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굴레 2 홍신 엘리트 북스 14
서머셋 몸 지음 / 홍신문화사 / 1992년 7월
평점 :
절판


인간의 굴레(Of Human Bondage)

                                                                                           서머셋 몸

[ 2 ]

  하루하루 밀드레드를 잊어갔다. 지난날을 깊은 혐오를 가지고 회상하게 되었다. 어찌하여 그토록 부끄러운 사랑의 노예가 되었었는지 스스로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밀드레드를 생각할 때마다 오직 분노와 증오만이 끓어오를 뿐 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그토록 지독한 굴욕을 맛보게 한 여자였고 그런 여자에게 사랑을 느낀 자신을 생각하면 치가 떨리곤 하였다.

 

 어느 날 오후, 밀러한테 채인 밀드레드가 불쑥 찾아왔다. 밀러는 자식이 셋이나 있는 유부남이었는데 그 사실을 속이고 결혼한 후 그녀가 임신을 하게 되자 그녀를 차버린 것이었다. 울면서 얘기하는 밀드레드를 보며 필립은 그녀에 대한 사랑이 다시 되살아남을 느꼈다. 밀드레드는 과거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필립은 노라에게 절교를 선언하고 밀드레드에게 다시 빠져들기 시작한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보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한 것이었.

 

 

  필립은 가난한 형편에도 아낌없이 돈을 써 가며 밀드레드를 도운다. 그녀는 심지어 기본적인 청소조차 하지 않고 필립의 도움을 받았고 또 자신의 치장을 위해 돈을 요구하기까지 했다. 밀드레드는 딸을 낳았고 아이를 다른 사람에게 맡겨 기르기를 원했다. 아이는 미시즈 하딩에게 맡겨졌다.

 

  필립은 밀드레드와 함께 그리피스를 만났다. 그리피스는 밀드레드의 관심을 독점해버렸다. 그리피스는 밀드레드를 유혹하는 편지를 보냈고 밀드레드는 오래 전부터 필립과 계획했고 약속했던 파리 여행을 취소했다. 그것도 그리피스와의 약속 때문에. 그러면서 옷값의 청구서는 필립에게 내밀었다. 그리피스, 가난뱅이로 여러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있으면서도 자기의 욕정을 위해서는 그 누구를 희생시켜도 뉘우칠 줄 모르는 사나이, 바로 그런 사내였다. 밀드레드는 바로 그런 사나이에게 빠져있었다.

 

  밀드레드 역시 못지않았다. 옷값, 방세와 식비, 아이의 양육비까지 스스럼없이 필립에게 손을 벌리면서 그리피스와 놀아나고 있는 행동을 떳떳하게 정당화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필립의 돈으로, 필립에게 퇴짜를 놓은 파리 여행을 그리피스와 가고 싶어 했다. 필립은 그리피스와 함께 옥스퍼드로 여행을 간다는 밀드레드에게 여행 경비를 마련해 주고는 둘을 태우고 떠나가는 사륜마차를 보며 참을 수 없는 화와 함께 뼈아픈 오열이 치솟았다.

 

  돌아온다는 월요일, 밀드레드는 오지 않았다. 필립은 전신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았다. 이 마지막 배신은 너무나도 지독했다. 그는 언제까지나 한없이 밀드레드를 저주했다. 그리고 이러한 실망이 모두가 그리피스 때문이라고 생각하자 증오스러운 나머지 살인의 쾌감 같은 것도 이해할 것만 같았다. 필립은 그리피스의 편지를 받았다. 하고 싶은 비겁한 짓은 다 해놓고 나중에 후회한다는 비겁하기 짝이 없는 위선에 가득 찬 글이었다.

 

  밀드레드는 돌아왔으나 말도없이 짐을 꾸려 이사를 해 버렸다. 이제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필립은 받은 고통이 너무 지독해서 참느니 차라리 죽고 싶은 정도였다. 하지만 그 따위 여자 때문에 자살을 한다면 얼마나 우스운 꼴이 되겠는가.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을 버린다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었다. 그리고 그것도 결국 시간문제에 불과한 것이다. 필립은 블랙스테이블로 돌아갔다.

 

  냉정하게 생각할 수 있는 지금 생각해보면 도대체 밀드레드라는 여자한테 애정을 요구한 것부터가 무리였다. 필립은 남자나 여자 한쪽이 상대방을 노예로 만들고 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째서 그것이 특정한 인간에게만 그토록 강렬한 매력으로 나타나는 것일까, 그것을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저항할 수 없는 충동이었다. 이성도 이것과 맞설 수 없었으며 우정도 감사도 이해관계도 이것 앞에는 아무 힘이 없었다.

 

  그는 언젠가 자신이 쌓은 철학을 생각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왜냐하면 그가 경험한 위기에 그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생이 위기에 처했을 때 사상이 과연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어떻게 할 것인지를 생각하긴 했지만 막상 행동하게 될 때가 되면, 본능과 감정, 그 밖에 뭔지 확실히 알 수 없는 손아귀에 붙잡혀 전혀 맥을 못 추었다. 그의 이성은 방관자로 옆에 서서 사실을 관찰하긴 해도 간섭할 힘은 전혀 없었다.

 

 

 그 후 필립은, 그리피스가 악착같이 따라붙는 밀드레드를 간신히 떼어내는데 성공했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겨울 학기 초에 필립은 외래 담당 조수가 되었다. 그는 그 일이 적성에 맞았고 흥미로웠다. 그가 환자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비극도 희극도 아니었다. 가지각색의 사람들, 갖가지 사건들, 눈물도 있는가 하면 웃음도 있었다. 행복이 있는가 하면 슬픔도 있었다. 지루하고 재미있고, 그러면서도 비정했다. 있는 것은 다만 사실뿐. 그것이 인생이었다.

 

 필립은 병원 환자로 있던 도프 아델니라는 자식이 아홉이나 된다는 사람을 친구로 사귀게 되었다. 그의 집에 자주 초대를 받아 가면서 이제는 아이들에게 가장 환영받는 손님이 되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우연히 밀드레드를 만났다. 그녀는 진한 화장을 한 밤의 여인으로 변해 있었다. 이제는 자신이 이미 그녀를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참으로 잘 알 수 있었으며 불쌍하다고는 생각되었지만 용케 빠져나왔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기뻤. 그녀와 아이를 자신이 빌린 집에 머물 수 있도록 해 주었다.

 

 

  필립은 그녀와 함께 바닷가로 여름휴가를 가기도 했으나 무리해서라도 각 방을 사용하는 등 철저하게 그녀와 거리를 두었다. 그녀는 매우 귀찮은 동반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필립은 아델니와 그의 가족에 대해서 무척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모두 유쾌하고 숨김이 없고 건강하고 귀여운 아이들이었. 필립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의 착한 마음씨에 끌리는 것을 느꼈다.

 

  필립은 이번에는 외과 병동에 배속되어 수술 조수의 실습을 하였는데 그 무렵 돈이 없어 그의 생활비가 드디어 그의 두통거리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런 중에도 밀드레드는 옷이며 신발 등 여러 가지를 많이 샀다. 그녀는 일자리를 찾을 작정이라고 했으나 번번이 핑계를 대며 일자리를 거절하였고 이제는 필립도 취직하려는 절실한 마음이 그녀에게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밀드레드는 자신을 데면데면하게 대하는 필립을 보며, 필립이 자신을 구해준데 대해 감사하며, 필립이 자신을 얼마나 진심으로 사랑했었는지, 그에 대해서 자기는 그에게 얼마나 지독한 보답을 했던가를 생각하면 뼈아픈 후회를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도 그녀는 자신이 필립의 뱃속까지 훤히 들여다보고 있으며 그를 다루는 방법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그를 참혹할 만큼 내버려두면 머지않아 스스로 기어들어올 것이 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필립의 마음에 확실한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그녀는 깨닫지 못했고 이성과의 관계라면 으레 성 관계라고만 믿고 있는 그녀로서는 혹시 다른 여자가 있는지를 살펴보았지만 그런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자 필립은 아직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오판했다. 밀드레드는 사람을 불쌍히 여긴다든가 동정한다든가 친절을 베푼다든가 하는 그러한 것이 이해될 여자가 아니었다. 결국 밀드레드가 내린 결론은 요컨대 필립은 좀 이상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로슨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날 밤, 밀드레드가 몸을 비비고 유혹하며 치근덕거리고 매달린다. 필립이 매정하게 뿌리치자 그녀는 날카롭게 숨을 들이마시고 대뜸 무서운 욕지거리를 퍼붓기 시작했다. 차마 저토록 많구나 여길 만큼 심한 욕설을 목청껏 쥐어짜 내서 끊임없이 쏟아냈다. 필립 바로 앞에 다가와 턱을 내밀고 입가에 허옇게 고인 침을 마구 튀기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리고 모든 증오를 집어 동댕이치듯 내뱉었다. “병신!”

 

  다음 날 퇴근하고 오니 집안을 엉망이었다. 밀드레드와 아이는 종적을 감추었고 그릇 등 깨지는 것은 모조리 깨어져있었으며 침대, 이불, 베개는 모두 칼로 찢어져 있었다. 필립은 병원 앞으로 하숙을 옮겼다.

 

  돈이 부족함을 느낀 필립은 매컬리스터의 조언을 받아 전 재산을 주식에 투자했지만 주가가 폭락하여 그만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백부에게 두 번이나 도움을 요청했으나 모두 거절당하였고 이제는 학비는 고사하고 식비와 하숙비조차 밀리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일자리를 찾았지만 불경기에 불구의 몸으로는 쉽지가 않았다.

 

  당장 없어도 될 양복은 모조리 팔아버렸고 미루어오던 방세를 지불해야 하는 날은 집에 들어가지 않고 이곳저곳 노숙을 하며 보냈다. 비참한 감정에 사로잡혀 도대체 어떻게 해야 알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남보다 더 이기적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고 가능한 한 불우한 사람들을 돕기도 했는데, 그런 자기만이 어째서 이렇게까지 궁지에 몰려야만 하는 것인가를 생각하면 참으로 억울했다. 며칠을 굶다시피 하며 일거리를 찾아 여기저기 헤매 다니다 아델니네를 찾았다.

 

  필립은 그곳에서 구원을 얻었다. 아델니 부부는 필립의 형편을 이미 알고 있었다. 부부는 필립이 일자리를 얻을 때까지 숙식을 제공했고 아델니는 그에게 일자리를 알아봐주었다. 필립은 여성복을 주로 판매하는 린 앤드 세들리 상회에 취직했다. 힘든 일이었지만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필립이 생각하기에 이 곤경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되는 길은 백부가 돌아가셔서 유산을 상속받는 길 하나뿐이었다. 필립은 진심으로 백부가 돌아가시기를 바라기 시작했다. 어느 날 우연히 길에서 로슨을 마주쳤다. 그는 전쟁에 나갔던 헤이워드가 장티부스로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필립은 같은 또래가 죽었다는데 충격을 받았다. 얼마나 슬프고 덧없는 인생인가? 한 때는 매일같이 얼굴을 맞대고 그가 없는 인생이란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친했는데, 이별이 오고, 오늘에는 마치 필요 없는 인간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것은 인생의 불가사의다. 커다란 가능성을 안고 미래에의 정열에 불타던 그가 아무것도 이루어 놓은 것 없이 허망하게 죽은 것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던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인생의 이의란 무엇인가? 필립은 절망적으로 자문해 보았다. 그야말로 공허하고 꿈과 같이 생각되었다.

 

  필립은 동방의 왕자라는 옛이야기를 생각해냈다. 왕은 인간의 역사를 알고 싶어서 어떤 현자에게서 5백 권의 책을 받았다. 국사에 몹시 바쁜 왕이 그것을 좀 더 요약해 오라고 분부를 내렸더니 10년 후 50권으로 줄여져 있었다. 그러나 왕은 이미 노령이어서 그 광대한 분량을 읽을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재차 요약하도록 명령했고 20년이 지나 자신과 같이 백발이 되어버린 현자가 단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가지고 왔다. 그러나 그때 왕은 병상에 누워있어서 그 한 권의 책마저 읽을 수 없었다. 결국 현자는 인간의 역사를 단 한 줄로 줄여서 국왕에게 아뢰었다. “인간은 태어나고, 괴로워하고, 그리고 죽습니다.”

 

  인생의 의미 따위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일생도 또한 무익한 것이다. 인간이 태어나건 태어나지 않건, 살건 죽건, 그러한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결국 죽음도 무의미하고 삶도 무의미한 것이다. 필립은 소년 시절 신앙이라는 무거운 짐이 제거되었을 때의 기쁨과 같은 기쁨에 취했다. 리고 비로소 완전한 자유를 느꼈다.

 

  필립은 인생의 의미를 물었을 때 페르시아 융단을 내밀었던 크론쇼를 문득 생각해냈다. 인간은 그 개인적인 만족에 의해서 마음에 드는 날실을 골라잡아 어떠한 무늬를 짜내든 그것이 곧 그 개인의 만족인 것이다. 다만, 그 속에서 가장 명백하고, 가장 완전하고, 가장 아름다운 무늬가 단 하나 있다면 인간이 태어나고, 성장하고,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빵을 얻기 위해서 일하고 그리고 죽어간다는 무늬가 바로 그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물론 그 밖에 좀 더 다른 무늬도 있을 수 있다. 필립은 행복에의 소망을 저버리는 것으로써 인간의 일생을 좀 더 다른 척도로 책정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용기가 백배로 솟는 것 같았다. 행복이라든가 고통이라든가 그러한 것은 이미 문제가 아니었다. 그 자신이 열심히 무늬를 만들고 일생의 종말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비로소 무늬의 완성을 기뻐할 것이라면 필립은 행복했다.

 

  어느 날 필립은 밀드레드로부터 만나자는 편지를 받는다. 참을 수 없는 혐오가 치밀어 편지를 갈기갈기 찢어버렸지만 걱정으로 마음이 불안하여 그녀를 찾아갔다. 그녀는 모처럼 건져준 타락의 생활로 다시 돌아간 것 같았고 무척 많이 변해있었다. 아이는 죽었고 그녀는 병에 걸려 있었다. 필립의 도움으로 약을 먹으며 몸이 나아지자 그녀는 필립의 부탁을 뿌리치고 다시 타락의 길로 들어섰고 필립은 이후 그녀를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백부가 위독하다는 편지를 받고 회사를 그만두고 블랙스테이블로 내려갔다. 지난 2년 동안 백부의 죽음을 매일 기다려 왔었다고 하여도 좋을 만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역시 동종심이 솟아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백부는 결국 숨을 거두었다.

 

 며칠 후 런던으로 돌아와 의학교에 복학했다. 부인과 조수 자리에 등록하고 왕진부에 배속되어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을 처절하게 체험했다. 생활에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에 성 누가 병원에서의 마지막 1년도 전력을 다해 공부하였고 드디어 졸업장을 받았다. 입학한 지 7년 만이었다.

 

 이제 필립은 모든 사람들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연민의 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피스의 배반도, 밀드레드로부터 받은 고통도 이제는 모두 용서할 수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문득 머리에 떠올랐다. ‘그들을 용서하라,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이 어떤 일인 줄을 모르기 때문이니라.’

 

 이 소설은 서문에서 밝힌 것과 같이 작가의 자서전적인 소설이다. 선천적으로 절름발이로 태어나, 어려서 양친을 여읜 필립이 백부모 집을 시작으로 자라면서 겪게 되는 성장과정 - 불구의 몸이기에 느끼는 외로움과 학대, 서서히 자리 잡아가는 자의식, 믿음의 상실과 갈등, 사랑 등 과 인생 여정을 진솔하게 묘사하고 있다. 특히 주인공의 생각과 심리적인 갈등의 묘사는 감동적이며 교훈적이다. 작가의 깊이 있고 풍부한 철학적 소양을 느낄 수 있다. 자라는 청소년들에게 필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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