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화차가 개봉한다는, 그것도 감독이 변영주라는 소식을 듣고 소설 화차를 읽기 시작했다. 

근 2달만에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내린 결론은 미안하게도 영화는 안 보는 게 낫겠다는 거였다. 

어차피 2시간 안 되는 시간동안 이 소설이 하고자 한 모든 것을 표현하기는 불가능한 일이고, 그러면 당연히 감독이 취사선택한 방식과 스토리가 나올 수 밖에 없는데 결국 그건 소설 화차라는 텍스트 자체 뿐만 아니라 그 텍스트를 읽으면서 경험한 총합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 사는 게 다 맘대로 되는 게 아니듯, 정신없이 보낸 주말에 영화까지 보게 되었다. 


고스톱에서야 쓰리고면 최고지만 영화 시나리오의 각색이란 게 10고는 기본이고 20고도 남의 얘기가 아닌데, 과연 변 감독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인물과 사건과 그 감정들을 조율하느라 보냈을까. 그것도 본인이 7년만에 메가폰을 다시 잡는 영화에 미미 여사의 사회파 고전이니... 그 마음 고생은 안 봐도 뻔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느낀 점은 전체적으로 과잉의 기운이 느껴진다는 것. 많은 부분을 솎아내고 캐릭터의 추가, 변형을 거치고 나서 꽤나 속도감 있게 밀어부치는 데도 불구하고 이런 과잉의 느낌은 시종일관 계속되었다. 주인공들이 찾아다니는 인물들은 경선/쿄코의 비밀을 말해주지 못해 안달인 것 같고, 토막난 시체는 딱 필요한 시점에 턱 떠올라 주고... 심지어 주인공들조차 자기 감정과 행동을 친절하게 합리화 해주는... 


결국 영화 화차는 감독이 읽은 소설 화차에 대한 감상문이 아니었나 싶다. 텍스트의 빈 곳을 채우는 것이 본인의 감상이기에, 인물들은 선영에 대한 이야기들을 경쟁하듯 던져 주고, 주인공들은 그렇게 설명적이고 말이 많았던 것 같다. 


그리고 감독은 양파 껍질처럼 겹겹이 숨겨진 경선/쿄코 라는 인물에 여성으로서의 공감이라기 보다는 남성적 시선으로서의 사랑/연민을 더 느낀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소설과 달리 본인이 유추해서 만들어 낸 용산역 시퀀스에서 문호가 왜 그런 짓을 저질렀냐며, 날 사랑하긴 한 거냐며 하나마나한 물음을 던지지는 않았을 거고, 선영 역시 그러면 행복해 질 줄 알았어 같은 하나마나한 변명은 안 해도 되지 않았을까. 이러한 감독의 시선은 펜션씬에서 본인이 직접 잡은 보조 카메라로 김민희라는 배우를 훑는 카메라 워크에서도 드러난다. 이 때 카메라의 시선은 완벽히 남자의 시선이니까. 

 

김민희가 현장에서 행복해 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조성하, 이선균, 그리고 변영주 까지 3명에게서 무한의 사랑과 경배를 받았을 테니...


어찌 됐건 무려 20년이나 지난 한국 사회에서 선영은 뱀이 허물을 벗고 다리가 돋아나는 기적을 행하지 못한다. 힘들게 허물을 벗고 다리가 돋아나지 않은 걸 확인하고 다시 숲속으로 숨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 하물며 나비가 되어 날아가는 꿈은 말해 무엇하랴. 비상 혹은 현상 유지를 위한 애절한 욕망의 날개짓의 끝은 추락일 뿐이다. 


덧. 영화의 가장 아쉬운 점은, 빛나는 순간이 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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