 우리시대 가족의 심리학
한기연 지음 / 씨네21북스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읽으며, 내 자신은 물론이고 참으로 많은 주변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곤 했다. 내 주변의 사람들이 유독 불행한 가족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만큼 가족의 문제는 누구에게나, 어느 가족에게나 있을 수 있는 것이고, 실제로도 많은 가족들이 문제를 품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관계'의 문제로, 피를 나눈 가족도 기본적으로는 나와 타인과의 관계이다.

나와 타인으로 구분된다는 것은 서로 다른 자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에 따른 경계를 구분하고, 서로의 경계를 침범하지 않으면서 소통하는 것이 양질의 관계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가족이란 피를 나눈 사이이고, 때문에 그 누구보다 서로를 잘 알고 있으며, 또한 그 누구보다 서로를 생각하고 걱정하기 때문에 수시로 넘어서는 안되는 경계를 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 속에서 관계가 악화된다.

서로를 잘 알고 있기때문에 하는 걱정의 진실은 도를 넘는 사랑이며, 사실은 간섭이며, 때때로 폭력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가족으로 인해 속울음을 울고 있는지, 때때로 나는 나 혼자만 겪는 고통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하곤 했다.

 

나는 평화로운 사람들을 늘 경이로운 시선으로 보아왔다. 평화롭다라는 것은 안정된 자아를 의미하는 것으로, 그들은 도대체 어떤 엄마 아래서 유년시절을 보냈기에 그토록 안정되고, 침착할 수 있는지 늘 부러움의 대상이 되곤 했다. 하여, 나의 불안정하고 히스테리컬한 성격을 확인하게 될 때마다, 원망은 늘 과거를 향하곤 했다. 그 속에서 나는 늘 용서할 수 없다고 외쳐왔다. 그럴수록 나는 늘 불행했으며,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은 경험이 없는 나는 엄마가 될 자격조차도 없다고 믿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결혼을 했고, 생물학적인 엄마가 되었다.

엄마가 되었지만, 내 엄마가 그랬듯이 아이가 엄마인 내가 원하는 행동을 할 때만 조건부적인 사랑만을 주었다. 잠든 아이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린 날이 흘리지 않은 날보다 많았고, 아이의 우울한 모습을 보면서 어린 나를 보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아마도 그것이 내 변화의 시작이라고 생각된다. 잠든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이대로는 안된다는 생각.. 아이를 제대로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 후로, 내 안의 자라지 못한 아이를 위로할 수 있는 강좌와, 책을 찾아 읽었고, 상담공부를 하며 실제로 상담을 받기도 했다. 그런 과정에서 나 혼자만 힘든 유년시절을 보낸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또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마찬가지로 아이가 내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은 아이의 잘못이 아니며, 내 시선이 왜곡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았다.

내 속의 자라지 못한 아이를 만날 때마다, 아이를 쓰다듬었다. 얼마나 외로웠니, 얼마나 두려웠니, 사랑받고 싶었구나...

이상한 것은 내 속의 아이를 받아들이고, 안을 수 있게 되자 내 아이의 못마땅한 행동들이 전혀 못마땅하게 여겨지지 않았을뿐더러, 그저 바라만 보아도 예쁘고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나는 내게서 평화로움과 안정을 느낀다. 더이상은 내안에 미움이나 원망이 없다. 그것은 내가 과거의 엄마를 놓아버렸기 때문이다. 용서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놓아버렸다. 이제는 거의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아마도 그것이 이 책에서 말하는 '한계설정'일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떠올렸던 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한 권씩 선물하고 싶다. 가족이 꼭 반드시 사랑일 필요는 없다라는 것을 말로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족도 엄밀하게는 타인이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불행한 가족사를 마감하는 첫번째 순서가 될 것이다. 더불어, 이 책을 주변의 엄마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아이는 제2의 '나'가 아니라는 것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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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연금, 보험, 저축을 능가하는 노후대비'책'
    from 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2012-10-30 14:56 
    '두통에는 진통제', '우울증엔 항우울제', '불면증엔 수면제'라는 것이 공식처럼 각인되고 있다. 그러나 시댁과 갈등을 겪는 전업주부의 두통과 학습우울증에 걸린 청소년의 두통이 과연 같은 질병일까. 또 시댁과 갈등을 겪는 주부에게 어깨 결림, 두통, 불면증, 소화불량, 생리통이 동시에 나타났다면, 이는 각각 정형외과, 신경과, 정신과, 내과, 산부인과에서 따로 해결해야 할 병일까. ─강용혁, 『닥터K의 마음문제 상담소』, 12쪽 예전에 손발이 너무..
 
 
꼬마요정 2012-02-21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족의 문제는... 참으로 어려워요..
저한테 많은 도움이 되는 글입니다. 고맙습니다.^^

비의딸 2012-02-21 22:26   좋아요 0 | URL
웅..? 도움이 되신다니 저도 고맙습니다. 책을 직접 읽어보시면 더 많이 도움 받으실꺼라 생각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