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생단 사건 

 민생단 사건(民生團事件)은 일제 강점기 1930년대 전반 동만주의 한·중 연합세력에 한국인을 간첩으로 들여보내어 한·중 연합을, 항일유격대와 공산주의 세력 또는 중국 공산당 조직과 대중단체를 분열시킴으로써 와해시키려던 일제의 공작사건이다. 
 


배경

민족 개량·실력 양성·자치를 내건 일제의 문화운동이 한국 내에서는 일정한 성과를 거두어 소위 민족주의 계열의 우파 독립운동가들이 차츰 변절하였다. 한편 독자적 세력과 투쟁력을 확보한 좌파 세력은 비합작·단독 투쟁 노선을 확인하면서, 광주 학생 운동과 간도 폭동(1930년 5월 30일)을 일으키며 극한 투쟁의 길로 들어선다. 그러다가 만주사변(1931년 9월 18일)이 나자 중국 공산당과 합작하여 항일전선을 구축한다. 이에 일제는 중국과 한국의 무장 세력을 분열하려는 공작을 시도하게 된다.

경과

급기야 한국과 중국의 항일 세력이 합작하게 되자 그것을 와해하기 위해 일제가 조직한 것이 민생단이다.
민생단은 최남선의 매부 박석윤(朴錫胤)이 동민회(同民會) 계열의 친일파 조병상(曺秉相) 및 북간도의 친일파 김동한(金東漢)·김택현(金澤鉉)·이경재(李庚在)·이인선(李仁善)·최윤주(崔允周) 등과 협의하여 만주 사변 직후부터 조직을 준비하였다.
조선 총독부와 간도 일본 영사관에서는 그들을 후원하여 1932년 2월 5일 일본군 대좌 출신 박두영(朴斗營)을 단장으로 하는 민생단을 용정에서 발족하였다. 겉으로는 재만 조선인의 생활 안정과 낙토 건설을 표방하였으나, 실제로는 한국인과 중국인을 이간하고, 중국 공산당 조직 및 산하 대중단체를 파괴하려는 반공 친일 간첩 조직이었다. 중국 공산당 조직이 강력하자 1932년 7월에 일시적으로 사무소를 폐쇄하였으나, 일본 헌병대에서 다시 살려내어 계속 후원하였다.
그러다가 최현(崔賢)에게 사로잡힌 일본 헌병의 입으로부터 민생단 정보가 나왔다. 그 정보를 바탕으로 연길의 농민협회 기관지 인쇄책임자 송노두(宋老頭)를 1932년 12월 처형하는 것을 필두로 중국 공산당 동만특위는 1933년 12월까지 무려 2백여 명의 한국인을 처형하였다. 그 뒤 1935년까지 숙청은 계속되었는데, 숙청된 주요 인사는 동만특위와 현위의 간부 이상묵(李相默), 동북인민혁명군 독립사(師) 간부 박동근(朴東根) 등이다.

영향

중국 공산당 내 민생단 간첩이 전원 한국인이었으므로, 중국인이 한국인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 또한 무고하게 처형된 한국인의 가족과 동료가 중국인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한국인과 중국인의 연대가 약해지게 된다.  

(출처 : 위키) 

일제 토벌보다도 희생규모가 컸던 ‘중국공산당의 조선인 마녀사냥’ 민생단 사건-1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 한겨레21) 

상처받은 민족주의’를 넘어…  (한홍구 박노자 대담 - 한겨레21)

세기형 민족주의자, 김일성  (한홍구의 역사이야기-한겨레21)

적의 적도 적이 된 ‘민생단’ 사건과 김일성 사령의 선택   (김상일 교수-통일뉴스)

‘민생단’ 십자가를 지고 왕청 골고다 언덕을 걸어가는 이 사람을 보라!  (김상일 교수 - 통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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