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러운 볼 ㅣ 밀리언셀러 클럽 106
기리노 나쓰오 지음, 권남희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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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기리노 나쓰오는 아마 일본에서 소설가로서 수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상을 수상한 몇 안 되는 작가 중 한 명일 것이다. 그렇기에 작가의 수상작만 찾아 읽는 것도 일인데 개중 나오키상 수상작인 <부드러운 볼>은 절판이 돼서 구입해서 읽기까지 시간이 제법 걸렸다. 작가 본인이 뽑은 최고의 작품, 최고의 대중 문학상을 받은 작품, 하지만 가장 이질적인 작품이었던 <부드러운 볼>은 기대와는 사뭇 달랐다.

 일단 추리소설과 정반대의 소설임을 강조하고 싶다. 추리소설적인 사건은 등장하지만 관점이 완전히 다르다. 추리소설이라면 보통 사건의 해결을 염두에 두는데 이 작품은 거의 무관심으로 일관하듯 진행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사건을 해결하는지 보는 소설이 아니라 어떻게 사건 해결을 단념하는지 살펴보는 이야기라서 추리소설의 '추'자도 꺼내선 안 되리라. 스포일러긴 하지만 일단 이 점을 짚어야만 얘길 진행시킬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딱히 스포일러인 것 같지도 않다. 초반부만 대충 읽어도 작품의 결말을 확신해버리게 되니까. 근거는 없었지만, 결말에서 사건의 내막이 공개됐더라면 오히려 더 놀랐을 것 같다.


 이 작가의 장기는 하드함과 문장력에 있다. 기본적으로 수위가 세고 어딘가 꼬인 심성을 바탕으로 한 인물이나 이야기를 세밀하고 그럴싸하게 묘사하는 장면이 적잖은 편이다. 대표작 <아웃>에서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 묘사력이 두드러졌고 최근에 읽은 <그로테스크>는 제목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채 처음부터 어두운 심리 묘사를 주축으로 삼는다. 이런 요소는 때론 설득력보다 섬세함이나 분위기를 평가해야 하는데 개인적으로 뛰어난 장기라고 인정하고 지금까지 감탄해왔다. 하지만 이 작품을 읽고 난 뒤, 심리 묘사만으로 작품 전체의 완성도까지 보장하긴 힘들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인공이 자신의 불륜남과 '이 사람과 함께라면 아이들을 버려도 좋다'고 생각한 직후에 그녀의 딸이 유괴되는 괴사건이 발생한다. 참으로 기가 막힌 타이밍에 벌어진 재앙에 극심한 죄책감을 떨칠 수 없게 된 주인공은 마치 정해진 수순인 것인 마냥 가시밭길을 자청하며 걷게 된다. 불륜남과는 관계를 지속할 수 없고 남편과는 사이가 껄끄러워지고 둘째 딸에겐 얼굴을 들기 힘들고... 이런 상황 속에서 4년이 흘러간 주인공은 주변 사람 모두가 포기했음에도 자신만은 딸의 생존 가능성을 포기하지 못한다.


 <부드러운 볼>은 사건의 관계자 모두가 포기하더라도 혼자서만은 포기하지 않는 것, 마치 그것을 자신의 존재 이유라 여기기에 이르는 주인공의 갈팡질팡하는 내면을 그린 소설이다. 사건 초반에 드러나는 아이러니와 더불어 웃음기 하나 낄 수 없는 압도적으로 무거운 작풍이 인상적인데 딱 거기까지다. 내면에 대한 묘사가 너무 길고 지리멸렬하며 사건의 전개도 분량에 어울리지 않게 매우 더디고 분위기만 충만해 있다. 주인공 카스미와 함께 가장 비중 있다고 할 수 있을 전직 형사 우쓰미는 그 애매한 목적의식과 최후 때문에 작품을 이해함에 있어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불륜남 이시야마의 퇴장도 마찬가지고... 서두에 기리노 나쓰오의 작품 중 가장 이질적이라고 한 데엔 이런 애매한 서사의 탓이 크다. 아니, 백번 양보해서 서사가 애매할 수는 있다고 치자. 그런 종류의 소설이 존재할 수도 있고 그런 소설에 대한 수요도 분명 있으니까.

 하지만 이 작품을 쓴 저자가 노렸을 터인 여운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는가 묻는다면 고개를 흔들 수밖에 없다. 때론 오리무중이어야 더욱 와 닿는 사건도 있는 법이다. 하지만 카스미의 딸 유카에게 일어난 사건이 카스미의 죄책감과는 무관하게 그저 우연히 발생한 사건이라면 과연 이렇게 미해결로 넘어가는 게 최선일까 싶었다. 작중에서 미해결된 거야 그렇다 쳐도, 독자까지 사건의 아무런 전모를 파악할 수 없다면 500페이지 넘게 달려온 이야기에 허무함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은 아닌지? 솔직히 말해 카스미를 비롯한 모든 캐릭터의 심리 묘사가 처음엔 집중이 되다가도 어째 했던 말 반복하는 느낌이라 몰입도가 떨어지는 마당에 결말에서 여운을 주겠답시고 사건의 전모에 대한 추측만 늘어놓는다고 납득할 사람이 몇이나 될는지 모르겠다. 작품의 분위기나 캐릭터들도 호불호가 갈리는데... 보통 이런 생각 잘 안 하지만 이 작품이 절판된 이유를 왠지 알 것만 같았다.


 작가의 작품 중 가장 실망한 작품이었다. 다루는 소재들의 수위가 무색하게 꽤나 대중적인 이야길 직조할 줄 아는 작가라고 생각한 나의 인상이 많이 바뀌었다. 사실 기리노 나쓰오라면 응당 이런 종류의 소설을 쓸 법도 했는데, 이 작가라면 이보다 더 완성도 있게 쓸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이 자꾸만 드는 게 그저 아쉬울 뿐이다. 그런데 작가 자신이 최고로 뽑는 작품이 이 작품이라니...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보이는 것은 언젠가 소멸해요.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소멸하는 것이 슬프고, 허무해요.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보이지 않는 것을 생각해요. 마음이나 진실을요. - 15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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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일본의 이해 - 만화로 보는 《영속패전론》
시라이 사토시 지음, 이와타 야스테루 그림, 박우현 옮김, 이서현 / 이숲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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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9.0






 일본도 다양한 사람이 사는 나라이기에 언론에서 접하는 극우, 혐한이 그 나라 국민의 일부임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소위 일본 지식인이란 작자가 일본을 비롯해 주변 나라들과의 국제 관계에 대해서 속 시원히 짚어내는 경우는 본 적이 없는데 한국인과 일본인의 시각에 차이가 있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일본인들이 자국에 대해 온정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어 관련 주제의 글을 접할 때마다 알게 모르게 찝찝하곤 했다.

 이 책의 원작이라 할 수 있는 시라이 사토시의 <영속패전론>을 읽지 못해 짐작만 할 뿐이지만 아마 무겁고 딱딱했을 터인 책의 내용을 최소한의 만화 기법으로 잘 담아낸 것 같다. 아주 전형적인 학습 만화였는데 대체로 설명 위주인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림은 적어서 버거울 뻔했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의 핵심을 잘 짚어내서 집중력이 떨어지진 않았다. 원작의 내용을 적절히 잘 녹여낸 덕분이었을 것이다.


 전후 일본의 행태는 한국인으로서 도저히 모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욕하는 것으로 끝내는 게 아니라 일본이 왜 저런 태도를 보이는가 하는 것인데 이때 저자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통찰력 있는 답을 내놓는다. 가령 일본인들이 원폭을 맞은 것을 비극이라 인식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대신에, 다시는 원폭을 맞을 짓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이르지 못하는 것엔 다름 아닌 원폭을 인재가 아닌 자연재해로 여기는 것에서 기인한 탓이 크다. 이는 일본이 스스로 제2차세계대전을 패전이 아닌 '종전'으로 부르는 것과 일맥상통하다. 자신들은 전쟁에서 진 게 아니라 그저 전쟁이 끝났을 뿐이라고. 이 얼마나 웃기지도 않은 정신승리인 건지...

 일본이 이런 정신승리를 해올 수 있던 것은 냉전 시대에 마주한 미국의 전략과 일본의 지리적 이점, 그리고 전쟁 특수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라 저자는 말한다. 100% 완벽한 논리라고 보기엔 한두 군데 비약이 있을 수 있지만 오늘날 일본 극우들의 우월주의나 정부의 태도를 떠올리니 일단 닥치고 공감이 갔다. 소련을 위시한 사회주의 전선과 직면한 한국과 대만이 파란만장한 근대를 보낸 것과 달리 일본은 민주주의가 비교적 빨리 정착해 평온하게 경제 성장을 이뤘는데 이게 단순히 일본과 일본인이 우월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일까? 생각보다 많은 일본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저자는 소련이나 중국과 거리가 있는 지리적 이점의 덕택일 뿐이라고 일갈한다.


 우리나라에서 친일의 잔재가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것과 비슷하게 일본은 미국이 장기말로써 부리려는 계획 하에 경제 발전에 돌입했기에 2차세계대전의 전범들을 그대로 정부 주요 인사에 투입시켰다고 한다. 작중에서 미국에 대해 얘기하는 부분은 약간 음모론 같은 구석이 있었지만 역사의 흐름이나 현재 미국의 동향을 살펴보는 일본의 모습을 보면 마냥 얼토당토하게 들리지 않았다. 온전히 미국의 주도 하에 국력을 키웠으나 그 과정에서 패전을 했다는 자아 비판이 이뤄지지 않아 염치가 없게 됐다는 해석은 정말 와 닿았는데 특히 영토 분쟁에 있어서 거의 답이 없는 태도를 생각하면 용케 이 나라가 존속을 해왔구나 싶었다.

 영토 문제는 미국과의 역사적 연관성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는지 몰라도 쿠릴 열도나 센카쿠 열도에 비해 독도는 언급하지도 않았는데 저자가 일부러 외면한 건지, 아니면 원작에는 다뤘지만 만화판에서 생략한 건지 모르겠지만 작중 내내 작가의 통찰력이 돋보여서 이런 의문 정도는 눈감을 수 있었다. 일본인이 일본인을 위해 쓴 역사 이야기라 약간 걱정되는 측면도 있었고 실제로도 관점이 미묘하게 다른 부분도 있었지만 - 간단히 말하면 이 책은 일본이 세계 무대에서 평화롭게 지낼 수 있기 위해 역사나 지난 과오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집필된 책이다. - 제목 그대로 전후 일본을 이해하기에 알맞아서 이래저래 많이 배울 수 있었다. 이 책의 원작인 <영속패전론>도 정독해봐야겠다.

배우지 않아서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의 불운이라면, 알고자 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것이랄까. - 머리말




패배를 인정하지 않기에 패배를 질질 끌어올 수 있었다. - 제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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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 ㅣ 변호사 고진 시리즈 5
도진기 지음 / 황금가지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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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참 함정이 있는 제목이 아닐 수 없다. 아마 현직 판사였던 시절, 작가가 법정에서 겪은 온갖 환멸을 드러낸 제목인 건가 싶어서 괜히 특이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정작 본 작품의 사건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벌어졌다는 것을 제외하면 생각보다 평이한 양상을 보였다. 최근에 읽은 작가의 작품인 <가족의 탄생> - 최근이라고 해도 벌써 3년 전이다. - 도 이 작품처럼 통속적이고 외견만 보면 평이한 사건으로 시작되는데 특히 이번 작품 같은 경우엔 법정물이라서 더 그렇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명색이 시리즈의 주인공인 고진이 변호사고, 작가도 법조인인데 법정물은 이번 작품이 처음이었다. 법정물이란 장르는 신기할 게 없지만 도진기 작가가 쓰는 건 처음 봐서 사뭇 기대가 됐다. 일찍이 이 작가가 법정을 배경으로 한 창작물을 보기 힘들다는 이유로 자신이 몸담고 있는 현실과 다르기 때문이라고 했던 만큼 다른 건 몰라도 법률에 대한 고증에 대해선 불안할 것이 없었다.


 처음으로 법정에 선 고진, 상대 검사는 그간 고진의 전적을 떠올려 본다면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위인이지만 사건이 여러모로 변호인에게 불리한 구석이 있어 난항이 예상된다. 하지만 변호란 곧 방어, 진범을 잡아야 하는 사건 수사가 아닌 의뢰인의 무죄 판결을 이끌어내기만 하면 충분한 터라 고진은 의심을 제기하는 방식으로 차근차근 분명하게 승소에 다가간다. 이는 어떻게 보면 소극적인 태도라 할 수 있기에 작품의 전개는 은근히 잔잔한데 고진의 취향이자 신념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전개였다고 볼 수 있겠다.

 최근 우리나라에 리메이크돼 방영 중인 일본 원작 드라마 <리갈하이> - 리메이크작을 보려고 했더니 주변에서 뜯어 말리더라. 반드시 실망할 것이란다... - 에서 다뤄진 법조인, 특히 변호인의 딜레마에 통달한 인물이 바로 고진일 것이다. 법의 생리, 한계를 알 만큼 아는 고진은 본래 그 점을 이용해 뒷세계에서 이름 좀 날렸을 정도로 시니컬하기 이를 데 없는 인물인데 우연한 책임감 때문에 '어둠의 변호사' 개업 이래 처음 법정에 출두했더라도 그의 철학이 흔들릴 일은 없었다. 그래서 고진은 법정에서 초반엔 소극적으로, 중반부엔 어울리지 않게 무기력하게, 후반부엔 매우 파격적으로 행동하는데 이런 장면들이 어떻게 보면 무난하게 흘러가는 이 작품에서 한 줄기 빛과 같은 것이었다. 누가 뭐라 해도 자신의 의뢰인을 전폭적으로 신뢰할 생각이 없는 철저한 합리주의자인 고진이기에 가능한 모습이었다.


 작중 사건의 배경이 내가 실제로 가봤던 블라디보스토크라서 내심 기대하고 읽었지만 의외로 작품에선 장소에 대한 매력을 어필하지 않는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장면은 별로 길지 않은 등 이른바 여행 미스터리의 쾌감 같은 건 전무해서 이럴 거면 왜 굳이 블라디보스토크를 배경으로 썼을까 싶었는데 다 읽고 나니 막판에 고진이 밝혀내는 범인의 거대하고 황당한 규모의 트릭을 위해서 선정된 느낌이 다분해 일단 의문은 남지 않았다. 다만 장편보단 오히려 단편에 어울리는 성질의 트릭이었던 것과 더불어 특유의 황당함 때문에 독자도 같이 추리하기 힘들었던 건 좀 아쉬운 부분이었다. 추리소설답게 막판까지 쉽게 결말을 유추할 수 없고 긴장감과 기대를 이끌어내는 연출은 경험이 쌓인 작가답게 능숙했지만 만듦새 자체는 약간 위태로웠다.

 범인의 동기도 마찬가지다. 이번 작품은 작가의 초기작과 비교하면 대단히 드라마가 강조된 편으로 흡사 만화 김전일이 떠오르기도 했다. 아주 전문적인 문인은 아닌 탓인지 캐릭터 설정이 스테레오 타입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단점은 여전하나 - 특히 여성 캐릭터의 묘사나 쓰임새는 젠더 감수성이 예민하다고 자부하는 독자라면 거슬릴 수도 있겠다 싶었다. - 그만큼 알기 쉽고 선명해서 작가가 노렸을 감동과 여운이 일정 수준 이상 안겨지긴 했다. 하지만 고진이 입을 빌려 그걸 일일이 설명하는 장면은 구태의연해서 내심 질리는 마음도 없지않아 들었다. 사람의 속내를 거의 발가벗기듯... 어쩌면 이 때문에 고진이 법정에서 진범을 밝히길 꺼렸던 게 아닐까 싶었을 정도라 약간만 독자의 해석에 기댔어도 좋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래도 함정이 있는 제목 덕에 작품의 여운이 강조돼서 괜찮았다. 이 이상 제목의 함정을 강조하는 건 스포일러가 될 테니 입을 다물겠지만... 초기작부터 시니컬함으로 일관하던 작가가 이 작품에서 드라마와 감동에 치중하는 변신을 선보여 결과적으로 신선한 작품으로 남게 됐다. 조금씩이지만 작가가 변화를 추구하는 모습이 솔직히 불안한 한편으로 보기 좋다. 전업 작가도 아닌데 이렇게 정력적으로 집필하시다니, 분야를 막론하고 참 모범으로 삼을 만한 모습이란 생각이 들었다.

마치 변호사용 상식이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정말 그렇게 믿는 걸까요? 아니면 단지 그가 돈을 지불하는 의뢰인이기 때문에 그러는 걸까요? 그 이성이 확률의 편에 선 이성입니까? 뻔한 범죄자를 변호한다는 여론과 양심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 혼자만의 신념이라는 장막 뒤로 숨는 건 아닐까요? - 16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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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기린
가노 도모코 지음, 권영주 옮김 / 노블마인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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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9.4







 추리소설은 의외로 범용성이 상당해서 다루지 못할 소재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럼에도 상극인 소재도 있지 않나 싶다. 개인적으로 '소녀'라는 키워드가 그렇다고 보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데뷔작 <방과 후>가 동기에 있어서 독자들의 의견이 갈렸던 것처럼 - 그 작가의 다른 작품도 동기가 늘 논란의 중심인 것 같지만... - 일본 문학에서 소녀에 대한 정의나 쓰임새는 대체로 위태롭기에 불가사의한 존재에서 벗어나질 않는 것 같다. 위태롭다느니 불가사의하다느니, 그래봤자 거릴 두는 말들인 것 같아 별로 와 닿지 않는 표현 같은데 그도 그럴 것이 소녀라고 다 같은 소녀가 아니니까 일반화하기 애매하지 않은가. 그런데 단지 추리소설에서 등장한 일부 소녀들의 모습을 보고 우리가 그들을 확대 해석하는 게 아닐까. 추리소설은 물론이고 일본 문학을 접할 때마다 늘 드는 생각이다.

 피해자든 가해자든 목격자든 소녀가 개입하거나, 아니면 아예 여고가 배경이면 명쾌함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추리소설이 방향을 잡기 어려워 하는 것 같다. 이번에 읽은 <유리기린>에서 그걸 확실히 느꼈다. 책의 제목과 동명의 동화를 쓴 여고생이 살해당한 사건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연작 소설인 이 작품의 대부분의 이야기가 소녀의 불가사의함에 초점을 두고 있다. 아, 오해는 마시길. 각각의 미스터리는 복선이 충실해서 추리하고 해결하는 과정이 꽤 탄탄하니까. 중요한 건 이런 미스터리를 만들어낸 당사자들의 심리인데 이게 좋게 말하면 독특한 거고 나쁘게 말하면 이해 불가한 것일 터다. 그리고 나는 좋게 말하고 싶다.


 소녀라는 존재에 필요 이상으로 의지해 미스터리를 얼렁뚱땅 해결하는 건 원치 않는데 이 작품에선 소녀의 심리를 굉장히 예리하고 설득력 있게 풀어내 제법 감탄스러웠다. 각각의 연작의 제목이 시사하는 주제의식이 무척이나 선명해서 살짝 석연찮았던 심리 묘사도 그럴싸하게 다가왔다. 아마 이 작품에서의 난제는 주어진 단서를 통해 진상을 규명하는 것이 아닌 주어진 단서를 통해 규명된 진상이 일반적인 상식으론 쉽게 이해하기 힘들다는 점일 것이다. 한마디로 궁극의 'Why done it?'을 자랑한다고 할 수 있겠는데 - 물론 'How done it?'도 출중하다. - 그렇게 드러난 진상이 그렇게 억지스럽지 않다는 게 신기하고 다행이었다. 물론 이것도 다 개인차가 있을 것 같지만 적어도 작가의 글빨 때문에 분위기가 탁월하단 것만은 부정할 수 없을 듯하다. 이거야 원, 추리소설이 아니라 성장 문학이라 칭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니. 그것도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받은 작품이 말이다.

 작중에서 인용되는 안도 마이코의 동화를 비롯해 일본의 동요, 혹은 동물에 대한 잡지식 등이 유난히 인상적이었는데 각각의 요소가 각 소설에서 상징하는 바가 꽤 커서 작품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데 십분 도움이 됐다. 이게 은근히 효과를 거두기 까다로운 기교라고 생각하는데 작품의 아기자기하고 환상적인, 그야말로 동화적인 컨셉과 잘 맞물리는 인용들이라서 더 인상적이었다. 가끔 인위적이고 끼워맞추는 듯 얘기하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추리를 해나감에 있어서 꽤 효과적인 연출이기에 오히려 추리소설의 정체성을 확고히 다졌던 것 같다.


 다양한 캐릭터, 전개 등 연작 추리소설로는, 그리고 일상 추리소설로도 더할 나위 없던 작품이었다. 어느 정도 취향을 탈 내용이긴 하지만 추리소설이 이렇게 색다르면서도 본분에 충실할 수 있단 걸 보여줬다는 점은 분명 인정할 만하다. 조금 솔직히 말하면 가장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드러난,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의 내막이 너무 초월적인 감정선으로 점철된 것과 일러스트레이터 노마와 작품에서 탐정역을 맡았던 진노 선생의 러브라인이 뜬금없었던 게 좀 걸리지만 나머진 다 괜찮았다.

 최근에 읽은 작가의 작품이 - 주로 초기작들 - 기대에 못 미쳐서 기분이 좀 그랬는데 이 작품을, 가장 처음에 접한 작가의 작품을 오랜만에 다시 읽으니 오히려 더 감명 깊게 읽혔던 것 같다. 안도 마이코 또래일 때는 잘 와 닿지 않았던 감정선이 지금은 다르게 읽히다니, 역시 당사자일 때 모르던 것들이 지나고 나면 알게 되는 것인가. 아무튼 예전에 읽은 작품이 처음보다 지금 더 재밌게 읽혀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역시 작가가 성장한 게 맞았군.

하지만 적어도 타인의 행동이나 운명에 어떤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믿는 건 오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심해져서 남의 생사를 자기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다고 믿는 인간이야말로 진짜 살인자가 되는 게 아닐까요. - 21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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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실을 향해 쏴라 ㅣ 이카가와 시 시리즈
히가시가와 도쿠야 지음, 임희선 옮김 / 지식여행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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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7.5






 히가시가와 도쿠야의 책은 정말 오랜만에 읽어본다. 아마 5년 전에 읽은 게 마지막인 것 같은데 지금 그의 작품을 읽으니 옛날과는 다르게 다가온다. 다름 아닌 그의 전매특허라 할 수 있을 유머라는 코드가 무척 거슬렸던 것이다.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이라도 먹은 것일까? 옛날엔 인물들의 얼빠진 면모나 이름 갖고 말장난하는 게 재밌었는데 지금은 좀 지리멸렬하게 읽혔다. 어떻게 보면 추리소설이란 진지하고 어두운 것이란 통념을 보기 좋게 도전한 작풍이겠고 작가도 뚝심으로 밀고 나가 자신만의 새로운 지평의 추리소설을 구축했으니 퍽 긍정적인 특징이라 봐야 할 테지만... 그냥 이 작품에서 유난히 작가가 유머에 고전했던 것이라고 넘어가는 게 좋을 듯하다.

 이 작가의 장점은 유머가 아니다. 유머는 곁가지이자 작가만이 목매는 요상한 잔재미라 치부해도 좋을 정도다. 결국 추리소설이라고 한다면 유머보단 단연 트릭과 반전에 집중을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지금까지 읽은 히가시가와 도쿠야의 작품은 어딘가 나사 빠진 유머에 비해 대체로 추리소설의 본분에 있어서는 얕볼 수 없었다. 히가시가와 도쿠야를 자기 복제의 대가라고 인식할 만큼 작품을 많이 읽지 않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읽은 작품들은 그랬다. 예전에 읽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데뷔작인 <밀실의 열쇠를 빌려 드립니다>와 대표작 <수수께끼 풀이는 저녁 식사 후에>가 겉모습에 비해 추리소설의 원초적 재미가 탄탄해 깜짝 놀랐던 인상은 아직도 남아있다.


 <밀실을 향해 쏴라>는 작가의 데뷔작이 속한 '이카가와 시' 시리즈 2편이다. 전편을 너무 재밌게 읽어서 거의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기분으로 읽었는데 기대가 너무 과했던 건지 가독성에 비해 몰입하기 쉽지 않은 작품이었다. 처음부터 의욕 넘치게 쏟아지는 유머는 대부분 유치했고 중반부 넘어서도 전개가 지루해서 하마터면 대단히 실망할 뻔했다. 가독성이 좋지 않았다면 중반부에 도달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이야기의 4/5 지점에서부터 뿌린 복선을 착실히 거둔 후반부의 추리쇼도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본전치기에는 성공한 작품이었다.

 살인 도구로 총이 주요하게 다뤄진 추리소설이 몇 있을까 싶을 정도로 컨셉은 나름 신선하니 괜찮았다. 남은 총알 개수와 울려퍼진 총성을 짚어가며 추리해가는 후반부도 재밌었다. 이야기의 규모에 비해 분량이 너무 길다는 느낌은 들지만 - 이게 다 유머 때문이다. 물론 호불호가 갈리는 요소이고 작가가 추구하는 점이기도 해 아예 빼버릴 순 없겠지만 분량이 줄면 어떨까 싶었다. - 결말은 깔끔해서 속이 후련했다. 특히 유머로 인해 잊혀질 뻔한 작중 초반의 형사들의 실책을 결말에서 따끔하게 지적해 장르의 정체성이 흔들리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어쨌든 살인사건이 등장한 추리소설이기에 끝까지 가벼운 분위기를 유지했더라면 뒷맛이 개운치 않았을 텐데 그 우를 범하지 않아서 내가 괜한 걱정을 했구나 싶었다.


 데뷔작 다음에 바로 쓴 작품이라 그런지 전체적인 완성도가 전편에 미치지 못했지만 어느 정도 결말을 잘 맺었다고 본다. 시리즈의 후속작이나 작가의 다른 작품에 대한 기대를 심어줬다는 측면에서 말이다. 지금 국내에 출간된 작가의 작품이 워낙 많아서 뭘 먼저 읽을지 살짝 고민되지만 아마도 이 작품의 내용이 가물가물해지기 전에 시리즈 3편인 <완전범죄에 고양이는 몇 마리 필요한가>를 먼저 읽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나저나 그 작품, 검색하니까 절판됐다고 뜨던데 읽으려면 빨리 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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