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은 미래보다 새롭다 - 유하 산문집, 개정증보판
유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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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숲, 휘파람새 둥지를 바라본다/저 바람 속 모든 새집은/새라는 육체의, 타고난 휘발성을 닮아 있다./머물음과 떠남의 욕망이, 한 순간/망설임의 몸짓으로 겹쳐지는 곳에서/휘파람 소리처럼 둥지는 태어난다/새는 날아가고/집착은 휘파람의 여운처럼/둥지를 지그시 누른다

매혹의 고통은 종종/새의 가벼운 육체를 꿈꾸게 한다/하여 나의 질투는 공기보다 가볍다/난 사랑하고 있으므로, 사라지고 싶은 것이다(유하, 휘파람새 둥지를 바라보며 中)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 말죽거리 잔혹사, 비열한 거리, 쌍화점, 하울링. 그는 이미 중견 영화감독이다. 그러나 내가 아는 '유하'는 시인 이었다. 20대를 보내며 외우고, 또 외웠던 그의 시어들. 시인의 이름조차도 싯구처럼 아름답던 유하.

시인은 자신이 바라보며 느끼는 주관적인 감상을 솔직히 적기 때문에, 읽는 이에게는 난해 할 수 있다. 알듯말듯 모르겠는 그 난해함이 시를 읽게 하는 힘이라고 나름 생각한다. 나는 시인과 같은 시선으로, 같은 감각으로 무엇인가를 보기 위해 시를 읽는 것이 아니라, 시인과는 다른 감성을 느끼기 위해 시를 읽는다.

그런데 그가 영화 감독이었니. 시인이 영화 감독일 수도 있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낯설다. 마치, 소설가인 줄 알았는데 어느날 보니 야구 해설가이기도 하더라는 것처럼 내게는 뜬금없다. 정말 유하를 좋아하기는 했던거냐.

문학과 예술에도, 학문처럼 '통섭'의 힘이 무섭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유하, 스스로도 고백하고 있다. '모든 예술이 한 우물이라 생각한다. 제대로 영화를 만들기 위해 시를 쓸 것이며, 시를 쓰기 위해 영화를 만들 것이다.(개정판 서문에서)'

시의성이 떨어지는 얼마간의 글들을 솎아내고 몇 편의 글들을 새로이 꾸려넣었다고는 하지만, 무려 17년 전 쓴 에세이를 묶은 책이다. 왜..? 이제와 새삼,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이미 책의 제목이 말하고 있다. 돌이키고 싶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이미지를 회상함 이라고. 혹은, 하늘아래 새로운 것은 없나니, 다가오는 미래조차도 이미 과거의 반복이지 않겠냐는 작위적 표현일 수도 있겠다 생각한다.

책은 시인의 추억담을 담고 있다. 고향과 음악, 첫사랑, 그가 쓴 시, 혹은 그가 추억하는 또다른 시인들, 그리고 영화 이야기. 나처럼 시인 유하의 아름다운 잡념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꼭 한번은 읽어볼 필요가 있는 책이다. 그가 사물을 보는 방식과 그가 엮어낸 시어들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는 유하를 영화감독으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매력적인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시를 쓰고, 시를 쓰기 위해 영화를 만듦으로.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영화 이전에 시가 있었다. 그는 아마도 이 시 한편으로 혜성같은 시인이 되었던 것이라고 기억한다. 그의 시를 통해 압구정동은 실제의 이미지에 비해 몇 배는 부풀려져 재생되었고, 따라서 나같은 쑥맥조차도 왕성하게 숨막히고, 갈수록 섹시한 압구정을 바람이 불던 불지않던 수시로 탐하게 하고, 못내 뒤섞이기를 갈망하게 하였다. 시인은 압구정을 체제가 만들어낸 욕망의 구덩이라고 표현했지만, 체제의 작위적인 문화는 유하 자신에 의해 재현되고, 확대되었으며, 확장되었음을 거부하진 못하리라. 결국 이 시대는 시대를 위해 누구나 소모품이 될 것을 강요하고 있다.

어쩌면 시인의 가슴 속에는 아직 채 넘치치 못한 열정이 있으리라, 시인으로. 영화 감독으로. 에세이스트로. 재즈 컬럼니스트로. 차마 구분되지 못한 영역을 넘나들며 시인이었던 유하는 지나간 이미지를 재현하고, 시대를 재현하고, 미래를 재현하겠지.... 그가 다시 시를 쓸 수 있을까.

유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도 입안에 휘파람 소리가 가득해지는 아름답던 시인 유하는, 게으르고 한가한 눈으로 관찰하기를 즐겨하던, 뭔가를 쓰지 않으면 몸이 아프다던 유하는, 우리에게 관음증 환자가 될 것을 명하는 영화감독이 되었다. 나는 그 사실이 못내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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