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 오브 아프리카 열린책들 세계문학 87
카렌 블릭센 지음, 민승남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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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 오브 아프리카(Out Of Africa)

                                                                                                    카렌 블릭센

 

  카렌 블릭센(Karen Blixen | Karen von Blixen Finecke 1885 1962) 덴마크 출신 작가. 코펜하겐, 파리, 로마에서 미술을 공부하기도 했다. 1913년 케냐로 이주해 커피 농장을 시작했고 커피 농장이 파산하자 덴마크로 돌아가 평생을 그곳에서 보냈다. 1954년과 1957년 두 차례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으며 1962년 영양실조로 고향에서 운명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아웃 오브 아프리카’ ‘위의 그림자등이 있다.

 

  로마 시대 작가 플리니우스의 글 <Ex Africa semper aliquid novi(Out of Africa always something new)>에서 제목을 따온 이 작품은 아이작 디네센이라는 필명으로 미국에서 발표되어 작가로서의 명성을 굳히게 해 준 그녀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17년간의 아프리카 생활에서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한 회고록으로 1985년 시드니 폴락 감독에 의해 메릴 스트립과 로버트 레드포드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져 이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등 7개 부문을 석권하였다.

 

  J. D. 샐린저가 지은 호밀밭의 파수꾼속에 좋은 책으로 소개되어 관심을 갖고 있다가 읽게 되었다.

 

1. 카만테와 룰루

  해발 18백 미터 높이에 자리한 나의 은공 언덕 기슭 농장에서 바라보는 전망은 어마어마하게 넓었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위대함과 자유, 비길 데 없는 장엄함을 느끼게 했다. 나는 사파리에 나섰다가 129마리의 버팔로 떼가 구릿빛 하늘 밑 안개 속에서 나오는 광경을 본 적이 있으며 코끼리 떼가 울창한 야생의 숲을 지나가는 광경과 때때로 초원을 가로지르는 기린의 행렬, 아침 산책에 나선 무소, 백수의 왕 사자가 동트기 전 사냥을 마치고 얼굴이 귀까지 피로 붉게 물든 채 풀 밭 위를 걸어가거나 한낮의 낮잠 시간에 가족들에 둘러싸여 휴식을 취하는 모습도 보았다.

 

  나는 아프리카에 처음 도착하면서부터 원주민에게 뜨거운 애정을 느꼈다. 원주민들은 백인들에 비해 삶의 위기감이 훨씬 적었다. 나는 사파리 중에 아니면 농장에서 극도로 긴장된 순간에 원주민들이 눈빛을 보고 그들과의 거리감을 느끼곤 했는데 그들은 내가 두려움에 떠는 모습이 의아하기만 한 듯 했다.

 

  어느 날 나는 초원에서 키쿠유족 소작인의 아들인 어린 소년 카만테를 만났는데 그는 온몸이 고름이 질질 흐르는 깊은 상처로 뒤덮인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를 치료하다 실패하여 그를 스코틀랜드 교회 병원으로 보냈다. 그는 그곳에서 석 달 동안 입원했다가 병이 나아 돌아와서 우리 농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는 기독교인이 되어 있었고 내가 아프리카를 떠날 때까지 12년가량을 나를 위해 일했다. 카만테는 생각이 깊은 아이였고 금전 문제에도 밝아서 염소 거래도 현명하게 해냈다.

 

  카만테는, 원주민 노파들처럼, 숱한 시련을 겪으며 운명과 피를 섞은 그녀들이 운명의 장난과 마주할 때마다 그것이 자매의 장난인 양 너그러이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 같은 심리를 보였다. 그는 또한 요리법에 대한 기억력이 비상하여 우리집은 식민지 내에서 요리로 유명해졌다.

 

  정상적인 우기는 3월 마지막 주에서 6월 중순까지인데, 어느 해에 우기가 찾아오지 않았다. 아프리카의 가뭄은 끔찍하고 기막힌 체험으로, 그것을 겪은 농부는 평생 그 기억을 잊지 못한다. 모든 것이 점점 더 건조해지고 단단해져 갔고 모든 힘과 기품이 세상에서 철수한 듯 했다. 초원과 언덕의 물웅덩이들이 말라붙으면서 생소한 종류의 오리와 거위가 내 연못으로 왔다. 얼룩말이 23백 마리씩 길게 열을 지어 찾아오기도 했다.

 

  원주민은 가뭄 아래서 침묵했다. 가축의 90%를 잃을 수 있고 소작지의 작물들이 거의 시들어 가뭄은 그들의 생존 자체가 걸린 문제였지만 그들은 절대적으로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내 뻐꾸기시계가 염소를 치는 원주민 아이들을 집으로 불러 모으기도 했다. 키쿠유족은 백인과 반대로 자신의 죽음은 별로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왜 시체 만지는 것을 그토록 겁내는지 알 수 없었다.

 

  룰루는 아프리카 영양 중 가장 예쁜 부시벅 종 새끼 영양이었는데, 어느 날 아이들이 숲에서 잡은 것을 데려와 식구가 된 것이었다. 룰루는 몸집이 고양이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카만테가 우유를 먹이고 돌보아주자 유난히 카만테를 따랐다. 룰루는 빼어난 미모와 우아함을 무기 삼아 집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했고 모두에게 존중을 받았다. 내가 기르던 두 마리의 사냥개조차 룰루에게 좋은 자리를 양보했다. 그러던 룰루가 짝을 만나 집을 나갔다.

 

  그런데 룰루는 새벽이면 남편과 같이 와서 사람을 무서워 하는 남편은 숲속에 두고 혼자 집에 들르고 있었고 카만테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얼마 후 룰루는 새끼를 낳아 데려오기도 했다. 그렇게 룰루의 가족과 우리 집의 관계는 수년 동안 이어졌다.

 

  나는 아프리카를 떠난 후 룰루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지만 카만테와 다른 하인들에게선 편지를 받았다. 카만테는 글을 쓸 줄 모르며 영어도 못한다. 그는 대필로 편지를 보냈다. 백인이라면 편지에 예쁜 말을 써서 보내고 싶으면 나는 당신을 영원히 잊을 수 없습니다라고 쓴다. 그러나 아프리카인들은 이렇게 쓴다. ‘우리는 당신이 우리를 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2. 농장에서 일어난 오발 사고

 

  적도의 별이 빛나는 밤하늘은 북쪽의 그것보다 풍요로우며 밤에 나가는 일이 많아서 밤하늘을 더 자주 보게 된다. 아프리카에서는 해가 지자마자 하늘 가득 박쥐들이 날고 여러 새들이 자동차 불빛 앞으로 날아오른다. 긴 풀에서는 매미 소리가 그칠 줄 모르고 유성들은 하늘에서 마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처럼 떨어진다.

 

  1219일 저녁, 혹시 비가 오나 해서 밖에 나갔다가 한 발의 총성을 듣게 된다. 2분 후 커피 공장 지배인인 미국인 벨크냅이 오토바이를 타고 와서 오발 사고를 알려주었다. 그의 요리사가 하루 휴가를 내고 부엌을 비운 사이 조수인 일곱 살 먹은 카베로가 파티를 열었는데, 양계장에 침입하는 짐승들을 쫓으려고 베란다에 둔 산탄총을 장전된 줄 모르고 발사했다는 것이었다.

 

  내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부엌은 온통 피바다였고 탄약 냄새가 자욱하여 마치 벼락을 맞은 것 같았으며 두 아이는 중태에 빠졌거나 죽어 있었고 세 아이는 경상을 입고 겁에 질린 상태였다. 응급 처치 후 병원에 도착했을 때 한 아이는 죽어 있었고 한 아이는 살아 있었다. 나는 경찰에 사건 신고를 하였다. 다음 날, 소작인들 사이의 분쟁 해결을 위해 정부에서 인정한 농장의 원로회의인 키야마를 열기 위해 노인들이 모이는 것을 보고 끝도 없는 논의에 끼고 싶지 않아서 말을 타고 떠나 버렸다.

 

  나는 마사이족 보호 구역으로 말을 몰았다. 마을들이 텅 비어 있었는데 그 위대한 방랑자들이 가축 떼를 몰고 다른 초원을 찾아 떠났기 때문이었다. 나는 무엇보다 농장의 평화를 원했기 때문에 원주민들의 문제를 모른 척하고 지낼 수 없었고 원주민들도 그걸 알았기 때문에 문제를 확실히 매듭짓고 싶은 때에는 내게 판결을 내려 달라고 청했다.

 

  그런데 유럽인과 아프리카인은 정의에 대한 관점이 다르며 서로의 관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프리카인에겐 불행한 사건을 해결하는 방법은 단 하나, 바로 보상이며 행위의 동기 같은 건 따지지 않는다. 살인을 저질렀건 사고로 죽었건 원주민들은 똑 같은 처벌을 내린다. 손해가 발생하면 누군가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보상해야 한다.

 

  서로의 관점의 차이는 존재했지만 그들은 내게 재판관이 되어 줄 것을 요구하고 내 판결을 존중했고 키쿠유족의 재판관이라는 내 위치는 또한 풍부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내게도 소중한 것이었다.

 

  나는 파라를 데리고 원로 회의 키야마에 참석했다. 카니누는 카베로의 아버지였는데 소작농 중에서 가장 부자였다. 그는 넷인가 다섯인가 되는 딸들을 마사이족에게 시집보내며 받은 몸값인 암송아지들로 부를 축적한 것이었다. 반면에 오발 사고로 목숨을 잃은 와마이의 아버지 조고나는 가난뱅이였다.그는 여자도 늙은 부인 한 사람뿐이었고 가진 것이라곤 달랑 염소 세 마리였다. 하지만 당시 내가 읽고 있던 코란에는 가난한 자의 이익을 위해 법의 정의를 굽혀선 안 된다라고 적혀 있었다.

 

  원로 회의는 일주일가량 회의를 한 끝에 카니누가 조고나에게 양과 염소 40마리를 보상하는 것으로 최종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와마이가 조고나의 자식이 아니라 자신들의 형제의 자식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보상금을 챙기기 위해 나타났고 나는 조고나를 위하여 6년이 넘는 오랜 기간의 진술서를 작성하여 주었다. 조고나는 감동하였고 그 진술서는 그의 소중한 보물이 되었었다.

 

  그날 오발 사고를 일으키고 사라져 죽은 줄 알았던 카베로는 죽지 않았고 그의 누이들이 있는 마사이족과 함께 있다는 것이다. 5년 동안 마사이족과 함께 떠돌아 다니던 카베로는 농장으로 돌아 왔고 몸이 회복되어 퇴원한 와냔게리는 암소와 그 새끼 암송아지 한 마리씩을 받고 사건의 종결에 합의하게 되었다.

 

  죽음을 우습게 여기며, 여자를 즐기는 냉혹하고 관능적인 아랍인들이 왔다. 또한 그들보다 더 열성적으로 마호메트의 가르침을 따르는 독실한 무슬림인인 성질 급하고 싸움 잘하고 금욕적이며 탐욕스러운 소말리족도 왔다. 스와힐리족도 함께 왔는데 노예근성을 지닌 그들은 잔인하고 음란하고 도둑질 잘하고 농담 잘하고 나이들면 몸에 살이 붙었다.

 

  그들은 내륙에서 고원지대의 원주민 맹금 마사이족을 만났다. 마사이족은 속박 아래서는 살 수 없는 기질 때문에 원주민 중 유일하게 이주민 귀족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 다른 원주민들은 노예로 외국에 팔려가서도 신과 친구가 되었. 그리고 자신들을 박해하는 자들과의 관계에서도 독특한 자기감정을 유지했다.

 

3. 농장을 찾은 손님들

 

  농장에는 손님들이 많이 찾아왔다. 개척지에서는 손님맞이가 여행자뿐 아니라 정착민에게도 삶의 필수적인 요소다. 농장에서 열리는 가장 대대적인 사교 행사는 원주민의 춤 잔치 은고마였다. 은고마가 열리면 손님이 15백 명에서 2천 명 정도 찾아왔다. 은고마는 낮에도 밤에도 열렸는데 야외춤판은 경계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낮에 열리는 대규모 은고마는 단순한 춤판이라기보다는 축제에 가까웠다. 구경꾼들이 춤꾼들을 따라 구름 떼처럼 몰려와 나무 그늘 아래 자리를 잡았다. 밤의 은고마 역시 근사한 구경거리였는데 마치 극장 쇼를 보는듯한 공연이 불을 둘러싸고 이루어졌다. 은고마에는 피리와 북뿐 아니라 소리꾼도 있었는데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치는 꾼이 초빙되어 오기도 했다.

 

  어느 날 밤 은고마에 마사이족 젊은 전사 열두 명이 찾아왔는데 키쿠유족과 싸움이 벌어져 마사이족 하나와 키쿠유족 셋이 심하게 다쳤다. 다행스럽게도 부상자들은 모두 회복되었으며 은고마에 참석하는 것이 불법이었던 부상당한 마사이족 전사는 오두막에서 오랫동안 숨어서 치료한 뒤 말없이 사라졌다.

 

  봄베이에서 몬순이 불어오면, 현명하고 인생 경험이 풍부한 노인들이 인도에서 배를 타고 와서 농장을 찾았다. 인도의 대사제가 방문하여 서로 기념품을 교환하기도 했다.

 

  파라가 결혼하여 소말리랜드 출신 아내를 농장으로 데리고 왔고 신부의 어머니와 동생, 사촌이 함께 왔다. 나중에 파라가 엄마 없는 여자 아이를 입양하자 우리집에 사는 소말리족 여인은 모두 다섯 사람이 되었다. 파라의 장모는 소말리랜드에서 딸 교육을 잘 시킨 훌륭한 어머니로 존경받고 있었고 세 처녀도 더할 나위 없이 기품이 넘치고 정숙했다.

 

  소말리족 처녀들은 자신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무슬림 처녀는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남자와 결혼할 수 없으며 그런 혼사는 집안의 크나큰 수치다. 반면 남자는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여자와 결혼할 수 있었다. 소말리족 처녀들은 유럽의 나라들에서 몸값을 받지 않고 시집가는 것에 대해 여자들이 자존심도 없고 존중 받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들은 만일 자신이 불행하게도 그런 나라에서 태어난다면 그렇게 결혼을 하느니 차라리 무덤에 들어가겠다고 맹세했다.

 

  소말리족 여인들의 삶에서 옷은 대단히 중요한 요소다. 그들에게 옷은 남자들과의 전쟁에서 획득한 전리품이며 승리의 상징이다. 소말리족 남자들은 천성이 금욕적이고, 강인하며 검소하다. 오직 여자만이 그들의 사치품이다. 그들은 여자에 대해서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을 지녔으며 그들에게 여자는 지고의 선이다.

 

  여자들은 이 천성을 이용해 자신들의 몸값을 올리고, 이를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다. 남자의 도움 없이는 신발 한 짝도 마련할 수 없으며 독립적이지 못하고 아버지나 남자 형제, 남편에게 속해 있어야 하지만 그녀들은 남자에게 인생 최고의 목적물이다. 처녀들은 아름다운 머릿결을 가꾸며 정복자를 정복하고 갈취자를 갈취할 날을 고대한다.

 

  덴마크인 크누센 영감이 병든 장님 신세로 농장에 왔다가 쓸쓸히 죽음을 맞기도 했고 스웨덴인 엠마누엘손이 하룻밤 피신하였다가 탕가니카로 가기도 했다. 버클리 콜과 데니스 핀치해턴도 우리 집 단골손님이었다.

 

  버클리는 바다에 대한 끝 모르는 사랑을 품고 있었는데 나와 함께 항해 계획도 짜고 선원들도 준비해 놓았지만 끝내 배를 살 돈을 마련하지 못했고 결국 죽고 말았다. 우리 농장 말고는 머무를 곳이 없었던 데니스는 함께 사자 사냥도하고 비행기를 가져와 함께 하늘을 날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4. 어느 이민자의 노트에서

 

  이 장에서는 작가의 소소한 메모들이 잔잔하게 기억되고 있다.

 

  반딧불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안 완성되는 그림,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던 젊은 황소가 표범에게 잡아먹힌 일, 요리사 에사, 죽으면 그 아름다운 색을 잃게 되는 이구아나, ‘베니스의 상인의 이야기를 듣고 시뻘겋게 달군 칼로 가슴살을 조금씩 떼어내면 피 흘리지 않고 정확하게 1파운드를 떼어낼 수 있다는 파라의 얘기를 들려 주고 있다.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까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우리의 소에 비해 평생 하루도 쉬지 못하고 죽도록 일만 하는 인도인과 백인 청부업자의 우마차를 끄는 황소들은 그게 삶이고 세상이다. 삶은 고달프고 고달프다. 하지만 묵묵히 견디는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다. 수레를 끌고 비탈길을 내려가는 건 지독한 고역이다. 생사가 달린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고 느낄 것이라 생각했다.

 

  전쟁이 터지자 남편은 자원입대했고 나는 그의 요청으로 식량과 군수품을 싣고 3개월이나 걸린 사파리를 떠나기도 했다. 우리들은 우마차를 끄는 황소들이 사자에게 공격을 받을까봐 늘 노심초사했다. 아프리카의 농부들은 건기를 걱정하여 항상 비를 듬뿍, 넘치도록 내려주십사고 하늘에 대고 외쳤다. 원주민들은 리듬감은 그토록 뛰어난데도 시는 몰랐다.

 

  젊은 백인의 하인이었던 키토시가 주인의 지시를 어기고 암말을 타고 왔다는 이유로 구타당하고 감금되었다 죽는 사고가 발생했다. 키토시가 죽고 싶다고 말하고 나는 죽었다!’고 외친 뒤 정말 죽었던 사실과 죽고 싶다는 생각이 정말로 죽음으로 이어지는가에 대한 상반된 의사들의 법정 증언들이 논쟁에 휩싸이기도 했다. 백인 주인은 중상해죄로 징역 2년을 선고 받았다.

 

  아프리카의 새들, 사냥개 파니아, 전쟁 후 다시 돌아 온 요리사 에사의 새 아내가 군인 막사로 도망쳤다 잡혀오기를 반복하다 그를 독살한 일, 지진이 일어나자 데니스는 코뿔소가 트럭 밑으로 들어왔구나생각하고 나는 표범이 지붕에 올라 갔구나생각하기도 했으며 죽을 것 같다고 느낀 후 지진임을 깨달은 일, 함부르크로 가는 기린들, 박물학을 연구하는 한 스웨덴인 교수가 원숭이 15백 마리를 쏠 수 있게 허가 신청을 하고 여섯 마리를 쏠 수 있도록 허가 받은 일, 푸란 싱의 대장간과 그곳을 구경하는 키쿠유족들, 5백 마리쯤이나 되는 거대한 들개 무리, 그리스어로 시를 읊는 앵무새 등의 얘기들도 들을 수 있다.

 

5. 농장과의 작별

 

  은공 농장은 커피 재배를 하기엔 지대가 좀 높았고 비도 부족했다. 세 차례나 극심한 가뭄을 겪었고 설상가상으로 커피 가격까지 폭락해서 농장은 점차 역경에 빠졌고, 빚도 갚을 수 없고 플랜테이션을 운영할 돈도 없었다. 농장을 이끌어 간다는 것이 갈수록 큰 짐이 되었다.

 

  바로 그 해에 메뚜기 떼가 찾아 왔다. 메뚜기 떼를 막기 위해 옥수수 대를 높이 쌓아 불을 지르고 인부들이 빈 깡통을 치고 고함을 질러 보았지만 그건 일시적인 유예일 뿐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메뚜기 떼가 밤 동안만 머물렀기에 진입로의 큰 나무 두 그루가 쓰러졌을 뿐 큰 피해는 없었다.

 

  메뚜기 떼는 또 왔다. 두세 달 동안 농장은 메뚜기 떼의 연이은 습격을 받았다. 거대한 무리를 이루고 찾아오는 메뚜기 떼는 농장을 지나는데 며칠씩 걸렸다. 강풍처럼 윙윙 울부짖으며 사방에서 맹렬히 움직이는 작고 단단한 날개들은 태양빛을 받은 칼날처럼 빛났지만, 정작 태양빛을 가렸다. 메뚜기 떼를 따라 거대한 새 무리도 찾아 왔는데 메뚜기 떼가 내려앉은 들판 위를 걸으며 배를 채웠다.

 

  커피나무 잎은 월계수 잎처럼 단단하기 때문에 메뚜기들이 갉아먹을 수 없어서 드문드문 나무가 부러지는 외에 큰 피해는 없었지만 옥수수 밭은 처참했다. 부러진 옥수수 줄기에 마른 잎 몇 장만 매달려 있을 뿐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정원도 꽃이며 채소며 약초며 할 것 없이 모두 사라지고 쓰레기 더미처럼 변했다. 메뚜기들은 흙 속에 알을 까고 떠났다. 이듬해 우기가 지나자 새끼 메뚜기들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날지는 못했지만 기어 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먹어 치웠다.

 

  돈이 바닥나 더 이상 비용을 감당할 수 없자 나는 농장을 나이로비에 있는 큰 회사에 팔았다. 나는 커피 수확 때까지 농장을 관리하도록 되어 있었다. 어리석게도 그 시기에도 나는 농장을 포기하거나 아프리카를 떠나게 되리라고 믿지 않았다. 하지만 원주민들을 도울 수 없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바로 그 해에 키난주이 족장이 세상을 떠났다. 키난주이는 마지막 순간을 우리 농장에서 맞이하고 싶어 했지만 이미 그곳은 나의 소유가 아니었기에 나는 그의 요청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데니스 핀치해턴이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 나는 그가 살았을 때 죽어 묻히고 싶어 하던 농장이 보이는 언덕에 그를 묻었다.

 

  나는 파라와 함께 가재도구를 모두 처분하고 푸란 싱에게 작별의 선물로 파란 보석이 박힌 금반지를 선물했다. 나는 함께 모여 살겠다는 농장의 키쿠유족들을 위해서 여러 기관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요청이 이루어지도록 해 주었다. 그 시기에 인근 노인들이 나를 위해 은고마를 열기로 결정하였지만 당국의 금지로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떠나는 날 많은 친구들이 기차역으로 전송을 나와 주었다.

 

  작가의 강인한 의지가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섬세하고 풍부한 감성과 뛰어난 표현력은 잔잔한 감동을 일으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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