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모래시계 - Novel Engine POP
도리카이 히우 지음, 정대식 옮김 / 데이즈엔터(주) / 2018년 7월
평점 :
품절


8.7







 작중에 등장하는 가상 국가 제리미스탄은 '종말 감옥'이란 특이한 정책을 내건다. 전세계적으로 인권의 바람이 불어 대부분의 나라가 사형수를 사형시키지 못할 때 제리미스탄은 종말 감옥을 만들어 전세계 사형수를 받아서 대신 사형시키겠다고 앞장선 것이다. 당연히 인권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에겐 논란이 됐지만 이 정책은 당장 여러 나라에게 큰 환영을 받는다. 사형수들을 사형시키지 않고 감옥에 가둬두느라 세금이 허비되는 게 탐탁치 않았던 각국 정부는 사례금을 주고서 제리미스탄에 사형수를 양도하고 제리미스탄은 그렇게 얻은 사례금으로 국력을 키운다. 그렇게 윈윈 전략 아래서 탄생한 제리미스탄의 종말 감옥에는 각국의 사형수들이 모이는데...

 참 특이한 설정의 연작 추리소설이었는데 감옥을 배경으로 해서 추리에 제약이 발생한다는 상황도 흥미로웠고 전세계 사람들이 모여 각자 출신지에 따른 가치관의 차이에서 - 참고로 수감자는 의사소통을 위해 필수적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제리미스탄어 수업을 듣는다. - 수수께끼와 갈등, 살인이 비롯된다는 건 개인적으로 취향에 맞아 좋았다. 무엇보다 감옥을 배경으로 한 창작물이 흔히 보이는 '범죄자에게도 정이 있다'는 듯한 분위기가 별로 없던 게 좋았고 사형 제도 자체에도 크게 주제의식을 드러내지 않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간혹 특정 나라의 가치관에 반했을 뿐이지 객관적으로 보면 사형수 판결이 과한 인물도 있고 개중엔 아예 무고한 사람도 있지만 그걸 빌미로 사형 제도의 모순을 비판하기 보단 본격 추리소설의 소재와 설정으로 이용한다는 느낌을 받아 오히려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한마디로 오락을 강조한 추리소설이란 컨셉에 충실했다는 것이다.



 '마왕 샤보 돌마얀의 밀실'


 초장부터 전세계 사람들이 수감된 종말 감옥이란 설정과 매력을 각인시키기에 제격이었던 에피소드. 총 6편의 수록작 중에서도 가장 임팩트가 컸다. 사건의 동기는 그리 어렵지 않게 유추가 됐지만 방법에 대한 해답은 꽤 재밌었다. 복선도 충분했고 캐릭터들도 다 개성이 있어 이래저래 이상적인 출발이 아니었나 싶었다. 

 그나저나 작중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이 전부 특이한데 우리나라 번역판이니까 그나마 괜찮았지 일본 원서로 읽으면 가타카나가 범벅이라 눈이 다 어지러웠을 것 같다.



 '영웅 첸 웨이츠의 실종'


 유일하게 제리미스탄 종말 감옥에서 탈출한 첸 웨이츠의 비범함은 놀라웠지만 이후에 보인 다소 썰렁한 행보가 뜻밖이었던 작품. 반전 자체는 그렇게 의외도 아니었고 오히려 첸 웨이츠란 인물에게 실망하게 됐지만 탈출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계획성과 추진력은 혀를 내두를 만했다. 그렇기에 그의 행보가 더욱 실망스러웠던 거겠지.



 '감찰관 제마이야 칼리드의 도회'


 어떻게 보면 사형 제도를 전면으로 수행하는 종말 감옥이란 공간에서 사형 제도에 대해 그나마 사유다운 사유를 했던 에피소드. 간수들은 사형수들이 사형되기 전에 그들의 인권을 어느 선까지 존중할 것인가. 꽤 생각해봄직한 질문이었는데 너무 편파된 답을 유도하는 듯한 막장스런 인격의 간수가 나왔던 건 내심 아쉬웠다. 그래서 사건의 내막에 공감이 크게 집중이 안 갔던 것 같다. 하필 사건의 내막이 너무 작위적이고 초월적이기까지 해서 작중에 드러난 사유의 역할이 중요했는데 너무 반전에만 급급한 듯한 내막이라 도리어 크게 인상에 남지 않았다.



 '묘지기 라쿠파 걀포의 긍지'


 서로 다른 출신지의 수감자들이 모이는 종말 감옥의 특수성에 가장 어울리는 반전이 돋보인 에피소드였다. 솔직히 말해 다룬 소재가 보통 특수한 게 아니다 보니 복선이 부족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데 작품의 설정에는 대단히 어울리는 사건이고 반전이 아닐 수 없어 치사한 감은 있어도 납득하게 되는 결말이었다. 여러 나라의 문화에 관심이 있다면 흥미롭기 이를 데 없는 에피소드일 것이다.



 '여죄수 마리아 스코필드의 잉태'


 남자 수감자와 여자 수감자가 철저히 분리되는 제리미스탄 감옥에서 한 여자 죄수가 임신했다는 보고가 들어온다. 이 책의 수록작 중에서 가장 궁금한 도입부였는데 결말은 기괴하기 짝이 없어서 뒷맛이 상당히 안 좋았다. <죽음과 모래시계>의 수록작 6편 중 3편은 종말 감옥이란 배경을 잘 활용했고 나머지 3편은 배경의 한계를 드러낸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그 3편 중 '여죄수 마리아 스코필드의 잉태'가 가장 심했다. 논리적으로 말은 되고 의외성도 있었지만 계획 실행에 있어 일부 우연에 기댄 부분도 있었기에 추리소설로써도 완성도는 그닥이었던 에피소드였다.



 '확정수 앨런 이시다의 진실' - 스포일러 有


 예상과 달리 마지막치고 클리셰 투성이라 놀랐던 에피소드. 용두사미까진 아니지만 확실히 기대에 못 미치긴 했다. '알고 보니 무고했다'는 앨런의 과거도 그렇지만 그의 아버지의 정체나 다소 격정적이었던 후반부의 전개도 전부 클리셰가 아닌가. 막판에 앨런의 아버지가 숨을 거두면서 읆조린 말에서 소름이 돋긴 했지만 그것만으론 이 상투적인 마지막 에피소드의 아쉬움을 달래기엔 역부족이었다. 해피엔딩이 아니란 건 마음에 들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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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 비행
가노 도모코 지음, 박정임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8년 4월
평점 :
절판


7.3







 바로 직전에 <작가 형사 부스지마>를 읽어서 그런가... 작풍을 비롯해 모든 것이 상반된 작품을 이렇게 연속으로 읽는 건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기껏 감성적인 일상 미스터리를 읽으면 뭐하는가, 직전에 읽은 작품과의 온도 차에 적응이 되지 않아 미진한 반응만 일고 마는 것을.

 ...이렇게 생각하고 싶지만 이 작가에 대한 기대가 커서 상대적으로 실망했던 게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가노 도모코의 작품은 <유리기린>이나 <손 안의 작은 새>는 꽤 재밌게 읽었는데 정작 작가의 데뷔작이나 그 작품의 후속작인 이 작품 <마법 비행>은 별로였다. 꽤 재밌게 읽었던 두 작품은 내가 10대 후반, 20대 초반에 읽었고 별로였던 작품은 최근에 읽었는데 이 시간 동안 내가 많이 바뀐 것일까? 그건 재밌게 읽은 두 작품을 재독하면 판명될 일일 것이다.


 작가의 데뷔작 <일곱 번째 이야기>와 이번 <마법 비행>은 여대생 고마코가 주인공인 연작 일상 추리소설로 어딘가 자전적인 요소가 느껴지는 아기자기한 작품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두 소설을 추리소설로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엄연히 수수께끼가 등장하고 그 수수께끼를 논리적으로 푸는 과정이 후반부에 배치돼서 실상 굉장히 정석적인 추리소설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여타 추리소설과 차이가 있다면 주인공인 고마코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묘사가 따뜻한 것이 - 아주 따뜻함 일색인 건 아니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분명 따뜻하기 이를 데 없다. - 영락없도록 추리소설적 분위기,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범죄의 기운이 물씬 나는 분위기완 상반됐다는 것일 터다.

 일상 추리소설을 좀 찾아 읽는 사람이라면 이런 작풍은 그리 낯설지 않겠지만 특유의 자전적 요소와 고마코가 겪는 일상의 사건과 그걸 소설화시키는 고마코의 서술 사이의 관계라는 부분이 있어 조금은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이 매력이다. 와카타케 나나미의 작품보단 따뜻하고 기타무라 가오루의 '엔시 씨와 나' 시리즈하고는 이 자전적 요소에서 미묘하게 차이가 있어 나름의 개성이 있기도 하다. 이런 부분이 매우 비관적이고, 특히 소설에 대한 환상을 모조리 조롱한 <작가 형사 부스지마>와 상극이라 그 작품을 읽은 직후에 <마법 비행>을 읽는다는 것은 남들에게 말도 못할 당혹스러운 경험이었는데 그런 부분을 감안하더라도 이 연작 추리소설은 왠지 이목을 끄는 맛이 부족했다.


 표제작인 '마법 비행'이 그나마 재밌었고 나머지 세 작품은 인상이 흐릿했다. 일상 추리소설답게 무척 사기적인 수준의 추리가 나오는데 고마코의 소설과 세오 씨의 해설이 너무 역할이 딱딱 나뉜 경향이 있어 무의식적으로 고마코의 소설 부분의 몰입도가 약해지지 않았나 싶다. 고마코의 소설 부분이 추리소설적 구성을 지녀 그런대로 흥미롭지만 사건의 임팩트 자체는 미미한 수준이기에 정작 해설에 이르는 과정보다 해설 자체만 기다리게 되지 않았나 싶다. 나도 결국엔 똑같은 소설가 지망생이라 훈수 두기엔 처지가 좀 그렇긴 하나 단적으로 말해 소설을 읽거나 쓰는 것엔 취향이란 별개의 영역도 분명 있는 법이니 선뜻 작가의 감성과 스토리 텔링이 퍽 와 닿지 않아도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내가 무척 불성실한 독자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이 작품 몇 년 뒤에 쓴 작가의 작품 <유리기린>, <손 안의 작은 새>가 재밌던 걸 떠올리면 나는 작가가 아직 이 작품을 쓸 때까지는 미숙했던 거라 단정하고 싶다. 일상 추리소설에서 작가가 구현한 감성에 몰입할 수 있느냐는 것은 꽤 중요한 지점이므로 다시 말하지만 상술한 두 작품을 재독해야 판명될 일임에도 지금 당장으로서는 솔직히 말해 이 시절까지는 작가가 미숙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거, 진짜 말이 나온 김에 <유리기린>부터 좀 다시 읽든가 해야겠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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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형사 부스지마 ㅣ 스토리콜렉터 64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김윤수 옮김 / 북로드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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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우리나라 독자 한정으로 참 재밌는 제목이 아닐 수 없다. 원래는 독설가인 주인공의 성격에 맞게 이름에 '독'이 들어갔을 뿐인데 뜻밖이면서도 아이러니하게 우리나라에선 다른 의미의 이름이 되고 말았다. 실제로 부스지마는 작중에서 용의자나 업계 등 자기 앞의 대상을 그야말로 철저하게 부수는데...

 직언하지 않는 게 국민성이라 할 일본이다 보니 오히려 그에 대한 갈증으로 인해 사이다 발언을 하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작품을 잘 만드는 것도 같다. 비슷한 플롯과 캐릭터를 다룬 작품으로 오쿠다 히데오의 '이라부' 시리즈와 교고쿠 나츠히코의 <죽지그래>, 그리고 사카이 마사토가 출연한 드라마 <리갈 하이>가 떠오르는데 모두 가식 없이 내면을 후벼파는 내용이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작가 형사 부스지마>는 주인공의 캐릭터성만 보면 위의 작품들에 비해 좀 약한 편이지만 대신 컨셉이 특이해 재미와 통쾌함이 위의 작품들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이 책은 작가 지망생은 결코 읽으면 안 되는 책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작가 지망생인 내 입장에서 불편하지만 읽어야만 하는 내용이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오로지 출판업계만을 상대로 비판을 일삼는 작품은 처음인데 추리소설적인 사건과 반전, 결말은 부수적인 요소로 느껴질 만큼 업계의 실상을 낱낱이 까발리는 게 주된 목적인 작품이라 생각하게 만드는 요소가 참 많았다.

 공모전 1차에 낙선되는 실력 미달 작가 지망생, 편집자에 의존하는 신출내기 작가들과 그런 작가들의 등골마저 빼먹는 악덕 편집자, 어떻게 신인상을 받으면서 데뷔는 했지만 실적을 못 내고 있는 작가들과 그들에게 꼰대짓을 하는 문단의 거장 등 에피소드가 거듭될수록 조롱하는 대상이 진화하는데... 어떨 때는 '이게 현실일 리 없다'며 부정하고 싶은 발언도 나오고 언제는 '남들이 날 이렇게 보고 있진 않을까' 라며 찔리는 장면도 나와 여러모로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워너비의 심리 테스트'


 공모전 1차에서 떨어지는 이유를 납득할 수 없는 작가 지망생들의 추한 모습을 다룬 첫 번째 에피소드. 그들과 완전히 같은 처지라 할 수 있기에 남 얘기처럼 읽히지 않았다. 나 역시 작년에 낙선하고 최종 심사에도 못 들어서 크게 낙심하던 차였는데, 작중 인물들만큼은 아니더라도 내심 불만스러웠던 터라 오히려 읽고 반성하게 되는 에피소드였다. 타인의 객관적이고 냉정한 개입 없이 자기 세계에 갇히는 게 얼마나 위험하고 추한 것인지 작가 형사 부스지마가 제대로 비웃는데 나도 그 대상이 되지 않게끔 열심히 써야겠단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편집자는 편집자'


 이 에피소드는 무능한 작가인 용의자들과 너무 이해타산적이라 유능한 편집자라 평가받았던 피해자를 동시에 꼬집는다. 데뷔를 했어도 첫 번재 에피소드의 용의자들과 다를 게 없는 인물들이 또 나오는데 이런 병적인 면모는 어떻게 보면 작가를 지향하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모습이겠단 생각에 크게 웃을 수만은 없었다. 따라서 사건의 전말은 씁쓸하기 짝이 없었는데, 출판업계엔 걸출한 재능의 소유자가 너무 극소수라 비즈니스적 요인을 무시하고 이상적으로 꾸려나가기엔 힘들다는 의견에 새삼 동의하게 됐다.



 '상을 받긴 했지만'


 화려하게 데뷔는 했지만 성과를 내지 못해 도태되기 일보직전인 용의자들이 나오는 에피소드다. 첫 번째, 두 번째 에피소드와 플롯이 비슷하긴 한데 개인적으로 피해자가 출판업계에서나 거장 소리 들을 만한 위인이었다는 것이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두 번째 에피소드의 피해자도 주변에서 유능하지만 인격엔 문제가 있는 것으로 평가를 받았는데 이번엔 인격적인 부분에서도 어느 정도 인정하는 주변의 평가가 조금 의아했기 때문이다. 물론 피해자가 괜찮은 작가고 양반인 건 부정할 수 없지만 신인들한테 설교를 한다는, 꼰대라 불려도 할 말이 없는 행동에 대해선 쉽게 동의할 수 없었다. 물론 부스지마의 방식이라고 찬성할 순 없지만... 때론 도태되는 것을 자청하는 인물을 구제하려는 게 말짱 헛짓인 경우나 상대도 있구나 싶어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특히 이익을 추구해야 하는 출판사의 입장을 떠올리면 더더욱.


​ 

 '애독자'


 이야기 자체는 그리 흥미롭진 않았는데 용의자 중 한 명이 꽤나 인상에 남았다. 책을 사지도 않고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 주제에 인터넷으로 악평을 남기고 책을 사서 보는 건 낭비고 바보 같은 짓이라 주장하는 그 인물의 논리가 반은 동의하고 반은 반대하기 때문이다. 나 같은 경우엔 신뢰하는 작가의 작품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의 책을 빌려 읽기로 결심한 독자인데 빌려 읽었는가, 돈을 내고 읽었는가에 따라 감상에 차이가 있으며 대체로 후자가 더 정성이 들어가기 마련인 걸 경험했기에 이 인물에 대한 비판에 대해 대체로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하지만 작가로서 출판업계의 일원이 되고자 하는 자아와는 무관하게 나는 소비자로서의 선택의 자유를 옹호하는 편이므로 결국 중요한 건, 이 작품집의 진정한 주제일지 모를 '작가는 재능이건 뭐건 작품을 성실히 잘 쓰는 게 답이다'란 결론이 아닌가 싶었다. 해당 에피소드와는 그리 관련이 없는 말이긴 하나, 실력도 없는데 이상을 추구하거나 건방을 떠는 건 추하기만 할 뿐이니까.


​ 

 '원작과 드라마 사이에는 깊고 어두운 강이 있다'


 소설이 원작인 일본 드라마를 자주 보는 나로서 정말이지 공감하지 않기가 힘들었던 이야기. 가장 궁금하면서도 가장 골 때리는 부분에 대해 얘기하는데, 순전히 작품 외적이면서 하찮기 이를 데 없는 요인으로 원작을 훼손하는 드라마 프로듀서가 정말이지 언제나 좋은 작품을 접하길 바라는 한 사람으로서 살해당해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란 생각을 나도 모르게 품었던 것 같다.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부스지마가 용의 선상에 오르는 상황도 재밌었고 작가이자 '형사 기능지도원'으로 재취업된 형사이기도 한 부스지마의 정체성이 강조된 의외의 결말, 그리고 첫 번째 에피소드 때부터 활용된 함정 수사 형식이 돋보인 것도 모두 인상적이었다.


​ 

 부스지마처럼 못된 말을 하는 캐릭터로 <리갈 하이>에서 사카이 마사토가 열연한 코미카도가 떠오른다. 그 캐릭터는 세상이 요지경이라 위악자로 사는 게 아닌가 하는 묘사가 있었는데 부스지마는 그런 면모까지 그려지지 않아 약간 아쉬웠다. 심지어 딱히 위악자는 아닌 것 같은데 억지로 못된 말만 하는 것 같은 다소 어정쩡한 모습을 보여 어딘가 어정쩡하다는 느낌도 받았지만 대신 하는 말 대부분이, 작가를 대변하는 그의 말은 의미가 있어 한동안 잊지 못할 캐릭터임엔 분명하다.

 또 부스지마한테 그렇게 철저히 당하고도 '그래도 자긴 열심히 쓸 거다'고 하는 하는 몇몇 인물들도 마찬가지로 잊지 못할 것 같다. 그들은 통찰력이 뛰어나기로 정평이 난 부스지마의 예상을 벗어난 인물이자 우리가 본받아야 할 유형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이 되고자 하는 역사에 남을 위대한 작가는 그런 식으로 탄생하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 작품에서 묘사된 출판 업계처럼 - 아마 현실과 거의 비슷할 - 독설이 절실한 막장의 세계에선 말이다.


 작가의 데뷔작을 읽었을 땐 이 정도 인상까진 못 받았는데 이 작품을 읽으니 이 작가의 책이 왜 그토록 많이 출간되는지 알게 됐다. 작가의 또 다른 데뷔작인 <안녕, 드뷔시>부터 차근차근 읽어야겠다.

야심이 원한으로 변질되는 건 이 바닥에 때때로 일어나는 일이죠. - 31p




작가의 재능이라는 게 워낙에 실체가 의심스럽잖아. 자각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이 꼭 이익으로 직결된다고 볼 수도 없고, 잠재력이 어느 정도인도 짐작할 수 없고. 하지만 그게 없으면 얘기가 안 돼. 의심스러운 걸 다루기 때문에 모조리 비즈니스처럼 처리할 수도 없고, 스스로 착각하는 인간들도 나오게 마련이지. - 103p




정말이지 당신들 하는 짓하고는. 드라마에서는 여기저기 온갖 배려하며 예의 차린 것만 만들면서, 보도만 된다 하면 한없이 천해진다니까. - 30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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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자는 죽어야 한다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5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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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이 작품의 제목은 저자의 전작들과 비교해도 확연히 차이가 난다. 매우 직설적이고 독선적이라 읽기 전 고개를 갸웃했는데 막상 정말로 '죽어 마땅한 어리석은 자'랄 인물은 별로 보이지 않아서 의아하기도 했다. 난 또 어리석은 놈들이 줄을 이어서 등장하는 줄 알았더니, 생각해보면 일본에서 하드보일드 작가로 둘째 가라면 서러울 하라 료의 작품인 만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다음 작품을 읽기 시작한 건 곤란을 자처했던 게 아닌가 싶다. 물론 제목이 함축하는 바가 후반부에서 터지긴 하지만 약간 독자를 낚는 제목이란 생각도 들었다.

 시리즈 2기의 시작을 알리는 이 작품은 일본에서 전작으로부터 10년이 지나 발표됐고 한국에서도 대략 5년 정도 지나고 출간됐다. 아마 내가 아는 한 과작의 정점을 점하는 작가면서 발표하는 작품마다 밀도가 높아 후속작이 나올 때까지의 긴 기다림이 용인되는 흔치 않은 완성도를 자랑하는 작가라 할 만했다. 장편 3권과 단편집 한 권, 그리고 시리즈 2기를 알리는 이번 신작은 - 일본에선 최근에 시리즈 5권이 나왔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출간할 때가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 처음으로 기대에 못 미쳤던 작품이다. 내가 이 과작 작가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품은 걸까?


 전반적으로 작풍이 좀 바뀐 듯하다. 시리즈 2기라 그런가? 시간이 흘러 이젠 21세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사와자키를 비롯한 주역 인물들이 죄다 나이를 좀 먹었다. 여전히 사와자키는 단독으로 활동하는데 경찰과 야쿠자 사이에서 전혀 기죽지 않고 초연하다. 작중 표현을 빌리자면 평정하게 탐정 업무를 수행하는데 정의를 위해서라거나 속물적인 이유도 아닌 정말 딱 탐정이라는 직업인으로서의 예의만 차릴 뿐이라 이번에도 하드보일드의 느낌은 충만했다. 분위기도 그리 달라지지 않았는데 내가 바뀐 것 같다고 느낀 건 바로 이야기의 모양새다. 사건의 복잡한 내막이야 그렇다 쳐도 다소 정리가 안 된 것 같기 때문이다. 전개도 이상하게 빠른데 전반적으로 등장인물이나 등장 단체가 너무 많은 것에 비해 이야기 전개엔 완급 조절이 안 된 것 같아 가독성에 비해 몰입도는 떨어졌다.

 시리즈의 2기를 알리는 작품이라고 계속 말했는데 그렇게 의미가 부여된 작품치고 에피소드에 크게 임팩트가 없던 것도 좀 걸린다. 어떻게 보면 평범하게 2기의 시작을 알리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과작도 보통 과작이 아닌 작가에게 있어 지나치게 힘을 뺀 게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문장력이 상당한 나머지 옮겨 적고 싶은 구절이 많았던 전작에 비해 이번 작품은 신기하게 문장마저 평이했는데 내가 기대를 너무 많이 한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작가가 매너리즘 비슷한 무언가에 시달리는 것인지 살짝 걱정이 되기도 했다.


 어쩌면 재독하면 인상이 많이 달라질지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은 크게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 시리즈의 팬으로서 소장하고 있겠지만 기대에 비해 미진한 인상을 남겨 평가는 좀 유보해야 할 듯하다. 재독을 언제 하려나.



인상 깊은 구절


병원이 인간 생명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지만, 가장 잘하는 일은 생명에 가격표를 매기는 짓이다. 가격표가 붙으면 보험사 직원도 나타나고 사기꾼도 등장한다. 머지않아 탐정도 얼굴을 내민다. 그뿐이다. - 7~8p


즐거운 시간은 오래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게 인생의 첫걸음이지만, 괴로운 시간 역시 마찬가지라는 사실은 인생이 끝나갈 때가 되어서도 알기 힘들다. - 186p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변호사들은 늘 흥분 상태인 사람들을 상대하네. 겉모습만의 문제가 아니라 밖에서는 볼 수 없는 정신 상태도 포함해서 말이야. 우리는 그렇게 흥분한 사람을 다루는 일에는 충분히 능숙해. 그런데 때론 무서우리만큼 냉정한 녀석이 나타나는데, 냉정이란 말하자면 흥분의 반대 같은 거지. 수완 좋은 변호사는 이런 녀석도 급소만 찌른다면 어떻게든 대응할 수 있겠지. 곤란한 건 평정한 인간이야. 자네처럼 평정한 인간은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니 경계할 수밖에 없지. - 18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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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우맨 (리커버 에디션) ㅣ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7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2년 2월
평점 :
품절


9.5







 내가 가장 처음 접한 작가의 책을 다시 읽었다. 이 작품을 읽고 시리즈의 1권부터 순서대로 읽겠노라 다짐했는데 꼬박 4년이 걸렸다. 이게 다 전편인 <리디머>가 늦게 출간된 탓이다. <스노우맨>이 시리즈의 일곱 번째 작품이지만 전편을 예습하지 않아도, 또 개별적인 완성도도 뛰어나 국내에 처음 출간시킨 건 인정하지만 역시 들쑥날쑥한 출간 순서와 속도는 불만을 품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전편을 예습하지 않아도 괜찮은 작품이긴 해도, 역시 1권부터 차근차근 읽어나간 다음에 읽었을 때 감동이 배가되니 가급적 시리즈는 순서대로 읽어야겠단 생각은 변하지 않게 됐다.

 혹시 이 시리즈를 처음 접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1권인 <박쥐>부터, 적어도 3권인 <레드 브레스트>부터 읽길 권한다. 물론 7권인 <스노우맨>도 시작으로선 그리 나쁘지 않다. 해리와 연쇄살인범의 대결이란 빅 이벤트가 드디어 그의 고국인 노르웨이에서도 펼쳐진 작품이니까. 1권과 7권 사이의 작품은 이를 위한 사전 단계이자 담금질로 생각할 수도 있고. 그렇게 표현하기엔 정말 많고 많은 일이 있었지만... 아무튼 이 작품 역시 이야기의 무대인 노르웨이, 특히 오슬로에서 읽으니 몰입도가 더욱 남달랐던 작품이다.

 직접 오슬로의 거리를 걸어본 나로선 작중의 서늘한 분위기가 더욱 이질적이게 느껴졌다. 왜 해리의 동료들이 노르웨이에선 연쇄살인은 없다고 단정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 해서 앞으로 일어나지 않으리란 건 사실 굉장히 순진하고 비논리적인 주장이지만 직접 그 동네를 걸어다닌 나로선 왠지 납득이 갔던 것이다. 그럼 요 네스뵈의 이 이야기는 그저 픽션으로 치부하면 그만인 것일까? 극우와 청산하지 않은 역사 문제가 현대 사회에 끼치는 악영향에 대해 매우 통찰력 있게 짚어낸 작가인 만큼 마냥 허구적이라 치부하긴 힘들어 보인다. 바라선 안 되는 일이지만, 그의 진단은 예언 같은 구석이 있으니까.


 직전에 <리디머>를 포스팅하면서도 언급한 사항이지만, 하나의 작품을 평가할 때 작가나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국가가 중요한 요소로 거론되는 게 꼭 좋은 일이라 볼 수는 없다. 어쩔 때는 한계로 여겨질 수도 있는 부분인데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의 경우엔 노르웨이란 나라가 생소하기 때문인지 몰라도 어마어마한 강점으로 다가온다.

 작품의 서두에서 '세계 무대에서 노르웨이는 돈이 많아 세상 물정 모르는 금발의 여자와 같다'는 식의 묘사가 나오는데 - 왜 하필 여자인지는 의문이 들지만... - 이 점은 연쇄살인의 낌새가 느껴짐에도 떨떠름하는 걸 넘어 아예 해리가 유명해지고 싶어 안달이 난 관종으로 넘겨짚는 오슬로 경찰청의 분위기에서 문제점이 극대화된다. 톰 롭 스미스의 <차일드44>와는 경우가 많이 다르지만 이 정도면 연쇄살인범이 자아도취돼서 활개할 무대가 되기에 충분한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노우맨>은 시리즈의 어떤 작품보다 이야기가 명확하고 흡입력이 강하다. 연쇄살인범 '스노우맨'으로 의심되는 사람이 계속 바뀌며 독자들을 현혹하는 진행도 일품이고 극을 이끌어가는 캐릭터들도 매력적이다. 해리의 성장을 위해 퇴장당한 인물이 한둘이 아니라 못내 아쉽지만;;; 새로 등장한 인물들의 존재감이나 역할도 이전의 동료들 못지않아 심심찮은 위로가 됐다. 처음 나왔을 때 괜히 한 번 반항하고 놀려주고 싶던 하겐 경정도 참 괜찮은 양반으로 등장하고 대놓고 노린 캐릭터인 줄 알았던 카트리네 브라트도 의외로 해리와 스노우맨에 뒤쳐지지 않은 활약을 보여 흥미진진했다. 출연 비중을 떠나 괜찮은 캐릭터를 만들 줄 아는 작가에게 어떻게 보면 내심 백과사전 수준의 분량은 필수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개인적으로 서양 스릴러 특유의, 사건의 내막에 주인공 형사의 개인사가 강하게 반영된 서사를 선호하지 않는데 이 시리즈만은 예외다. 한 가지 예로 <레드 브레스트>부터 이어진 라켈과의 관계가 어떤 식으로 결말이 날 것인지 보는 것도 흥미로운데 이 시리즈가 해리의 성장을 다룬 하나의 길다란 이야기 안에서 참으로 일맥상통한 서사라 불만이 생기지 않는 것 같다. 이는 이야기의 무대가 노르웨이인 것과 마찬가지로 시리즈에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일 텐데 작가가 개연성을 저버리지 않고 잘 완성시켰다는 생각만 든다. 늘 말하지만 백과사전 수준의 두께임에도 하나의 흐름 안에 여러 요소를 잘 연결시키는 작가의 솜씨는 늘 감탄스럽다.

 방심할 수 없는 전개와 더불어 시리즈의 가장 큰 미덕일 후속작을 기대하게 만드는 결말이 어우러져 깊은 만족감을 선사해준 작품이다. 형사와 연쇄살인범의 대결로 정의될 수 있는 작품이라 뻔한 양상을 보이기 십상이었지만 노르웨이를 넘어 북유럽이기에 구현이 용이해 보이는 눈에 대한 서늘한 묘사가 기가 막히게 활용돼 상당한 존재감을 안겨줬다. 한마디로 기획이 탁월한 작품이었다. 위에서 후속작을 기대하게 만드는 결말이란 얘기를 했는데 그와 동시에 전작을 다시 보고 싶게 만드는 내용이란 점 역시 인상적이었다.

 솔직히 시리즈 최고의 작품이라 생각하진 않지만 - 개인적으로 작품성으로는 <레드 브레스트>, 오락성으로는 <네메시스>를 시리즈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다. - 시리즈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란 점에선 이견을 제시하기가 힘들다. 어떻게 보면 그래서 사람들이 시리즈 최고의 작품이라 칭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 작품이 마이클 패스밴더 주연의 영화로도 나왔다기에 기대가 됐는데 평가가 바닥을 기어서 걱정이 된다. 이렇게 두 번 읽은 마당에 영화를 안 볼 수가 없는데... 또 예고편은 잘 만든 것 같아서... 모든 못 만든 영화는 그래도 예고편은 잘 만든다는 게 틀린 말이 아닌 걸까.

좋은 이야기는 연이은 성공이 아니라, 처절한 실패에서 나옵니다. - 369p




그러니까 겉으로 청렴결백하게만 보인다면, 청렴결백한 거로군요.

그게 <리베랄>을 팔리게 하는 요인이오. 사람들은 진실이 밝혀졌다고 생각하면 만족하니까. - 462p




정의란 건 철학에서든 재판에서든 무딘 칼과 같으니까. 우리가 가진 건 운 좋은 혹은 운이 나쁜 의학적 소견이라네. - 613p




살고자 하는 자의 목숨을 빼앗는 것과 죽고자 하는 자에게서 죽음을 빼앗는 것 중에 뭐가 더 나쁜 것 같소? - 61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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