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이 시대 최고의 엔터테이너.

연습과 리허설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보면 볼수록 그의 동작, 눈빛, 노래 하나하나가 마치 공연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목을 보호하기 위해서 살살 부르는 노래에도 저절로 몸이 들썩일 정도니, 온 힘을 다해 부르는 본 공연의 감동은 얼마나 대단할까. 아니 대단했을까. 

Rest in peace.

 

작년 가을이었나 여름이었나, 을밀대에서 정지우 감독을 우연히 만나 잘 지내시냐는 인사를 나누고, 요즘엔 무슨 작품 준비하시냐고 물었더니, 은교를 준비중이라고 하셨다.

박범신의 소설 은교는 그냥 노문호의 롤리타 습작 정도 아닐까 하는 생각에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그 소설을 원작으로 영화를 찍고 있다니.

박해일에 대한 정감독의 애정은 십년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캐스팅까지 다 결정된 영화가 엎어지면서 한동안 같이 작업을 못 하다가 모던 보이에서 드디어 같이 작업에 성공했었지. 이번 작품에서 노인역에서 젊은 역까지 모두 박해일에게 맡긴 건, 성공 여부와는 별개로 한 배우에 대한 감독의 오랜 애정에서 비롯된 믿음 아니었을까 싶다.

아무튼, 회사 팀원들(남자 4명)이 점심 시간에 나와서 단체로 본 영화는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다크나이트 비긴즈, 다크 나이트, 다크나이트 라이즈... 트릴로지 세편을 모두 다 봤다.

다크나이트 시리즈를 정말 사랑하지만, 뒤에 군소리가 붙지 않은 다크 나이트만이 진정 최고라고 말하고 싶다.

다크나이트를 보고 한동안 '정말 이런 영화를 만들어내다니'라는 충격에 일어나지 못할 정도였는데. 헐리웃 블럭버스터로, 감독이 만들어낼 수 있는 극한의 영화를 만든 게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번 다크나이트 라이즈는 이 시리즈가 만화를 원작으로 한 블럭버스터라는 걸 새삼 깨닫게 해 준, 그냥 잘 만들고 재미있게 볼 만한 영화였다.

아이맥스로 못 봐서 아이맥스로 한 번 더 봐야지 하고 극장에 들어갔지만, 나오면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 그동안 케이블에서 해주는 다크 나이트는 극장에서 느낀 그 감동이 훼손될까봐 차마 보지도 않았는데 참 아쉽네.

그래도 트릴로지 DVD 세트가 나오면 분명 사겠지. 그럴거야.

 

내게 파리는 인생의 커다란 결정, 그리고 그 결정에 대한 보상의 의미가 크다. 잘 한 결정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만...

나에게 30년대가 가보고 싶은 황금시대라면, 이 영화의 주인공인 길에게는 20년대 파리가 황금시대이다. 그가 거기서 사랑에 빠지는 아드리아나는 1890년대 벨르 에포크를 황금시대로 생각하고 벨르 에포크의 주인공들은 르네상스 시대를 황금시대라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주인공 길이 만나는 인물들, 그가 걷는 세느 강변, 카메라가 보여주는 도시의 풍경들이 다시 생각나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의 황금시대는 파리에서 보낸 2주 동안은 아니었을지.

그래도 감독은 결국 각자의 황금시대는 바로 지금, 여기라고 말해주고 싶어한다. 나이든 감독의 유머와 친절한 충고를 다시 한번 곱씹어 볼 일이다.

 

비오는 주말 저녁, 어제 본 따끈한 영화.

내용은 대강 알고 있었고, 왠지 힘든 영화가 될 것 같아서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영화는 정말 잘 만들었고, 배우들은 정말 잘 연기했지만, 그래도 편하지는 않았다.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하고, 사랑을 다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데, 상대가 그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아니 결국 나 자신이 그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거라면...

인생에서 만나는, 평생 대해야 해서 익숙하긴 하지만 결코 좋아할 수는 없는 그런 존재가 가족 안에 있다면.

남편이나 아내는 잘못된 선택이란 생각이 들면 이혼이라도 할 수 있지만, 물릴 수 없는 자식이란 존재가, 불.량. 이라면.... 이건 신체적인 장애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자식이 웬수다라는 속담이 계속 생각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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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2-08-21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먼저 음악을 들어요. 밑에서부터 올라가는,^^;;
우디 앨런의 영화에서 이 노래가 나와서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그런데 한씨님 도대체 어떤 분이시기에 저는 평생 만나 볼 수도 없는 감독님과 대화하시는???
점점 한씨님이라는 분이 궁금해지잖아요!!! ㅎ
마이클 잭슨 것만 빼고 저 와 다 겹쳐요!!!
마이클 잭슨을 생각하면 지금도 안타까워요.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지네요.
오늘 대전엔 큰 구름이 많이 떠 있어요.
제가 하늘에 구름이 많은 걸 무척 좋아하거든요…. 더구나 하얀 구름이 뭉게뭉게, ㅎㅎㅎㅎ
이런 페이퍼 자주 올려주세요, 읽으신 책도 그렇고, 오늘 하루 기분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아요.
한씨님께도 느낌 좋은 일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 남깁니다.^^

2012-08-22 18: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름 고심해서 책을 사곤 하지만 가끔은 전혀 아닌 책을 고를 때가 있다. 

읽지도 않은, 그렇다고 나중에 읽을 것 같지도 않은 책이라 미련 없이 알라딘에 되팔았다. 

박스에다 넣고 (그래 예스24 박스이긴 했다...) 지정 택배로 보낸 후 며칠 있다가 문자가 왔다. 메일도 왔다.

책을 받았는데, 상태가 불량해서 반송한단다. 

도대체 넉넉한 서류 봉투에 넣어 박스로 포장해서 보낸 책이 어떻게 가면 상태가 불량해 질 수 있을까. 







반송된 책을 받아 보면 알겠지. 

일주일 정도 지난 오늘 책이 왔다. 

꺼내 본 책 상태는 내가 보낼 때의 상태와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내가 보낼 때의 상태는 알라딘에서 처음 받았을 때의 상태와 동일하다. 

불량한가?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 봤다. 아니란다. 내가 봐도 매입이 거부당할 정도로 불량해 보이진 않는다. 

왼쪽은 몇주 전 알라딘에서 산 책, 오른쪽이 반송 처분된 책이다. 

상태 불량의 이유는 조금 운 것 때문인가? 처음 받았을 때도 저렇게 울고 있었다. 그리고 띠지 상태를 보니 배달가면서 비라도 맞은 건 아닌지 의심된다. 

그럼 왼쪽의 새 책은 양호한가? 

알라딘에서 책을 한 권만 살 때 보내는 비닐 포장에 담겨 오다가 택배 아저씨가 한 번 놓쳤는지 구석이 크게 눌리고 깨졌다. 그래도 이 정도로 반송하고 새 책 요구하는 건 좀 심한 거 같아서 그냥 보고 있다. 

그런데 오른쪽 책을 상태 불량으로 반송 처분 당하고 왕복 택배비 3000원까지 부담당하고 나니 왠지 억울하다. 

도대체 어느 책이 더 상태 불량인가?

알라딘에 중고책을 팔려면 얼마나 깨끗해야, 얼마나 철저하게 포장해서 보내야 하는 건지... 


당신들이 중고책 검사하는 기준으로 새 책도 확실하게 포장해서 보내라.

한 권이라고 비닐 포장, 에어캡도 제대로 안 되는 포장으로 보내서 한번만 떨어지면 귀퉁이가 다 찌그러지는 포장으로 보내지 말고. 뭐, 읽어 보기나 하겠냐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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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화차가 개봉한다는, 그것도 감독이 변영주라는 소식을 듣고 소설 화차를 읽기 시작했다. 

근 2달만에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내린 결론은 미안하게도 영화는 안 보는 게 낫겠다는 거였다. 

어차피 2시간 안 되는 시간동안 이 소설이 하고자 한 모든 것을 표현하기는 불가능한 일이고, 그러면 당연히 감독이 취사선택한 방식과 스토리가 나올 수 밖에 없는데 결국 그건 소설 화차라는 텍스트 자체 뿐만 아니라 그 텍스트를 읽으면서 경험한 총합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 사는 게 다 맘대로 되는 게 아니듯, 정신없이 보낸 주말에 영화까지 보게 되었다. 


고스톱에서야 쓰리고면 최고지만 영화 시나리오의 각색이란 게 10고는 기본이고 20고도 남의 얘기가 아닌데, 과연 변 감독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인물과 사건과 그 감정들을 조율하느라 보냈을까. 그것도 본인이 7년만에 메가폰을 다시 잡는 영화에 미미 여사의 사회파 고전이니... 그 마음 고생은 안 봐도 뻔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느낀 점은 전체적으로 과잉의 기운이 느껴진다는 것. 많은 부분을 솎아내고 캐릭터의 추가, 변형을 거치고 나서 꽤나 속도감 있게 밀어부치는 데도 불구하고 이런 과잉의 느낌은 시종일관 계속되었다. 주인공들이 찾아다니는 인물들은 경선/쿄코의 비밀을 말해주지 못해 안달인 것 같고, 토막난 시체는 딱 필요한 시점에 턱 떠올라 주고... 심지어 주인공들조차 자기 감정과 행동을 친절하게 합리화 해주는... 


결국 영화 화차는 감독이 읽은 소설 화차에 대한 감상문이 아니었나 싶다. 텍스트의 빈 곳을 채우는 것이 본인의 감상이기에, 인물들은 선영에 대한 이야기들을 경쟁하듯 던져 주고, 주인공들은 그렇게 설명적이고 말이 많았던 것 같다. 


그리고 감독은 양파 껍질처럼 겹겹이 숨겨진 경선/쿄코 라는 인물에 여성으로서의 공감이라기 보다는 남성적 시선으로서의 사랑/연민을 더 느낀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소설과 달리 본인이 유추해서 만들어 낸 용산역 시퀀스에서 문호가 왜 그런 짓을 저질렀냐며, 날 사랑하긴 한 거냐며 하나마나한 물음을 던지지는 않았을 거고, 선영 역시 그러면 행복해 질 줄 알았어 같은 하나마나한 변명은 안 해도 되지 않았을까. 이러한 감독의 시선은 펜션씬에서 본인이 직접 잡은 보조 카메라로 김민희라는 배우를 훑는 카메라 워크에서도 드러난다. 이 때 카메라의 시선은 완벽히 남자의 시선이니까. 

 

김민희가 현장에서 행복해 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조성하, 이선균, 그리고 변영주 까지 3명에게서 무한의 사랑과 경배를 받았을 테니...


어찌 됐건 무려 20년이나 지난 한국 사회에서 선영은 뱀이 허물을 벗고 다리가 돋아나는 기적을 행하지 못한다. 힘들게 허물을 벗고 다리가 돋아나지 않은 걸 확인하고 다시 숲속으로 숨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 하물며 나비가 되어 날아가는 꿈은 말해 무엇하랴. 비상 혹은 현상 유지를 위한 애절한 욕망의 날개짓의 끝은 추락일 뿐이다. 


덧. 영화의 가장 아쉬운 점은, 빛나는 순간이 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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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팅과 소비자에 대한 글. 대중과 별종이라는 카테고리로 소비자를 설명하지만, 이미 대중이라는 신화에 함몰한 기업 역시 대중과 별종이라는 카테고리로 설명할 수 있을 듯. 마케터 스스로 '평균'이라는 함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정규분포곡선의 종이 녹아내리듯이 사라질 수 있다는 섬뜩한 경고. 하지만, 초당 1억원이 넘는 광고비를 수퍼보울 경기에 쏟아 붓는 걸 보면 아직 '이상한 놈들'만 있는 건 아닌 게 현실...

 

 [별종]

지난 50년 동안 대중을 손에 넣는 일은 거의 모든 미국 비즈니스의 목표였다. 그것은 일반인들에게 일반적인 물건을 높은 가격에 대량으로 판매하는 것을 의미했다. 다른 한편에서 소비자들에게 한결같이 주입된 내용은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대중의 중심을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 24p

 

별종은 홀로 있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외로운 사람도 아니다. 그들이 별종인 이유는 대중의 편안함과 효율성을 포기하고 대신에 작은 집단, 즉 그들의 튀는 개성을 기대하는 집단을 형성하는 것이다. 별종이라는 존재의 핵심 요소는 바로 스스로 원해서 '선택'을 내린다는 것이다. - 28p

 

사람들이 대중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이유는... 목적은 바로 소통이다. -56p

 

고장 난 교육 시스템에 대한 단순한 대안은 바로 별종을 끌어안는 것이다. 정상을 포기하는 것... 간단한 일이다. 하지만 쉽지는 않다... 별종은 가공할 수가 없다.  - 119p

 

나만의 독특한 개성을 살릴 수 있는 능력과 선택의 자유, 설득적인 표현력... 행복과 가장 관련이 높은 요소들이다.  - 121p

 

수세대가 지난 후엔... 새로운 정상(별종)이 곧 새로운 도덕이 되었다.  -129p

 

[마케터]

마케터들은 계속해서 헛다리를 짚고 있다. 소부족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함께 협력하는 체계를 갖추기보다는 거대 집단을 찾느라 분주하다... 대중에 치우친 우리의 편견은 너무나 강력하고 깊숙이 박혀 있어 그냥 지나치기 쉽기 때문이다. - 51p

 

새로운 마케터는 시장이 원하는 것을 만들어 내는 능력뿐만 아니라 시장이 무엇을 원하는지 간파하는 능력 역시 뛰어나다. -53p

 

사람들이 소통을 선택하면 그들이 권력을 얻게 된다. 그들의 선택은 그들의 몫이지, 마케터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당신한테서 물건을 구입하기를 바란다면, 당신은 먼저 나의 튀는 개성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어야 한다. -74p

 

별종의 의무. 마케터가 정확히 당신이 원하는 것을 만들게 하려면, 마케터에게 당신이 원하는 것을 말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그런 제품을 만들었을 때 약속대로 그것을 구매해야 한다.  -125p

 

많은 마케터가 현대의 PT 바넘이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것은 목표가 아니다. 목표는 한 부족을 찾아내고 조직하고 필요를 채워 주고, 이끌면서 구성원들의 독특한 개성에 맞서는 대신에 그것을 포용하는 것이다.  -146

 

[미디어]

모바일은 최강의 별종 매체이다... '나'라는 사일로에 시간(...바로 지금)과 위치(...바로 여기)를 추가했으니 말이다. -104p

 

보잉보잉닷넷은...크리에이터를 위한 것이고, ESPN은 잠시나마 안전과 향수를 찾는 사람을 위한 것(10년 전만해도 ESPN은 광고비를 투자할 만한 곳이 아닌, 괴짜 아웃라이어로 여겨지던 방송이었다)  - 113p

 

[광고]

텔레비전 홍보에 푹 빠졌던 수많은 브랜드들은 돌아갈 곳도 이렇다 할 계획도 없이 발이 묶이고 말았다. 대중에게 사로잡힌 상태에서 그만 상대할 대중이 없어지고 만 것이다. -79p

 

개인을 들여다 보는 하나의 렌즈를 생각해 보자. 이제 우리는 없다. 대중도 없으며, 중심도 없다. 우리 문화는 부족들의 집합체이며, 각 부족은 관심사별로 뭉친 커뮤니티이다.  - 140p

 

이제 틈새 시장은 없다. 대중도 없다. 부족에 가담하고 부족을 키우고, 혹은 부족에게 물건을 팔 사람들을 찾느라 애쓰는 부족만이 있을 뿐이다.  -141p

 

일반적인 광고는 모두 싫어하지만 특별한 광고는 모두 좋아한다.  -14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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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화가 이우일이 쓴 책 '콜렉터'의 소개글에 이런 말이 있더군. '일단 모으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 

 잘 나가는 CD가 읽은 책들을 모은 책이 나오더니, 이제는 자기들끼리 회의한 것을 적어 놓은 회의록까지 책으로 내놓다니... 그래 올해 피티도 많이 줄었던데, 다들 한가했구나. 그랬구나.... 부러움 반, 질투 반의 반, 걱정 반의 반....  

 잘 된 광고를 보면 저 광고 기획서는 도대체 어떻게 썼을까 하며 수소문해서 찾아 보던 것도 이젠 옛말. 요즘은 무슨 광고가 새로 온에어 됐는지도 제대로 못 챙기는 지경이지만. 그래도 기획서도 아니고 무려 회의록이라는데, 안 볼 수가 있나.  

아, 역시 광고계의 전설 박웅현 CD팀의 회의는 달라도 많이 다르다. 짧으면 2주, 길면 3개월에 걸친 피티 기간을 저렇게 요약해서 정리해 놓으니, 그동안의 핍박과 분노와 피말리는 빡센 추억은 증발되고 모두들 연극같은 멋진 대사를 치면서 농업적 근면에 밤을 불사르는 정의의 용사들로 분해 있다(또 한 번 배아픈 건 그게 사실이라-고 짐작된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감동적인 건 적절할 때 적절한 컨셉과 적절한 카피를 수줍게 내미시는 팀장님(AE나 사장님은 그동안 똥줄 좀 탔을 거고). 그래 역시 그들은 광고계의 행운아들이 맞다. 하지만 나는 안다. 곳곳에서 나오는 '팀장님의 얼굴이 어두워 졌다'라는 문장들이 내포하는 그 많은 의미들을. 팀원들이 겪었을 그 고통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광고 발상을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교실은 회의실이다'라는 박웅현 CD의 말은 옳고 옳고 옳다. 백날 남이 만든 광고에 남이 쓴 기획서를 들여다 본들, 그런 광고를 만들 수는 없다. 흉내는 낼 수 있겠지.  

그래 흉내라도 낼 수 있으려면 그들의 회의 원칙이라도 적어 두자.  

1. 회의에 지각은 없다. 10시 3분은 10시가 아니다.   --> 처음엔 무슨 말인가 한참 생각했다. 결국 늦게 오면 죽는다는 것. 늦게 온 사람을 위해 한 얘기를 다시 하는 것만큼 기운 빠지고 회의를 늘어지게 하는 건 없다. 그렇다고 늦게 온 사람에게 그냥 알아서 따라오라고 하면 나중에 꼭 딴 소리해서 또 기운 빠지게 한다.

2. 아이디어 없이 들어오는 것은 무죄. 맑은 머리 없이 들어오는 것은 유죄. --> 하지만 아이디어 없이 맑은 머리로 들어갈 수 있을까.... 맑은 머리만큼 중요한 게 책 중간에도 나오지만, 팀원들의 고른 레벨. 아, 하면 딱 알아들을 수 있어서 사례와 개념을 설명하느라 시간 다 보내지 않게 만드는....

3. 마음을 활짝 열 것. 인턴의 아이디어에도 가능성의 씨앗은 숨어 있다.   --> 그래 똑똑한 막내를 많이 두자.... 20년 내공은 멋진 카피를 구술할 수도 있지만, 어중간한 5년~10년차들은 괜히 겉멋만 들어서 고집 많고, 덜 반짝거릴 수 있다. 아이디어에서 가능성의 씨앗을 발견해 내고, 혹은 뒤돌아와서 찾아낼 수 있는 건 팀장의 필수 능력.

4. 말을 많이 할 것. 비판과 논쟁과 토론만이 회의를 회의답게 만든다.   --> 자기 얘기만 하는 게 아니라 남의 얘기, 남의 아이디어에 대해 많이 얘기해야 한다. 살이 붙는... IDEO의 회의에 'but'은 금물이라지 않나... 하지만 회의하러 와서 리뷰만 하려는 분들... 아예 들어오지 마세요.

5. 회의실의 모두는 평등하다. 누가 말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말했느냐의 문제다.  --> 가장 어려운 부분. '직급이 깡패'라는 법칙을 깰 수만 있다면, 그 회의는 무조건 성공이다.  

6. 아무리 긴 회의도 한 시간을 넘기지 않는다.  --> 찔리는 기획팀장, CD들 많을 듯. 마른 수건 쥐어 짜듯 몇시간씩 붙잡아 둔다고 아이디어가 나오지는 않는다. 자신의 무능력을 인정하는 것일 뿐. 다만 훈육/벌로써의 효과는 상당하다. 부작용은 팀원의 이탈과 뒷담화.

7. 회의실에서 나갈 땐 할 일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 이것은 다음 회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 회의을 위한 회의, 준비 없는 회의를 하는 사람들에게 회의는 매번 새로운 시작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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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1-12-03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콜렉터도 읽으신거에요? 전 관심도서에만 찜.ㅎㅎ
어쨌든 이 책은 관심 없었는데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관련분야와 상관 없더라도 말이지요.

hanci 2011-12-05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콜렉터는 저도 찜한 리스트에만 ^^ 광고일 하는 사람들의 실상을 알 수 있죠. 그래도 많이 미화되긴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