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자는 죽어야 한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5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8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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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이 작품의 제목은 저자의 전작들과 비교해도 확연히 차이가 난다. 매우 직설적이고 독선적이라 읽기 전 고개를 갸웃했는데 막상 정말로 '죽어 마땅한 어리석은 자'랄 인물은 별로 보이지 않아서 의아하기도 했다. 난 또 어리석은 놈들이 줄을 이어서 등장하는 줄 알았더니, 생각해보면 일본에서 하드보일드 작가로 둘째 가라면 서러울 하라 료의 작품인 만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다음 작품을 읽기 시작한 건 곤란을 자처했던 게 아닌가 싶다. 물론 제목이 함축하는 바가 후반부에서 터지긴 하지만 약간 독자를 낚는 제목이란 생각도 들었다.

 시리즈 2기의 시작을 알리는 이 작품은 일본에서 전작으로부터 10년이 지나 발표됐고 한국에서도 대략 5년 정도 지나고 출간됐다. 아마 내가 아는 한 과작의 정점을 점하는 작가면서 발표하는 작품마다 밀도가 높아 후속작이 나올 때까지의 긴 기다림이 용인되는 흔치 않은 완성도를 자랑하는 작가라 할 만했다. 장편 3권과 단편집 한 권, 그리고 시리즈 2기를 알리는 이번 신작은 - 일본에선 최근에 시리즈 5권이 나왔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출간할 때가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 처음으로 기대에 못 미쳤던 작품이다. 내가 이 과작 작가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품은 걸까?


 전반적으로 작풍이 좀 바뀐 듯하다. 시리즈 2기라 그런가? 시간이 흘러 이젠 21세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사와자키를 비롯한 주역 인물들이 죄다 나이를 좀 먹었다. 여전히 사와자키는 단독으로 활동하는데 경찰과 야쿠자 사이에서 전혀 기죽지 않고 초연하다. 작중 표현을 빌리자면 평정하게 탐정 업무를 수행하는데 정의를 위해서라거나 속물적인 이유도 아닌 정말 딱 탐정이라는 직업인으로서의 예의만 차릴 뿐이라 이번에도 하드보일드의 느낌은 충만했다. 분위기도 그리 달라지지 않았는데 내가 바뀐 것 같다고 느낀 건 바로 이야기의 모양새다. 사건의 복잡한 내막이야 그렇다 쳐도 다소 정리가 안 된 것 같기 때문이다. 전개도 이상하게 빠른데 전반적으로 등장인물이나 등장 단체가 너무 많은 것에 비해 이야기 전개엔 완급 조절이 안 된 것 같아 가독성에 비해 몰입도는 떨어졌다.

 시리즈의 2기를 알리는 작품이라고 계속 말했는데 그렇게 의미가 부여된 작품치고 에피소드에 크게 임팩트가 없던 것도 좀 걸린다. 어떻게 보면 평범하게 2기의 시작을 알리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과작도 보통 과작이 아닌 작가에게 있어 지나치게 힘을 뺀 게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문장력이 상당한 나머지 옮겨 적고 싶은 구절이 많았던 전작에 비해 이번 작품은 신기하게 문장마저 평이했는데 내가 기대를 너무 많이 한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작가가 매너리즘 비슷한 무언가에 시달리는 것인지 살짝 걱정이 되기도 했다.


 어쩌면 재독하면 인상이 많이 달라질지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은 크게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 시리즈의 팬으로서 소장하고 있겠지만 기대에 비해 미진한 인상을 남겨 평가는 좀 유보해야 할 듯하다. 재독을 언제 하려나.



인상 깊은 구절


병원이 인간 생명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지만, 가장 잘하는 일은 생명에 가격표를 매기는 짓이다. 가격표가 붙으면 보험사 직원도 나타나고 사기꾼도 등장한다. 머지않아 탐정도 얼굴을 내민다. 그뿐이다. - 7~8p


즐거운 시간은 오래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게 인생의 첫걸음이지만, 괴로운 시간 역시 마찬가지라는 사실은 인생이 끝나갈 때가 되어서도 알기 힘들다. - 186p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변호사들은 늘 흥분 상태인 사람들을 상대하네. 겉모습만의 문제가 아니라 밖에서는 볼 수 없는 정신 상태도 포함해서 말이야. 우리는 그렇게 흥분한 사람을 다루는 일에는 충분히 능숙해. 그런데 때론 무서우리만큼 냉정한 녀석이 나타나는데, 냉정이란 말하자면 흥분의 반대 같은 거지. 수완 좋은 변호사는 이런 녀석도 급소만 찌른다면 어떻게든 대응할 수 있겠지. 곤란한 건 평정한 인간이야. 자네처럼 평정한 인간은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니 경계할 수밖에 없지. - 18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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